이번에는 답사 팀이 아닌 개인적인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국립공원내장산에는 우리가 새겨둘 만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봄에 신록도 좋고, 겨울 설경은 아는 사람만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눈이 엄청 많이 내리지만, 따뜻한 곳이라 오래 남아있지는 않지요. 노령산맥 줄기 타고 오는 서해 바람이 몰고오는 겨울 눈은 구천동에 스키장을 낳게하고,, 수안보까지도 이어지지요..
기차타고 태백시로 가는 것도 좋지만, 정읍 내장산 겨울 설경도 대단합니다(제 경험으로).
정읍은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로 유명하지만, 임진왜란 때 역사적 인물로 변신하게된 이 충무공의 시발점이 바로 정읍현감에서 유성룡의 천거로 선조 24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되어가는 초유의 역사적 사건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곰파보면 매우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 관심있는 분은 정읍시립박물관을 거쳐서 둘러보아도 좋을 듯 합니다.
내장산에는 조선왕조실록(국보 151호)을 위기에서 구해낸 역사적 장소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낸 것이 '실록길'입니다.
그동안에는 별로 내세우지 않았는데, 이제는 제법 역사성을 띈 산책로로 만들어 놨습니다.
식물에 관심있는 분은 비자림 숲도 있고, 천연기념물 굴거리나무도 있고, 겨울에 볼 수 있는 기생식물 겨우살이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실록길'을 걸으면서 5월의 단풍나무 신록을 함께 마음껏 들여마셔봅니다.
탐방로 안내도에는 '실록로'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군요.
내장사 천왕문에서 나와 왼쪽으로 난 길 계곡으로 신선봉을 향해서 걷습니다.
다리 난간에 안내가 되어 있지만 눈 밝은 사람이 아니면 그냥 스쳐 지나가기 쉽습니다.
올 봄에는 원체 가뭄이 심해서인지 계곡에 물이 거의 메말라 있었습니다.
안내도의 까치봉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 가면 급경사 바위지대가 나오고 계단으로 만들어진 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임진왜란(1592년) 이맘 때 이겠지요.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왕조실록을 지게에 지거나 가마에 모시고 올라갔을 것을 생각해봅니다. 혼자 몸도 가누기 어려운 곳, 가파른 그래야 왜적의 침입이 용이치 않은 험지를 골라, 몰래 비장해야만 병화를 피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밤낮으로 지켰다니 그것이 '임계기사'와 수직상체일지로 기록까지 했었다니. 여름은 그렇다하고 한 겨울 추운데서 어떻게 당직근무를 했을까를 생각하면 절로 감격해집니다. 최전방에서 한겨울 철책선 경계근무를 선 사람의 심정으로 가늠해봅니다.
그런 고초를 이겨낸 덕택에 4대사고 중 전주사고만이 간신히 보존되어 훗날 5대사고에 안치되기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무주)적상산 안국사에 가면 적상산 사고터에 사각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그곳에도 병란시에는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들을 보다 안전한 곳에 피난시킨 곳이 안렴대라고 합니다. 여기 용굴암 뒤에 있는 석굴 같은 곳이지요.
그래도 용케 전주사고가 남게 된 것도 크게는 이충무공의 전라도 호남일대를 지킨 덕택이라 생각하니 그 무슨 인연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경상도에서 한양까지 침공로사이에 있던 성주사고, 충주사고, 춘추관에 봐관되었던 것들이 모두 불타버렸으니까요.
(*사진 자료 중 대전산과산성사랑 표식은 본인의 임의 삽입입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 탐방로 안내판에는 '실록로' 표시가 없네요-
(내장사 왼쪽 냇물따라 올라가면 까치봉 입구까지 표시된 길로 가면 됩니다.)
-내장사 천왕문 앞엔 내장사 연혁 안내문이 있습니다. -
-내장사 연혁 속에 조선왕조실록에 관한 얘기가 있습니다. -
-천왕문 안으로 들어가니 부처님의 세상이어야 할 곳이 휑하니 비어 있습니다.
작년(2021년) 3월 5일에 이곳 스님이 홧김에 불질러 버려서 대웅전이 다 소실되었답니다.
부처님의 인생무상을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가르친 것일까요. (역사학자 하라리는 Everything changes. 라고 했는데. )
아니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인가
-천왕문을 나와 실록길을 가리키는 안내판을 두리번 거리면서 찾아보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왼편 계곡으로 갑니다. 계곡은 말라 비틀어져서 건천(와디)이 되어버렸고, 그 위로 난 다리에 붙어있는 것을 보니 비로소 '실록길'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어진과 실록을 지켜낸 사람들.( 싸움터에서 만이 아니라 이렇게 착하고도, 장한 백성들이 있슴을 알게됩니다.) -
- 정읍-태인 선비 안의에 대한 소개. 의병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보기 -
- 선비 손홍록 소개
-깨어있는 선비 손승경 소개 -
-책임감이 강했던 경기전 참봉 오희길 -
- 용굴암 터에 있는 안내판들.-
(일행들이 사진에 담고 있다. 마음에 담듯이)
-용굴암 뒤에 있는 석굴 -
(어진과 804권이나 되는 왕조실록을 담은 궤짝을 이곳에 둘 수 있었을까?)
- 용굴암 터에 서 있는 안내판 -
-용굴암의 '암'이 바위 암자가 아닌 '암자 암'인 것을 여기서야 안다. 아둔함이 드러난 셈이다.
( 암자 터에는 표지만 있고, 암자 뒤로 석굴이 있다.)
-용굴암에서 은봉암, 비래암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
(주변 지형은 바위 절벽 지대로 험하디 험하다. 계단도 이렇게 가파른데, 더이상 올라가는 것은 생략하고 뒤돌아선다.)
- 평상시에 사고를 보관하던 사각의 모습-
(적상산 사고지에도 이런 것이 있다. 중앙학 자료 사용)
-돌아오는 길에 들린 쉼터 '실록원' 무인판매점-
(신선봉 가는 길에 있다. 난생 처음 무인판매점에 들어가서 어리둥절하면서 음료수 등을 골라갔고 나온다.
돈통에는 지폐가 수북한데, 거스름돈을 챙겨오는 내 손 느낌이 묘하다.)
((마침 1964년에 육사생도로 입학했던 분이 육사 시절의 무감독 시험, 무인 판매점 운영을 통해서 정직한 생활을 가르쳤던 이야기를 해주어 듣는다. 그런 정신이 지금 2000년대에 와서 이런 산골 깊은 곳까지 전파되었음에 대해 우리나라의 국민 의식 수준의 선진화를 실감한다. 우리나라가 진정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선진화, 군사적 강대국, 문맹률도 가장 낮은 최선두그룹임은 물론, 김구 선생이 그토록 강조한 진정한 강대국은 문화강국임을 역설한 진의를 절감케 하는 무인판매점 체험이다.))
(* 눈으로 보고 발로 찾아가 확인하면서 느낀 '실록길' : 우리들의 조상님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갖게한 걷기 길 이다.)
참고로 <전주사고>와 <임계기사>에 대해 알아봅니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 참고 )
<전주사고(全州史庫)>
전주에 사고를 설치한 것은 이곳이 조선 왕실의 본관지이며, 이미 1410년(태종 10)에 태조의 어용(御容)이 경기전에 봉안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실록각(實錄閣)이 처음부터 마련되지 않아 실록들을 여러 차례 옮겨 보관하였다.
1445년(세종 27) 처음 전주에 실록들을 봉안할 때, 부(府)의 성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1464년(세조 10) 가을에 진남루(鎭南樓)로 이안(移安)하였다. 당시 세조는 전라도에 명해 실록각을 건립하도록 했으나, 연이은 흉년으로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미루었다.
1472년(성종 3) 봄, 세조·예종 양조의 실록이 만들어지자 성종은 양성지(梁誠之)를 봉안사(奉安使)로 삼아 이를 전주사고에 봉안하게 하였다. 이때 춘추관의 구신(舊臣)이었던 김지경(金之慶)이 이곳 관찰사로 나와 있으면서 애써 실록각을 건립하고자, 양성지와 더불어 경기전의 동편에 자리를 잡고 계(啓)를 올렸다.
이에 이웃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00명을 역군(役軍)으로, 전주부윤 조근(趙瑾)을 공역(工役) 책임자로, 순창군수 김극련(金克鍊)은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여 1473년 5월을 지나 공사를 마쳤다. 실록각이 완성되자 그해 6월 진남루에 봉안하고 있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그 뒤 120년간 실록과 기타 서적이 잘 보관되어 내려오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에 소실될 위험이 있게되자 전주사고의 실록을 1592년(선조 25) 6월 22일에 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기게 된다. 이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유신(柳訊), 수직유생(守直儒生)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공로가 컸다.
같은 해 9월 28일에는 다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긴다. 전주사고본 실록과 태조 어용은 정읍의 내장산에서 1년 18일을 숨겨 보존하다가 뒤에 바닷길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으로 옮겨 난을 피한다.
왜란이 끝난 뒤, 보현사의 전주사고본 실록을 다시 영변의 객사로 옮겨두었고, 1603년 5월에는 등서(謄書)와 재인(再印)의 편의를 위해 다시 강화도로 옮겼다. 임란 후, 전주사고본 실록과 이를 바탕으로 재 인쇄된 4질을 합한 5질의 실록을 봉안하기 위한 5사고가 정비되나 전주사고는 계승 복구되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무주 적상산의 사고는 이곳 내장산으로 이안되었던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해서 임란 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겠다.
*<임계기사>
<임계기사(壬癸記事)>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임진년(1592년)과 그 다음 해인 계사년까지 있었던 왕조실록 이안에 관한 일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이 <임계기사>는 왜적이 이웃인 금산까지 쳐들어왔음을 알고서는 경기전 담당자인 참봉 오희길의 제안을 받아들인 정읍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錄)과 백성들이 적극 참여, 어진과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밤낮으로 수직(守直)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원본이 아닌 필사본만 남아있단다. 1592년 6월 22일부터 내장산 은봉암(은적암)으로 옮긴 사실과, 7월 14( 혹 9월28일 ?)일에 비래암으로 다시 옮기는 과정 등 조선왕조실록 보존 과정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국보 151호이자 세계기록문화유산이기도 한 <조선왕조실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고문서로서 역사적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다만 원본이 아닌 필사본이긴 하지만 이것이 <임계기사>같은 기록이 남아 있음으로 해서 현재의 왕조실록이 건재할 수 있게 된 눈물겨운 과정이 있슴을 알고 숙연해진다. 이와 관련해 매일매일의 수직을 기록한 '수직상체일기'(오늘의 숙직일지 같은 것)도 남아있다는데 자세한 것은 정읍시립박물관이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말이 아닌 글로 남겨 놓은 기록문화 유산의 중요성과 아울러 후손들의 보존 관리 계승의 중요성도 함께 깨닫게 된다.
-----------(2022.06.09. 자부리 )
(* 다음에는 또 어떤 만남이 이어질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