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기록(記錄)으로 위문에 기여한 송당(松堂)
송당은 아버지 휘 경환(景煥)과 어머니 염학실씨(廉鶴室氏) 사이의 둘째아들로 1924년(甲子)에 고향 함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재형(載亨)이며 호는 송당(松堂)이다. 고향에서 함흥사범학교를 졸업, 교단에 섰다. 6·25전쟁으로 인해 서울로 피난, 다시 교직에 복귀해서 고명상고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교편을 잡았다.
그가 장흥위씨를 위해 본격적으로 뛰어든 시기는 55세부터였다. 관북출신 위씨들이 그렇듯 피난 나와 자리가 잡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도와줄 이 없는 타향에서 먹고살고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뿌리에 대한 생각이 없지 않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피난 1세대가 늙어가고 한 사람 두 사람 세상을 떠나자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월남한 종씨만이라도 파악해서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한다고 여긴 것이 신유보(辛酉譜)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후 관북위씨종친회, 월명송 창간, 대종회의 장흥위씨 종보 발행으로 문중사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1) 관북족보 신유보(辛酉)를 발간하다
송당을 비롯한 관북 출친 9명은 1979년(己未) 10월 20일 족보를 속간하기 위해 임시종친회를 발족시켰다. 피난지인 서울에서 족보를 만들자는 계획이다. 월남한지 30년 만이다. 임시종친회는 회장에 대선(大善), 부회장 준혁(駿爀), 재걸(在傑), 총무 재걸(在傑 또는 福祿), 재무 영용(永鏞), 감사는 송당이 맡았다.
족보를 속간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전쟁으로 월남한 종인을 많이 수록하지 못하더라도 후일 통일이 이루어져 족보를 속간할 때 가교적(架橋的) 역할을 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월남한 종인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안하는 것보다 많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임시종친회의 노력으로 족보는 22개월 만인 1981년 7월에 간행됐다. 신유보는 4권 3책으로 되어있는 1940년의 경진보(庚辰譜)를 저본(底本)으로 삼고 광복 후 월남한 관북종인과 그 후예들을 수록했다. 따라서 신유보는 월남하면서 족보만 짊어지고 피난 왔던 종친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족보였다.
그런 족보를 배본하는 타이밍도 매우 특별했다. 그러니까 신유보가 출간된 지 약 한 달 뒤인 1981년 8월 23일 임시종친회를 정식종친회로 출범시키고자 전국의 종인들이 우이동 솔밭에 모인 자리에서 배포했기 때문이다. 종인들은 월남 이후 자신들의 2세들이 수록된 족보를 받아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관북종친들은 월남한 이후 처음으로 족보를 받아보기 때문이다. 관북종친들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피난지에서 족보를 발행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1972년 임자년(壬子)에 남북합보형태의 족보가 나왔으나 형태만 갖췄을 뿐 내용은 빈약했다. 왜냐하면 관북종친은 불과 300호만 수록됐기 때문이다.
2) 관북종친회 운영에 일익을 담당하다
관북종친회는 신유보를 만들기 위한 임시종친회가 모태이다. 임원들은 족보를 발행하고 해체여부를 논의했다. 결국 그동안 족보발행을 위해 파악한 종인록을 사장시키기에는 아깝고 월남 1세들이 해놓아야 할 일이 많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1981년 8월 23일 우이동 솔밭에서 전국총회를 열고 출범한 것이다.
명칭은 '관북장흥위씨종친회'로 정했다. 이유는 1824년에 발행된 관북갑신보(甲申譜)에 의거한 것이다. 이 족보 범례 제1항에는 '관북장흥위씨족보'라고 명시했다. 즉 '관북'은 거주하는 곳을, 본관은 '장흥'임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關北長興魏氏族譜爲題目以明居關北而本長興也). 그러나 이 부분은 재평가돼야 한다.
이렇게 출범한 종친회에서 송당은 1987년 9월까지 총무를 맡았다. 사실 모든 조직이 그렇듯 회장이나 부회장보다 그 조직의 실질적 업무는 총무가 핵심역할을 하게 마련이다. 그도 역시 많은 일을 했다. 그 중 첫째는 1985년부터 하산대제 참여를 통해 관북종인들과 본향인 장흥과의 교류를 활성화시킨 것이다.
둘째는 관북파의 큰집인 사월문중과의 유대강화이다. 사월방은 관북입조인 성균생원공 휘 자공의 보금자리랄 수 있다. 할아버지는 용산면 계산리 사월방에서 백씨 할머니와 결혼해 외아들을 낳고, 두 손자를 봤다. 그 후 관북으로 가셔서 오늘의 관북파를 있게 했다. 그러므로 사월방은 관북종친들과는 인연이 가장 깊은 곳이다.
그러나 사월파나 관북파는 그동안 서로를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 1985년 하산대재 참여를 계기로 송당과 계사(桂沙)가 만나면서 사월재는 관북종인들의 제2의 월명사(月明祠)가 됐다. 그 다음해에 전체종인들의 성금으로 파조의 유장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매년 관북종인들이 제향에 참여하는 길을 트기에 이른 것이다.
셋째는 종친회보인 월명송(月明頌)을 발행한 것이다. 입북조의 유장비가 당신의 보금자리인 사월방에 세워지기까지는 무려 500여년이 넘었다. 그런데 후손들인들 회한이 없겠는가. 그 감회와 회한을 버리기가 아까워 기록으로 남기자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회보를 발행하자는데 뜻이 모아져 월명송이 나온 것이다.
월명송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도 깊은 의미가 있다. 월남 1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인사들은 해마다 음력 10월 1일 관북입조이신 자공 할아버지의 시제에 참여하곤 했다. 바로 할아버지의 제향을 모신 사우가 월명사(月明祠)이다. 그러므로 월명송은 할아버지와 고향을 잊지 말자는 뜻을 함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넷째는 백씨 할머니 묘역의 땅을 매입하는 것이다. 원래 할머니의 묘소자리는 선산인지 모르나 언제부터인지 광산김씨 소유로 넘어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관북종친회는 할머니의 묘소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매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었다. 그래서 1987년 7월 26일자로 매입해서 이전등기를 했다.
다섯째는 관북종친회와 대종회의 기금을 마련한 것이다. 종친회 기금으로 1천만원을 조성하기로 목표를 설정하는 한편 대종회의 활성화를 위해 500만원을 기탁했다. 인간은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생물이라 두 가지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종친회라고 다를 수 없다. 기금이 그래서 필요하다.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님의 옛발자취와 문중사에 대한글 잘보고 공부하고 갑니다.
송당어르신 소천하신지 한달정도 되었네요. 우리 문중에 끼친 그 노고는 길이 남을 것입니다.
송담어르신의희생과
노럭의
결정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