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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인은 어려움을 극복할 때 더 큰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행16:1-5)
2024 1/28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행16:1-5절 말씀으로“신앙인은 어려움을 극복할 때 더 큰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충만하길 원합니다.
지난주에 영하10도 미만까지 떨어져 조금 겨울 같은 느낌이 났는데, 하나님께서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맞습니다.
뭐든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대로 가야 우리에게 가장 좋은 상태가 되기 때문에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벗어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럼에도 요즘 사람들은 자연질서든 사회질서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질서에 역행하려해서 걱정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응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신앙인은 어려움을 극복해 갈 때 더욱 빛이 납니다.(1절)
둘째로, 신앙인은 바울에게서 유연성을 배워야합니다.(3절)
셋째로, 신앙인은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때 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2절)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기 전과 후의 내 모습을 비교해볼 때 차이가 있는지요? 차이가 있어야합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신앙생활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말과 행동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변하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보니 여러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그걸 극복해야합니다.
반대로 너무 경직된 사고로 신앙이 외골수처럼 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 신앙인은 자연스럽고 온유한 마인드를 가져야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형제들에게 칭찬받을 수 있고, 그럴 때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걸 생각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음으로 더 보람 있는 일을 해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따라가면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더 큰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신앙인은 어려움을 극복해 갈 때 더욱 빛이 납니다.(1절)
본문 1절 말씀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아멘.
사도바울이 마가라 하는 요한과 동행여부로 바나바와 결별한 후 실라를 데리고 터기 동부지역을 통해 토러스산맥을 넘어 1차 전도여정 때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면서 진행하는데‘더베’를 거쳐‘루스드라’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루스드라는 사도바울에게 특별한 곳으로, 바울이 1차전도 때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한 자를 고친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당시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나바는 제우스로 바울은 헤르메스로 추앙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환대도 잠시,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가사상태에 빠집니다.
여러분들도 사건 사고로 가사상태까지는 아니어도 크게 다쳐본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 배현진 국회의원이 이재명 지지자인 중학생에게 벽돌에 맞아 수술을 했는데, 사람들 만나기가 두렵다는 보도가 있었듯이 의도하지 않은 큰 사고를 당하면 고통이나 정신적 충격으로 유사한 상황을 만났을 때 불안해하는‘트라우마’가 나타나는데, 일종의 공항장애입니다.
옛날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매몰되었다가 구출된 사람들 중 일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상당한 심적 고통을 느끼고, 제가 아는 사람도 어릴 때 물에 빠져 죽다 살아났는데 지금도 물만 보면 그때 기억이 떠올라 두려움을 느낀답니다.
그런데 이런 트라우마, 공황장애가 비단 일상생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큰일을 겪고 나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가사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났으니 루스드라에 가면 상당한 공황장애를 겪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루스드라를 우회하지 않고 들어가 복음을 전했고, 또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형제들이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그가 정말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가는 훌륭한 전도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조금 싫거나 나쁜 경험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있는데, 사도바울은 그런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루스드라로 다시 들어가 교회를 돌아보고, 복음을 전한 것을 볼 때 여러 어려움을 잘 극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든 인생을 살아갈 때든 만나는 여러 어려움을 잘 극복할 때 진정한 전도자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요즘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도바울은 어떻게 트라우마를 극복했을까요?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했습니다.
사도바울이 1차 전도에서 힘들게 복음을 전할 때 믿고 회심하여 같은 형제가 된 그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저는 그 마음이 100% 이해가 됩니다. 사도바울이 각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정말 아름답게 성장해가는 그들의 신앙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겠다는 사명이 트라우마를 이겨내게 했습니다. 여러분!!! 목적이 분명하면 죽음도 이결 낼 수 있습니다. 북한의 증산교화소에 수감된 사람이 중국에 있는 딸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쥐나 지렁이 벌레까지 닥치는 대로 생으로 잡아먹으면서 살아나왔는데, 목적이 없는 사람은 금방 허약(영양실조)이 와서 빨리 죽는답니다. 사도바울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아보겠다는 강한 의지로 트라우마를 이겨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살인자요 포행 자였던 나를 만나주시고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그 어떤 트라우마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트라우마 공항장애는 죽을 것 같은 느낌이지 실제 죽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병이란 겁니다.
마음의 병 전문치료자는 우리 주님입니다. 주께서 지옥으로 끌려가는 우리를 살리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여 영생을 누리게 해주셨는데, 이보다 더 큰 은혜와 기적이 어딨겠습니까? 이걸 생각하면 극복 못할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것은 정말 잘한 일이고, 훌륭한 일입니다.
전도과정이든, 신앙생활이든, 아니면 일상생활에서든 어려움과 고난은 항상 있을 수 있는데, 따라서 그걸 극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빛나고 장한 일입니다.
여러분도 살다보면 어려움과 고난을 만나고,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힘든 일을 만나는데, 그럴 때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이겨내야 합니다.
물론 극복하는 과정에서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극복해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걸 극복할 때 더 나은 미래와 성숙함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탈북자들이 한국까지 올 때 10,000㎞가 넘는 여정을 통해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들어오는데,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은 생사를 넘나드는 그들의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지옥 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땅에서도 날마다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어떤 고난도 역경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인생은 더욱 빛날 뗀데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신앙인은 바울에게서 유연성을 배워야합니다.(3절)
본문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아멘.
사도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 전도의 파트너로 삼아 그와 동행하기에 앞서 먼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그런데 이 할례는 평소 사도바울의 신념을 볼 때도 그렇고, 예루살렘공의회의 결정을 보아도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사도바울이 1차 전도를 다녀온 후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율법과 할례를 행해야 구원받는다는 주장에 얼마나 반발했습니까?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결국 율법과 할례를 행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이신칭의’교리까지 받아냈습니다. 또한 고전7:19절에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이런 소신을 갖고 있었던 바울이 굳이 오늘 디모데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한 것이니 이는 참으로 모순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바울은 왜 디모데에게 자신의 소신과는 다르게 할례를 시켰을까요? 선교과정에서 유대인들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이신칭의의 소신이 바뀌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바울의 깊은 생각이 담겨있는데, 그건 바로 디모데를 거리낄 것이 없는 전천후 교회 지도자로 키우기 위함이고, 또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바울과 디모데의 주 선교대상은 이방인들이지만, 유대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과는 상대조차 하지 않아서 무 할례 자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함께 전도하고 목회해야 할 파트너인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쪽짜리 전도자가 된다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거리낄 것이 없는 교회지도자로 세우고, 나아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할례를 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이걸 통해 우리가 얻게 될 교훈이 있는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비 본질적인 것은 양보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나 이신칭의의 교리 같은 본질적인 것은 절대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들, 예를 들면 율법이나 할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나 예배시간과 순서, 이런 건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주일 날 교회 가는데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면 비록 예배시간이 늦어도 사람부터 살리는 게 유연성입니다.
할례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비본질적인 것으로,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할례가 아니라, 다른 영혼을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할례를 행한 것이라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 아니라면 복음전파의 방법에 있어서는 유연성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9:18-22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행했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행했는데, 이는 그들을 얻기 위해 그랬다고 말합니다.
고전6:12절에서도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 또한 이런 사도바울의 유연성을 배워야합니다.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내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 모습을 한번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너무 교리와 신앙형식에 얽매어서 정말 중요한 가치인 하나님사랑과 이웃 형제사랑에 너무 경직되어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마음을 열고 온유하고 선한 생각으로 신앙인의 길을 가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신앙인은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때 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2절)
본문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아멘.
디모데의 고향은 루스드라입니다. 그는 비교적 연소한 나이임에도 북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는 이고니온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그의 신앙과 선행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가 비교적 연소한 나이임에도 사도바울의 동역자로 발탁되어 초대교회의 큰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칭찬받는 그의 신실한 신앙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도 크게 쓰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선한 행동을 통해서 칭찬받아야합니다. 또한 칭찬받는 사람이 더 큰일을 감당하는 것도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주의일이든 세상일이든 더 큰 일을 감당하려면 먼저 형제들에게는 당연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칭찬받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만 알아주시면 되지 사람의 칭찬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말씀에 순종하고, 우상을 배격하며, 악을 따르지 않는 것은 사람의 칭찬보다 앞서는 일입니다. 그러나 죄 짓는 것이라면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도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데, 하나님께 칭찬받고 인정받는 사람은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칭찬을 받기도 하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서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면 당연히 사람들에게 유익이 됩니다. 주를 믿는 성도는 주님을 닮아가는데,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피해와 손해를 끼쳤습니까? 아니죠.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형제와 이웃에게 사랑과 덕을 베풀게 되는데, 그러니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아브라함도 헷사람에게 인정받아 사라가 묻힐 막벨라굴을 그냥 받았지만 값을 치뤘습니다. 모세를 비롯해 성경 속의 인물들은 모조리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초대교회사도와 성도들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행5:12-16)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신앙인들을 미워합니다. 이들은 선한행동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들 편인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그 선한 예수님도 악한 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이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야합니다.
만일 평판이 좋지 못한 신앙인이 있다면 신앙이 바르게 정립되지 못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든 사회든, 인정받고 큰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디모데처럼 칭찬받아야 하고, 그럴 때 더 큰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죽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