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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예찬] Ⅰ
"김정호(金正浩)의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 동여도(東輿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속에서
'서울의 모습'은 서로 어떻게 그려졌을까? *
지도에는 공간, 시간, 인간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내가 살고있는 서울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을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아마도 지도를 먼저 펼칠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지난 8.14(화)부터 10.28(일)까지
"지도예찬 - 조선지도 500년, 공간.시간.인간의 이야기"라는 주제로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 줄 것입니다.
궁금증이 많은 나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 전에 손으로
그려 만든 분첩식 전국지도인 '동여도' 속에서 서울은 어떤 모습인가를
살펴보고 대동여지도에서는 어떻게 판각되었나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아래에 김정호가 만든 '동여도 제1층'과 '대동여지도 제1층'의 지도표,
그리고 '경조오부도'와 '도성도' 에서 서울의 모습을 서로 비교해 보았으니
궁금증을 푸시는데 도움이 되셨으면 고맙겠습니다.
2018.10.1
이경환 드림
* < 동여도(東輿圖) 중 제1층과 함경북도 지역 >
동여도(東輿圖) / 김정호(金正浩 1804? ~ 1866?)
- 조선, 1856~1859년경, 종이에 묵서와 채색,30.5x20.0cm, 절첩 -
-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동여東輿'는 우리나라 땅을 뜻합니다.
'동여도東輿圖'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 전에 먼저
손으로 그려 만든 분첩식 전국지도입니다. '동여도'는 '대동여지도'와 같이
모두 22첩에 우리나라 전체의 지도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남북 120리 간격으로 국토를 22층으로 나누고 각 층의 지도를 동서 80리 간격으로
접어 마치 병풍 모양의 절첩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지도에 수록된 국토의 윤곽,
산줄기와 물줄기, 도로망, 수록된 지명 등 목판으로 인쇄해서 만든 '대동여지도'와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모두 펼치면 높이 약6.6m의 전국지도가 만들어 집니다.
'동여도'는 손으로 직접 그린 지도로 모두 19,140여 개의 지명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동여지도'에 비해서도 7,370여 개 정도 더 많은 수치로,
'동여도'는 한국의 전통 지도 중 가장 상세한 지도라 할 수 있습니다.
'동여도'에 수록된 지명은 읍치, 진보鎭堡, 역참驛站, 창고,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진도津渡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보 모두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특히 목판본인 '대동여지도'에서는 생략되어 있는 면面과 리里 단위의 지명
3,810여 개도 수록되어 있습니다.['지도예찬'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18., p.238]
* < 두만강 하구의 우리나라 땅 녹둔도가 명확히 표기되어 있습니다.
1860년 청나라가 러시아와 베이징조약을 맺은 이후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으며,
현재는 두만강 하구의 범람과 퇴적작용으로 연해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
* < 동여도 제1층 >
* < 대동여지도 제1층 >
제1책에는 축척 역활을 하는 방안표를 시작으로,
지도에 쓰인 모든 기호의 쓰임새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지도표地圖標, 한반도의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 지역의 지도,
그리고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와 도성도都城圖 등
서울 지도가 실려 있는데, 이 점도 '대동여지도'와 동일합니다.
특히 지도에 쓰인 모든 기호의 쓰임새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지도표를 제시한 점은 지금의 지도와 비교해 보아도 하나도
손색이 없는 상세한 지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 동여도의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
* < 대동여지도의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
'경조京兆'는 서울을 뜻하는 여러 이름 중 하나입니다.
오부는 한성부를 구성하는 중부, 북부, 남부, 서부, 동부 등
다섯 개의 행정구역을 말합니다.
'대동여지도' 특유의 산줄기 표현 방법으로 조산祖山인
삼각산(북한산)에서 보현봉을 거쳐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북악산)까지 내려오는 산줄기를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인왕산과 타락산(낙산) 및 목멱산(남산)의 산줄기가
도성을 둘러싼 모습도 잘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풍수지리 사상에 기초하여 도성 입지의 우수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성부의 도로망도 자세히
표시하였는데, 예를들면 '용인로龍仁路', '과천로果川路',
'인천간로仁川間路', '고양간로高陽間路' 등과 같이 기재하여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명확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한강변으로는 동쪽으로부터 두모포, 한강진, 서빙고, 동작진,
용산, 마포, 서강, 양화진 등 지금도 익숙한 이름의 나루와
포구가 자세히 적혀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재미있는 것은 왕십리, 답십리가 '왕심리旺深理',
'답심리踏深里'로 표기되어 있고, '영등포英登浦' 지명도
한자 표기가 지금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 < 동여도의 도성도都城圖 >
* < 대동여지도의 도성도都城圖 >
'한성'은 조선의 도읍지로 최고통치자인 왕이 거주하는 장소인
동시에 왕의 권력을 집행하는 행정기구가 집중된 지역입니다.
따라서 '도성도'에는 왕의 권위를 부각하고자 하는 상징성과
실생활에서의 실용성이 함께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도성도都城圖'에는 궁궐과 관청의 위치를 비롯하여
부部-방坊-계契-동洞 등 하부 행정 단위의 명칭을 꼼꼼히 기록
하였으며, 도성 내의 도로망과 하천이 상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하천과 산지의 묘사도 매우 상세하게 표현하였습니다.
특히 '대동여지도'의 다른 지도에 비해 도성도에서는
산지의 표현이 매우 독특합니다. 즉, 회화적 기법을 활용하여
왕도王都를 아름답게 표현하였는데, 목판 인쇄 후 덧칠을
하여 회화성을 한층 더 높였다고 하겠습니다.
목멱산,남부, 서린방, 회현동,남소영 등 종로 남쪽의 지명이
거꾸로 표기되어 있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겨납니다.
아마도 도성은 임금님이 사시는 곳이니까 왕을 기준으로 해서
왕이 보시기에 편리하게 거꾸로 표기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 <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 >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김정호(金正浩 1804? ~ 1866?)
- 조선, 1861(철종 12),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30.5x20.0cm, 절첩 -
'대동여지도'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1861년(철종12) 세상에 내놓은
전국지도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도 제작 전통을 집대성하였으며
근대 지도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상세하고 실용적입니다.
김정호는 우리나라의 국토를 남북 120리 간격의 22층으로 나누고,
각 층의 지도를 1권의 첩으로 엮었습니다. 각 권의 첩은 동서 80리를
기준으로 펴고 접을 수 있게 제작하여 편리하게 보도록 하였습니다.
22권의 첩을 모두 펼쳐 연결하면 세로 약6.7m, 가로 약3.8m 크기의
대형 우리나라 전국지도가 만들어집니다. 김정호는 국토의 뼈대가 되는
산줄기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땅의 자연환경을 정밀하게 묘사했습니다.
백두산에서 비롯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어진 산줄기의 모습을 크기와
중요도에 따라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그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도 흐름과
폭을 반영하여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행정, 국방 및 경제, 교통 등 다양한
정보를 수록하여 국토에 대한 풍부한 지리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 대동여지도 제1층의 왼쪽에 있는 지도표 >
그 뿐만 아니라 물줄기는 곡선으로, 도로는 직선으로 표현하여
구분이 쉽도록 하였으며, 특히 도로에는 10리마다 점을 찍어
지역과 지역 사이의 거리를 쉽게 계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오늘날의 지도와 같이 기호를 활용하여 11,700여 개에 달하는
많은 지명들을 쉽고 빠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고안한 장점이 있습니다.
즉 '지도표'라는 범례에 따라 기호들을 정리하여 이해를 도왔습니다.
오늘날까지 30여 질이 보급되어 이용되고 있음으로 보아 대동여지도를
목판인쇄본으로 만든 것은 제한된 수요만을 충족시킬 수 밖에 없었던 필사본
지도에 비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지도를 통해 부강한 나라의 건설을 꿈꾸었던 김정호는 1834년 청구도를
제작한 이후 그는 평생을 지리 지식의 연구와 보급에 헌신하였습니다.
* < 대동여지도 제14첩 중 한성과 경기일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