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칠지도의 비밀
칠지도는 1874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궁사 간 마사토모가 처음 발견했다.
칠지도는 10년뒤 중국지안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비와 함께 고대한일관계의 '수수께끼'로 양국 학계의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돼 왔다.
칠지도 문제는 임나일본부설의 진위를 밝혀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중대한 일이지만, 한국고대사를
바로잡고, 한일관계사 재 구축과 올바른 한, 일 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간 마사토모를 비롯한 황국사상을
조작하고 있던 학자들은 칠지도와 광개토태왕비가 임나일본부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근거라고 주장하며, 일본서기가
얼마나 정확한가를 증명한다고 우겨댔다.
일본학계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52년(252)조에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점을 들어 이를 조공품으로 해석했다. 나아가 4세기 후반 이후 왜군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로도 내세웠다.
칠지도 칼의 앞면에는 '泰O四年O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出) 百兵宜供供候王OOOO(作)'라는 34자, 뒷면에는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라는 27자가 각각 금으로 상감((象嵌; 쇠로 만든 칼 몸통 양쪽에 금으로 각종 화려한 문양을 박아 넣음)돼 있다. ('O'는 판독
불가, ( )안은 다른 글자로도 볼 수 있음). 해석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태화 4년(근초고왕의 연호·서기 367년) 6월16일 병오일에
백번 제련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었으니 온갖 적을 물리치리라. 후왕(侯王; 제후 왕, 아래나라의 왕)에게 줄만하다. 예로부터 이와 같은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奇)가 귀하게 성음으로
태어났다. 그런 까닭에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백제 왕이 하사한 이 칠지도라는 칼에 적힌 내용에는 일본 왕에게 ‘하사’한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일본학자들은 이것을 거꾸로 백제 왕이 왜왕에게 헌상한 것으로 해석하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이는 백제가 일본을 지배한 역사를 부정하고 싶은 욕구에서 나온 또 하나의 날조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와 관련된 역사조작에 왜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일까? 일본에는 신라가 임나를 병탄할 때 건너 온 가야 인들도 있을 것이다. 신라에
패한 망국 한에 시달리는 백제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조상 대대로 한반도에서 패하여 어쩔 수 없이 일본 땅으로 망명한 사람들의
원한이 작용하는 때문일까? 나라가 망해 쫓겨 왔다는 콤플렉스가 가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원한이 맺혔다 해도 날조(捏造)와 개찬(改竄)을 통해 진실을 호도해 본들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 일일까?
백제는 660년에 패망했다. 일본역사서는 신라에 패한 백제인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작성한 것이다. 이들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역사서를 통해서라도 신라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역사서 곳곳에서 나타나 있다.
(비슷한 맥락이기는 하지만, 나는 일본인들은 아예 백제의 제후국이었음을 숨기고
싶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망해버린 백제가 상국이라는 흔적을 지우고 거꾸로 자신들이 역사를 주도해 온 세력으로 날조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증거를 다 없애 버릴 수는 없지만, 웬만한
것들은 백제와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위장할 수는 있다. 그들은 몇 가지 결정적인 증거만을 조작하면 역사를
뒤집을 수 있다는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던 1963년 북한학자 김석형은 "칠지도는
황제의 지위에 있던 백제왕이 아랫사람인 일본의 '후왕(候王)'에게 '하사'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친일사관을 주도한 학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두계 이병도도 백제의 왕자가 왜왕에게 내린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내내 백제왕이 헌상한 것이라고 억지를 쓰다가 그게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요즈음에는 '백제 헌상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드물고, 대신 백제가 대등한 입장에서 선물한 것이라는 '증여설'로 후퇴했다.
하지만 ‘후왕’이란 용어는 대등한 관계에서 쓰는
호칭이 아니다.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는 것도 명령어가
아닌가? 왜는 백제의 제후국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간 마사토모(菅政友)는 연호를 중국연호라고 주장을 하고 (칼에 있는 연호 한자가 훼손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연호라고 주장을 할 근거가 생긴 것이다.) 억지로 일본서기 내용과 맞추려 했지만 당시 고구려, 신라가 다 연호를
썼으니 백제가 연호를 쓰지 않았을 리 없지 않은가?
백제대왕들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고문서가 1996년 9월 일본 큐슈 미야자끼현의
미카도(神門)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학자들은 백제의 대왕인 근초고왕이 왜로 떠나가는 제후인 왜왕 지(旨)를 위해 제작해 하사한 것으로 본다.
문제는 맨 처음 칠지도를 발견한 간 마사토모의 이력이다. 1824년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중국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중국 서예에 능통했다. 그는 내무성 역사 편찬국(요즘의 교육부 편수관)에서 일하다가 대궁사에 취임한다.
유망한 자리를 놔두고 신궁의 주지를 자처했을 때 어떤 비밀스런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그는 반짝거리는 칠지도의 금상감 명문을 해독하려 예리한
칼로 녹을 긁어냈다. 그 과정에서 실수로 글자를 훼손 시켰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의도적으로 그랬다면?
그가 이 칠지도를 발견할 당시의 나이는
50세였다. 4년간 이소노카미 신궁 대궁사로 일하다가 도쿄대 교수를 역임한 뒤 1894년 7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일본이 한반도 남쪽을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신봉자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력
때문에 ‘칼로 긁어 검을 훼손하고 조작한 음모설’이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는 것이다.
마사토모를
비롯한 황국사상을 맹신하고 있던 학자들은 칠지도와 광개토태왕비문을 조작하게 되면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감히 이런 엄청난 모험을 실행에 옮긴 것이 아닐까?
(칠지도가 발견된 10년 뒤인 1884년, 만주 지안에서 확인한 광개토대왕 비문도 조작설에 휩쌓였다. 1972년
재일사학자 이진희가 광개토대왕 비문의 조작설을 주장, 파란을 일으켰다.)
칠지도는 지금도 절대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런 칠지도의 복제품(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이 74년
일본 문화청에 41만1천 엔을 주고 의뢰하여 만든 것)이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우리는 그 복제품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