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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묵상글 들 (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영적인 노안.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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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영적인 노안
오늘 독서 민수기는 발람의 신탁입니다.
그런데 발람은 노인일 수도 있고,
그의 눈은 영적인 노안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본래 거짓 예언자이고 모압 임금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는 부탁을 받지만 주님이 그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어
이렇게 얘기합니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먼 미래를 볼 수 있게 되고
저주 대신 오히려 다음과 같이 축복을 하게 됩니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들을 얻습니다.
신앙인에겐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이 하느님이 뜻이듯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다른 것이 보일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다른 눈을 주시어 보게 하시는 것이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다른 말이 내 입에서 나올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다른 귀를 주시어 말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눈이 멀 때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 노안이 되면 그리되는 것처럼
영적인 노안도 목전의 이익은 보지 못하지만 멀리 내다보게 됩니다.
저도 발람처럼 본래 거짓 예언자이고 점차 나이를 먹어
눈이 흐려져 가까운 것은 못 보고 귀가 어두어져 가까운 소리 못 들어도
부디 주님께서 다른 눈과 귀를 열어주시어 멀리 하늘을 보고 듣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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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마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 나게 됩니다. 결국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사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하소서.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알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고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과 위선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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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명에 응답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21,23).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21,25).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눈 가리고 아웅’한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진실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내 뜻을 주님의 뜻 인양 내세우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내가 그분에게 맞춰야 하지만 합리화 거리를 찾습니다. 주님을 나의 들러리로 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습니다”(집회42,20).
이현주 목사는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인데 하나는 주님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람의 일이 앞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믿음의 길이 멀기만 합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고 하느님의 일을 늘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과 권한에 모두를 걸었듯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루치아 성녀는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하고 결혼준비로 장만한 재물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루치아를 취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귀족은 이것에 분개하여 그가 가톨릭 신자임을 밀고하여 재판정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는 재판정에 서서 “성스러운 신앙을 지닌 순결한 마음속은 곧 성령의 궁전입니다”하며 꿋꿋이 믿음을 고백하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루치아 성녀의 상본은 ‘쟁반에 두 눈이 담겨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루치아의 이름은 광명, 또는 빛의 의미를 담고 있는 데 그 빛을 말합니다. 루치아가 신앙의 빛이 되었듯이 우리도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맑고 밝은 빛이 되기 위해 먼저 회개의 요청에 응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의 유형이 여러 가지인데‘백설공주형'이 있답니다.‘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공포의 주둥이’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빠야 하는 데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망하고, 불평불만하며 교만한 '원불교'신자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우거지’형도 있습니다.‘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기왕이면‘우거지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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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빛은 동방에서
오늘은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5세기 경 로마 박해시대에 동정의 몸으로 신앙 진리를 위하여 순교한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빛’을 뜻합니다. 발라암은 지파별로 자리잡은 이스라엘을 보고, 별 하나가 솟을 것임을 보고 신탁을 선포하였는데(독서),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은 성전에서 군중을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는지를 따져 물었습니다(복음). 별은 빛이요 권한은 법입니다.
본시 로마에 전해진 신앙 진리는 동방에서 전해진 빛이었습니다. 반면에 우리 민족에게 신앙 진리의 빛은 서방에서 전해졌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처음 소개된 성경은 명말청초(明末淸初)에 중국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E. Diaz, Mailla)이 서양 신학서적을 한문으로 번역한 성경직해(聖經直解)와 성경광익(聖經廣益) 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동방의 아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시아는 고대 문명과 종교의 발상지입니다. 서양인들이 동방을 창의적 직관과 명상을 통하여 고유한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발전시킨 신비의 땅으로 여겨 온 것은 결코 과장이나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아시아에서 나온 이 세계 종교들에는 모두 경전이 있어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온 인류를 진리로 이끌고 있습니다. “빛은 동방에서”(ex oriente Lux)라는 오래된 서양 격언이 이를 잘 반영합니다. 그 중의 한 빛이 히브리 문명의 경전인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과 지중해 문명이 어우러진 땅에서 쓰이고 퍼져 나갔습니다. 지중해 문명 즉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이 두 문명의 상속자로 자처하는 서양인들은 오랫동안 성경을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내려 주신 선물인 양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이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보다 훨씬 앞서 생겨난 고대 근동의 두 문명 –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 의 영향을 받은 히브리 문명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근세에 들어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대 근동어를 연구하는 서양 학자들은 유럽 언어들의 원조로 여겼던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동방의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셈어와 페니키아어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하였습니다. 언어뿐 아니라 문학 양식에서도 서양인들은 동방의 영향을 받았음이 밝혀졌습니다. 서양의 정신문화를 이끌어 온 성경은 신화, 법전, 민담, 격언, 비유, 역사, 연가(戀歌)와 애가(哀歌), 예언 등 다양한 문학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문학 양식들이 모두 고대 근동의 문헌들에서 고스란히 발견되었으며 내용까지도 비슷합니다.
그런데도 아시아인들이 성경을 낯설게 느끼는 것은 성경이 이처럼 아시아에서 생겨난 복합 문화의 토양에 뿌리박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식의 성경 해석과 접근 방법으로만 알아온 탓이 큽니다. 그리스도교가 서양을 거쳐 세계의 모든 대륙으로 확산되는 동안, 성경도 서양인들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실용적인 사고방식으로 분석하고 객관적 진리나 교의(敎義)를 이끌어 내는 데 크게 기여한 영향이 큰데, 이것도 그리스도교나 성경을 서양의 옷을 입은 문화로 바라보게 하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법은 서양에서”(ex occidente Lex)라는 서양 격언이 뜻하는 바 그대로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2천여 년의 긴 여정을 거쳐 다시 동방으로 돌아온 성경이 놓여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온 인류에게 구원의 표지로 주신 귀중한 경전입니다. 성경의 세계가 모든 문화권을 포함하고 성경의 메시지가 모든 문화권에 열려 있다는 사실은 이제 서양 일변도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동방의 빛을 아시아의 관점으로도 바라보아야 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태동시킨 이스라엘은 정치나 윤리 면에서 결코 뛰어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본디 정처 없이 물과 목초지를 찾아 떠돌던 유목민들과 사회의 밑바닥에서 천대받던 히브리인들의 후예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조상들이 하느님의 초대를 감사하게 받아들였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의 번영과 안정된 정착지를 약속하셨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탈출시켜주시고 가나안 땅으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후예들이 하느님을 배반하자, 그분께서는 혹독한 시련과 고난의 벌을 내리셨습니다.
서양의 인류문화학자들은 인류가 아프리카의 유인원에서 비롯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말하지만, 성경에서는 대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음을 증언합니다. 그 후손들 가운데 아시아의 서방에 자리잡은 히브리인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빛의 기록으로 성경을 쓰는 동안에, 아시아의 동방으로 이주한 한민족은 예로부터 빛을 숭상하는 경천과 제천의 전통을 이룩했습니다.
성경이 전해준 큰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자면 이 큰 빛을 알아보고(이사 9,1), 인류에게 반사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온 누리에 비추어주어야 할 민족들의 빛(이사 49,6)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 전 세계인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한류의 물결이 선한 영향력으로 지속되어 온 인류에게 하느님의 빛으로 비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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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낯선 지역을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펼쳐놓고서 어떻게 가장 빠른 길로 갈 수 있는지를 공부했지만, 이제는 전혀 공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비게이션이 정확하게 목적지로 안내해주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어느 신부의 차를 탔는데, 내비게이션에서 안내하는 대로 운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르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즉, 막히는 곳으로만 안내한다면서 아는 길의 경우는 내비게이션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히려 더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은 결과입니다.
믿어야 내비게이션을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믿어야, 하늘 나라에 가는 길을 잘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이틀 동안 성전에 들어가셔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경청하였고, 이로써 예수님을 하느님이 보낸 예언자로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신다는 것은 곧 성전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교에서 수학하지 않았고 법적으로 교사 자격을 얻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그 어떤 율법 학자보다도 뛰어났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생활 방법을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인 대제관, 율법 학자, 원로들은 이 교도권 문제를 문제 삼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라고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질문하시지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그들 자신이 세례자 요한을 배척했으니 하느님께 불충한 자가 되는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모두가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터에 자신들이 법적으로 처형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거짓 예언자는 돌로 쳐 죽여야 했고, 참 예언자를 거부하는 행위도 같은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믿음이 없는 이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해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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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생활과 비교하지 말고 네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콩도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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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초 안에 불행해지는 법
60초 안에 불행해지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친구를 떠올린 다음, 그 친구와 나를 비교합니다. 특히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 친구는 가졌지만, 나는 갖지 못해 부러운 것.”
60초 안에 내 자존감이 무너져 내리고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남과의 비교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주면서 우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교만 하지 않아도 행복에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 나름의 삶을 사는 것이고, 나도 나만의 삶을 사는 것뿐입니다. 절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비교는 남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는 것은 아닐까요? 부족한 부분의 나와 이를 채워 나가는 나를 비교한다면 어떨까요? 더 이상 불행의 단어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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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신문사에 있으면서 좋은 점은 매주 신문을 정독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2개의 연재물이 끝났습니다. 호명환 신부님의 ‘프란치스칸 영성’은 66회로 마감되었습니다. 김혜경 교수님의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의 한 장면’은 61회로 마감되었습니다. 저는 두 연재물을 읽으면서 ‘권위’에 대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고 사제도 아니었던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무너져가는 교회를 부탁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과 정결 그리고 비움으로 무너져가는 교회에 신선한 영성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오상’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교회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찬양하였습니다. 꽃과 나무, 나비와 벌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생태적인 신앙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종교, 민족, 국가, 신념, 체제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의 한 장면’은 권위의 또 다른 모습을 전해 주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가지려 할 때, 교회가 높은 첨탑과 제도의 그늘에 머물러 있을 때는 부패와 타락이 생겼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때는 교회의 권위도 조금씩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나 교황이 다스리던 영토를 내어주었을 때, 세상의 권력에서 멀어졌을 때,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때 교회는 비로소 영적인 권위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연재물은 ‘예루살렘 공의회, 트리텐트 공의회’와 더불어 교회를 영적으로 쇄신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지막으로 다루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세상에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공의회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으로 교회가 바티칸의 창문을 열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경청하는 공의회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먼저 쇄신되어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입니다.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며 “이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타볼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입니다. 이때도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권위는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십자가 없는 권위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습니다.
21세기에 우리가 대림시기를 지내고, 성탄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과학과 기술만으로는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 폭력, 살인, 범죄, 욕망은 과학과 기술로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인류에게 충분한 자원을 마련하였지만 인류의 욕망을 채우기에는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두 번에 걸친 세계 전쟁, 식민지 지배의 탐욕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난민, 테러, 환경오염, 가난, 질병, 굶주림이 우리 삶의 주변에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자비를 이야기 합니다. 영성의 시대를 살면 원시인류였어도 감사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욕망의 시대를 살면 21세기의 풍요 속에서도 우리는 빈곤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과학과 기술 그리고 법칙과 질서로만 살아간다면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옷을 입더라도 우리는 영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직도 ‘성탄’을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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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꿈의 훈련, 꿈의 실현
- 루멘체치스(Luumen Caecis);맹인에게 빛을! -
오늘은 우리 오딜리아 베네딕도 연합회의 수호자인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이자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성녀 오딜리아는 순교자는 아녔지만 말 그대로 순교적 삶을 살았던 성녀였습니다. 잠시 루치아 성녀에 대해 전설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빛, 광명을 의미하는 ‘룩스’(Lux)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성녀 루치아는 4세기초(314년) 순교한 분으로 모진 고문을 받을 때 눈알에 뽑히는 형벌까지도 받았다. 그러나 천사의 도움으로 뽑힌 눈알을 돌려 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성녀 루치아는 이름 그대로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동정 순교자로서, 시력이 약하거나 시력을 잃은 이들과 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우리 연합회의 대축일을 지내는 오딜리아 성녀와 ‘빛’이란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 오딜리아 성녀 역시 전설적인 분으로 7세기 중엽 프랑스 북동주 알자스 지방 보주 산맥의 오베르하임에서 태어난 성녀는 후에 수녀원장이 될 때까지 참 판란만장한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성녀는 세례중 성유가 눈에 닿자마자 눈이 열려 시력이 온전해 지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전설같은 실화가 전해집니다. 성녀에 대한 공경은 프랑스를 넘어 독일에까지 급속하게 퍼져갔으며 16세기 이전부터 성녀 오딜리아는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나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져 왔으며, 교황 비오 12세는 성녀 오딜리아를 알자스 지방과 시각장애인 및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두분 성녀 시각장애인들의 수호성인이란 점에서 일치합니다. 우리 연합회의 모토인 “루멘체치스(Luumen Caecis);맹인에게 빛을!” 이란 말마디도 오딜리아 성녀의 전설적인 일화에서 근거합니다. 간절히 하느님을 열망하여 하느님을 꿈꿨기에 은총으로 눈이 열린 오딜리아 성녀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공통점에 주목합니다. 성인들은 모두가 ‘꿈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부단히 하느님을 꿈꾸는 성인들이었고 그 꿈이 실현되어 하느님을 닮은 성인이 되었습니다. 하늘 꿈, 하늘 희망, 하늘 비전은 우리 믿는 이들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비로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꿈을 노래한 끝기도시 찬미가중 주님을 꿈꾸게 해달라는 아름다운 한 연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라.”
더불어 주일미사후 낮기도 대신 바치는 짧은 시편 은혜로운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그 잘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2ㄴ)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 이사야 예언자 역시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언자이자 신비가이자 시인이였고 부단히 하느님을 꿈꿨던 말그대로 이상주의理想主義적 현실주의現實主義자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의 하늘 나라 꿈은 얼마나 고무적이며 우리를 격발激發케 하는지요! 바로 이런 하느님 꿈이, 하늘나라 꿈이 우리를 참으로 살게 합니다. 그대로 대림시기를 맞이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이사야 예언자가 아니곤 어디서 이런 아름다운 꿈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는지요! 언젠가의 ‘그때’가 아니라 바로 오늘 ‘이때’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꿈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때 마음의 눈이 열립니다. 참으로 많이 강조했던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無知라는 마음의 병입니다. 무지에 눈멈에서 기인하는 온갖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하느님을 꿈꿀 때,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만날 때 무지의 눈이 열립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무지의 눈이 열릴 때 비로소 사랑과 지혜, 겸손과 진실의 사람이 됩니다.
엊그제 가톨릭 신문 복음 묵상란 제목을 잊지 못합니다. “기쁨의 훈련!”입니다. 언젠가 본 ‘희망의 훈련’이란 말마디도 생각났습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영성훈련이 기쁨의 훈련, 희망의 훈련, 꿈의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이뿐입니까! 감사의 훈련, 겸손의 훈련, 사랑의 훈련, 행복의 훈련 줄줄이 계속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런 덕목을 선택하여 부단히 훈련할 때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마음을 다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시간은 희망과 기쁨, 겸손과 진실, 찬미와 감사의 영성훈련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부단히 선택하여 단련하고 키워야 하는 희망이자 꿈이요 기쁨이요 모든 영성 덕목들입니다. 이런 영성훈련의 열매가 참 풍요롭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만날 때 무지의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릅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바로 이것이 희망의 힘, 꿈의 힘이요 하느님의 힘입니다. 사실 희망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이요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죽어있는 삶이 뒤따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만날 때 깨어 살아나는 영혼이요 무지의 두려움에서 해방이요 샘솟는 활력이며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날로 좋아지는 마음의 눈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마음의 순수요, 밝고 맑은 마음의 눈으로 삶의 실재를 직시합니다.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않을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 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네 몸이 온통 환해질 것이다.”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을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만나 날로 마음의 눈이, 심안이 밝아질 때, 몸도 더불어 환해 진다는 것입니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육안도 심안도 맑고 밝고 몸까지도 밝아 환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병의 치유에 주님을 만나 마음 깨끗해지는 일이 결정적인 조건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순수 역시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마음 순수의 훈련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만날 때 무지의 탐욕에서 벗어납니다. 집착에서의 이탈을 통한, 주님을 만난 이들에게 주어지는 참 좋은 은총의 선물이 마음의 초연함, 홀가분함입니다. 세상 도피가 아닌 세상에 살되 세상에 매이지 않은 탈속脫俗의 자유로운 깨어 있는 영혼들입니다. 참으로 품위있고 충실히 주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선사되는 축복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우리 모두 초연한 이탈의, 종말론적인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때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변하는 세상 것들에 집착하여 일희일비一喜一悲하거나 마음을 두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 중심 안에 정주定住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하느님을 꿈꾸며, 초연하고 홀가분한 자유인自由人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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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21,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습니다. 그리고 그 권한을 누가 주었는지를 묻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가 아닌데 어떻게 성전에서 가르칠 수 있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고 물으시면서, 이에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이해타산하다가 곤경에 빠지자, "모르겠소."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데,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걸림돌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았거나, 자기가 알고 있는 틀 안에 갇혀 있으면, 유다인들처럼 율법이라는 형식의 틀에만 갇혀 있으면, 다양한 형상이나 표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알아보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우리의 눈,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녀 루치아 축일'입니다.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루치아(Lucia)는 '빛' 또는 '광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빛(광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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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루치아 성녀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부유한 귀족 집안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워 신심 깊은 아이로 성장하였으며,
스스로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자,
어머니는 성녀를 한 귀족 청년과 혼인시키기로 합니다.
루치아는 오랜 기도 끝에 동정의 뜻을 밝히고, 어렵게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자신의 혼인 지참금마저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러자 루치아에게 청혼했던 젊은이는 자신의 소유가 될
재산이 사라진 것에 분개하여 루치아가
그리스도인이며 로마 제국의 법을 어겼다고 고발합니다.
루치아는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한 고문을 받습니다.
재판관은 도저히 그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매음굴로 보내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여러 남자와 소 떼까지 이용해서 루치아를 끌어내려 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녀는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마침내 긴 칼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성녀가 고문을 받을 때 눈이 뽑히기도 하였는데,
천사의 도움으로 이를 돌려받아 다시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치아 성녀는 자신의 두 눈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이름의 뜻처럼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동정 순교자로 공경받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빛이 있어야 볼 수 있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어둠 속을 헤매는 우리 인간에게 빛이 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각자 자신의 길을 걷게 해 주십니다.
그 빛은 나눌수록 커지고, 그 따뜻함도 커집니다.
성인 성녀들은 빛을 받아들이고 또 그 빛을 나누는 모범을 보여 준 이들입니다.
오늘 루치아 성녀를 기억하며, 나는 오늘 누군가에게 빛이었는지,
또 어떤 일을 하면 서로에게 빛이 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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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져 묻는다. 그들은 위대한 기적들을 많이 보았다. 그 기적들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아마 그 기적들의 결과가 미래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이 사건들을 통하여 모든 위험을 보았기 때문이다.
구제하기 어려운 그들의 사악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그들이 질문의 뜻을 이해하고 답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더는 당신께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4-25절)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요한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 답은 하늘이 보낸 증인을 믿지 않은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될 터였고,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에게 돌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답에 발목을 잡힐까 봐 두려워 “모르겠소.”(27절) 하고 대답한다. 사실 그들은 요한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몰랐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두워진 마음은 빛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눈이 멀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리 없이 사냥하는 사냥꾼은 함정을 파면서 동시에 함정 옆에 결코 도망칠 수 없도록 그물을 쳐 놓는다고 한다. 사냥감이 도망을 못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덫을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사탄에게도 똑같이 하셨다. 사탄이 성경을 인용하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시편 9,11-12). 주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고, 신명기의 말씀을 들어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신명 6,16)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모른다.”라고 답하지 않으시고,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7절) 하신다. 즉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으므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당신을 신문하는 자들을 가르치시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상대의 교묘한 비난을 논박하고 계시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필요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알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을 닮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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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마태 21, 25)
색깔만
바꾼다고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짓밟힌 길을
하느님께서
새롭게 하신다.
언제나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는
아둔한 교만이다.
참으로 중요한
것을 또 다시
놓치며 우리는
살고 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이정표는
언제나
사람이었다.
깨어지는
아픔 없이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구원의
역사는 뜨거운
피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변화이다.
깨어지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
교만이다.
깨어져야 할
한 줌의
교만이다.
사람의 길은
끝이 있지만
하느님의 길은
영원하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새롭게
살아나는
사랑이
참된 빛이다.
서로에게
빛을 줄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세례는
우리에게
빛을 준다.
다시 태어나는
세례의 기쁨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세례와 성탄의
여정이다.
깨어지는 것이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벗어나는 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새로움의 초대
대림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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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3-27)”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라는 질문은, 정말로 예수님의 권한을 알고 싶어서 한 질문이
아니라, “당신은 아무 권한도 없으면서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라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왜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인가?”)
사제들과 원로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갈릴래아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당국의 허락을 받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고,
또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사제들과 원로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논쟁은 예수님의 ‘권한’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논쟁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감히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일입니다.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 사제들에게 가서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논쟁은 ‘인간을 구원하는 권한과 권능’에까지 연결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향해서,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라고 말하면서 조롱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마태 27,39-44).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는 구세주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에 사제들과 원로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질문했다면,
예수님께서는 “나의 권한은 하늘에서 왔다.” 라고 단순하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 없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으려는
의도로 질문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을 먼저 언급하십니다.
‘믿음’은 ‘마음을 돌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말씀하신 것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서 당신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도, 또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은 메시아” 라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대로 회개를 했느냐? 의 여부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이고,
그의 세례는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들과 원로들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왔다.’ 라고 대답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고,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하늘에서 왔다.” 라고 생각하지만,
생각만 하고, 실제로 회개할 마음은 없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은 ‘하늘에서 왔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예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믿는다면서 왜 나에 대한 그의 증언은 안 믿느냐?”가
그들이 예상한 예수님의 반응인데, 그들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해서
난감해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에게서 왔다.’ 라는 말도 하지 못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돌을 던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딱하게만 보이는 상황입니다.
아주 단순한 질문인데도 그들의 머릿속은 너무 복잡합니다.
자기들이 얻게 될 이익과 손해를 계산해야 하고, 변명과 핑계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군중이 두렵소.’ 라는 말입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만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죄입니다.
만일에 그들이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했다면 단순한 질문에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고, 복잡한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르겠소.” 라는 그들의 대답은, 대답이 아니라 대답하기를 회피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자기들을 구원해 주려고 하시는 목자를 피해서
달아나는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그들의 모르겠다는 말은,
“관심 없다. 알고 싶지 않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는 그들의 태도를 드러내는 말이 됩니다.)
“나도 ......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런 그들에게는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신 것은,
당신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음을 밝히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반문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어려워서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안 들으려고 해서 듣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왜 이렇게 마음과 귀를 닫아 놓고 있는 것이냐?” 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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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무자격자와 무능력자>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마태 21,25)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하신 뒤라 긴장감이 도는데도 성전에 가서 가르치십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최고권력 기관은 최고의회 구성원들이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누구에게 받은,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고 치유하며 성전을 정화하는지 물으며 시비를 겁니다(21,23).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 달리 권력 문제에 매우 민감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전정화를 하신 예수님의 처사는 대단한 도전으로 보였음이 분명합니다. 권한에 관한 그들의 질문은 한마디로 왜 우리들의 기득권을 침범하려 하느냐 하는 반발인 셈입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태도는 이미 오시어 하느님의 일을 하는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지녔기에 그들은 입으로는 하느님의 권위를 말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직무를 받았으니 자신들의 말을 따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으뜸가는 문제는 바로 위선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아닌 자기 권력을 삶의 중심에 두고, 선입견에 매여 있으면서도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21,25) 하고 물으시자, 자신들의 권력에 침해를 입을까 걱정하여 “모르겠다”(21,27)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거짓, 선입견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아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수석사제들이나 원로들과 같은 사람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지요. 청문회나 국정조사의 증인들은 상투적으로 “모릅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고 답합니다. 자기 권력을 지키려고 비굴하게 거짓을 읊어내는 모습이 추악하고 가련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무능력자요 자격 없는 사람들이 아니고 누구일까요? 심장에서 양심이 가출해버리고 마비되어버린 상태, 사랑도 선도 진실도 남의 비극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영혼은 하느님 나라의 들어갈 자격도 능력도 없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권능 앞에 먼지에 지나지 않고 무상한 것이 인간 권력이지요.
이제 성탄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능력과 자격을 갖추도록 스스로를 추슬러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능력은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적 능력, 인간적 재능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자(他者)를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은 자신의 힘을 빼고 하느님의 권능에 의지하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나의 소유와 내 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을 내려놓고 진리 안에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이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느님 친히 선물로 주신 사랑의 마음으로 정의를 위해 헌신하고, 진실하고 열린 자세로 서로를 이롭게 하는 일에 투신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지닐 참 권한은 사랑의 권한뿐임을 기억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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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합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특강과 판공성사 시즌을 맞아, 한동안 바쁜 순간을 지내다가, 이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팬데믹 시대 점점 위축되어가는 신앙생활 앞에 힘겨워하시는 교우들의 눈망울을 보며 큰 안타까움과 함께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드려야겠다는 마음에 열심히 뛰어 다녔습니다.
고백소에 들어갈 때마다 크게 느끼는 바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나 교우들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잘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년 고백성사의 내용과 올해 내용이 거의 똑같다는 것입니다.
늘 같은 죄, 같은 고민을 평생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도회 입회 때 안고 있었던 고민을 아직도 안고 있습니다.
거의 매번 고백하는 죄의 내용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영적지도 신부님께도 부끄럽습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하니...
그러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입니다.
신앙에도 성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성장은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은 절대 주어지지 않습니다.
각고의 노력, 그야말로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아주 조금씩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과수원을 운영하는 농부는 어떤 노력을 합니까?
이른 봄에 묘목들만 딱 꽂아놓으면 다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심고 나서는 즉시 충분한 수분을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넉넉한 퇴비도 필수입니다.
강풍에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대도 세워줘야 합니다.
때로 병충해 예방약에 성장촉진제도 투여합니다.
그래야 묘목이 무럭무럭 성장하고, 몇 년 뒤에는 꿈에 그리던 품질좋은 과일을 풍성히 수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멋진 묘목을 본 농부의 마음은 얼마나 흐뭇하겠습니까?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도 반드시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각자 각자에게 주어지는 아주 중차대한 의무가 있는데, 각자 안에 뿌려진 신앙의 씨앗을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세례받은 후 40년, 5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조금도 성장하지 못하고 세례 때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얼마나 딱하게 여기실까, 걱정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성전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을 따지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신앙은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메시아로 자신들의 목전까지 다가오신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몰라본 것까지는 좋은데, 철저하게도 메시아를 거부하고 배척했으며,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매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명품 신앙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야 마땅합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매일의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아있는 대림 시기 많이도말고 딱 두 가지,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영적 계획을 한번 세워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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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당신이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방식 그대로 예수님도 당신을 대하신다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관한 논쟁입니다.
먼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게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이 만약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그가 증언한 나를 믿지 않느냐?”
라고 할 것이고, 땅(사람)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하늘에서 보낸 사람으로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 것 같아서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그대로 나도 너희를 대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유튜브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뭐 이런 일이 거의 있을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긴 이야기인데 짧게 정리하면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주 큰 회사의 회장이 은퇴하고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집에서만 있기가 무료한 회장은 아들의 회사에서 주차관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회장은 그렇게 회사를 위해 작은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회장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가 회사에 늦게 도착하고는 차 열쇠를 던지며 주차해달라고 하고 열쇠를 다시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장은 “그것은 저희가 할 일이 아닌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 직원이 자신이 누구인지 아느냐며 화를 내고 올라가 버렸습니다.
회장은 꾹 참고 그 사람이 일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자신이 사장과 아는 사이인데
이런 식으로 하면 잘라버리겠다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장이 이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어쩐 일이시냐며 인사를 했습니다.
비로소 사장의 아버지, 곧 회장님이라는 사실을 안 그 직원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낮은 곳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모습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난하고 겸손하고 절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완성되려면 나의 세속-육신-마귀는 죽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돈 있고 권력 있는 많은 사람에게 무시당하기에 십상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위해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이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들을 주님은 어떻게 대하실까요? 그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똑같이 갚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괜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래서 예수님과 친하다고 하면서 그분께로 인도하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때엔 사장 친구의 꼴이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그리스도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된 이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 소속-육신-마귀가 그리스도로 향하는 길의 걸림돌이기에 자신이 몸소 가난하고 정결하고 겸손해진 이들을 존중하고 본받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도 그렇게 대해주십니다.
그분은 사랑이고 행복입니다.
영화 ‘패밀리맨’(2000)은 출세를 위해 사랑하는 케이트라는 애인을 떠나서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잭이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13년 뒤 큰 투자기업의 사장이 되어있는 그는 성탄절도 즐기지 못하고 일합니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이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들 둘을 데리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남자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처음엔 가난한 삶이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아내 아내와 아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가정이 주는 행복에 젖어갑니다.
그리고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쯤 눈을 뜹니다.
그는 회사의 중요한 일도 집어치우고 성공을 위해 버렸던 자신을 떠나 비행기를 타려는 한 여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이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행복은 욕심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이가 케이트입니다.
케이트에게 대하는 대로 행복도 잭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대신 돈이 행복이라는 마약으로 순간적인 쾌락은 허락합니다.
하지만 케이트를 잠시만이라도 받아들이면 욕심이 없는 행복을 맛봅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사랑과 행복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림과 행복이 그렇듯, 요한과 예수님은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세상에 나를 가난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고 절제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꼭 붙드십시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곧 사랑이요, 행복이요, 영원한 생명인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교회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돌아가실 때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말한 예수의 데레사 수녀는 하늘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요?
“너도 내 딸이다”라며 맞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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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묵상과 기도
루치아는 로마 박해 시대에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신심있는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이세례를 받은 그는 아버지 사후, 딸의 신변을 염려한 어머니의 주선으로 약혼하게 되었습니다. 동정 생활을 원했던 루치아가 혼사를 거절하자, 화가난 약혼자의 고발에 따라 300년 무렵 관헌에 넘겨져 순교하였습니다. 루치아, Lucia, 이름은 빛, 광명이라는 라틴 말입니다.
라틴어 Adventus는 곧 그분이 '도착'하신다. 뜻입니다.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전례력의 새해인 대림 시기는 주님 성탄 대축일 전 4 주간 동안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성찰과 회개, 믿음과 희망으로 오시는 구세주를 기다립니다. 미사와 성사 참여, 그리고 선과 자선을 행합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그 무렵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구나.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그들의 임금은 아각보다 뛰어나고 그들의 왕국은 위세를 떨치리라.”
그러고 나서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 민수 24,2-7.15-17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마태 21,23-27
실천
우리 모두는 빛을 따라 걸어갑니다. 빛 가운데에 있습니다. 또한 큰 빛이신 주 예수님의 성탄을 기리고 있습니다. 빛은 자기의 몸을 태우면서 비칩니다. 빛 만이 아니라 열도 냅니다. 빛과 열은 생명의 에너지가 되고 모든 사물과 살아있는 것들을 살립니다.
등불이던 세례자 요한이 오시는 가장 큰 빛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더 능력을 가지신 분,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 조차 없는 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고 하였습니다.
루치아, 빛 광명, 의 뜻과 의미를 새깁니다. 빛이 비칠 때 어둠은 사라집니다. 그 빛 안에서 우리의 어둠을 벗기고 그 암흑을 벗어납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별을 따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회개와 보속, 믿음과 기쁨, 사랑과 자선을 통하여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영접을 준비합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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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민수24,2-7 15-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 (17)
'나는 그를 바라본다'에서 '그'는 곧 야곱에게서 나온 한 별이며,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난 왕홀이다. 즉 임금 중의 임금이신 메시야를 발라암이 지금 보고, 또 자세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지금'으로 번역된 '앗타'(atha)는 '이제'(now)라는 뜻의 부사로 현재 시간을 의미하는 말이고, '가깝지는'에 해당하는 '카로브'(qarob; near)는 말 그대로 가까운 미래의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다.
본문은 신, 구약에 나타난 '계시(예언)의 시간성'이란 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탁월한 표현이다.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통해 보여준 예언 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의 예수님의 예언들에까지도 모두 적용되는 '성취의 시간성'이라는 측면을 잘 설명하고 있다.
예언이나 계시는 지금 당장 성취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또 당대의 역사 안에서 실현될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즉 그 성취의 시간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 뿐이다.
'별 하나'
별은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에게는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구약에서 여기처럼 '별'에 해당하는 '코카브'(kokab; a star)가 단수로 쓰일 때에는 '임금'(왕)을 상징했음이 분명하다(이사14,12; 다니8,10).
더욱이 여기서는 뒤에 나오는 '왕홀'과 평행적인 대구를 이루기 때문에 여기서 '별'은 '임금'을 상징함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약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때, 이 별은 단순한 한 나라의 임금이 아니라 온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만왕의 왕 메시야임을 알 수 있다(마태2,2; 묵시22,16).
'야곱에게서 ~솟고'
'솟고'로 번역된 '따라크'(darak)는 '밟다'(신명1,36), '(활을)당기다' (1역대5,18)라는 뜻으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지는 동사이다.
하지만 '(활을)당기다'는 뜻과 같이 '밟는다'는 것도 곧 '소유'(신명11,24), '정복'(판관20,43), '통치'(신명33,29)라는 이면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따라크'의 기본 개념은 '전쟁'과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원문은 '별 하나'(한 별)가 마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행진하듯이 걸어 나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상징적인 묘사이기는 하지만, 별이 땅을 밟고 전진하는 것은 매우 신비롭고 기이한 모습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육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발라암은 환시 중에 환히 빛나는 별 하나가 악한 적들을 섬멸하기 위해 야곱의 진영 가운데서 행진하여 나오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 예언은 하느님을 적대하는 악한 세력과 싸워 이긴 임금, 곧 메시야를 상징한다.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왕홀'로 번역된 '셰베트'(shebet)는 원래 '막대기'(레위27,32), '지팡이'(판관5,14)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그 의미가 발전하여 '지파'(창세49,28)를 뜻하는 말로 자주 쓰인다.
여기서는 특히 임금의 지위를 나타내는 지팡이인 '왕홀'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과거 야곱의 유다에 대한 예언에 나타난 '홀'과 연관되어 있으며 (창세49,10), 본문과 대구를 이루는 '별'과 관계되어 메시야의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시편45,7; 아모스1,5.8).
한편 '일어난다'에 해당하는 '웨캄'(weqam)의 기본형 '쿰'(qum)은 특별히 발라암의 이야기 가운데서 암사자의 '일어남'('쿰'; qum)을 묘사할 때도 쓰인 동사이다(민수23,24).
즉 이 단어는 암사자가 사냥감을 공격할 때 일어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는데, 이런 의미가 여기서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말하자면, 별 하나가 악한 세력과의 전쟁을 위해 행진하여 나오고, 홀이 '일어나'(쿰) 그 세력을 치려는 모습을 발라암이 환시 중에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별과 홀에 의해 모암, 에돔, 아말렉 등의 나라와 아시리아까지 멸망하게 될 것임이 이어지는 예언에서 밝혀지고 있다.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
여기서 '모압'은 단순히 당시에 있었던 근동의 한 나라 '모압'만을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 '모압'이라는 나라의 멸망과 '별'과 '왕홀'로 상징된 메시야의 출현과는 실제 역사 안에서 특별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한 민족을 말한다기보다는 모압으로 대표되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을 적대하는 세상의 세력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셋'은 노아의 셋째 아들인 '셋'('셰트'; sett; 창세4,25)이 아니고, 노아의 셋째 아들과는 다른 사람으로서 모압 족속의 기원과 깊은 연관을 지닌 인물이거나 부족으로 보고 있다.
2021.12.13.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사제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는
광야를 지나 약속된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예언자인 이방인 점쟁이,
발라암의 신탁을 들려줍니다.
발라암은 모압의 임금 발락의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메시아의 축복을 들려줍니다.
주님의 영에 이끌려, 야곱에서 나온 임금이
이스라엘과 많은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교회 전통은 전체적인 의미에서,
이 예언이 기다리던 메시아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 합니다.
복음에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는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신 분으로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정통 교리(敎理)를 지키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자신의 불신 때문에,
그리고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하느님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늘에서 오는 신비에 겸손하게 마음의 문을 열어 놓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권한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비난을 일삼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권한을
조용히 부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인 그들은
거짓 예언자들과 참예언자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였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20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무슨권한(權限)으로(마태21,23-27)
사탄(Satan, 魔鬼)~ 우리들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귀신이나 마귀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간혹 봤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영화나 드라마로, 또 사람들의 이야기로 자신이 갖고있던 것이 마음의 상처나 아픔으로 마음이 약해졌을 때, 두려울 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성경은 그것을 사탄, 마귀라고 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뜻, 계명)을 사람의 뜻을 위한, 말씀, 계명으로 듣게 해,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그래서 영(靈)의 구원이 아닌 육(肉)의 만족을 위한 신앙을 살게하여 이 땅(地獄)에 묶이게 하는 것이 사탄(Satan)이다.
그 사탄이 사람의 마음을 가르치게 한다. 그 사탄(Satan)인 뱀의 유혹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받아, 무화과 잎으로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자신의 부끄러움(죄)을 가리려 했던 아담 - (그 상태가 마귀, 귀신 들리는 것이고 말씀을 진리로 깨닫게 되면 그 귀신이 쫓겨나는 구마(驅魔)인 것이다.) 그러나 아담 자신이 스스로 만든 열심(계명), 그 자기 의로움의 옷(무화과 잎)으로는 죄를 덮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어린양이 죽어 남긴 그 가죽으로 친히 옷을 만들어 입히시어 죄를 덮어 주셨다.(창세3,7)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께서 손수 준비하신 그 가죽 옷만이 죄를 덮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의 피로 죄가 씻겨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계명이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곧 사람(아담)의 스스로 행위만 무성한 그 신앙은 죄의 용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화과는 열매가 없다. 우리가 열매라고 먹는 것은 사실은 꽃이다. 그렇듯 우리가 한 의로운 일이 구원의 열매라고 착각하고 그 착각으로 열심을 부리는 그 헛된 신앙을 살고 있다는(티토3,5) 말씀이 앞절(마태21,18-22)에 있었고 오늘 복음으로 이어진다.
(마태21,23-27)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權限)을 주었소?”
= 어린양의 권한이다. 하느님께서 주셨다.
(요한17,2) 2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 요한의 세례, 하느님께서 주셨다.(요한1,33)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 하느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라는 것이다.
베드로 역시 그랬다. 그랬던 그가 성령을 받은 후에 예수님을 선포하지 말라는 최고 지도자들의 말을 듣고~
(사도4,19) 19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 자신들의 뜻을 고집하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른다고 하는 그 속셈을 아시기에 말씀을 주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우리)도 곧 깨닫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발락의 청을 바라암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가던 중, 그의 뜻을 넘어뜨리시는 하느님을 체험한다.(민수22,22-25)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를 깨닫게 된다.
오늘 독서~
(민수24,16-17)16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王笏, 지팡이)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
= 그 왕홀이신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성경의 모는 율법, 계명은 그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루가24,27.46 요한5,39) 그러나 그 율법, 계명을 사탄의 작용으로(2데살2,7) 도덕과 윤리로 사람의 생각으로 제멋대로 말하기에~ 하느님의 길이 아닌 사람의 길을 진리로 신앙하는 이들이 많다.
그 많은 이들이 구원의 열매 없는 도덕과 윤리의 그 자기의 행위를 가치로 여기며, 무화과 잎 같은 신앙을 살고 있음을 오늘 보라는 것이다. 그 도덕과 윤리의 신앙은 믿음과는 상관이 없다. 아무리 열심을 부려봐야 의혹만 생길뿐, 믿음은 생기질 않는다. 믿음의 주체는 하느님이시다.
우리를 구원 하시겠다는 그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그래서 성경을 모르면 믿음이 생길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받는 하늘의 용서, 의로움, 거룩인데 말이다.(사도26,18 외 다수)
(로마8,24-25)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 말씀은 보이는 행위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야 믿음이 생긴다.
(요한8,37-38)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 하시고(전하시고)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사람의 법, 관습으로 실천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이유인 것이다. 곧 뱀(사탄)의 거짓을 그대로 받아, 말씀을 행위로 실천한다는 말씀이시다. 그것이 사탄의 계략이다.
사람의 본성을 만족시켜 주는 가르침과 사람의 의로움을 진리로 말하며 빛의 천사의 모습으로 위장하기에(2코린11,14-15)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진리와 멀어져 사람의 뜻이 구원의 진리라며 육의 욕망을 위한 잎만 무성한 헛된 신앙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늘의 진리를 모른척하며 자신들의 뜻, 이익을 위해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늘의 진리를 말하는 이들이 틀렸다고 한다.
(갈라6,14) 14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래서 그 무화과 신앙과 대조되는 구원의 열매를 찾을 수 있는 길을 다시 마태복음21장28절이하 포도밭의 말씀으로 깨달으라 하신다. 낼 복음이로 이어지네요~~~ ♪살롬.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복음(마태21,23~27)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25)
'어디에서'라고 번역된 '포텐'(pothen; where)은 '기원', '원인'을 물어보는 의문사이기에, 본문은 세례자 요한의 권한(권세)이 어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서 '하늘'로 번역된 '우라누'(uranu; heaven)는 '우라노스'(uranos)의 탈격으로서 '하늘로부터'라는 기원을 나타낸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라는 명칭을 거룩하다고 생각하여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요한의 세례'가 하느님으로부터 기원되었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사람'으로 번역된 '안트로폰'(anthropon; men) 역시 '안트로포스'(anthropos)의 탈격으로서 기원 및 출처를 나타낸다.
여기서 '사람'은 '하느님'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불완전하고 거짓된 계시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권한의 출처에 대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반문한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 입장 표명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의 출처가 하늘이라고 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신 자를 질시하여 결국 죽게 하였다는 점에서 곤경에 빠지게 되고, 출처가 사람이라고 하면,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여겼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틀려서 반발을 사게 되는 곤경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질문으로써 그들의 위선과 간교하고 사악함을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이다.
또한 이 질문은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한을 입증하려고 하셨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께로 보내신 예언자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널리 인정받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메시야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요한1,32~36).
예수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 당신의 권위의 출처와 관련해서 질문해오자, 오히려 요한의 세례의 출처에 대한 역질문을 던지심으로써, 자신이 세례자 요한의 참된 증거에 근거한 메시야임을 증명하려 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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