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2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부부의 날 》
엡 5:22~33
〈 병고가 부부의 손을 이어주다 〉
“어머, 황 목사님, 너무하신 것 아니에요? 금슬 자랑 너무 하세요!”
지난 5월 초 지방회 목사님 부부들과 함께 베트남 달랏을 다녀왔습니다.
가기 전에 조금 망설였습니다. ‘제가 전립선암 환자인데 해외여행이 가능할까?’
비행기 타기 전에 “암 환자는 탑승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부당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때는 주변에 물어보는 것이 상책입니다. 친구 목사에게 여쭸습니다.
“무슨 소리야, 다녀와야지, 앞으로 미국도 가고, 두루 다녀야지!”
그 말에 힘을 얻었습니다. 쫄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건강에는 자신이 없지만 해외여행에 나섰습니다. 마침 아내와 함께입니다.
여행지에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다녔습니다. 한결 안전함을 느꼈습니다.
저희 부부가 손을 잡고 다니자, 다른 분들이 웃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황 목사님, 너무하신 것 아니에요? 금슬 자랑 너무 하세요!”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러댔습니다.
“저희 쇼윈도 부부에요! 호텔 방에서는 절대 손 안 잡아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호르몬 치료요법을 쓰고 있습니다.
제 몸 안에서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제거하는 요법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화학적 거세’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전립선암 세포가 남성호르몬을 타고 전이하기 때문입니다.
체내 남성호르몬 분비를 억제하면, 부작용이 있지만, 암세포를 차단하려는 요법입니다.
호르몬 차단으로 인한 증상이 여럿이지만, 그중 하나, 뼈가 약해집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위험합니다. 넘어짐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아내 손을 잡았습니다.
이런 속내도 모르고, “금슬 참 좋으시네요!” 덕담을 해 주십니다.
늙고 병들어 아내 손을 잡았는데요, 아내 손잡고 다니기, 새로운 경험입니다.
사실 평생 집 밖에서 아내 손을 잡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함께 걸어가면, 아내는 4~5미터 뒤에서 따라오고, 저는 성큼성큼 앞장 섰습니다.
가끔 나란히 걷고자 시도해 봤지만, 잠시뿐이었고, 둘 사이 거리는 다시 벌어지곤 했습니다.
☞ 질병이 부부의 손을 잡게 해 주었습니다. 고맙다 해얄까요?
〈 손잡으니 좋은 점 〉
요즘 한국에 맨발 걷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저희 부부도 그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거의 매일 맨발 걷기를 합니다.
이때도 저희 부부는 손을 꼭 잡고 다닙니다. “넘어지면 자빠지잖아요!”☻
모르는 분들이 가끔 “보기에 좋습니다!”라고 말해줍니다. 함께 웃게 됩니다.
아내는 가끔 “안 잡아!”하고 토라질 때도 있습니다.
“알았어, 그래도 우리 ‘쇼윈도 부부’하자!” 제가 아쉬우니 달래어 손을 잡습니다.
결혼 40주년을 넘기고, ‘부부가 손잡고 다니는 새로운 세계’를 체험 중입니다.
부부가 손잡고 다니다 보니 그 이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꽤 있습니다.
해 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신세계입니다.
일일이 설명은 생략합니다. 해 보시면 알게 됩니다.
그러나 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비밀”입니다.
‘비밀의 문’ 밖에서는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부부가 손잡고 다니면 일어나는 일’ 해 보면 알지만, 안 하면 모르는 비밀입니다.
이런 비밀을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표현합니다.
본디 비밀이란 감추어져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감추어졌다’라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재밌습니다. “감추어진 비밀”
〈 감추어진 비밀 하나 〉
“사람은 자기 얼굴을 못 봅니다.” 자기 얼굴은 못 보고, 남의 얼굴만 볼 수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얼굴만 봅니다. 거울 속 얼굴을 자기 얼굴로 착각하며 평생 삽니다.
이렇게 살면서도 불편을 못 느낍니다.
만약 옆 사람 얼굴을 볼 수 없다면,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의 얼굴은 못 보면, 하루도 못 살지만, 자기 얼굴은 평생 못 보고 살아갑니다.
☞ 어쩌면 인간은 바보가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바보들의 행진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사람이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다.” 뼈저리게 아픈 ‘진리’이자 ‘비밀’입니다.
이 진리를 자각하지 못하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삽니다.
“사람이 자기 얼굴은 볼 수 없다.” 이 진리도 “감추어진 비밀”에 속합니다.
누구도 부인 못하는 진리인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살아가니,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 감추어진 비밀 또 하나 〉
감추어진 비밀은 꽤 있습니다. 감추어진 비밀 중에 ‘사랑’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중에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요?
사랑은 밥보다도 중요합니다.
“사랑은 밥보다도 중요하다!” 동의하시지요?
그런데 먹는 밥은 잘 알면서, 사랑은 의외로 잘 모릅니다.
수많은 시인이 사랑을 노래하고, 철학자들이 사랑을 논하지만 사랑이 뭐냐고 물어면요?
“사랑은 이것이다”라는 대답이 얼른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정말 사랑은 무엇일까요?
☞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사랑을 매우 잘 하고 있습니다.
하루도 빠짐 없이, 한 시도 쉬지 않고, 사랑을 합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잠시도 배겨나지 못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못 삽니다.
이렇게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이 무어냐 물으면 우물쭈물합니다. 왜요?
사랑도 “감추어진 비밀”이라서 그렇습니다. “사랑도 감추어진 비밀이다!”
사랑, 진짜 사랑, 진본 사랑, 이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매일매일, 매시간, 매순간 사랑하면서도 알지 못하니,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이 비밀이 오늘 본문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29절)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
사람은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몸을 사랑합니다.
세상에 자기 육체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의 진본, 사랑의 실체는 모든 사람이 자기 육체를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는 자신과 직결되어있습니다. 잠시도 자기 몸 관리를 멈추지 못합니다.
손톱 밑에 가시만 박혀도 견디지 못합니다. 당장 가시를 뽑고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향하여 쏟는 정성, 그것이 “사랑의 오리지날” 진짜배기, 진본입니다.
누가 사랑이 뭐냐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시면 됩니다.
☞ “내가 내 몸을 아끼고 위하는 일, 이것이 사랑입니다.”
〈 사랑의 실천 〉
누구나 자기 몸을 향하여 사랑을 쏟아붓게 되어있습니다.
하루도 멈출 수 없습니다. 한시도, 아니, 잠깐도 멈출 수 없습니다.
내가 내 몸을 아끼고 위하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뭘까? 궁금해지거든, 내가 내 몸을 위하여 어떻게 하고 있지? 자문하면 됩니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자기 몸을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지으셨습니다. 왜요? “사랑을 알아라, 사랑을 하여라!”
사람은 자기 몸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는 “실천”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 그것은 바로 자녀를 낳아 양육하는 일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기르는 부모들,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이를 양육하는 일, 마치 자기 몸을 사랑하는 일과 매우 흡사합니다.
자기 몸 사랑을 거울삼아, 자녀를 사랑하면서 양육합니다.
오늘 본문 32절에서 선포합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우리 세 번만 복창하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로 33절까지, 제목이 “아내와 남편”입니다.
성경에서 부부에 대하여 매우 날카롭고 정확하게 진리를 밝혀줍니다.
그러나 골백번 읽어도, 이 비밀을 알지 못하면 이해 못합니다.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이 비밀을 알고 사랑의 실천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실천은 ‘내가 내 몸을 가꾸는 사랑’
두 번째 실천은 ‘자녀를 낳아 기르는 사랑’
세 번째 실천은 ‘배우자를 내 몸같이 위하는 사랑’
네 번째 실천은 ‘이웃을 내 몸같이 위하는 사랑’
다섯 번째 실천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랑’
두 번째 세 번째는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제가 일부러 바꿨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자녀사랑보다 먼저여야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니 바꿨습니다.
내 몸 사랑에서 사랑을 인지하고, 자녀 사랑에서 실천해 봄으로써 사랑을 체득합니다.
☞ 이렇게 배운 사랑을 늦게라도 부부간에 적용하라는 의미입니다.
〈 예수님의 교회 사랑 〉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교회 사랑’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24~25절)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5절 뒷부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예수님이 교회를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바울 사도는 남편과 아내, 아내와 남편을 향하여 “주님이 하신 것처럼 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교회 사랑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기 몸을 전혀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유비로 부부에게 선포합니다.
-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주님께 하듯 하라(24절)
=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에 하듯 하라(25절)
여기서 복종과 사랑이라는 단어를 구사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
복종과 사랑!
왜 굳이 복종이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그냥 서로 사랑하라고 해도 될 터인데,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아내들이 불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라면 될 것 아닌가?”
아내들은 아내들대로 불만일 수 있습니다.
남편들은 여기서 아내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당신, 복종해야지!” “교회가 예수님께 복종하듯, 복종해야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당신은 지금 주님이 교회 사랑하듯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게 맞아?”
이렇게 아웅다웅할 수 있을 겁니다.
☞ 복종과 사랑이 화두입니다.
〈 복종과 사랑의 교차 〉
복종과 사랑으로 아내와 남편의 임무를 선포한 이유가 있겠지요?
첫째, 남녀의 차이 때문입니다.
둘째,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셋째, 복종, 사랑, 예수님의 속성입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가정을 이뤘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과 남편이 아내에게 바라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을 바랍니다. “이 남자는 이제 나만을 사랑해 줘야 해!”
남편은 아내에게 복종을 바랍니다. “이 여자는 이제 나를 잘 따라줘야 해!”
아내의 주요 관심사는 남편의 사랑이고, 남편의 주요관심사는 아내의 복종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을 줘야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을 줘야 합니다.
이것 또한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아내는 가정이 지향하는 목표보다는, 지금 남편이 나를 사랑하느냐에 집중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사랑보다는, 우리 가정을 어떻게 이끌어갈까에 집중합니다.
가정이 지향하는 바, 목표에 도달하고자, 남편이 원하는 것은 아내의 복종입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늘 확인코자 하는 아내에게, 남편의 사랑은 묘약입니다.
공교롭게도, 남편은 사랑하기에 취약합니다. 아내는 복종하기에 취약합니다.
남편들은 “사랑해”라는 말을 하면 닭살이 돋습니다.
아내들은 “예,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모든 것을 잃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정에 문제가 끊이지 않습니다.
☞ 이 모두가 아담과 하와 때문입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순간부터 이렇게 어긋났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행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저에게 질병을 주시어서 제가 아내 손을 잡고 쫄래쫄래 따라다닙니다.
아내는 남편이 딱한 처지라서 손을 잡아줍니다.
☞ 아내는 저에게 사랑을 주고, 저는 아내에게 복종하니, 이 또한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참으로 오묘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깊고 오묘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