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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과학산책
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
2011년 개봉된 영화 ‘갱스 오브 뉴욕’ 은 한국에서 흥행을 했다. 탄탄한 구성과 연출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카메론 디아즈 등 일류 배우들의 열연도 한몫을 했다. 영화의 배경인 1850년대 초반, 뉴욕 최고의 슬럼가인 ‘파이브 포인츠’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매일 수천 명씩 모여드는 꿈의 도시였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내쫓으려 한다. 갈등이 계속되면서 두 집단은 결국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런데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왜 매일 수천 명씩 뉴욕으로 몰려들었을까?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인한 감자 대기근 때문이었다. 아일랜드에서는 1845년부터 시작된 긴 장마로 감자잎마름병이 돌았다. 감자 생산량이 급속히 줄어들면서 800여만 명의 아일랜드 인구 중 200여만 명이 굶어죽었다. 200여만 명이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전통적인 아일랜드 문명이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붕괴된 것이다.
영국의 서쪽에 있는 섬나라 아일랜드(Republic of Ireland)는 면적이 남한보다도 작으며 인구는 350만 명 정도이다. 1960년대부터 다양한 경제정책이 성과를 거두면서 발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프트웨어 산업의 메카라 불릴 만큼 IT산업의 본거지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영국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다가 1948년에야 독립을 쟁취했다.
아일랜드의 조그만 국토엔 늪지대와 얕은 호수가 많다. 토양이 산성이라서 나무나 곡식이 잘 자라지 않아 늘 가난 속에서 살아왔다. 기후는 북위 50도나 되는 고위도 지방이지만 멕시코 만류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그러나 비가 자주 내리고 매우 습한 기후를 보인다. 서울보다 비 오는 날이 3배 정도 많다.
“아일랜드의 풍부한 강수(rainfall)를 음악으로 만들었습니다. 강수량은 각 지역의 위도와 경도에 따라 각각 다른 악기로 연주하지요. 바이올린은 북부지방, 비올라는 문스터 지방, 첼로는 레이스터 지방의 강수량을 표현한답니다.” 아일랜드 음악가 미카엘 펜스톰은 강수 데이터를 토대로 ‘비의 한 해’라는 작품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뒀다.
이들은 ‘비의 한 해’를 위성사진과 강수를 이미지화한 애니메이션과 통합시켜 CD롬으로 제작해 전 세계적인 판매에 성공했다. “아일랜드인은 비가 없는 조국을 상상하지 못합니다.”란 말처럼 아일랜드는 비가 자주 내리는 기상학적 특성을 보인다. 이런 기후조건이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하게 된 원인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로 가난에 찌들어 있던 아일랜드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감자가 전파되면서부터다. 감자는 1600년대 초반 남아메리카에서 도입되어 아일랜드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상당한 규모로 재배되었다. 감자는 심어보니 기가 막힌 식품이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아일랜드에서도 엄청난 수확을 거뒀다.
감자는 곧 아일랜드의 주 식량이 되었다. 전 국토가 감자밭으로 개간되기 시작했다. 감자는 1690년대에 스코틀랜드인들이 당했던 극심한 기근을 아일랜드인들이 모면하게 해준 귀중한 주식이 되었다. 아일랜드의 감자 재배는 그 뒤 반세기 동안 20배로 늘어났다.
물론 ‘학살의 해(bliain an áir; the year of the slaughter)’ 라고 불리게 된 1740~1741년은 예외였다. 그해에 강력한 한파로 곡물과 감자, 가축, 심지어 바닷새들까지 얼어 죽었다. 100년 후에 닥칠 대비극의 예고편이었던 이 기근으로 인해 40만 명이 이질과 기근, 발진티푸스로 죽었다. 아일랜드인의 10퍼센트 정도가 죽은 것이다.
그러나 이때를 빼면 감자는 아일랜드인들의 기근을 막아주는 훌륭한 주식이 되었다. 아일랜드가 감자로 기근을 극복하는 것을 본 헝가리도 1772년에 기근이 든 후에 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정부 역시 1760년대와 1830년대 대기근 이후 감자 재배를 장려했다.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의 북부 지방에서도 감자가 중요한 농작물로 떠올랐다.
감자는 산업혁명 시기에 급격히 퍼져 유럽의 도시 인구를 위한 주요 식량이 되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감자 수확량이 경지 면적의 크기나 성질에 관계없이 모든 작물 수확량의 몇 배나 되었기 때문이다.
1770년대에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공업화되면서, 또 1800년대에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아일랜드는 엄청나게 많은 감자를 수출할 수 있었다. 곡물가격이 상승하자 감자 경작지 확장이 계속되었다. 일손이 필요해짐에 따라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이 당시 아일랜드 사람들은 유럽 대륙보다 영양상태가 좋았다. 성인이 감자를 하루에 7kg, 여자와 아이들도 5kg 정도를 먹었기 때문이다. 풍부한 식량으로 인해 1700년대에 200만 명이던 인구는 1800년대에는 500만 명으로 늘어났고, 1821년에는 700만 명이 되었다. 대기근 발생 직전인 1845년에는 850만 명에 이르러 인구밀도가 유럽에서 가장 높았다.
감자잎마름병균(Phytophthora infestans)은 따뜻하고 습한 환경에서 번식하며, 바람이나 물을 통해 전달되는 포자에 의해 전파된다. 이 균은 먼저 잎과 줄기를 공격해 시들게 하며, 토양을 통해 뿌리와 줄기에 파고들어 감자를 썩게 만든다.
이 균이 아일랜드를 덮친 것은 1845년 10월이었으며 가을에 수확해 저장해 놓았던 감자들이 썩기 시작하면서 재앙이 닥쳐오고 있음을 알렸다. 감자잎마름병균은 10℃ 이상의 기온과 90% 이상의 상대습도를 오랫동안 유지할 때 급속히 증식하는 특성을 보인다. 밭에 남아 있던 감자들과 저장해 놓았던 감자들이 다 썩어갔다.
감자잎마름병이 다시 발생한 것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온난하고 다습한 서쪽 끝 지방에서였다. 1846년 이른 여름이 되자 서풍을 타고 1주일에 80km의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8월 초에는 아일랜드 전역을 휩쓸어 무성했던 감자밭이 하룻밤 사이에 썩어 버렸다. 이해에 감자 수확량이 4분의 3 이상, 심한 곳은 90%나 감소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매우 좁은 땅에서 감자 농사에 전념했기에, 감자 생산이 준다는 것은 식량이 소진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847년이 되자 대지주들은 2년 동안의 흉년으로 토지 임대료와 연체금의 회수가 어려워졌음을 느꼈다. 이들은 소작인들을 내쫒고 감자밭을 목초지로 바꾸었다. 농민들은 식량도 없이 무일푼으로 거리로 내몰렸다.
“황량해진 오두막 마을을 서성이며, 누더기를 걸친 어린 것들이 소리 없이 절망의 눈길을 먼 데로 던진 아버지에게 매달려 칭얼대고, 하나는 나지막이 흐느끼며 고개를 숙인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있다.
몇 사람은 토탄 불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감자를 먹던 추억의 찌꺼기라도 건지려는지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그러다 무리를 지어 고독하고 정처 없는 발길을 돌리는데, 이 밤 저녁은 먹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몸을 쉴 바위 밑이나 구덩이를 찾아야 한다.”고 당시의 참상이 기록되어 있다.
감자잎마름 병으로 검은 반점이 생긴 감자잎
<출처: (cc) Howard F. Schwartz, Colorado State University, United States at Wikimedia.org>
1845년 10월은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1845년에서 1846년은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온난했던 시기이다. 이때 여름에 습윤한 남풍이 계속 불었다. 대서양 부근에 저기압이 위치할 때 아일랜드에는 비가 많이 내린다. 당시 대서양에는 지속적으로 강력한 저기압이 위치했다. 이런 기후조건이 새로운 감자 전염병을 몰고 온 것이다.
1846년 여름에도 대서양 부근에 저기압 지역이 위치하면서 계속 많은 비가 내렸다. 감자 수확량의 4분의 3 이상이 썩어 버렸다. 1847년 7월에 다시 엄청난 비가 내리면서 수확량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1848년 7월에는 날씨가 냉랭해지면서 비가 자주 내렸다. 다시 감자잎마름병이 발생했다. 5년 동안 연속해서 발생한 감자잎마름병은 아일랜드를 초토화시켰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처참했다. 사람들은 굶주리고 병에 걸려 죽어갔다. 기근으로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의 식량 감산이 떼죽음을 몰고 온 것이다. 영양실조는 치명적인 질병들을 불러와 발진티푸스와 재귀열이 창궐했다. 일가족이 모두 죽어 장례조차 치를 수 없는 가족이 허다했고, 마을 전체가 송두리째 폐허화된 곳도 많았다.
시골은 점점 비어갔다. 토지가 전쟁 뒤의 폐허처럼 변했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전쟁이 아닌 최악의 기후 조건과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병균이 나라를 파멸로 몰고 가며 역사를 바꾼 것이다.
아일랜드의 비극이 처참했던 것은 당시 지배국이었던 영국이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던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영국 정부는 크림전쟁에는 7,000만 파운드의 돈을 펑펑 쓰면서도 죽어가는 아일랜드를 돕는 데는 1,000만 파운드 이상을 결코 쓰지 않았다.
여기에 철도 관련 주식투기로 영국의 국가재정이 위기에 빠졌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재정적자를 이유로 아일랜드에 대한 구제자금 방출을 중단했다. 아일랜드에서는 죽은 시체를 매장할 힘을 가진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다. 시체들이 길거리에 나뒹굴고 사람들이 구빈원 문 앞에서 죽어갔다. 지주들이 죽음에 몰린 소작인들에 의해 암살되기도 했다.
폭력 사태가 일어나자 영국은 군대를 투입해 폭력을 진압했다. 1847년 말경에는 1만 5천 명의 영국 군인들이 기아와 열병으로 초주검이 된 나라에 주둔했다. 이제 살려면 아일랜드를 탈출하는 길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불행과 전염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으로의 대규모 이민은 1847년의 최악의 기근이 가장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1841년부터 1852년까지 10년 동안 아사나 이민으로 인해 아일랜드 인구는 820만 명에서 650만 명으로 감소했다. 1845년부터 1855년 사이에 200만 명 이상이 이민을 갔다. 그들 대부분이 미국행 배에 올랐다. 놀랍게도 현재 미국에 사는 아일랜드인이 아일랜드 본토보다 세 배나 많을 정도다.
살기 위해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던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대기근 이민의 4대 후손인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될 정도로 미국 사회의 주력이 되었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 ‘성 패트릭의 날’을 만들어 퍼레이드와 함께 큰 행사를 벌인다.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상업적인 부대 행사도 계속 화려해지고 있다. 아일랜드의 상징색이 초록이기 때문에 이날이 되면 모든 것이 초록색으로 장식된다. 목도리, 셔츠, 바지, 모자, 심지어 맥주까지도. 그래서 사람들은 이날을 ‘그린비어 데이(Green Beer Day)’ 라고도 부른다.
미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인들은 후손들에게 ‘힘이 없으면 비참하다’는 말을 대대로 전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지금도 기억한다. 자신들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영국은 오히려 아일랜드의 식량과 가축을 본국으로 실어갔다는 사실을.
발행일 : 2017. 11.17.
글 반기성 케이웨더 기후산업연구소장
연세대 천문기상학과 및 대학원 졸업하고, 공군 기상전대장과 한국기상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케이웨더 기후산업연구소장이며, 조선대학교 대기과학과 겸임교수로 있다. 연세대에도 출강하고
[네이버 지식백과] 아일랜드 문명과 기후 - 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 (지구과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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