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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우물] 메시아(그리스도)는?
신약성경에서 메시아(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쉽고 짧게 알려주는 구절로 다음을 꼽겠습니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묵시 5,6)
본디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일곱은 충만함과 구원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뿔이 일곱이니까, 수난당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으로 충만하신 분 곧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앎을 뜻하는 눈이 일곱 개라는 말은 앎으로 충만하신 분을 상징합니다. 종합하면 요한 묵시록 5장 6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과 앎으로 충만하신 곧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고 계시하는 구절인 것이죠.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그리스도론)를 누가 이보다 더 쉽고 간결하게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힘과 앎으로 충만한 승리자로서의 어린양은 유다교 메시아상에 상응합니다. 유다교의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을 성취하는, 곧 모든 악을 물리치는 궁극적 승리자로서의 모습을 담은 메시아상은 성서 어디에 나올까요? 다음 두 구절이 그 답을 줍니다.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그리스어로 구원의 뿔)를 일으키셨습니다.”(루카 1,69)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일곱 뿔과 일곱 눈을 들어서 메시아가 누구신지를 그림을 들여다보듯이 그렇게 입체적으로 그려주는 요한 묵시록 5장 6절 말씀은 4장부터 5장에 걸쳐 드러나는 ‘천상 예루살렘 예배’에 나옵니다. 천상 예루살렘 예배의 절정, 곧 예배 끝부분에서 하느님과 어린양께 대한 찬미 노래가 다음과 같이 울려 퍼집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하고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묵시 5,13-14)
이 천상 예루살렘 예배 장면 안에 요한 묵시록의 핵심 신학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사실 묵시록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혀주는 책입니다. 묵시록 저자는 곧 수난당한 어린양으로 등장하는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기다려오던 메시아(그리스도)이심을 밝히기 위하여, 당시 통용되던 온갖 상징과 숫자 등을 동원해 보다 쉽고 입체적으로 그 신비를 묘사합니다.
기원후 97년경 묵시록 저술 당시에는 천사와 황제 숭배(신격화)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특히 영지주의자(Gnosis)들은 육신은 경시하고 영적인 측면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순수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을 평가절상하는 반면, 우리 인간처럼 육체를 지니신 예수님은 평가절하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즈음에 묵시록 저자 요한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천사의 위치를 바로잡아 줍니다.(묵시 1,1 참조) 천사는 신이 아니라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고백합니다. “나(요한)는 …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마라. 나도 너와 너의 형제 예언자들과 … 같은 (하느님의) 종일 따름이다.’”(묵시 22,8-9 참조)
[다시 만난 신약 성경] 사랑하느냐?
어느 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느냐?”,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라고 물으신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상하게도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요한 복음의 마지막 장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하십니다. 오래전에는 이 대화를 보면서,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글쎄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더 쉬워 보였고 양들을 돌보라는 것은 더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러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시면 그렇다고 할 것 같은데,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양들을 돌보라고 일을 시키시는(!) 것은 좀 무리하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만 하라고 하시면 더 쉬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보니,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말씀보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이 더 어렵게 보입니다.
오늘도 또 다른 할머니 이야기를 하자면, 종종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식사 시간인지 취침 시간인지도 헷갈리시는 95세 수녀님이 계십니다. 돈을 가위로 잘라놓기도 하고, 미사 시간에 성무일도를 펼쳐 놓고는 영성체하시라고 해도 지금이 무슨 시간인지 모르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공동체 수녀님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수녀님들을 사랑해요. 내가 자꾸 잘못하기도 하고 도움이 되지도 못하지만, 내가 수녀님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히 보장할 수 있어요.” 아,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저는 그렇게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6)라고 말씀드렸을 때 저런 마음이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요한 복음 18장에서 베드로는 칼을 뽑아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사제의 종의 귀를 잘랐습니다. 예수님이 대사제에게 신문을 받으실 때는 그분의 제자가 아니라고 잡아떼었습니다. 20장에서는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고 성령을 받았지만, 21장에서는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했어도, 예수님은 그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오래전에, 제가 좀 더 젊었을 때 생각하던 것과는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데 예수님은 양들을 돌보라는 어려운 일을 맡기시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정말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은 다른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들보다 베드로처럼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당신 양들을 맡기고 싶어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요한 복음이 끝나지만, 요한 복음에서 한 구절은 다시 인용하고 마쳐야 하겠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성서와함께’ 가꾸는 기도의 정원] (6) 산딸나무
꽃인 줄 알았더니 잎… 십자가를 닮았네
목련·벚꽃·철쭉 같은 화려한 봄꽃들이 지나간 후 녹음 짙은 초여름 뒤늦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식물이 있다. 숲이나 시골 길부터 도심 아파트 단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산딸나무다. 나뭇가지를 가득 뒤덮은 커다란 꽃은 낮에는 마치 흰 나비 수십 마리가 떼를 지어 앉아있는 것처럼, 밤에는 은하수의 별들이 내려앉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흰 나비처럼, 별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꽃이 아니라 잎이 변형된 ‘포엽’이다. 진짜 꽃은 크기가 아주 작고, 여러 송이가 둥글게 모여 포엽에 둘러싸여 있다. 가을이 되면 겉표면이 올록볼록한 빨간 열매가 열리는데, 이 열매가 산딸기를 닮았다고 하여 산딸나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님 시대에 산딸나무는 참나무만큼이나 크기가 거대하고 목질이 튼튼해 십자가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산딸나무는 자신이 그처럼 잔혹한 목적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보고 슬퍼하는 산딸나무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고통에 슬퍼하고 동정심을 보인 산딸나무야, 이제부터 너는 십자가로 쓰일 만큼 크게 자라지 않을 것이다. 너의 줄기는 가늘어지고, 가지는 구부러지고 휘게 자랄 것이며, 꽃은 두 장의 긴 꽃잎과 두 장의 짧은 꽃잎이 십자가 모양으로 피어나리라. 뾰족한 꽃잎 가장자리에는 못에 박힌 상처를 닮은 붉은 자국이, 꽃 한가운데는 가시관 모양의 꽃술이 자랄 것이다. 앞으로 모든 사람들이 너를 보며 나의 수난을 기억할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산딸나무는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에서 자생하지 않으므로 실제 십자가의 재목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서양 문화권에서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산딸나무는 그리스도교에서 깊은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
산딸나무는 품종마다 나무의 특성, 포엽이나 열매의 모양,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포엽은 흰색이 일반적이지만, 끝만 붉게 물들거나 포엽 전체가 진분홍색을 띠는 품종도 있다. 포엽이 얇고 끝이 뾰족한 품종도, 둥글고 끝이 안으로 말려 있는 품종도 있다. 어떤 품종이든 네 장의 포엽이 십자가를 연상시키고, 산딸나무 자체에 ‘고난 속 사랑’이라는 의미가 있어 다양한 테마의 기도 정원에 활용할 수 있다. 개화 시기에는 절화시장에서도 길게 자른 나뭇가지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산딸나무 가지는 밝은 녹색 잎과 흰 포엽의 존재감이 확실해 꽃꽂이에 넣어도 참 예쁘다.
[교회상식 더하기] (25) 계이름은 사실 기도문이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찬미가에서 유래
“이 동요 외국어로 부를 수 있어?”
어릴 적 친구들 사이에서 종종 하던 장난입니다. 이를테면 “<작은 별>을 외국어로 부를 수 있다”며 “도도솔솔 라라솔~”이라며 계이름으로 노래하곤 했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오는 귀여운 장난입니다만, 이 계이름은 실제로 외국어, 그것도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심지어 이 “도, 레, 미~” 안에 교회가 오랫동안 이어 온 기도의 숨결이 담겨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계이름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11세기 이탈리아의 귀도 다레초 수사입니다. 귀도 수사는 4선 보표 체계를 만들어 음높이를 명확하게 표시하는 방식을 고안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계이름을 활용한 것이 특징입니다.
귀도 수사가 계이름을 지을 때 눈여겨 본 것이 바로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에 바치는 「성무일도」의 저녁기도 찬미가의 첫 부분입니다. 라틴어로 “Ut Queant laxis Resonare fibris Mira gestorum Famuli tuorum Solve polluti Labii reatum Sancte Iohannes”라는 문구로 이뤄져있는데요. 우리말 「성무일도」에는 “세례자 요한이여 들어주소서. 위대한 당신 업적 기묘하오니 목소리 가다듬어 찬양하도록 때 묻은 우리 입술 씻어주소서”라고 번역돼 있습니다.
이 찬미가는 단계적으로 음이 올라가는 형식의 노래였습니다. 여기서 다장조의 여섯 음과 순서대로 맞아떨어지는 우트(Ut), 레(Re), 미(Mi), 파(Fa), 솔(Sol), 라(La)를 각 음의 이름으로 삼은 것입니다. ‘우트’는 후에 발음하기 쉽게 ‘도’로 이름이 바뀌었고, 17세기경에 일곱째 음인 ‘시’가 더해져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계이름이 완성됐습니다. 참고로 시(Si)는 성 요한(Sancte Iohannes)의 머리글자입니다. 도(Do)는 주님을 뜻하는 도미누스(Dominus)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찬미가를 통해 기리는 성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에 앞서 주님의 길을 준비한 예언자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증언하면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할 수 있도록 이끌었지요.
계이름도 역시 계이름을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귀도 수사가 계이름을 만든 것은 누구나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식을 통해 성가대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10년에서 1년으로 줄어든다고 자신했습니다. 실제로 이제 계이름과 악보를 통해 어린아이도 쉽게 하느님을 찬미하며 노래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계이름 안에는 “목소리 가다듬어 찬양하도록 때 묻은 우리 입술 씻어주소서”라는 교회의 오랜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주 미사 때는 어린 시절 배운 “도, 레, 미~”를 생각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보시면 어떨까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씀하셨듯 “성가는 두 배의 기도”니까요.
[성경 이야기] 성경에서 "씻는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린시절 우리집 앞에는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주말 아침이 되면 삼삼오오 목욕바구니를 들고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추운 겨울날 목욕을 마친 여성들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하얀 김을 뿜으며 종종걸음치는 풍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동생과 나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실 때면 먼저 비눗물로 씻게 하고 곧바로 커다란 뜨거운 탕에 들어가 한참을 앉아있게 하셨다. 온몸이 벌겋게 된 채 탕에서 나오면 아버지는 이탈리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빳빳한 이태리 타올로 등을 박박 밀어주셨다. 어떤 아저씨는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아흐! 하고 연신 비명을 지르기도 했고, 뜨거운 탕에 큰 대(大)로 기대 누워 느릿느릿 창(唱)을 부르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목욕은 동물의 본능적인 습성인 동시에 인류의 문화이기도 하다. 인간이 목욕하는 방식은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되었다. ‘씻는다’는 행위는 위생 관리, 공중 위생, 종교 의식, 속죄 행위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시대와 문화를 반영하며 변화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목욕 문화는 단순한 청결을 넘어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고대 문명에서 목욕은 종교적 정화 의식이나 신체적 건강과 관련이 깊었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에서는 목욕 문화가 발달했으며, 공중 목욕탕이 중요한 사회적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 시대에는 위생 관념의 변화와 종교적 영향으로 목욕 문화가 위축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도원 등에서는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목욕이 지속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위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공중 보건 개념이 확산되면서 목욕 문화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특히 유럽에서는 공중 목욕탕이 위생 개선과 사회적 교류의 장소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대에는 개인위생 관리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목욕 문화가 일상화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목욕 시설과 용품이 개발되었고, 목욕은 건강 관리, 스트레스 해소, 미용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씻는다는 것은 이처럼 사회 문화적,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고, 성경에서도 자주 표현된다. 물이 귀한 유목민 사회에서 목욕은 부정을 씻는 강렬한 상징이 되었다. 또한 손을 물로 씻으면 액운과 함께 죄를 씻어낸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의 신전 입구에는 손을 씻는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후에 이 관습은 성수를 뿌리는 예식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 예식 역시 정신의 정화와 세례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세례(洗禮)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는 예식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기독교 공동체에 입문하는 예식이다. 유다교의 정결 의식에서 유래했지만, 초대교회부터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세례는 그리스어 동사 ‘밥티조’(Βαπτιζω)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 의미는 ‘물에 담그다, 물로 씻다’는 뜻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이 단어는 ‘물에 담그다’와 ‘물로 씻다'의 의미로 사용한다. 성경에서 물로 씻는 행위는 깨끗하게 하는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는 정화(淨化)의 의미를 지닌다. 정결한 사람만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허용된다.
“그들이 만남의 천막으로 들어갈 때, 물로 씻어야 죽지 않는다. 그들이 예식을 거행하려고, 곧 주님에게 화제물을 살라 바치려고 제단에 다가갈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손과 발을 씻어야 죽지 않는다. 이는 그와 그의 후손이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정이다.”(탈출 30,20-21)
세례 중 몸을 씻는다는 행위는 죄에서 깨끗해지는 상징적 행위이다.
“예루살렘아, 네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네 마음에서 악을 깨끗이 씻어 내어라. 언제까지나 네 안에 악한 생각을 품어 두려느냐?”(에레 4,14)
또한 물로 씻는 행위는 치유로 작용하기도 한다.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음으로써 나병에서 깨끗해졌다.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 살이 돋아 깨끗해졌다.”(2열왕 5,14)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 제자들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비난한다. 예수님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고 지적한다. 율법의 씻는 행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신 셈이다(마르 7,1-23).
세례를 받는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물로 씻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구원의 상징이 된다(로마 6,3-4).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기도에 앞서 두 손을 씻었다. 손을 씻는 일은 교회에 들어올 때에도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관습이다. 그래서 큰 성당 앞뜰에는 수반이 놓여 있었다. 이 관습은 후에 성수를 뿌리는 정신의 정화와 세례의 기억을 상징하는 행위로 변화된다. 미사 때 봉헌 후에 사제가 손을 씻는 것은 사제가 죄를 씻고 정화된 손과 마음을 갖고 성찬례를 집전한다는 의미가 있다.
성경에 보면 빌라도가 군중의 소요를 피하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후 군중 앞에서 물을 받아 손을 씻는 장면이 나온다(마태 27,24). 지금도 “손을 씻다”는 표현은 부정한 일이나 찜찜한 일에 대해 더는 관여치 않겠다는 의미로 널리 쓰인다.
사도 바오로는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영적(靈的)으로 하나가 된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13) 즉 세례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며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는 첫 성사로 자리잡는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주님의 마지막 당부를 기억해야 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한다.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다. 우리도 매일 세수나 몸을 씻을 때마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면 좋겠다.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요엘 예언서
시대 배경의 이해
요엘서를 읽어보면 “프투엘의 아들 요엘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1,1)이란 말 외에 인물과 시대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 정보도 제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예언서가 만들어진 시대를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봅니다. 역사에서 일어난 구체적 사건으로 ‘메뚜기 재앙’을 언급하지만, 오늘날 태풍과 같이 근동지역에서는 여전히 메뚜기 떼의 습격은 수시로 발생하는 일이니 이 사건 하나로 시대를 예측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언제인가?’를 찾기보다 ‘이 사건을 통해 예언자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헤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메뚜기 재앙과 가뭄
예나 지금이나 메뚜기 떼는 대지를 뒤덮고 사방으로 기어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곡식을 먹어 치웁니다. 농부들은 빗자루로 메뚜기들을 후려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고 메뚜기 떼가 지나간 곳은 마치 불에 타버린 것처럼 황량하게 됩니다. 그러니 농부들에게 메뚜기 떼의 습격은 분명 치명적인 재앙입니다. 모든 것을 해치우는 메뚜기의 파괴력을 설명하기 위해 예언자는 “그들의 이빨은 사자 이빨 같고 암사자의 엄니 같다.”(1,6)라고 합니다.
한편 예언자는 또 다른 재앙인 가뭄을 이야기합니다. 가뭄 역시 메뚜기 재앙만큼이나 가혹합니다. “곡식 농사는 망하고 햇포도주는 말라버렸으며 기름은 떨어졌고”(1,10), 짐승들이 신음하고, 양 떼가 죽어갑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제단에 제물과 제주를 봉헌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황입니다.
자! 여기서 예언자는 메뚜기 재앙과 가뭄을 통해 자연 현상과 재해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말하려는 것일까요? 두 재앙은 하느님의 심판이 펼쳐질 ‘주님의 날’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날인지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예시에 불과합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두 가지 무서운 재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일 사람들에게 요엘 예언자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주님의 날이 다가온다. 정녕 그날이 가까웠다.”(2,1) 주님의 날에 비하면 앞선 재앙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날은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먹구름의 날이며, 숫자가 많고 힘이 센 민족의 침입과 같아 아무도 대항할 수 없는 날입니다. 마치 불이 삼키고 간 것처럼 살아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 날이 얼마나 끔찍할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정녕 주님의 날은 큰 날, 너무도 무서운 날, 누가 그날을 견디어 내랴?”(2,11)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의 두려움을 맛보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목 놓아 울며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는 반드시 오고야 말 그날을 대비하기 위한 방책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2,13) 바로 회개만이 살길임을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진실한 회개만 하면 주님의 날을 쉽게 피해 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요엘 예언자는 회개를 통해 단순히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실 구원은 회개에 따르는 당연한 보상이 아니며, 용서를 빌었으니 당연히 주어지는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구원은 하느님의 자비 덕분이지, 완벽한 나의 회개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마음을 바꾸실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으로 마음을 찢으며 하느님께 돌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요엘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다시 후회하여 그 뒤에 복을 남겨 줄지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 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2,14) 과연 하느님은 그렇게 회개하는 인간을 못 본 척하고 당신 계획대로 예정된 재앙을 내리실까요?
나에게 주님의 날은?
분명 주님의 날은 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실된 회개로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비록 주님의 날을 피할 수는 없더라도 그 후에 이스라엘에 펼쳐질 ‘복구와 회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곡식과 햇포도주와 햇기름을 주고, 황폐하게 만든 이들을 내쫓으며, 풀밭이 푸르고 나무가 열매를 맺게 되리라 선포합니다. 결국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3,5 참조)을 받습니다. 반면 같은 날, 하느님 백성을 흩어버리고 땅을 빼앗은 민족들에게는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이 따르게 됩니다.
자! 공포스러운 주님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같은 날이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걸고 마음을 찢고 회개한 사람에게는 구원이 따를 수 있지만, 하느님의 소유를 찬탈하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에게는 그날이 무서운 재앙의 날일 뿐입니다. 그러니 요엘서가 말하는 주님의 날은 수신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다양한 사건이 전개되는 모순적인 날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를 공포와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사건들은 많습니다. 메뚜기 떼와 가뭄만이 아니라 홍수와 산사태, 산불과 쓰나미, 전염병과 전쟁이 어쩌면 주님의 날의 예시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종말론에 비추어 반드시 오고야 말 주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을 주님의 날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우리에게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고 우선적인 주님의 날은 바로 ‘나의 죽음’이겠지요. 그러니 개별 사건인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수신자에 따라 다양한 사건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은 날을 우리는 ‘기일’이라 부르며 제사를 지내며 고인을 추모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신 성모님에게도 기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을 ‘기일’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이라고 합니다. ‘영혼이 꿰찔리는 고통’을 품으신 성모님에게 주님의 날은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불려 올려지는 환희와 영광의 날이었습니다.
11월! 위령 성월입니다. 반드시 오고야 말 주님의 날이 누군가에게는 제삿날이지만 성모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는 승천날이 되기를 희망하며 오늘을 살아갑시다. 영혼이 꿰찔리는 고통은 아니더라도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회개로 주님의 날을 맞이합시다.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테살로니카 2서
테살로니카 2서는 친저성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견이 있습니다. 편지 말미에 등장하는 “이 인사말은 나 바오로가 직접 씁니다. 이것이 내 모든 편지의 표지입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편지를 씁니다.”(3,17)라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테살로니카 2서는 바오로 사도의 친서가 됩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 테살로니카 1서와 2서가 흡사하며 비슷한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에 친서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같은 지역 교회 공동체에 두차례 편지를 쓰면서 비슷한 내용을 반복한다는 것이 쉽게 납득 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테살로니카 2서의 문장이 테살로니카 1서보다 길고 복잡하며, 이러한 특성은 차명 저자가 작성한 것으로 간주되는 에페소서나 콜로새서와 흡사하기 때문에 차명 서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친서라고 가정했을 경우 테살로니카 2서는 50년경에 작성되었으며, 테살로니카 1서에 이어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또 기다리고 있지만 계속해서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가르침에 해당합니다. 반면 차명 서간이라고 가정했을 경우 테살로니카 2서는 90년경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박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은 요한 묵시록의 배경이 되는 AD 1세기 말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상황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당대에 닥친 극심한 박해와 혼란을 종말에 앞서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표징으로 바라보고, 테살로니카 1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종말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따를 수 있도록 테살로니카 2서를 쓴 것이 됩니다.
1장은 서간의 머리말로서 바오로 사도는 먼저 테살로니카 교회 공동체에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하면서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인내하고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은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 주어지고 있는 박해와 환난에 대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 뒤 종말의 때에 심판이 이루어지면 교회를 박해하던 이들에게는 합당한 벌이 주어질 것이며, 끝까지 인내하며 견딘 이들에게는 영광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바오로 사도는 환난을 부정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성장케 하는 긍정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바라보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테살로니카 1서에서는 종말의 때를 기다리면서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던 반면, 테살로니카 2서에는 종말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종말의 순간과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오로는 종말의 때가 다가오면 누군가 나타나서 예언이나 설교 또는 사도들이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에 대해서 말하는 것들을 보게 될 텐데 여기에 불안해할 필요도, 마음이 흔들릴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배교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무법자”(2,3)가 나타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무법자는 사탄에 의해서 나타난 존재로서 온갖 힘을 가지고 거짓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며 온갖 불의한 속임수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의 적을 말합니다(2,9 참조). 테살로니카 2서를 차명 서간으로 볼 경우 무법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같이 실제로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로마의 황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며 무법자의 속삭임에 넘어간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니 굳건한 믿음으로 지금까지 잘 지켜왔던 것처럼 신앙을 이어가도록 독려합니다.
3장 1-15절에서는 박해자들의 손에 붙잡혀 있는 자신과 동료들이 풀려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바오로 사도의 요청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기도하면서 악으로부터 지켜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꾸준하게 일상의 삶을 살아가도록 당부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는 무질서와 게으름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종말의 때가 임박했다고 해서 일상을 저버리거나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낙심하지 말며 끝까지 선을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가르칩니다.
3장 16-18절은 맺음말로 테살로니카 교회 공동체를 향한 하느님의 축복을 빌며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46) 욕망의 자리, 대바빌론(묵시 18,1-8)
가장 낮고 추한 것들의 보금자리 된 대바빌론
요한 묵시록 18장은 에제키엘서 27~28장을 선명히 비추는 거울처럼 닮아있다. 옛 예언자는 몰락해 가는 티로를 향해 장송곡을 불렀고(에제 27장 참조), 그 도시 위에 내릴 하느님의 심판을 단호한 어조로 선포했다.(에제 28장 참조) 요한 묵시록은 그 오래된 비애와 심판의 언어를 되살려, 이번에는 대바빌론의 추락을 노래한다.
로마 제국의 은유로 기능하는 대바빌론은 부와 힘이 응축된 무대였고 사치와 문화가 폭발하는 도시였다. 이런 대바빌론이 추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가상의 해석이며 그 해석을 요한 묵시록 18장은 과거 예언자들의 애가를 통해 전하고 있다. 문명의 가장 화려한 무대가 돌연 폐허의 무대로 전환된다는 것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신앙적이고 영성적인 해석의 다짐이다.
그 다짐은 ‘다른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다른 천사가 나타나고 그의 광채로 땅이 환해지는 장면은, 마치 구약에서 하느님 영광의 발현이 풍성히 묘사되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에제 43,2 이하 참조) 빛은 단순한 조명 이상의 의미를 띤다. 그것은 한 세계가 끝나고 다른 세계가 문을 열기 직전, 경계 위에서만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이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저만의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이,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임을 빛은 가리킨다. 천사가 힘찬 목소리를 외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천사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우렁찬 외침을 암시한다.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외침이 이 지상을 향해 울려 퍼진다. 이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결의에 찬 외침이다.
천사의 목소리는 ‘무너짐’에 대한 선포다. 대바빌론의 몰락은 단지 도시가 파괴되는 사건이 아니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마귀들의 거처, 더러운 영들의 소굴, 그리고 더러운 새들의 둥지뿐이다. 묵시문학에서 ‘더러움’은 단순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질서가 무너진 뒤 남는 세상의 잔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래된 예언서들이 폐허의 자리에서 들짐승과 재앙의 새들을 불러 모았듯(이사 13,21–22; 34,11–15; 바룩 4,35; 예레 50,39 참조), 요한 묵시록은 대바빌론을 더러운 것들의 본령으로 선언한다. 인간 문명의 정점이었던 곳이, 몰락의 순간 가장 낮고 추한 것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 이 아이러니가 묵시의 핵심 서사다.
대바빌론이 왜 이런 추한 자리로 전락했는지 요한 묵시록은 아주 묘하게 짚어낸다. 그 중심에는 ‘난잡한 불륜의 술’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이 술은 특정 행위의 상징이라기보다, 모든 민족을 하나의 욕망의 연동 장치로 이해시키려는 은유다. 힘을 향한 갈망, 주류의 대열에 끼어들고자 하는 조급함, 사치에 자신을 비벼 넣어 존재를 증명하려는 충동, 이 모든 것이 한 잔의 술처럼 서로 뒤섞인다. 술을 마시면 가려지는 것처럼, 욕망에 취하면 자기 파멸의 흔적도 흐릿해진다.
요한 묵시록은 이 욕망의 구조를 ‘사치’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한다. 그러나 그리스어 ‘스트레노스(στρῆνος)’는 단순한 사치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그것은 교만, 거만, 건방, 욕망의 과잉을 동시에 가리키는, 인간 영혼의 팽창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의 사치는 물질적 번영만이 아니다. 영적 우월감, 정신적 허영, 자리를 차지하려는 끝없는 경쟁심 모두가 대바빌론의 얼굴이다. 고대 로마의 상업적 번영을 비판하려는 의도였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욕망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이 본문은 특정 시대에 갇히지 않는다. 시대가 달라져도 인간은 여전히 같은 욕망 앞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4절에서 하늘의 목소리가 울린다.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와라.” 이 목소리는 단순한 도피 명령이 아니라, 욕망의 구조로부터 탈출을 요구하는 초대다. 하느님을 잊게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종종 성공의 서늘한 그림자다. 성취와 번영의 달콤한 향이 오랫동안 영혼을 감싸면, 어느 순간 하느님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언제나 ‘나오라’고 외쳤다.(이사 48,20; 예레 50,8; 51,6.9.45 참조) 하느님께 돌아오는 길은 종종 자기 욕망의 벽을 무너뜨리는 일에서 시작된다.
6절에서는 다시 ‘잔’의 형상이 등장한다. 이미 14장에서 살펴보았듯, 이 잔은 하느님의 분노가 담긴 상징이다. 대바빌론이 누린 사치만큼, 아니 그 사치의 깊이만큼 하느님의 심판은 되돌아온다. 욕망이 잔을 채웠다면, 심판 또한 잔에 가득 찰 것이다.
대바빌론의 목소리는 무례하고 허영으로 가득하다. “나는 여왕의 자리에 앉아 있고, 과부가 아니니 슬픔도 모를 것이다.” 이 말은 구약의 바빌론과 티로가 과거에 외쳤던 교만의 울림을 되풀이한다.(이사 47,7–9; 에제 28,2 참조) 하느님의 자리는 비워둔 채, 스스로의 힘과 화려함에 취한 이들의 고집스러운 독백, 그 마지막 회오리가 바로 대바빌론이다.
이 교만의 도시는 결국 흑사병, 불, 붕괴의 잔해 속으로 추락한다.(8절) 큰 능력 앞에 인간 문명의 허세는 먼지처럼 흩어진다. 예언자들이 오래전 예고했던 그 무거운 심판의 단어들이, 이제 다시 18장의 공기를 채운다.(이사 47,9; 예레 50,32 참조) 많은 학자가 이 장을 로마 제국 번영에 대한 영적 비판으로 읽지만, 그 의미는 훨씬 넓다. 권력의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인간의 욕망은 더 길게 흔들린다. 거대한 도시는 무너져도, 욕망의 도시는 인간 마음 안에서 여전히 건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 묵시록의 외침은 고대 로마를 향한 비판이기보다,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무너져야 할 대바빌론, 우리의 과도한 욕망과 그에 대한 집착은 어디에 있는가? 그 도시로부터 “나오라”는 부름은 결국, 나 자신이 만든 욕망의 감옥에서 제발 벗어나라는 자유에의 호소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98) 회개의 표지로 네 배의 보상을 약속한 자캐오
스웨덴의 과학자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은 27세에 나이트로글리세린 제조법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가 발명한 ‘다이너마이트’는 평화와 문명을 파괴하는 데 더 많이 사용되면서, 그에게는 칭찬보다 비난이 쏟아졌다. 한동안 깊은 시름에 빠져 정작 사업을 시작하지 못했던 그에게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는 십만 프랑을 주며 “세계 산업에 일대 변혁을 초래할 발명품”이라고 격려했다. 그 이후 노벨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평화주의자였던 노벨은 자신이 발명한 화약이 인간을 살상하는 무기로 더욱 악용되는 현실을 보면서 큰 실망과 함께 자책감에 빠졌다. 유명한 ‘노벨상’은 이런 인간적인 고뇌에서 시작되었다. 노벨은 천문학적인 유산을 원금으로 맡기고, 매년 그 이자를 ‘인류의 발전과 행복에 위대한 일을 한 사람’에게 큰 상금으로 수여하도록 했다.
각종 기초과학·응용과학 분야의 상이 있지만, 수학상이 제정되지 않은 것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노벨은 친구인 수학자 미타크 레플러가 자신의 부인과 몰래 밀애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벨 수학상이 제정되면 당대의 천재인 레플러가 수상자가 될 것은 거의 확실했다. 노벨이 수학상을 두지 않은 것은 연적에 대한 마지막 복수였다는 것이다.
세리는 로마가 통치하는 지역에 꼭 있는 직업이었다. 로마는 식민지의 세금 징수에 그 나라의 사람들을 이용했다. 세관장들은 한 해의 예상 세입을 먼저 로마에 지불했다. 그러니 당연히 세리들은 선불금을 포함해 최대한 세금 수입을 올리려고 부당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세리들은 유다인 사회에서 로마 제국의 하수인이자 대리인으로, 이방인이나 창녀 같은 죄인 취급을 받았다.
자캐오란 인물도 다른 세리들처럼 법을 악용하여 재물을 모은 부자였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이스라엘에서 소문이 자자한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수님은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들과도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이미 들은 터였다. 길가에 많은 사람이 환호하자, 키가 작은 자캐오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주님은 나무 위에 올라간 자캐오를 보고 그를 부르셨다. 주변 사람들이 죄인과 어울린다며 수군거렸지만, 예수님의 일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캐오의 집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렀다.
동족에게도 비난과 멸시를 받으며 고독하고 소외된 삶을 살던 자캐오는, 자신을 평범한 친구처럼 대해주시는 예수님께 큰 감동을 받았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은 자캐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자캐오는 주님께, 많은 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약속했다. “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소유를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율법에는 남을 기망하거나 착취해서 부당한 이익을 챙겼을 때, 이익을 본 액수에 20%를 더해 되갚도록 하여 죗값을 치르게 했다.(레위 5,24 참조) 자캐오는 자신의 회심을 이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행동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사람은 마음이 변화될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