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 여인은 누구실까?”]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모님을 부를 때 가장 자주 함께 부르는 호칭은 “동정”입니다. 교회의 신앙은 마리아를 동정녀라고 처음부터 고백해 왔습니다. 이 신앙은 신약 성경에 근거합니다. 루카 복음은 마리아를 소개하는 자리,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나자렛에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루카 1,27)하고 강조합니다. 마리아는 동정녀였습니다. 동정녀로서 일생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친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 장면은 동정 마리아의 모습을 선명히 보여줍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하며 인사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 마리아는 깜짝 놀라며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동정 마리아는 말씀을 경청하는 분이었습니다.
천사는 그 모습을 보며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하고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곰곰이 생각했고,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하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5-37)하고 답했습니다.
말씀을 생각하고 그 뜻을 묻고 그 의미를 다시 주님께 듣고 배우는 일련의 과정,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을 하는 이는 말씀의 힘을 얻고 말씀으로 양육됩니다. 동정 마리아는 말씀을 묵상하며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무엇하기를 원하시는지 식별하였습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동정 마리아는 기도하는 분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기도로 하느님께 사랑의 순종을 드렸고, 하느님 아드님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잉태하였으며,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렸습니다. 동정 마리아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룬 분이었습니다. 이윽고 마리아는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루카 1,39-40).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러 서둘러 떠난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경청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으로 기도하고,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동정 마리아에게서 밝게 드러납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표본 동정 마리아
교회는 이것을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고 합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동정 마리아는 렉시오 디비나의 표본입니다. 어떻게 말씀을 듣고, 어떻게 말씀을 묵상하고, 어떻게 말씀으로 기도하고, 어떻게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동정 마리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한 동정 마리아는 오롯이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동정성은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선명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며 온 누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는 자리,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당신 사랑을 받아들여 줄 것을, 당신 사랑에 응답해 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동정 마리아는 인류를 대표하여 하느님께 사랑의 순종을 드렸고, 하느님 아드님께서는 마리아의 응답을 들으며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께 온전히 협력한 분이었습니다. 사랑의 응답으로 마리아는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 구원 사업의 출중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동정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이가 새롭게 태어나도록 전구 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의식합니다. 바로 그렇기에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반이요 정점인 성찬례 안에서 교회는 성모님께 전구를 청합니다. 사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인사하며 미사를 시작하고 곧바로 참회 예식을 인도합니다. 모든 이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성모님께서 우리 모두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도록 간절히 전구 하시며 미사 가운데 함께 계신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동정 마리아는 죄로부터 보호받으셨고, 하느님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은총에 의지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고귀한 일인지 가장 잘 아시는 성모님은 우리 모두가 은총으로 새로워지도록 항상 기도하여 주십니다.
동정 마리아는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도록 하느님께 전구 해주셔
신앙고백을 드리고 감사기도를 바칠 때도 신앙공동체는 동정 마리아를 부릅니다. 주일 미사와 대축일 미사에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바칠 때, “성자께서는 …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하고 입을 모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 역시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하며 고백합니다. 하느님 아드님께서 성모님의 사랑 가득한 협력으로 인간이 되신 신비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입니다.
감사기도를 바칠 때, 사제는 동정 마리아를 부르며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간구합니다.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으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복된 사도들과 모든 성인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감사기도 제2양식) 성모님은 동정녀로서 하느님의 은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하여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들 또한 지상 생활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도록 하느님께 끊임없이 간구하여 주십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동정 마리아를 바라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동정 마리아를 바라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동정 마리아를 바라보면 하느님께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동정 마리아는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길을 친절하고 자상하게 알려주시는 분, 또 그 길을 따라가도록 우리 모두를 북돋워 주시는 분입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 모두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태어나 이웃에게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전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도록 겸손하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믿나이다] (29)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
초기 교회에서 이방인 포용에 앞장선 야고보
신약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세 명 등장합니다. 이들 중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인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뽑으신 사도들입니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제베대오의 아들을 ‘큰(大) 야고보’라 하고, 알패오의 아들을 ‘작은(小) 야고보’라 부릅니다.(마태 10,3; 마르 3,18 ; 루카 6,15 ; 사도 1,13) 나머지 한 명은 예수님과 형제(마르 6,3; 마태 13,55-56)이며 ‘베드로와 요한 사도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갈라 2,9)으로 존경받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갈라 1,19)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같은 인물로 봅니다. 유다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이 둘을 동일 인물로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 경전 중 하나인 ‘야고보 서간’을 알패오의 아들로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 사도가 쓴 것으로 여겨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학자들 사이에선 알패오의 아들과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이유로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5)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라는 복음서의 증언처럼 예수님의 형제 곧 친척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서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라는 말을 들으며 배척당하셨을 때에는 이미 열두 사도들과 함께 활동하고 계셨다고 설명합니다.(마르 6장 참조) 그리고 무엇보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주님의 형제들을 언제나 구별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사도 1,13-14; 1코린 9,5; 15,5-8) 또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알패오의 아들’ ‘주님의 형제’라고 하지 않고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어 같은 인물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와 같은 인물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실상 신약 성경에서 그가 작은 야고보라 불렸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행적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 다른 하나가 있네요. 그의 어머니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 죽음을 지켜봤고,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빈 무덤을 목격한 성모님 친척인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마태 27,55-56)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마르 15,40)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루카 24,9-10) 등이 소개됩니다.
이제 학자들의 주장이 아니라 교회 전통에 따라 작은 야고보 사도를 소개합니다. 이미 밝힌 대로 교회 전통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로 활동했던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같은 인물로 봅니다. 그는 큰 야고보라 불리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가 44년 4월께 예루살렘에서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돼 순교한 후 예루살렘 교회를 맡아 사도직을 수행했습니다.(사도 12장 참조)
그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를 열어 이방인들을 할례 없이 교회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당시 교회 구성원의 한 축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한 축인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다교 율법을 따를 것과 할례를 받을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당연히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거부했지요. 그래서 사도들은 이 난제들을 신속하게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때 작은 야고보 사도는 모든 사도가 동의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모세의 정결례 법’만은 준수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우상숭배 행위와 불륜, 그리고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사도 15장 참조) 이처럼 작은 야고보 사도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와 함께 초기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야고보 서간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을 실천할 것을 권고합니다. 야고보 서간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삶에서, 무엇보다 이웃 사랑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에서 완성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 1,27)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1세기 말 저서 「유다 고대사」에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작은 야고보 사도가 62년 예루살렘 최고 의회 대사제 아나니아(사도 23장 참조)의 명으로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반면 에우세비오 「교회사」는 야고보 사도가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졌음에도 죽지 않아 몽둥이질을 당해 순교했다고 합니다.
[홍보 주일] 가톨릭 AI 개발자를 만나다 - 가톨릭 AI 개발사 ‘롱비어드’ 매튜 샌더스 대표
교도권에 충실한 가톨릭 AI, 교회 사명 수행에 새 길 제시
인공지능(AI)의 시대 흐름 속에 가톨릭교회는 이 새로운 기술이 인류를 위해 선용되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가톨릭 인공지능 개발사 롱비어드의 매튜 샌더스(Matthew Harvey Sanders) 대표는 제59차 홍보 주일(1일)을 맞아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사가 개발한 생성형 AI ‘Magisterium’(교도권)은 “교회가 AI 기술을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하도록 돕고자 개발됐다”면서 새 기술 발전에 대한 철학과 비전을 전했다.
샌더스 대표는 교회에 맞는 AI 활용 사례를 고심해왔다. 그러던 중 오픈AI의 챗GPT가 출시됐다. 그는 가톨릭교회 가르침을 통찰하고자 2년 전 가톨릭 AI 프로그램 ‘Magisterium(Magisterium.com)’을 내놨다.
그럼에도 여전히 AI를 둘러싼 위험성과 효율성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AI의 오늘, 그리고 미래를 묻고자 샌더스 대표와 2시간 가까이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본지는 교회가 AI를 실용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안과 선용할 수 있는 대책은 무엇일지 답을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Magisterium 출범 계기가 궁금하다.
“롱비어드사는 10년 전 설립됐습니다. 교회가 기술을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하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 중 교황청 여러 부서, 전 세계 가톨릭 단체들과 협력했습니다. 구글 같은 회사와 기술 인프라 작업도 했죠. 최근엔 오픈 AI와도 협업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에 딱 맞는 AI 활용 사례를 찾기는 어려웠죠.
그러다 챗GPT가 등장했는데, 놀라운 점은 수많은 가톨릭 신자가 AI에 단순한 정보 문답이 아니라 신학·윤리·철학의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생성형 AI가 지닌 문제점은 ‘할루시네이션’(환각) 현상이 두드러져 허위 정보 생성, 답변의 출처가 불명확하다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영적 질문에 대해 교도권에 기반해 충실한 답변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AI의 환각을 줄이고 답변이 적절한 문서에 기반하도록 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그 결과가 AI ‘Magisterium’입니다. 2023년 7월 출시됐고 세계 각지의 신학자들과 협력해 교리적 충실성을 검증했습니다. 초기 약 600개의 가톨릭 문헌들이 수록됐고 현재는 2만 6000개에 달합니다.”
‘교도권’이라 이름 지은 이유는 무엇인지?
“이름의 유래는 처음 공식 교리 문서를 모으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한 교황청립 대학 총장 신부님께서 도서관을 디지털화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중동이나 동아프리카·동유럽 같은 곳에서는 로마를 방문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그래서 ‘누구나 어떤 기기에서든 모국어로 접근 가능하게 하자’는 목표로 ‘Vulgate’(롱비어드 디지털 도서관)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사업을 확장해 교회의 모든 유산·신앙 고백·철학·영성 자료 등을 통합하고 생성형 AI가 탄생한 것이죠.
이것이 앞으로도 저희 사명이 될 것입니다. 교회 가르침에 대한 접근을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하고 싶습니다. 여러 지역과 협력해 디지털화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교회의 통찰에 접근할 수 있고 모두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챗GPT·딥시크와 같이 고도화된 생성형 AI가 있는데도 굳이 가톨릭 AI를 따로 개발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중요한 질문입니다. 다른 AI 연구소들은 교리적 충실성이 아닌 기능적 향상을 목표로 합니다. 챗GPT나 구글 제미나이 같은 AI가 10번 중 9번을 맞출 순 있죠. 하지만 교회에는 10번 중 1번의 오류도 치명적입니다. 항상 교리적으로 충실한 AI가 필요하죠.
또 하나는 AI의 데이터 문제입니다. 현재 상용 AI는 웹 기반에 의해 학습되고 인터넷 커뮤니티 의견도 포함됩니다. 신뢰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죠. 그런데 아직 디지털화되지 않은 가톨릭 자료들이 많습니다. 저희는 가톨릭 문헌들을 디지털베이스화하고 있고, 디지털 도서관 플랫폼을 구축 중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AI는 다른 대형 언어 모델보다 훨씬 더 많은 가톨릭 지식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연구소들은 AGI(다양한 분야를 학습하고 추론하는 능력)를 목표로 할 때 저희는 충실성(fidelity)을 목표로 합니다. Magisterium은 RAG(정확하고 신뢰도 높은 응답 생성) 기술을 기반으로 합니다. 사용자의 질문에 대해 AI가 대형·입체화된 가톨릭 문서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하고 해당 질문에 답변을 생성합니다. 특히 근거 자료가 있을 때에만 답변하도록 설계됐습니다.”
AI는 교회와 사회의 소통 노력에 어떻게 적용될까?
“저희는 교회를 돕기 위한 것이지만 전 세계에 도움을 주려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저희만 ‘신앙에 충실한 AI’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인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희 것 말고도 다른 대형 언어모델(LLM)을 사용할 겁니다. 다른 모델들도 신앙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탄탄한 데이터들과 평가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보유한 데이터들을 딥마인드나 오픈AI와 협력해 그들이 최소한 기본적인 교리, 교회 가르침에 대해 충실하게 답할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교회가 인공지능 개발 과정에서 중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기술들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대화를 촉진하는 것입니다. 노동 시장에 미칠 영향은 훨씬 클것입니다. AI가 화이트칼라(사무직) 직종을 넘어 휴머노이드 로봇이 블루칼라(생산직) 일까지 대체할 것입니다. 이 거대한 변화에 대해 사람들과 대화해야 하며 시민사회 차원에서 정직하게 논의해야 합니다. 정치인들이 미래를 준비하도록 압박할 필요도 있죠. AI 연구소 리더들도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지만 주주에 묶여 있어 발언권에 한계가 있습니다. 정부도 선출직 임기제로 장기적 사고가 어렵습니다.
다른 하나는 더 근본적입니다. 일론 머스크가 말한 것처럼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초(超) 풍요의 시대가 온다고 가정합시다. 주거·식량 걱정이 없는 세상이죠. 여유가 생겼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가상현실(VR) 게임·포르노그래피로 도피한다면 결국 인간은 공허해집니다. 실존적 공허죠. 자살률도 오를 수 있습니다.
이에 교회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건강한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시간과 정열을 쏟는 삶의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선택하게 하기 위해 교회의 탁월한 인간 교육·지적 형성·영적 형성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를 가진 곳입니다. 저는 이 AI를 통해 교회가 사명을 더욱 잘 수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반면 AI가 악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메타의 수석 AI 과학자(부사장)인 얀 르쿤의 관점을 따르는 편입니다. ‘AI에 의한 멸종의 위험’은 대부분 범용 인공지능(AGI)나 초지능(ASI)이 인간 통제를 벗어나 인간과 대립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인간이 AI에게 불편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I가 우리를 제거하려 한다는 공포인데요. 하지만 공상과학(SF) 영화나 소설이 그런 일이 불가피하다고 말했을지는 몰라도 꼭 그렇게 되진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 궁극적 권력을 갖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데, 우리는 이 공포심을 AI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라 봅니다.
AGI는 아주 천천히 발전할 것입니다. 터미네이터 같은 수준에 도달하려면 기술적 난제들도 많이 해결돼야 하고요. AI 연구소들도 폐쇄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AI가 인간 데이터를 기반으로 훈련되기에 ‘거짓말’을 이해하고 구현할 수는 있지만 현실에서 그럴 동기가 없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소수 악한 사람들이 목적에 따라 AI를 학습시키면 악용되지 않을까?
“저도 최근까지 그런 두려움이 있긴 했습니다. 소수의 정부와 대형 연구소가 세계 최고의 AI를 독점하는 것인데요. 제가 생각하는 해법은 오픈소스(공개 데이터)입니다.
오픈소스는 다양한 가치 체계에 따라 훈련된 AI가 존재할 수 있게 합니다. 사용자들은 어떤 AI가 어떻게 훈련됐는지 인식한 상태에서 자신에게 맞는 AI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본적 안전기준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AI가 핵무기 제조법을 알려주는 일은 없어야겠죠. 하지만 그 외에는 너무 많은 제약이 있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픈소스 환경에서는 어떤 악의적 사용자가 AI를 잘못 사용하더라도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또 다른 AI가 항상 존재하게 됩니다. 이 균형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가톨릭 AI가 유익할 수 있지만, 신앙은 인간이 주체가 돼야 한다. 교회를 지도하고 교리를 알려주는 사목자의 역할은 어떻게 전망할 수 있을지.
“저도 신앙생활의 주체는 인간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설적으로 AI가 현재 필요한 도구이지만 이상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 모든 가톨릭 신자가 고품질의 지적·영적·인격적 교리를 받길 바랍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목자가 부족하고 시간도 충분치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도구들이 필요한 것이죠.
AI의 장점은 무한한 인내심과 완벽한 기억력입니다. 신자들은 질문을 반복하고 화를 내도 AI는 교회 가르침을 문헌에서 찾아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저희도 AI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나 상황에 대해선 ‘이 문제는 인간과 상담하는 게 좋습니다’라고 권장하고 있어요. 원칙적으로 AI보다 신부님에게 상담하는 게 좋겠지만, ‘이혼은 중죄인가’ ‘성윤리적 문제에서 중죄를 지었을 때’ 같은 사생활에 해당하는 어려움에 대해선 때로 AI가 도움될 수 있겠죠. 혹은 AI가 사목자에게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한국 교회와 한국 신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씀은?
“한국은 오랫동안 기술 선도국이었고, 일상에서 기술을 가장 잘 통합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너무 갇혀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한국의 목소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희는 한국 교회와 협력해 주교회의나 서울대교구 문서나 통찰력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AI와 신앙 교육 분야에 있어 동아시아 교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도 한국 교회를 직접 만나 의견을 듣고 배우고 이를 통해 제품을 개선해 전 세계와 공유하고 싶습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ca)
미사 중 감사기도가 끝나면 영성체 예식으로 넘어갑니다. 영성체 예식의 시작은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때, 사제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라고 말하며 모두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치자고 초대합니다. 참고로, 이 초대 문구에도 반영되어 있듯 본래 주님의 기도는 세례받은 신자들만 바칠 수 있는 기도였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이들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어른 입교 예식」 중 ‘주님의 기도 수여식’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사제의 초대 권고 이후 ‘주님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미사 중, 특히 영성체를 앞두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이유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일상에 필요한 양식 외에 천상 양식인 성체와도 연관됩니다. 또한 죄의 용서를 청하는 건 영성체를 준비하는 이의 합당한 기도입니다. 4세기까지는 주님의 기도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 영성체를 위해 빵을 쪼갠 다음에 바쳐졌으나, 6세기에 이르러 대 그레고리오 교황(590~604 재위)은 이 기도를 감사기도의 연속으로 생각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한편, 과거에는 사제 혼자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신자들은 마지막 청원, 곧 “악에서 구하소서.”만 바쳤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기도를 공동체의 기도로 복원하여 현재는 첫 구절부터 모든 이가 함께 바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제가 팔을 벌리는 자세는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이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전형적 자세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이어, 사제는 혼자 부속 기도(Embolismus)를 바칩니다. 부속 기도는 주님의 기도 마지막에 나오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를 확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이어받아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안고 마지막 때에 있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해달라고 기원합니다.
끝으로, 주님의 기도를 마치는 영광송이 나옵니다: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지난 주에도 언급했듯이, 교회는 전통적으로 찬미가나 주요 기도를 영광송으로 끝맺곤 하였습니다. 성체를 합당하게 받아 모시기 위하여 주님의 기도와 부속 기도를 바친 공동체는 하느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영광송은 주님의 기도와 부속 기도에 대한 공동체의 응답이기에, 전형적인 전례 응답인 ‘아멘’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그래서 미사 중 주님의 기도 끝에는 ‘아멘’을 생략합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15)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② 「교회헌장」 7항 후반부
「교회헌장」 7항의 전반부는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고 그 몸의 머리가 그리스도시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어지는 단락은 모든 지체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모습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와 동화되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신자들은 세상에 살면서 환난과 박해를 받지만,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받는 것이니 그분과 함께 영광도 받을 것입니다.
머리와 몸의 결합을 통해 지체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성장합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봉사 직무의 은총을 끊임없이 주시어, 신자들은 그 은총으로 구원을 위하여 서로 봉사합니다. 이렇게 신자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따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장합니다.
머리와 몸의 결합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이 새로워지도록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머리와 지체들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는 신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신자들을 일치시키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성령의 이러한 임무는 교부들에 의해서 영혼이 육체 안에서 하는 일에 비교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지체들, 곧 교회와 맺으시는 관계가 우리들의 영혼이 우리의 육체와 가지는 관계와 같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성전입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에 비유됩니다(에페 5,21-33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당신의 신부처럼 사랑하시고, 교회는 자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리스도의 육신(인성) 안에 머무르고 있으므로(콜로 2,9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인 교회를 당신의 신적 은총으로 채워주십니다. 그 은총으로 교회는 하느님의 충만함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신랑이라는 비유는 복음서에 여러 차례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요한 3,29). 주님께서도 바리사이들과의 단식 논쟁에서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 2,19-20)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신랑”에 비유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를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되기로 약혼한 신부라고 표현합니다(1코린 6,17; 2코린 11,2 참조).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은 큰 신비입니다.
[교회의 언어] 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
‘공부해서 남 주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을 삶의 지향점으로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흔히 사람들이 좋은 대학들이라고 평가하는 많은 대학들이 모토로 삼고 있는 말이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리를 뜻하는 라틴어 “Veritas”는 ‘진리’, ‘진실’이라는 뜻 말고도 ‘현실’, ‘실제’를 뜻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진리는 어떤 이상이나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사람은 우리가 처한 현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나만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함께 기쁘게 살아가기 위한 공부가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안에서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갈 때, 모두가 참된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