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시(晉州市) ‘길손의 감흥‘ 한시(漢詩)편 3.> 총13편 中
조선시대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는 두 차례 있었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10월(이하 음력)의 전투를 제1차진주성전투라 하고, 이듬해 계사년(1593년) 6월의 전투를 제2차진주성전투라 부른다. 제1차진주성전투는 곧 진주대첩으로서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반면, 제2차진주성전투는 성이 함락됨과 동시에 대학살의 참극을 빚은 전투로 기록된다. 진주성은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물리친 빛나는 승리의 표상(壬辰勝捷)인 동시에,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처절히 항전하다 끝내 순국한 충의의 제단(癸巳殉義)으로 우리 역사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제1차 진주성전투(1592년 10월 5일~10일)는 3천8백여 명의 병력으로 2, 3만여 명의 적군을 6일 동안의 접전 끝에 물리침으로써 수성에 성공한 빛나는 승리의 기록이다.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도력과 방어능력을 바탕으로 천험의 요새에 의지하여 군과 민이 합심하여 힘써 싸움으로써 빛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각처 의병들이 주축이었던 외원군도 승리의 한 요인이 되었다. 제2차 진주성전투(1593년 6월 21일~29일)는 중과부적의 불리함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적의 대군 앞에 성이 함락된 쓰라린 패전의 기록이다. 최경회 등 수성군은 목숨을 바쳐 희생함으로써 호남지역의 보장을 이루었던 것이라 할 만하다. 왜군 9만3천여 명, 아군 대략 6, 7천 명, 중과부적(衆寡不敵) 그만큼 절대 불리한 형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일·최경회 등은 그러한 형세 속에서도 진주성이 지닌 전략적 중요성(특히 호남의 보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굳은 신념으로 사수를 결심하였던 것이다.
11) 봄날 아내를 데리고 진주로 갔다. 화순을 떠나려면서 섭섭한 마음이 들어 짓다[春日領內赴晉州 將離和順 悵然有作] 이른 봄에 백씨(伯氏 다산의 맏형 약현(若鉉))께서 내 아내를 데리고 진주로 갔는데 2월에 홍일보(洪日輔)가 모시고 돌아왔었다. 이때 부친께서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전임되었으므로 나는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먼저 진주로 갔다. 장인 홍공(洪公)께서 이때 영우절도사(嶺右節度使)가 되어 진주에 계셨다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久作湖南客 호남의 나그네로 오래 있다가
今辭竹裏亭 이제는 대숲 정자 하직하누나
出門春野綠 문 나서니 봄 들판 새파랗고요
回首曉煙靑 고개 돌리니 새벽 연기 푸르르구나
列岫如遮路 늘어선 산은 마치 길을 막는 듯
孤松好在庭 외론 솔은 뜨락에 그대로 있다
曺公那可忘 정든 조공 그 어찌 잊을 수 있나
駐馬叩山扃 말 멈추고 산가 문 두드린다네
12) 이 영공(李令公) 순(珣) 의 정자에 제(題)하다. 정자는 진주(晉州)에 있다. 경진년, 증고사(證考使)가 되었을 때 지은 것이다 / 이행(李荇 1478∼1534)
將軍遭泰運 장군이 태평한 시운을 만나
高枕蘊雄圖 베개 높이고 큰 포부 감췄어라
勝地開千載 빼어난 이곳 천년 전에 열렸고
奇遊擅一區 기이한 놀이 한 구역 독차지했네
江山無盡藏 강산은 무진장으로 펼쳐졌고
風月不時需 풍월은 무시로 구경할 수 있느니
登眺多名士 이 정자 오르는 이 명사가 많건만
留題強老儒 이 늙은 선비에게 굳이 시 남기라네
13) 남강(南江)에서 밤에 배를 띄우고 술에 취해 읊다. / 최립(崔岦 1539-1612)
自余來晉州 이 몸이 진주에 부임을 하고 나서
移月始登舟 한 달이 지나서야 가진 뱃놀이
適是新年飮 때마침 새해의 술자리가 아니던가
渾如少日遊 소싯적에 노닐던 일과 흡사하고녀
笙歌依別渚 외딴 물가 퍼지는 생황의 가락이요
燈燭見高樓 멀리 높은 누각 위엔 환히 밝힌 등촉이라
合有神仙在 이런 곳엔 신선이 있어야만 당연하니
他人向我求 다른 이가 나를 보고 신선으로 여겨 주리
14) 고이순(高而順), 양응우(楊應遇) 두 사문(斯文)의 운에 차하다. / 최립(崔岦 1539-1612)
二公詩合付玲瓏 두 분의 시는 영롱에게 주어야 마땅하겠소만
紅袖應經拂檻空 붉은 소매도 난간을 스치고 지나면 그저 그뿐
不用居僧煩刻畫 번거롭게 스님 손 빌려 새기고 그릴 게 있으리까
朱絃流水顧瞻中 돌아보면 붉은 현 줄 흐르는 물이 있는 것을
[주1] 고이순(高而順) : 이순은 고경명(高敬命)의 자이다.
[주2] 양응우(楊應遇) : 응우는 양사기(楊士奇)의 자이다.
[주3] 두 분의 …… 마땅하겠소만 : 무상한 세월 속에 빨리도 늙어 가는 것을 탄식한 시라는 말이다. 영롱은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나오는 기녀(妓女) 상영롱(商玲瓏)을 가리키는데, 상영롱에게 준 〈취가(醉歌)〉라는 시에 “허리의 붉은 자사(刺史) 인끈 언제까지나 찰 수 없고, 거울 속의 홍안 역시 벌써 빛을 잃었도다. 영롱이여 영롱이여 이 늙음을 어찌하노, 내 노래 끝나거든 네가 또 노래를 불러 다오.[腰間紅綬繫未穩 鏡裏朱顔看已失 玲瓏玲瓏奈老何 使君歌了汝更歌]”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4] 붉은 소매 : 미인의 옷자락, 즉 기녀(妓女)를 비유한 말이다.
[주5] 돌아보면 …… 것을 : 간이 자신처럼 두 사람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이가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잘 연주하였는데, 그가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를 하면[志在流水], 그의 지음(知音)인 종자기(鍾子期)가 듣고는 “멋지다, 거문고 솜씨여. 호호탕탕 유수와 같구나.[蕩蕩乎若流水]”라고 알아주었다는 고사가 있다.
15) 동헌(東軒)의 운에 차하여 경시관(京試官)을 송별하다. 2수(二首) / 최립(崔岦 1539-1612)
搖落誰知宋玉秋 요락이라 송옥의 가을 그 누가 알까
月明同醉庾公樓 함께 취한 달 밝은 밤 유공의 다락이라
只應來日堪惆悵 다만 내일 허전해질 이 마음을 어찌할꼬
君向雲衢我海頭 나는야 해변가로 그대는 대궐로 떠날 테니
重見江南橘柚秋 강남 땅 귤과 유자 두 번째 익는 가을
嶺雲遮障望京樓 산봉우리 구름 막혀 망경루도 못 보았네
離筵欲作思歸曲 이별 자리 사귀곡을 지어 볼까 하였더니
一唱佳人定白頭 가인의 한 곡조가 바로 백두음(白頭吟)이로세
[주1] 요락(搖落) : 전국 시대 초(楚)나라 송옥(宋玉)의 〈구변(九辯)〉에 “슬프다 가을 기운이여, 쓸쓸하게 초목은 지고 쇠한 모습으로 바뀌었네.[悲哉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搖落而變衰]”라는 명구(名句)가 나온다.
[주2] 함께 …… 다락이라 : 진(晉)나라 유량(庾亮)이 무창(武昌)을 다스릴 때에, 어느 달 밝은 밤 부하 관원들이 남루(南樓)에서 베푼 주연(酒宴)에 함께 참석하여 격의 없이 유쾌하게 노닐었던 고사가 있다.
[주3] 백두음(白頭吟) : 버림받은 여인이 이별을 슬퍼하며 부르는 노래로, 보통 헤어지는 섭섭한 감정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한(漢)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무릉(茂陵) 땅의 여자를 첩으로 맞이하려 하자, 그의 아내인 탁문군(卓文君)이 〈백두음〉을 지어서 결별(訣別)의 뜻을 드러내니, 상여가 그만 취소하고 말았다는 고사가 있다.
<경남 진주시(晉州市) ‘길손의 소회‘ 한시(漢詩)편 4.> 총13편 中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진주목(晉州牧)편에 의하면, 진주목은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거타(居?)라고도 한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빼앗아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은 거타주를 분할하여서 진주총관(晉州摠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은 강주(康州)라 고쳤다.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정주(菁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는 또 강주라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는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에 진주라 고쳐서 절도사를 설치하고, 정해군(定海軍)이라 칭하며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이 안무사(安撫使)로 고쳤고, 뒤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진양 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시켰는데, 태종(太宗)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목으로 만들었다. 세조조(世祖朝)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16) 진주 제영[晉州題詠] 여지승람에서(出輿地勝覽) / 하연(河演 1376~1453)
文武英材生樂土 문무의 영재(英材)는 낙토에서 나고
山川淑氣藹名城 산천 맑은 기운은 이름난 성에 가득하다.
又
百里桑麻深雨露 백리의 상마(桑麻)는 우로처럼 깊은데
一區山水老雲煙 한 구역 산수의 구름과 연기에서 늙을꼬.
17) 진주로 가는 길에 운을 뽑아서[晉州行路拈韻] / 오횡묵(吳
宖默 1834~?)
潦雨新晴客路長 큰비가 계속 내리다 날이 개여 나그네 길이 멀기만 한데
搖搖征旆又何方 관리의 깃발 또한 어느 방향으로 펄럭이느냐?
禾穗發生鷄頸引 벼 이삭이 피어나니 닭의 목을 매어 놓았고
蕎花輸八蜜脾香 메밀꽃이 밀비(蜜脾)의 향기를 팔방으로 보내네.
渾似烟蔬初展綠 아리따운 나물이 온통 푸르름 막 물드는데
未經霜柚早懸黃 서리 맞은 유자가 벌써 누렇게 열려 있어 지나치지 못했네.
借問磯頭垂釣子 묻노니 물가에 낚싯대 드리운 이 누구인가?
較看於我孰閒忙 나와 서로 비교해 누가 더 한가하고 바쁠까?
18) 진주 와룡동에서 숙박하며[宿晉州臥龍洞] / 정재규(鄭載圭 1843∼1911)
地名不偶號南陽 지명이 우연치 않게 남양으로 불리는데
云是神龍臥此岡 여기 산등성이에 신령스런 용이 누워 있다 말하네.
不作雲䨓淸海宇 깨끗한 바다 안쪽에 구름과 우레 만들지 않으니
空留明月滿池塘 텅 빈 하늘의 밝은 달빛만 못에 가득하다.
衣裳半染烟霞濕 의복에 안개와 노을이 젖어 반쯤 물들고
魂夢初凝水石蒼 꿈결인 듯, 예부터 엉겨 붙은 수석(水石) 또한 푸르네.
借宿雲窓懷古昔 하룻밤 묵은 집 창가에서 옛일을 회고하다가
潭亭題起意何長 연못가 정자에서 글을 쓰니 의미심장하구려.
19) 진주역에서 출발하며[發晉州驛] / 초려(草廬) 김상수(金相壽 1875~1945)
此是東遊發軔初 여기에서 동쪽 지방을 향해 처음 출발하여
跨山超水不虛徐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바삐 움직였다.
休言處處多佳景 곳곳에 아름다운 경치 많다고 말하지 않고
花外亶宜度小車 꽃 밖에서 도타운 작은 수레로 편히 지나갔다네.
20) 진주의 모정에서 담수의 운에 차하다[晉州茅亭 次淡叟] / 김종직(金宗直 1431~1492)
茆簷頗幽靜 띠 처마가 자못 그윽하고 고요하니
疑是野人居 아마도 야인의 처소인가 싶구나
潦縮汀洲吐 물이 줄으니 모래 섬이 나오고
秋深橘柚踈 가을 깊으니 귤과 유자가 성기어라
嘈嘈絃上舌 떠들썩한 것은 거문고의 소리요
瀲瀲甕頭蛆 넘치는 것은 항아리의 술 기름일세
勝地仍淸賞 좋은 경치에서 맑은 감상을 하니
眞堪老仲舒 참으로 늙은 동중서가 되는 것 같네
21) 진주목의 담수가 단계에서 대부인의 수연을 열다[晉州牧淡叟 壽大夫人於丹溪] 8월18일 / 김종직(金宗直 1431~1492)
一曲丹溪闢綵庭 한 굽이 단계에 채의의 마당을 열어라
年年閭里慶長生 해마다 온 마을에 경사가 길이 생기누나
祥迎初度桃應熟 상서는 생일을 맞아 천도가 응당 익었겠고
節過中秋月更明 절서는 중추를 지나 달이 다시 밝구려
舞罷紫袍輝玉斝 춤 끝낸 붉은 도포는 옥술잔에 빛나고
笑餘錦帨拂緹屛 웃음 끝에 비단 수건은 붉은 병풍 떨치누나
病夫却作籠中鳥 병든 나는 문득 우리에 갇힌 새와 같아서
恨未升堂拜壽星 당에 올라 남극노인 배알 못한 게 한스럽네
22) 이배되어 진주에서 길을 잃고[移配時 在晉州失路作] (四首) 날이 저물어 허탁의 집에 투숙하였다(日暮 投宿許鐸家) / 김구(金絿 1488∼1534)
失路東西夜已分 길을 잃어 사방을 분간하기 어렵고 밤은 이미 깊었는데
衝泥冒雨怯離群 흙탕길 무릅쓰고 걷는 길 혼자되니 두렵구나.
橫馳山腹眞堪畫 산을 가로지르니 마음 진실로 감당키 어렵고
深入松門喚不聞 소나무 숲으로 깊이 드니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네.
暮年春意雨如酥 저무는 한해 봄기운 있으니 비에 미끄러지는 듯하고
半壁殘燈客夢孤 벽을 비추는 깜박이는 등불에 나그네 꿈만 외롭네.
寄語平生應自許 평생을 돌이켜 응당 나 스스로는 떳떳하지만
男兒萬里任窮途 사내는 만 리 먼 궁벽한 길로 임하는구나.
半夜村扉費敲推 한밤에 마을 사립문을 애써 두드리는데
主人靑眼不相猜 주인이 반갑게 맞아주니 의심할 바 아니네.
避堂具燭誠非望 촛불 밝혀 손님을 반기리라 기대 한 건 아닌데
珍重雅鬟白玉杯 곱게 쪽진 처자가 백옥 술잔을 올린다.
失路終何有 길을 잃은 이가 또 뭐가 필요하리오.
艱危意更眞 어렵고 위험할 때 뜻이 더욱 참되도다.
諸生事業在 여러 선비의 사업이 여기 있으니
斯世共酸辛 이 세상 삶의 어려움을 함께 한다네.
32세의 젊은 나이로 혼탁한 사회를 개혁하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 자암은 수구세력의 반발에 부딪쳐 조광조는 죽고 나머지 동지들도 죽거나 귀양지로 쫓겨났다. 자암은 유배지 개령에서 남해로 가던 중에 길을 잃고 헤매다 허탁의 집에서 따뜻한 대접을 받게 된다. 장악원의 악정 벼슬을 하던 자암은 슬픔에 겨워 애절한 목소리로 하염없이 칠언 절구 3수와 오언절구 한 수를 노래한다.
23) 진주 산수도(晉州山水圖) / 정여령(鄭與齡) 고려 인종 때 무신.
數點靑山枕碧湖 두어 점 청산이 푸른 호수를 베개했구나
公言此是晉陽圖 공이 이르기를 이것이 진양의 그림이라네
水邊草屋知多少 물가에 초가집 얼마인가
中有吾廬畫也無 그중에 내 집도 있으련만 그려졌는지
[주] 작자가 진주(晉州) 사람인데, 이지저(李之氐)의 집에 갔더니 마침 주인이 진주 산수도(晉州山水圖)를 내보이며, “진주는 자네의 고향이니 시(詩) 한 수를 쓰라.” 하므로 즉석에서 부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