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상인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해 기업으로 성장한 가문이 드물었는데, 기업 가문으로 성공한 대표 사례가 박승직과 그 후손의 기업이다.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에 의하면 “1905년경 니시하라 류조가 박승직, 최인성, 김원식, 최경서와 함께 일본으로부터 면사·포를 직접 수입, 매매하기 위하여 조합을 만들었다. 조합원 30~40명이 자본금 2만200원을 출자해 합명회사 공익사를 설립했다. ”일본인 니시하라는 공익사의 전무, 박승직은 사랑으로 취임하였다.
박승직은 1864년 경기도 광주군 소작농의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서당에서 10여년간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1881년 지주 민영완이 전라도 해남군수로 부임하면서 평소 인물됨을 보아온 박승직을 데리고 갔다.
1936년 1월 10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박승직은 “1882년에 처음 면포업을 시작해 전라도 영암, 무안, 강진 등지로 주로 무명을 사러 다녔다... 그렇게 헐한 무명을 한 번 무역에 30필 가량 해다가 그것을 서울에 가져다 팔기를 십여년 했다. 그 후 육의전 제도가 폐지되고 모든 장사가 자유롭게 되던 해에 공익사를 설립했다”
박승직의 자선전인 ‘심야중자필(深夜中自筆)’(1920)에 의하면, 행상업을 해 번 돈 3000냥을 맏형 박승원에게 보내 포목상을 했다.
박승직의 ‘종로 4정목 점포의 역사일기’(1936년경)를 보면 1896년 6월에 포목을 열었다. 포목점이 있던 종로 4가는 조선시대 지명으로는 이현(梨峴 ·배오개)이었다. 18세기에 이현은 칠패, 종루와 더불어 ‘도성 3대시’라 불렸다.
1930년대 박승직 상점과 박승직
‘신용 본위’를 기치로 내건 박승직상점은 성장을 거듭, 박승직은 동대문·종로 일대에서 ‘배오개의 거상’으로 불렸다. 박승직은 개항 후 기계로 값싸게 대량생산된 수입 면사·포를 취급하면서 공익사 설립에 참여하였다.
박승직 상점은 각지에 지점을 설치해 판매망을 넓혔다. 치급 품목도 다양해 1915년에 사용하던 ‘무역상 박승직상점’봉투에 쓰인 문구를 보면, 주단·포목 이외에 방적사·곡물·염료·솥 등을 취급하였고 도량형기의 위탁판매를 하기도 했다.
박승직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관직과도 인연을 맺었다. 1900년 성진 감리서 주사, 1906년에는 중추원 의관에 선임됐다. 한성상업회의소 상임의원(1906~1911)으로 상인의 권익 옹호에도 힘썼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여 70여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박승직상점은 1915년 ‘박가분’이란 여성용 화장품을 제조, 판매해 큰 인기를 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불황기에 박승직상점은 자본금 6만원의 주식회사로 변모하였다. 박승직은 1933년 소화기린 맥주주식회사의 주주가 되었다.
해방 후 소화기린맥주회사 관리 지배인이 된 박승직의 장남 박두병은 상호를 동양맥주주식회사로, 상표는 OB로 바꿨다. 박두병은 1948년 동양맥주의 사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두산상회라는 간판을 걸고 무역업을 시작하였다.
[이헌창 고려대교수 / 경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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