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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잠언 제10강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말씀 / 잠언 20:1-22:16
요절 / 잠언 21: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오늘 말씀은 인간의 마음을 마치 엑스레이 찍듯 정확하게 진단하고 방향을 제시하시는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마음에 있는 것을 감찰하시고 다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환하게 다 들여다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통해 때로는 위로를 얻게 됩니다. 남들은 다 몰라줘도 우리 하나님은 나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의 연약함과 죄악 됨도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다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요?
20장 5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마음에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여기 ‘모략’은 ‘마음의 의도, 계획, 방책, 꾀’ 이런 의미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마음속에 무슨 모략이 있는지 쉽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명철한 사람은 그 모략을 길러냅니다. 다른 사람 속에 있는 깊은 의도를 파악해 내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을 보면, 두 여인이 솔로몬 왕에게 나아와 한 아들을 놓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둘 중 한 명은 분명 거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위를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명철로 친모가 누구인지 가려냅니다. 아이를 칼로 반으로 잘라 나누어주라고 판결하자, 친모는 친 자식을 향한 애타는 마음에 그냥 아이를 상대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명철로 두 여인의 마음을 감찰해 낸 것입니다. 두 여인의 마음의 모략을 잘 길러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어 각 사람 속마음의 깊은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섬세하게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과거가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어느 누구도 상종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물 좀 달라’ 말씀하심으로 여인의 마음 문을 여시고 여인 속마음에 있는 깊은 목마름을 파악해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과 영생의 샘물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여인은 진정한 경배의 대상이자, 영생수인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내면의 목마름이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왜 인생 속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성경 공부를 통해 우리 속마음을 깊은 곳에서부터 길러내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속마음을 이해하시고 상처 난 내면을 치료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의 내면 상태가 어떤지 간파하시고 각 사람에 맞는 해결책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내면을 깊이 파악하시고 길러내시는 지혜와 모략의 주님이십니다.
20장 6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어떤 일을 겪더라도 내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랑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난 많은 연인들, 돌싱들이 얼마 후 헤어집니다. 정말로 충성스러운 사람, 정말로 신실한 사람, 참으로 믿을만한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만큼 부패하여 간사하고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10절을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남과 비교해서 그래도 나 정도면 인자하고 성실하고 사랑이 많지, 나만큼 충성하는 사람도 없지, 나만큼 믿을만한 사람도 없지, 이러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심장을 살피고 폐부까지 시험해 보면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20장 9절도 보십시오.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 ‘나의 마음은 깨끗하다, 나는 죄를 말끔히 씻어냈다’라고 감히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성실과 의와 도덕의 한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의 보배 피로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의 거짓되고 이기적인 마음을 주님께 들고 나아가 회개하면 주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말갛게 씻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정결하게 되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20장 10절을 보십시오.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저울추와 되는 한결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부당한 이득을 얻기 위해 추와 되를 조작합니다. 편법, 불법을 쓰면 쉽사리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다 보고 계시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 드러내십니다.
20장 14절도 보십시오. “물건을 사는 자가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 사람들이 물건을 살 때는 싸게 사기 위해 “상품의 질이 별로 안 좋네. 너무 비싸. 다른 가게에서는 더 싸게 파는데” 이렇게 둘러대며 협상합니다. 그렇게 주인을 압박해서 싸게 사 가지고 집에 가서는 표정이 싹 바뀝니다. 잘 샀다고 자랑질합니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되로 속여 물건을 파는 사람이나 이기적인 마음에 거짓말로 압박해 물건을 사는 사람이나 다 진실하지 않습니다. 서로 속고 속이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네 세상살이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장 17절을 보십시오.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남을 속여 많은 재물을 얻을 때는 기분이 좋아 살맛이 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오히려 봉변당하기도 합니다. 고위공직자들, 장관들을 임명하기 전에 하는 인사청문회를 보면, 부정한 방법으로, 편법, 불법으로 얻은 재산이 문제가 되어 큰 수치를 당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속여서 얻은 음식물은 순간 달콤하고 행복감을 주는 것 같지만, 결국 입에 가득한 모래처럼 큰 걸림돌이 됩니다. 21장 6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속임수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순간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속이는 것은 눈 깜짝하고 넘어가면 될 것처럼 보이지만, 순간이고 잠깐일 순 있겠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합니다.
20장 21절도 보십시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여기 ‘속히 잡은 산업’은 ‘서둘러, 재촉하여, 탐욕 가운데 받은 유산’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아버지를 압박하여 유산을 받아냈습니다. 빨리 유산을 얻은 둘째 아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고 크게 흉년이 들자, 비로소 궁핍하게 되어 돼지치기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속히 잡은 산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하고 망가진 그의 인생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며 뜨겁게 영접하시는 아버지의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복은 처음에 속히 산업을 잡는데 있지 않습니다. 나의 인생을 선한 길로 완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영접하고 붙잡는 데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서두르고 빨리빨리 재촉해서 욕심껏 받아내는 것이 참 지혜로워 보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더 주목받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혜로워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빨리 갑부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가기에 사람들은 이런 자들을 부러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21장 4절은 말씀합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교만하고 악해도 형통한 것처럼 보이고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관점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형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다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20장 26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 평소에는 악인들이 형통한 것처럼 보이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심판의 키질을 하시면 쭉정이는 다 날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타작하는 바퀴를 굴리시기 시작하시면 악인들은 다 짓이겨지고 말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20장 27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하나님은 진리의 등불을 켜셔서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다 비추십니다. 그때 우리 본모습이, 우리 속마음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두렵습니다. 우리 깊은 속을 살피시고 훤히 들춰보시고 감찰하시고 선악 간에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두려워해야겠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겨야겠습니다. 전도서 맨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모든 행위와 생각, 모든 은밀한 일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1장 1절을 보십시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얼핏 보면, 왕이 자기 맘대로 모든 일들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왕의 권세가 매우 막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왕의 마음조차도 사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모든 역사와 모든 인생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들의 주관자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다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21장 2절을 읽겠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우리는 나 자신을 기준 삼아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잣대로 기준 삼아 살아가기 쉽습니다. 세상 사람 대부분이 그러면 나도 그렇게 살아가기 쉽습니다. 또 겉으로 드러난 것들만 가지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하나님은 결코 만만하신 분이 아니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시고 때로는 소름 끼칠 정도로 분명하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이 대목을 영어 성경에서는 “The Lord weighs the heart”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마음을 저울에 달아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매우 정확합니다. 무게가 나가지 않아서 함량 미달이면 하나님은 반드시 상응한 징계 조치를 하십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귀족 천 명을 초청해 큰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렇게 해서 각 지방의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자신의 권세를 온 천하에 과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 온 은과 금으로 만들어진 그릇들에다 술을 부어 마셨습니다. 이때 갑자기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씨를 씁니다(단5:24,25,27).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여기 ‘데겔’은 ‘무게를 달아보니 함량 미달’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의 바벨론 제국 왕의 마음까지도 감찰하셔서 무게를 달아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적, 도덕적 무게가 한참 미달이었기 때문에 가차 없이 심판하셨습니다. 그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하고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멸망해 메대 사람 다리오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단5:30.31). 이 얼마나 두려운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가볍게 쉽게 여김을 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21장 12절을 보십시오.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의인에게는 복을 주시지만,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에게는 환난에 내던지십니다. 오늘날에도 겉보기에는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세상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심판의 저울에 올려놓고 심사숙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마음먹으면 순식간에 키질하시고 심판의 맷돌로 갈아 짓이겨버리십니다.
21장 30,31절을 보십시오.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로도, 명철로도, 그 어떤 지략으로도 감히 하나님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하나님의 명철을, 하나님의 지략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이김과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우리는 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숱한 고난과 역경을 만났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며 수많은 교회들을 세울 수 있었던 데는 어떤 신앙 자세를 가졌기 때문일까요? 그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의지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3,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떤 속임수나 야심 때문에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 주님을 사랑하고 양무리들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섬겼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기뻐 받으시고 철저하게 지켜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신령한 능력과 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또 바울이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깊이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바울의 순수한 심정과 열정을 보시고, 친히 양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20장 6절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충성되고 신실한 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시대에, 우리가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서 살면, 충성된 사람, 신실한 사람, 한결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충성되고 신실하고 한결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희귀한 시대를 탄식하시며 이와 같은 사람을 간절히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새겨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고 신실하고 한결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2장 6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자녀들에게도 어려서부터 마땅히 행할 신앙의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도록 돕고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신앙이 자녀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우리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견고한 망대가 되셔서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울로 달아보실 때 ‘함량 미달’이진 않을까요? 거짓과 위선과 탐욕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실까요? 우리가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속마음을 훤히 다 아시는 주님, 나의 모든 상황과 형편을 다 아시는 주님 앞에서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지혜와 명철과 능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시대의 죄악과 싸우며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므로 하나님의 진정한 기쁨이 되는 존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