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을 생명처럼 : 공자-자공 (孔子-子貢)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2. 31. 12:10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겸손을 생명처럼 : 공자-자공 (孔子-子貢)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재아(宰我)와 더불어 언어에 뛰어났다고 한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사람. 성은 단목(端木)이고, 이름은 사(賜)며, 자가 자공이다.
이재가(理財家)로서도 알려져 수천 금(金)의 재산을 모았다.
자공(子貢)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BC 520 ? ~ BC 456 ?(64)
子貢曰 자공왈
君子一言以爲知 一言以爲不知 言不可不愼 군자일언이위지일언이위부지 언불가불신
也 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 夫 야 부자지부가급야 유천지불가계이승야
子之得邦家者 所謂立之斯立 道之斯行 綏之 자지득방가자 소위립지사립 도지사행 수지
斯來 動之斯和 其生也榮 其死也哀 如之何其 可及也
사래 동지사화 기생야영 기사야애 여지하기 가급야
자공(子貢)이 말했다.
"군자는 한 마디 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한 마디 말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말은 마땅히 삼가야 한다.
내가 선생님(공자)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은
마치 층계를 밟고 하늘을 올라갈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선생님께서 제후국이나 대부의 집안을 다스린다면
마땅히 서야 할 곳에 자리 잡게 하고, 바른 길로 이끌어 나아가게 하고,
모두 편안함을 누리게 하고, 화목하게 하실 것이다.
나는 그 분이 살아계시면 영광으로 여길 것이고 돌아가시면 슬퍼할 것이다.
어찌 내가 감히 선생님에게 미칠 수 있겠는가?"
『논어(論語)』 「자장(子張)」편
언변과 외교술이 뛰어난 자공(子貢)
자공(子貢)은 재아(宰我)와 함께 공자가 뛰어난 언변(言辯)을 지녔다고 평가한 제자이다. 그는 언변(言辯)뿐만 아니라 외교술(外交術)에도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공(子貢)의 언변과 외교술은 제(齊)나라의 위협으로부터 노(魯)나라를 구하고,
춘추시대 말기 각 제후국의 세력 판도를 뒤흔들어 놓을 만큼 출중했다.
춘추시대 말기의 정치-외교 현장에서 자공(子貢)이 보여준 뛰어난 언변과 외교술은
『사기(史記)』 「중니제자 열전(仲尼弟子 列傳)」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와 이웃한 제(齊)나라의 대부(大夫) 전상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제(齊)나라의 권문세족인 고씨(高氏)·국씨(國氏)·포씨(鮑氏)·안씨(顔氏)의 세력이 두려워 나서지 못했다. 그래서 먼저 군대를 합쳐 노(魯)나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노나라는 조상의 무덤이 있는 우리의 조국이다.
나라가 이처럼 위태로운데, 어찌하여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가?"라고 했다. 이 말에 자로(子路)가 나서겠다고 했으나, 공자는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자장(子張)과 자석(子石)이 나섰지만, 공자는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자공(子貢 : 단목사)이 나서자, 공자는 비로소 허락했다.
- 『사기(史記)』 「중니제자 열전(仲尼弟子 列傳)」
제자들의 장·단점을 꿰뚫고 있는 공자가 보기에, 자로(子路)와 자장(子張), 자석(子石)은 조국인 노(魯)나라의 위기를 구하기에 부족한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공자가 보기에, 자공(子貢)은 '부자(富者)이지만 교만하지 않고, 옛것을 모두 깨우쳐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 -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이었다.
자공(子貢)은 공자(孔子)에게 충분한 신뢰를 보여준 제자였다.
그래서 공자는 흔쾌히 자공(子貢)에게 대업(大業)을 맡겼던 것이다.
노(魯)나라를 떠난 자공(子貢)은 제(齊)나라로 가서 전상을 만나 설득한 후, 오나라 → 월나라 → 오나라 → 진(晋)나라를 차례대로 돌면서 제후(諸侯)들에게 유세해 노(魯)나라를 전쟁의 위기로부터 구해냈다.
자공(子貢)이 노(魯)나라로 돌아온 후, 각 제후국의 형세는 자공(子貢)의 구상과 예측대로 돌아갔다.
……
자공은 진(晋)나라를 떠나 노(魯)나라로 돌아왔다.
오(吳)나라 왕은 과연 제(齊)나라와 애릉(艾陵)에서 싸워 크게 승리했다.
오나라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진(晋)나라로 진격해 들어가 황지(黃池)에서 진(晋)나라 군대와 맞부딪쳤다.
이 싸움에서는 진(晋)나라의 군대가 크게 승리했다.
월(越)나라 왕은 오나라가 진나라에 크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는 즉시 강을 건너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월나라의 군대는 오나라의 도성 밖 7리까지 접근했다.
오나라 왕은 월나라의 침략 소식을 듣고 급히 진나라와의 싸움을 중단하고 돌아와 오호(五湖)에서 월나라와 세 번 싸웠으나 모두 패배하고 결국 도성까지 빼앗겼다.
월나라 군대는 오나라 궁궐을 포위한 후, 오나라의 왕 부차를 죽이고 재상 백비의 목을 베었다. 월나라는 오나라를 점령한 3년 후, 제후들의 우두머리인 패자(覇者)가 되었다.
이처럼 자공(子貢)이 한 번 나서자, 노(魯)나라는 위기에서 벗어나고 제(齊)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또 오나라는 멸망하고 진(晋)나라는 강국이 되었으며 월나라는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자공(子貢)이 사신(使臣)이 되어 여러 나라를 찾아다닌 후, 10년 동안 노나라·제나라·오나라·진(晋)나라·월나라 등 다섯 나라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 『사기(史記)』 「중니제자 열전(仲尼弟子 列傳)」
자공(子貢)의 원칙 : 스승의 가르침과 뜻을 온전하게 지킨다.
자공(子貢)은 부(富)와 권세(權勢) 모두 스승인 공자를 능가했다.
그는 탁월한 사업 수완이 있어서 노(魯)나라에서는 거부(巨富)로 통했다.
또한 뛰어난 언변과 외교술, 정치 능력으로 노(魯)나라의 조정에서는 공자보다 자공(子貢)을 더 높게 평가했다.
실제 스승인 공자(孔子)는 사구(司寇)라는 벼슬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으나, 자공(子貢)은 재상이 되었다.
당시 노(魯)나라 벼슬아치들은 "자공(子貢)이 공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했다.
대개 사람들은 스승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을 들으면, 아마 우쭐해서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뽐내고 다닐 것이다. 그러나 자공(子貢)은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스승인 공자의 '학문과 덕'이 너무 높아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라면서, 자신은 도저히 스승의 경지에 이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
노(魯)나라 조정에서 숙손무숙(叔孫武叔)이 다른 대부(大夫)들에게 "자공(子貢)이 중니(仲尼 : 공자)보다 더 현명하다"고 말했다.
자복경백(子服景伯)이 이 말을 자공(子貢)에게 전하자, 자공은 말했다.
"궁궐의 담장에 비교하자면, 내 담장은 어깨 정도의 높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궁궐 안의 방과 집안의 아름다운 것들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공자)의 담장은 몇 길이나 되는 높이여서 도저히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문(門)을 찾아서 들어가 보지 않으면 집안의 아름다운 것과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문(門)을 찾아 들어가서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숙손무숙(叔孫武叔)이 또 공자를 헐뜯자, 자공(子貢)이 말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중니(仲尼 : 공자)는 비난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현명함은 언덕이나 구릉과 같아 넘을 수 있지만, 중니(仲尼)는 해와 달과 같기 때문에 도저히 넘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해와 달과 인연을 끊으려 해도 해와 달을 손상시킬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지각이 없다는 것을 드러낼 뿐입니다."
진자금(陳子禽)이 자공에게 말했다.
"선생께서 공손한 것입니다. 중니(仲尼 : 공자)가 어떻게 선생보다 현명하겠습니까?"
이에 자공이 말했다.
"군자는 한 마디 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한 마디 말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말은 마땅히 삼가야 한다.
내가 선생님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은 마치 층계를 밟고 하늘을 올라갈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선생님께서 제후국(諸侯國)이나 대부(大夫)의 집안을 다스린다면 마땅히 서야 할 곳에 자리 잡게 하고, 바른 길로 이끌어 나아가게 하고, 모두 편안함을 누리게 하고, 화목하게 하실 것이다.
나는 그 분이 살아계시면 영광으로 여길 것이고 돌아가시면 슬퍼할 것이다.
어찌 내가 감히 선생님에게 미칠 수 있겠는가!"
- 『논어(論語)』 「자장(子張)」편
자공(子貢)은 자신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도 우쭐대지 않고, 오히려 스승의 훌륭한 가르침과 뜻을 온전히 이해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스승의 가르침과 뜻을 충실히 지키려고 했는지는 공자가 사망한 후 6년 동안이나 상복(喪服)을 입고 시묘살이를 한 것만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죽은 스승을 그토록 극진히 모신 사람이 살아 있는 스승을 얼마나 정성껏 모셨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
옛날 공자께서 돌아가신 후, 그 제자들은 3년 상(喪)을 마치고 각자 짐을 정리해 집으로 돌아가려고 자공(子貢)에게 가서 작별 인사를 나누며 서로 마주보고 통곡했습니다.
모두 목이 쉰 다음에야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자공(子貢)은 다시 공자의 무덤으로 돌아가 제단이 있는 곳에 집을 짓고 홀로 3년을 더 거처한 후에 돌아갔습니다.
-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편
자공은 유가(儒家)의 상례(喪禮)에서 정한 3년 상(喪)도 모자라 3년을 더 연장해 공자의 묘를 지켰다.
상례(喪禮)는 공자의 가르침에서도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예절(禮節)이다.
따라서 3년을 더 연장해 6년 상(喪)을 치렀다는 것은 공자가 사망한 후에도, 자공(子貢)이 스승의 가르침과 뜻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출처] 8. 겸손을 생명처럼 : 공자-자공 (孔子-子貢)|작성자 조아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