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소 글이 깁니다만, 읽어 보실 분은 참조바랍니다.
http://www.bc8937.pe.ne.kr/WEFH67489SDFffgtr/read.cgi?board=eofbrrhfu&y_number=353
강화의 왕릉
고증 1. 고려 서울, 개경[開京]
1)명사[明史], 권320. 외국전[外國傳], 외국[外國]1, 조선[朝鮮]
[원문]
후당시왕건대고씨겸병.신라백제지도[後唐時王建代高氏兼倂新羅百濟地徒]
거송악왈동경이이평양위서경[居松嶽曰東京而以平壤爲西京]
후당때 왕건이 고씨 [고구려를 얕잡아 표현하여 고씨라 표현했을 수도 있음]
대신 일어나 신라,백제땅과 백성을 겸하여 병합하고 송악에 도읍했는데
송악은 동경이며 평양성인 동시에 서경이다.
--원문--
기국북린글안서즉여직남왈일본
[其國北隣契丹 西卽女直 南曰日本]
원지원중서경내속치동녕로총관부진자령위계
[元 至元中 西京內屬置 東寧路總管府盡慈嶺爲界]
...이하생략
[해석] 그나라 북은 글안과 인접하고 서는 여직[=여진], 남은 일본이다.
원나라 지원[연호;AD1264-1294]중에 서경내 진자령을 경계로 하는
동녕로 총관부를 두었다.
위 큰 글자로 강조한 바와 같이 松嶽=東京=平壤城=西京이라고 明史에 분명히 써있다.
독자들이 이제까지 배운 반도=식민사관으로는 서경이 평양인 줄은 알겠지만 서경이 웬
송악이냐고 할것이라. 아래 설명으로 독자들의 머리 속을 정정하려 한다.
우선 기준이 되는 송악[松嶽]은 [서경이든 평양이든] 불변이므로 고정시켜 놓고
다른 것을 조사해 보면 이렇다.
이 글의 바로 위 고증1. 高麗史節要 첫머리 기록에서 설명하였듯이 송악은 처음에 사천성 成都인
한주[漢州]였다가 서경인 西安에서 고려 건국하면서 송악도 같이 옮겨졌던 것.
그리고 대륙 역사의 인식 속에 뿌리 박힌, 그리고 대륙 문명의 정신적이고
실제 생활에서의 기준이 되는 종주국인 고조선과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던 곳이기 때문에
평양성이라고 병記했던 것.
--이 설명으로 평양이 송악이 되는 이유를 독자 여러분들은 이해하였을까?!-
이 이후로 고려 서울이 송악=西安=평양=당나라의 서울 장안성이라는 고증을 계속하니
독자 여러분들은 신경써 봐주시기를.....
그런데 동경은 위 글에서 어떻게 나온 글일까?
이 글의 제3부 혁명적 역사관과 역사적 사실에서 밝혔듯이
최초의 요동,서 구분의 개념은 白山=天山이 기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春秋,戰國時代에 요동,서의 기준이 당시 古朝鮮의 平壤城이었던
현재의 陝西城 西安이 되면서 먼저 기준인 白山=天山의 동쪽이라 東京이라고도 했다가,
점차 역사의 무대-대륙의 활동무대가 지나 대륙의 동해안쪽으로 옮겨지면서
상대적으로 대륙 동쪽에서 보아서 西쪽에 있다고해서 西京의 개념이 굳어진 것.
옛 사람들의 관습이 자연스럽게 동경이 서경으로 흘러진 것을 역사 연구해 보면
자연적 이해가 되어 동경이 서경이 되는 뒤죽 박죽이 되고,
어떤때는 서경은 서경이고 동경은 동경인 구분되는 때가 역사 연구상에
앞 뒤 문맥으로 보아 자연적으로 구분이 되며, 또한 옛사람도 그렇게 뒤죽 박죽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위 명나라 역사서에 나오는 동경이 서경이라는
글귀는 아예 안맞으니 한반도 개성이 송악이라고 우겨대니 이러한 숫법이
일제가 즐겨 써먹은 숫법이라....
--기국북린글안서즉여직남왈일본[其國北隣契丹 西卽女直 南曰日本]
이 문구만해도 고려는 도저히 한반도에 있을 위치가 안된다.
고려, 그 나라 북쪽은 글란과 인접해 붙어 있다는 데,
이제까지의 식민사관에서는 북쪽에 인접해서 붙어 있는 나라는 처음에 발해였고
,태조 8년 글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한 다음에는 여진이 그자리를 차지해,
고려 북쪽에 있는 나라는 여진이지 거란이 아니라고 배웠다.
그런데, 위 明史에서는 글란은 북쪽에 있고,
여진은 서쪽에 있다하니 이는 고려가 대륙 중앙부에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식민사관의 거짓이 들어 나는 데,
이 글 아래로 누누이 계속해서 고증으로서 대륙 고려를 입증한다.
2)수서 열전 동이고려[隋書 列傳 東夷 高麗]
[원문]
대장군개봉[大將軍 改封] 고려왕세견사 조공불절[高麗王歲遣使 租貢不節]
기국동서이천리[其國 東西 二千里] 도어평양성 역왈장안성[都於 平壤城 亦曰 長安城]
동서육리 수산거곡[東西六里 隨山居曲] 남임패수 복유국내성한성.병기[南臨浿水 復有國內城漢城竝其]
...이하생략
-[해석]
(수나라가)대장군을 고쳐 고려왕[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임]으로 봉하고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그 나라는 동서 2000리이고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역시 부르기를 장안성이라 한다.
산을 따라 굽이가 많고 남으로는 패수에 임하고
그[평양성]뒤에는 국내성, 한성이 나란히 있다.
[복유국내성한성병기 (復有國內城漢城竝其)] 혹 식민사관 자들은 말하기를
위의 남임패수[南臨浿水]란 글귀를 가지고 북한 평양성 남쪽에 있는 대동강으로 말하는데,
그 다음의 복유국내성한성,병기란 글귀에는 어름어름 만주의 심양으로 떼어다 붙이는 데,
심양으로 떼어다 붙여도 맞지 않는 것이 북한 평양성 뒤로 북쪽에 국내성만 있지,
한성은 그 반대편 남쪽=남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유국내성 한성병기 (復有國內城漢城竝其)라는
이 글귀의 뜻처럼 그 뒤에 국내성과
한성이 나란히 있다라는 점에서, 한반도에 맞춰봐야 도저히 맞지 않고
현재의 섬서성 서안에 맞춰보면 꼭 맞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찌하여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이런 글귀도 안보고 반도사관을 지어냈는지,
아니면 엉터리로 우기는데는 선수인지 도대체 모를 부류들이다.
3)북사 고구려전[北史 高句麗傳]
[원문]
도평양성 역왈 장안성[都平壤城 亦曰 長安城] 동육리[東六里]
수출거곡[隨出居曲] 남임패수성[南臨浿水城]
도읍은 평양성이며 역시 장안성이고 동쪽으로 6리. 굽이굽이 돌아 남쪽으로 패수성에 이른다.
4)원사[元史] 지리지[地理誌]264쪽
[원문]
동녕로본고구려평양성{東寧路 本 高句麗 平壤城]
역왈장안성[亦曰 長安城]
한멸조선치낙랑현토군[漢滅朝鮮置樂浪玄토群]
차낙랑지야.[此 樂浪之也] .
[해석]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 역시 장안성으로 불린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둔 낙랑, 현토군이며 지금의 낙랑땅이다.
---낙랑땅에 평양성=장안성이 있다는 확인<>---
기존식민=반도사관에서는 낙랑군, 현토군이 북한 대동강 유역에 있다고 하든지
아니면 요동, 서지역에 있다고 하는데, 원사지리지를 분명히 보고서도
흉물떠는 소리 아니면, 민족 반역행위를 서슴치 않는다는 소리인가?
진의희후[晉(;필자 註-東晉)義熙後] 기왕고련시거평양성[其王高璉始居平壤城]
당정고려발[唐征高麗拔] 평양기국동사재압록수동남천여리[平壤其國東徙在 押綠水 東南 千餘里]
비평양지구야[非平壤之舊也].
[해석]
진[필자주;동진]나라 의희[필자주;AD405-418]후에 그왕 [고구려왕]
고련이 평양에 산 것이 시작이다. 당나라가 고구려 정복한 후 평양은 그 나라 동쪽으로 이사갔는데,
압록강 동남 천여리 지점 , 평양이 아닌 옛땅으로
[필자 주; AD 660년 경, 평양성이었던 현재의 섬서성 서안에 도읍하고 있던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 밀려 1차 평양 동남 1000리=400km에 위치한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사실이 있음. 그후 만주로 쫓겨가 심양에서 멸망]
---- 古來로 우리민족이 툭하면 붙이는 강 이름이 鴨綠江, 浿水, 大洞江인데
이 압록강이 분명히 평양성= 장안성=현재의 섬서성 서안옆을 흐른다고 기록되 있는데도
지금의 한만국경인 압록강이라고 반도=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허구가 역사서 곳곳에 들어나는데,
이도 그중에 하나이다
왕건이평양위서경[王建以平壤爲西京]
원 지원[元 至元] 6년이연령최탄현원렬등이부주현진60성래귀
[六年 李延齡,崔坦,玄元烈等以 府州縣鎭 六十城來歸]
8년개서경위동녕부[八年 改西京爲東寧府]
13년승동녕로총관부설녹사할정주의주현중화현철화진
[十三年 升 東寧路總管府設錄事司 割靜州 義州縣 中 和縣 鐵化鎭]
[해석]
왕건이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했고,,이 글 또한 고구려의 평양성을 왕건이
서경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독자 여러분은 평양이 서경이 되는 이유를 알겠는 지
원[元]나라 지원[至元][AD1264-1294] 6년에 이연령,최탄,현원렬등이 주, 부,현,진
[州,府,縣,鎭] 60성[性]을 가지고 래귀[來歸][귀순또는 투항] 했다. 8년에는 서경을 동녕부로
했고, 13년에 승격시켜 동녕로총관부를 설치하여 녹사가 정주, 의주현 , 중화현, 철화진을
관할케 하다.
5) 원사[元史] 208권 외이전[外夷傳] 제95 고려[高麗]
[원문]
고려본기자소봉지지 [高麗本箕子所封之地] 부여별종[扶餘別種]
상거지기지[嘗居之其地](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말함)
고려는 본래 기자가 봉해졌던 땅이다.[고려는] 부여의 별종이다.
---중략---
기국도왈평양성즉한낙랑군[其國都曰平壤城 卽 漢 樂浪郡]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했는 데,즉 한나라의 낙랑군이다.
여기에서 종합해보면, 위 원사[元史] 지리지[地理誌]264쪽에서 평양성은
장안성이라 했고 또한 낙랑땅이라 했다
그리고 왕건이 평양을 서경으로 고쳐 불렀다고.
그리고 바로 위글에서도 평양은 낙랑이라는 기록.
여기에서 성립하는 등식은 낙랑=평양=장안성=서경=송악=동녕로(부).
그리고 바로 다음 글처럼
이 모두 압록강 옆에 있다.
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곳은 현재의 섬서성 서안이다.
수유출말갈지백산[水有出靺鞨之白山]--물줄기는 말갈의 땅 백산으로부터,
또는 백산=중안 아시아에 있는 천산으로부터 흘러 말갈의 땅을 지나오는데,
者號鴨綠江而平壤在[자호압록강이평양재]--(이 물줄기를)사람들은 부르기를 압록강,
압록강에 평양이 있다.
기동남기동남인시이위 험후벽지익광병 고신라백제고구려삼국위일
[其東南 其東南因恃以爲險後闢地益廣幷古新羅百濟高句麗三國爲一]
기주성고씨 자초입국지당건봉초이국수수공이래자손복봉
[其主姓 高氏 自初立國至唐乾封初而國o垂拱以來子孫復封]
--그 동남으로 흐름으로 인해 험한 곳을 굽이쳐 흐르는 뒤로 광대한 땅에
고구려,신라,백제가 하나같이 있다.
그 주인은 고씨.[대표적으로 고구려만 기록했음].
당 건봉[AD666-668]초,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도망다니며
그 자손들은 복권 꾀하며 자립하여 나라를 세웠다.
위 원문--水有出靺鞨之白山[수유출말갈지백산]
--물줄기는 말갈의 땅 백산으로부터,또는
백산=중앙아시아에 있는 천산으로부터 흘러 말갈의 땅을 지나오는데,
者號鴨綠江而平壤在[자호압록강이평양재]--(이 물줄기를)사람들은 부르기를 압록강,
압록강에 평양이있다.--이 글이 참으로 평양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어 강조한다.--
이하 원문 생략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백산=천산인데, 중앙아시아 천산으로부터 흘러오는 강이 압록강이고,
압록강이 험한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흘러가는 곳, 서안에서 낙양으로 흐르는 강을
압록강이라 불렀다는 글이다. 그리고 압록강이 험한 산길 돌아 나온 곳에 고구려,백제,
신라가 하나같이 있을 광대한 땅이 북한 압록강 안팎에는 누가 봐도 있지를 않는다.
또한 말갈과 압록강, 평양성이 같은 주위에 있지도 않는다.
또한 말갈과 압록강, 평양성이 같은 주위에 있지도 않으니
반도=식민사관의 말은 거짓임이 증명된다.
기지후초능자립지오대시대주 기국천도송악자성왕씨명건
[其地後稍能自立至五代時代主 其國遷都松嶽者 姓 王氏 名 建]
그 땅에 5대 시대에 대표 주인격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그 나라는 송악에 도읍하고 성은 왕,
이름은 건.
[필자,주[註];5대[代]와 같이 따라붙는 표현이 10국[國]이다.
이 5代 10國의 시대는 당과 신라가 멸망하는 시기의 대륙의 전란기로서
위의 元나라 史書 원문과 같이 高麗 太祖 王建은 혜성과 같이 나타나
혼란기에 우뚝선 대륙의 주인처럼 고려를 건국하고 500년간 천자국으로 군림하였다.
참조;5代;後梁 AD907-923, 後唐 AD923-926, 後晋 936-946, 後漢 947-950, 後周951-960, 10國;契安,福建
荊南,嶺南,湖南,吳越,희南,岐,蜀,양진인데 큰 5나라라는 五代도 길게는 17년,
짧게는 4년이었으니 모두 작은 제후국에 지나지 않았다. 뒤에 자세히 쓰겠지만
대륙전체를 차지한 나라가 高麗이고 대륙 동북부 한귀퉁이 [개봉에서 북경까지 지역]에 있던
나라가 宋나라라 도읍도 河南城 開封에서 도읍했다가 뒤에는 산서성 북쪽으로 옮겼고, 배보다
배꼽인 송나라를 더 크게 역사를 왜곡한 원흉들은 누구란 말인가?
아무튼 고려태조 왕건은 역대의 대륙 천자국이면서 선조였던 고구려가 차지하였던
평양성=장안성을 다시 확보=탈환하여 고구려를 잇는다는 고려답게 천자국을 세워
고구려도 하지못한 명실상부한 대륙=삼한을 통일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몽고가 침략해와 22대 고종 25년 12월에 몽고와 강화조약 맺은 후,
24대 원종 10년 12월
순안후[順安候]로 강등되어 몽고의 지배를 사실상 받게 되는 AD1270까지 340년간 대륙통일왕조로서
번창하였고 고려-코리아라는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시기가 이시기였으니,
겨우 한반도-극동에 쳐박혀서는 코리아라는 이름이 알려질 처지도 아닌 것이
당시 서구인들의 지리적 감각이었음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 알수 있으리라.
--기존의 반도=식민사관에서 고구려 잇는다는 고려가 겨우 영토 북방 한계선이 지금 북한의
압록강하구라는 데에는 겨우 그렇게냐는 의구심이 풀렸으리라.
이상의 글 요점은
①한나라때 설치한 낙랑군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평양성이고, 당나라 때는 장안성이고,
고려 태조 왕건이 물려받아 서경, 그리고 동녕부, 그리고 동녕로총관부로 했다는 말.
②물줄기가 말갈의 백산[중앙 아시아 천산산맥=천산]으로부터 흐르는데,
동남으로 흐른다는 글. 북한의 압록강은 분명 서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북한의 압록강이 중앙 아시아 천산에서부터 흐르지는 않는다.
③압록강이 흐르는 곳이 험한 곳이고 그 뒤로 광대한 땅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하나같이 있다는 글.
북한의 압록강이면 맞지 않는 것이 압록강 북쪽에 고구려,압록강 남쪽에
백제와 신라가 나뉘어져 있기 때문.
위와 같이 한 두 史書도 아니고 이구동성으로
①분명히 압록강에 평양성이 있고,
--기존 식민사학에서는 압록강변 즙안에 평양성 아닌 국내성이 있다고
②압록강 뒤 광대한 땅에 3국이 하나같이 있을 곳은 섬서성 서안이고
③평양성=장안성 [개경이란 글자는 눈에 띄지도 않고]=서경=동녕부라는 글도 못 봤나
, 어찌하여 반도= 식민사학에서는 한반도 개성이라고 우기는 데는 그 속셈을 알지도 못할 부류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날조하기로 작정하였다면 할말이 없지만, 그것을 주장하는 식민 사학자들은
위와 같은 역사서도 안 읽어봤다는 말인가?
이상의 글로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평양성은 당나라의 장안성이고
또한 고려태조 왕건이 도읍한 서경이고 동녕로인 줄 알았으리라 믿고 다음으로...
--------------------------------------------------------------------------------
(2) 1. 고려 태조,세조의 능을 강화에 이장했다는 고려사절요 기록--고종 30년 8월 기록
-원문-팔월이장세조태조우강화개골동[八月移葬世祖太祖宇江華蓋骨洞]
2. 21대 희종의 능을 모신 기록고려사절요 고종 24년 8월 기록
원문-추팔월무자[일]전왕훙우법천정사다빈우낙진궁
[秋八月戊子(日) 前王薨于法天精舍多殯于樂眞宮]
동십월정유[일]장석릉시왈성효묘호정종후개희종 축강화외성
[冬十月丁酉(日)葬碩陵諡曰 誠孝廟號貞宗後改熙宗 築江華外城]
가을 8월 무자일에 전왕 훙[죽다]하여 법천정사에 빈소 마련하고, 겨울 10월에 낙진궁에서
장사지내고 석릉이라, 시호는 성효, 묘호는 정종, 후에 이름고쳐 희종이라하고, 능을 강화 외성에 쌓다
위의 기록은 세조, 태조의 능을 강화 개골동으로 이장하고, 21대 정종[후에 개칭, 희종]의
묘는 강화 외성에 쌓았다는 기록.
우리는 강화도에 가서 왕릉이나 왕릉의 흔적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전혀 날조인 강화 천도에 따른 궁성이, 또는 궁궐 터라도 있는가? 하물며 개성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며 선죽교조차도 쫒겨온 선조들이 대륙고려를 흠모하여 모조품을 만들어 놓은데에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반도=식민사관이 만들어 지는 증거품=유물이 되었으니, 경주나 김해의 모든 유물이 사람 홀리는 옘병할 실증사관=증거주의의 물증이 되어버린데에는 함정이 있으니,
대륙 탈출하면서 가져온 선조 유물을 모조 능에 파묻는 데는 기꺼이 이구동성이지만
이 모조 능을 누구의 능으로 지정하느냐는 데에는 아무도 결정 못 짓고 비석없는 능을 만들어 놓은 것을 왜 생각 못하느냐?!는 선조들의 돌대가리 후손들에 대한 질책이요, 거창하게 정각과 비문까지 세운 김수로 왕릉도 대륙에서 이장해 온 것이라는 김해 김씨 종중의 결정은 참으로 용기를 낸 쾌거이라...
--------------------------------------------------------------------------------
2. 몽고와 명나라의 천도 강요
1] 몽고의 천도 강요
[蒙古의 遷都 强要]고려사절요 24대 원종 10년 12월 기록
[22대 고종 25년 12월 몽고와 강화 조약 맺은 후 드디어 시작된 몽고의 내정간섭]원문
--왕여몽고명 순안후종감국[王如蒙古命順安候悰監國]
[몽고는 원종왕에게 명령하기를 순안후로서 나라 감독하는 것을 즐거워하라;왕도 아닌 제후, 순안후로서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
원문-정주별장강원좌등삼인래전[靜州別將姜元左等三人來傳]
[정주별장 강원좌등 3인이 와서 전하기를]
원문--몽고제소왈유 고려국귀주도령[蒙古帝召曰諭 高麗國龜州零]
[몽고 황제 유시하기를 고려는 귀주로 도읍을 옮기라 명령한다.]
원문--최탄등박 서경오십사성 서해육성 군민등근--[崔跛泊 西京五十四城 西海六城 軍民等近]
[몽고 명령 받은]최탄등이 아뢰기를 [고려 신하 임연이 몽고 파견사를 유인, 협박하기를 몽고파견사 처자, 그에 속한 많은 백성을 데리고 동쪽으로 가지 않으면 죽인다 하였더니 말을 듣지 않아 죽였다. 그래서 몽고가]서경 54성과 서해 6성, 그리고 그 군민을 다스릴테니 [고려는]내어 놓으라는 것...
귀주[龜州는 사천성 부능현[四川城 陵縣]--中國고금[古今]지명[地名]대사전 기록
2] 명나라[明]의 천도 강요[遷都强要]
고려사절요 우왕 9년 1월, 명나라 홍무 16년, AD1418, 명나라 성조는 요동도사를 통해 고려에게
도읍지를 옮기라는 통첩을 보냈다.
원문--요동도사이첩왈 고려신사대명불의여납[遼東都使移牒曰 高麗臣事大明 不宜與納]
합출통호 금문납합출견문합자불화청호[哈出通好 今聞 納哈出 遣文哈刺不花請好]
고려후례이위지 기어신사대명지의 여하여욕면죄감송
[高麗厚禮以慰之 其於臣事大明之義 如何如欲免罪감送]
문합자불화이효기성불연수유후환회지하급[文哈刺不花以效其誠 不然雖有後患悔之何及]
--------------------------------------------------------------------------------
3.13세기 세계의 초 강대국 고려
--고려사절요의 한 대목 기록절요란 중요 대목만을 뽑아 요점 정리했다는 뜻인데 필자는 또
그중의 high light만을 발췌하였음
[1]고려는 1만리 강토 가진 나라.
지나 대륙 전체를 통치했던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고, 찬란한 문명을 갖고 가장 강력했던 고려세계사를 통 털어 가장 위대했고, 찬란한 문화를 가졌고 세계사에 빛나는 원나라의 판도가 제일 크다하나, 원나라의 판도는,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했지만 대륙 고려를 빼놓은 판도라 고려보다는 못했던, 위대했던 고려.
1] 고려사절요 원종 1년 3월 기록
원문--皇弟驚喜曰 高麗萬里之國,
당태종친정이불능 복금세자자내차천의야
[唐太宗親征而不能復今世子自來此天意也]
[해석]
황제=임금의 동생은 놀라움과 기쁨으로 말하다. 고려는 만리의 나라다.
고려는 1차 고려를 뜻하면서 2차로 고구려도 뜻하니,
[(고려가 이렇게 큰나라인데 그 고려에 비교할만한 고구려를) 당 태종도 정벌할 때를 기다려야 했다는 다음글]
당 태종이 친히 치려고 했어도 불가능하여 지금의 세자[당 高宗 李 治]때로 미뤘으며 [復]하늘의 뜻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사실이 당고종이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므로]
2] 고려사절요 17대 인종[仁宗] 14년 冬10월의 기록
....前略 安石曰彦단言固當若能自治七十里可
[(왕)안석이 말하기를 (문)언단 말이 능히 사람이 다스릴 수 있는 한계는 70리라 했는 데,(참고;1개 군은 사방 100리 정도로 제후국이라 했음.)]
以王天下今以萬里之天下 而畏人者由不自治也
[왕(인종)께서 만리나 되는 천하(萬里之天下)를 두려움없이 인간으로서 다스린다는 것은 못할일이다.]
今三韓之地 豈特七十里[지금 이 땅은 삼한의 땅, 특별하지 않으면 70리 이상 다스림은]
而己哉然不免畏人者其咎[두렵게 되어 있으며 허물이 생기는 것을 면할 수 없다]
이런 기록이 이해되려면 그때 당시의 주변 상황부터 살펴 봐야 한다.
글안과 요[遼]나라가 멸망한 후 서여진과 동여진도 몰락한 후,
송나라는 이때, 인종 14년에 북송은 망하고 남송의 소흥 6년이며 금나라는 천회 14년이었다.
고려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괴롭혀 오던 글안과 요나라도 멸망하고, 고려 주변국이 모두 몰락의 길을 걷던 그때, 홀로 고려만이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열과 몰아치는 태풍을--풍상을 겪고난 다음 향기 높은 국화를 피우듯이 1萬里, 전 대륙을 통치하는 大 帝國의 極盛期였으니 다른 나라의 허물을 거울삼아 통치에 특별하여야 한다는 忠言이다.
[참고;왕안석은 분명 송나라 사람이지만 고려에서도 우대 받는 문필이고 위 고려사절요 인용 글귀의 전략 부분에 나타나는 고려의 金富義도 송나라의 신종이 인정하는 문필이었음.
현재는 10리가 4km이지만 고대에는 5-6km가 10리였다. 만리라면 5000에서 6000km이다
[필자;주;이 1만리인 6000km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기 위해 지구의 위도와 경도를 조사해보니,
매 5도가 1100km이고 중국 대륙은 동경 95도옆에 돈황이 있고 동경 120도 좌우에 남경과 상해가 있다. 이 동경 95도에서 120도 사이가 5500km. 그리고 위도는 베트남 통킹만 옆의 해남섬이 북위 20도이고 하르핀과 장춘사이를 그리고 몽고 서울 울란바토르를 지나는 선이 북위45도이니 이 사이가 5500km이다.
아래 지도의 경도와 위도 참조.
위 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지나 대륙 전체가 고려의 영토라는 말.
바로 위 글이 뜻하는 바를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한다.한,중,일 3국을 통 털어 가장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 세계사에 빛나는 원나라가 판도가 크다하나, 비록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했지만 대륙 고려 때문에 원나라도 고려보다 못했던, 가장 판도가 컸고 위대한 나라 고려,
그리고 세계사상[世界史上] 유례없는 강대국이라는 뜻임을 우리는 바로 새겨야 할 것이다.
틈만나면 강조하는 필자의 외침은 고려사절요는 엄연한 대륙 고려의 기록을 했다는 말.
고려사절요 편찬자 김종서, 정인지, 신숙주 등 28인이 반도=식민사관자들처럼 역사 왜곡 날조자들이 아닌 바에는 고려가 만리의 땅을 가진 나라란 사실이 거짓이라면 기록하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이런 사실이 믿기지 않는 사람을 위해 우리의 정사,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誌]를 발췌한다.
이미 이 글의 제1부 고려 서울 개경의 고증편에서 명사, 수서, 북사, 원사 지리지, 원사 등 5개의 사서로서 낙랑, 현토군=평양성=장안성=서경=동녕부=송악이라고 기술한 바있으므로 우리 사서 고려사 지리지를 가지고 고증[考證]한다.
[원문]
고려사지리지;성종개 주부군현급관역강포지호수분경내위십도 취십이주 각절도사
[成宗改州 府群縣及關驛江浦之號遂分境內爲十道 就十二州 各節度使]
[6대 성종은 주를 고쳐 부,군,현을 만들고 관련된 역참, 강, 강의 경계로 10도를 두었다.
각 도에는 12주, 절도사를 두었다. ]
기십도[其十道]--그 십도
一曰關內 領 양주,광주,황주,해주[楊州黃州,廣州海州]二曰中原 領 淸州,忠州
三曰河南 領 公州,雲州四曰江南 領 全州,瀛州,淳州,馬州五曰嶺南 領 尙州六曰嶺東 領 慶州,金州七曰山南
領 晉州 八曰해양[海陽]령[領]나주[羅州],광주[光州], 정주[靜州],승주[昇州], 견주[見州], 담주[潭州],
낭주[朗州] 구왈삭방[九曰朔方] 령[領] 춘주[春酒] 교주[交州] 명주[溟州] 화주[和州] 등주[登州]
십왈패서[十曰浿西] 령[領] 서경소관[西京所管], 其所管州郡共五百八十餘--각 도가 관할하는 주와군은 다합쳐 580여 곳
이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는 대륙을 10도로 나누고, 도 아래에 주를 두었는데
이 모두 한반도 지명이 아니고 분명히 대륙지명 아닌가?
우리가 처음 접해보는 지명--분명한 대륙 지명--교주,화주,등주,견주,낭주,정주[靜州],금주,마주,순주, 영주[瀛州],운주 그리고 관내도,중원도,하남도,산남도,해양도,강남도,영남도,영동도,삭방도 등...
고려는 태조 왕건으로부터 11대 문종때까지 대륙을 10도로 나누었는데, 대륙을 10도로 나눈 일은 고려가 처음은 아니다
---다음 글을 강조하는 말은 반도=식민사학자들은 고려나 근세조선만이 한반도를 도로써 나누어
통치했다는 말은 안했어도, 고려나 조선시대에만 있은 것처럼 일반이 아는 듯하여 강조하여 다음 글을 쓴다.
3] 고려 11대 문종이 대륙을 나눴던 10도[道]와 당 태종이 나눴던 10도[道] 비교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22쪽 기록
[十道]唐 太宗 幷省州郡, 分 關內, 河南, 河東,
河北, 山南, 용우, 淮南, 江西, 劍南, 嶺南
十道,
開元初, 增置, 京畿都畿淮南 三道. 分 山南爲山南東,山南西 二道. 江南爲江南東. 江南西 二道.
是爲十五道.
--10도는 당 태종이 성과 주, 군을 병합하여 [설치하고]. 관내, 하남, 하동, 하북, 산남, 용우,
회남, 강서, 검남, 영남 10도로 나누었다.
개원[연호]초 경기, 도기 회남 3도로 증설 설치했다. 산남을 산남동, 서2도로 나누고, 강남도를
강남동, 서[江南東. 江南西 ]로 나눠 15도가 되었다.
--------------------------------------------------------------------------------
[2]고려 10도와 당 태종의 10도 비교
1)고려 10도에는 있는데 당 태종 10도에는 없는 도; 해양도; 대륙 동남부 지역으로 당나라
당시에는 신라의 영토였기 때문에 당 태종의 10도에는 빠질 수밖에 그외 浿潟는
首都 西京을 관할하는 道이기 때문에 당 태동의 京畿道와 같은 개념의 도
2)共通道[공통도];關內道, 河南道[唐 太宗이 둔 河北, 河東道는 그 주위의 세분[細
分]이라 看過해도...] 嶺南道, 山南道., 이상 4個道
이로써 고려가 나눈 10도나 당 태종이 나눈 10도나 비슷하니
당연히
1] 고려는 대륙에 있었고,
2] 고려의 영토는 전 대륙에 걸친 말 그대로의 통일 왕조였던 것
--고구려도 못한 대륙=삼한을 통일한, 그리고 신라가 삼국 통일 했대야 당나라와 대륙을 둘로
쪼갠 중의 하나, 그것도 당이 차지하고 남은 찌꺼기[?]를 차지한데에 비하여 우리 역사상의
가장 위대하고도 가장 큰 영토를 가졌던 강력했던 나라였고,
강역[疆域] 크기와 문명 발달 진보로도 세계사상 유례없는 초 강대국이었던 高麗였다.
필자는 당 태종이 대륙을 10도로 나눠 통치한 기록을 연구 과정에서 찾아내고, 이를 고려의 10도와 비교해 보고서는 오히려 고려의 영토가 더 큰 것을 보고 24대 원종의 동생이 놀라움과 기쁨으로 만리의 강토를 말한 그 심정 그대로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뒤따르는 감정은 위대한 선조에 대한 못난 후손 중의 하나로서 부끄러움 그 자체였다.
그리고 후손의 도리로서 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한 소명감이 온 가슴에 강렬하게 충만하였다.
모든 歷史는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그에 따라 붙는 彊域=국토도 똑 같이 중요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역사서는 地理誌가 따라 붙는다.
이렇게 중요한 彊域의 기록, 즉 위에 쓴 高麗史地理誌나 고려사절요 24대 원종 元年 3월의 기록등을 아예 싹 무시하고, 또는 한반도에 있는 지명 몇 개-楊洲,光州,廣州등을 가지고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반도=식민사관자들은 분명한 민족 반역행위를 하고있는 것.
그리고 고려사지리지에 있는 양주[楊洲],光州,廣州도 대륙에 있는 지명인 것은 알아 볼 생각은 않고 지금 한반도에 있는 지명이라고 해서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한다면 --아무리 그렇게 배웠기로-- 이는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하는 사람이 아니고 학문이라는 틀 위에 군림하는 학문 관료들=전국의 모든 대학 국사 교수들이다.
국사 교수들이 그럴 수밖에 엾는 것이 5.16군사 혁명이후30년 채 못돼는 세월동안 한글 전용교육이 만들어 낸 한문 문맹자 세대인 데에다가, 개인적 한문공부로 옛 역사서 읽어보고 연구할 생각은 없이 어렵사리 따놓은 교수직에 안주하여, 어렵고 딱딱한 한문 공부하여 옛날 역사서 연구하느니,
과학이라는 빛좋은 개살구가 빛어낸 과학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증거주의=實證史觀이라는 고고학에 핑게대고, 구태의연한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목에다 힘주는 학문 관료-국사 교수노릇이 훨씬 편했기 때문.
조금만 옛 역사서를 읽어 보기만 했어도, 또는 읽어 볼생각도 없어,그리고 읽을 실력도 없어 그저 日帝가 조작해낸 반도=식민사관만을 구태의연하게 답습하며 신주단지 모시듯하며,다른 역사관 말하는 사람있으면 前術한 대전 출신 이병연처럼 웬수 대하듯 하는 것이 우리 국사학계의 오늘의 현실!
그리고 가장 괘씸한 사실은, 아득한 옛날은 잘 모르니까하고 양보한다해도 겨우 570여년 전의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선조들이었고,가장 超 强大國이었던 고려를 그리고 세계사에 유례없는 초 강대국이었던 고려를 한반도로 축소,조작해낸 것이고, 이는 틀림없이 天罰 받을 것이다.
이러한 바보들이 가르치는 대로 왜곡된 우리 역사는 시운을 타고 바로잡아 질때가 이제됐다.
1만년 중에 쪼그라 들기 시작한 572년 중에 다시 팽창하는 국운 상승기는 물극필반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물극필반[物極必反]----
--모든 사물은 극에 다다르면 반드시 뒤집혀 진다.
엄청난 군사독재가 시운을 타고 한번에 뒤집혀져 6.29선언을 창출해 내듯이...한국 그리고 한민족의 신세는 동시 수반하여 21c의 초 강대국으로 바뀌는 것.--
이것이 주역-역경의 이치이다.[物極必反]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역사를 조작해야 즈그들이 지구의 주인공으로 힘쓰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자신의 빈약한 역사 자체를 왜곡시켜야 패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정통성과 당위성을 부여해야 정신부터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제가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어 우리역사부터 조작해댄겁니다. 물론 그뒤에는 해양세력으로 불리는 미영이 주축인 배경 세력이 있지요.몽골은 내몽골, 외몽골로 분리되어 외몽골은 러샤에 속하고 있대요. 몽골은 이제 가능성이 없으니 공개하는 겁니다. 그것도 중요한 내용은 전부 제거했다고 합니다. 서양학자들도 우리와 같은뿌리로 보고 있다죠. 몽골도 지엽적으로는 고려 때 우리와도 다툼은 있었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노란돼지 되찾자는게 제 의도였는데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마치 같은 동포들끼리 말싸움이나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답니다. 어느분의 말씀처럼, 국내상황부터가 일베충 치하인데 별의미도 없다라고 합니다.
남북통일되면 반드시 실체가 드러나겠지요. 일본이 동경대 비밀서고에 감춰둔 고대 역사서 22만권만 찾아와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역사를 바로세우시는 분들이 지금 계십니다. 통일이 우선 빨리되어야 힘을 얻습니다.통일이 되어 힘을 얻으면 회복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야 민족 영웅들도 더 빛이 납니다
대역사를 되찾은 고려대국"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죠. 지금 청년실업문제도 해
@노란돼지 결되며 잘사는 대국으로 일어서는 겁니다. 쉽게 야그혀서 호랑이 아기에게 넌 토끼라며 세뇌시키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토끼처럼 행동하겄지요. 자신스스로 헤쳐나와 난 호랑이다"하는건 무지한 고통과 혼란을 불러옵니다. 그 호랑이의 정체성을 찾아줘야만 하는게 역사복원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의 식민사학은 반드시 없애버리고 호랑이의 정체성, 즉 우리의 찬란한 역사를 찾는 운동이 필요한 싯점이라고 보여져 나름대로 떠드는 거지요. 그런데 매식자닌 매국노라는 소리조차 해대는 부류가 있지요.
@발길 찾아보시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한정된 공간에서는 무리겠지요. 제 주관적인 설명은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찾아도시고 노력하시고 고뇌도 해봐야 한다고 사려됩니다. 저도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러니 한계도 있습니다. 본인이 찾오보지 않으면 힘듭니다. 제가 여기서 이런식로 말하면 의문점만 더 합니다. 맺습니다.다소 참고가 되셨으면 다행이구요.
정은 대충 알겠는데..
반이 좀 알기가 그른데..
(해서)
합은 나오기 어렵겠군.
고려사 (正史)를 제쳐두고 이제 이렇쿵 저렇쿵해서 여기 당장 닥친 나라의 환란(남,북한)에 시달리는데 무슨 소용있나?
지금 우리가 환란을 극복하고 통일을 해서 같은 민족이 희망을 갖게하는 진취적(進就的)인 경륜이나 설파하십시오.
잘보고 갑니다. 그런데 글이 좀 길다고 느껴집니다. 건필하십시요. 감사합니다.
<거송악왈동경이이평양위서경[居松嶽曰東京而以平壤爲西京]>
위 대목의 해석은 <송악에 도읍했는데 동경이라 칭하고, 평양으로써 서경을 삼다>가 맞는 해석 아닌가요?
어떻게 대전대 학장을 한 분이 이런 기초적인 해석을 못할 수 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군요.
고려사절요 인용한 대목도 데이터베이스에서는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없네요. 보니까.
년도나 달 을 잘못 기재한 것인지는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