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과 수동
소크라테스와 에우티프론의 대화는 경건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를 말한다. 이 심오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매우 중요한 개념을 건드리게 된다.
에우티프론은 경건이 곧 신들에게 사랑 받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경건이란 신들에게 사랑 받는 것. 소크라테스는 이 결론을 내버려 두고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경건하기에 신들에게 사랑 받게 되는 것인가? 혹은 신들에게 사랑 받기에 경건한 것일까? 이 질문은 능동태와 수동태의 이해, 그리고 이 둘 중의 무엇이 먼저인지를 알아야 답할 수 있다.
보이는 것은 왜 보일까? 바로 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물병을 바라볼 때 두가지의 입장이 생긴다. 첫번째는 물병의 입장으로 그 입장은 보이는 것이다. 두번째는 나의 입장으로 그 입장은 보는 것이다. 이때 어떤 입장이 수동이고 어떤 입장이 능동일까?
수동의 사전정의는 다른 것의 작용을 받아 움직임이고 능동의 사전정의는 스스로 내켜서 작용함이다. 보는 것은 스스로 작용한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떠 저 사물을 응시하는 작용을 스스로 함으로 “보는 것”이라는 정의를 자신에게 부여한다. 반면 보이는 것은 보는 것의 작용을 받는다. 그저 물병이었던 저 사물의 정의는 “보는 것의 능동적인 작용”의 의하여 “보이는 것”이라는 정의를 부여 받는다. 보이는 것은 수동적이고 보는 것은 능동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이 둘 중의 무엇이 먼저인가?” 당연히 능동이다. 능동이 없었다면 수동은 생길 수 없다. “보는 이”가 없었다면 “보이는 이”는 당연히 존재할 수 없다.
이 결론을 소크라테스가 던지는 질문에 응용해 보자. “경건하기에 신들에게 사랑 받게 되는 것인가?” 혹은 “신들에게 사랑 받기에 경건한 것일까?” 이 무엇이 능동적이고 무엇이 수동적인 것인가, 그 결론에 무엇이 먼저인지, 무엇이 경건인지 알 수 있다. 사람의 경건이 능동일까? 신들의 사랑이 능동일까?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관계로 해석해 보면 간단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신은 사람의 상위이다. 이것은 물병과 사람의 관계와 비슷하다. 사람이 물병을 물병으로 보는 것에서 보는 것, 보이는 것의 정의가 나오는 것처럼 신들이 인간의 어떤 요소를 경건으로 보는 것에서 인간의 경건이 정의 된다고 해석된다. 과연 그럴까?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물병과 사람의 관계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다. 질문해보자, 잘생겼다는 칭찬”이라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떤 사람의 잘생김에서 타인의 잘생겼다는 칭찬이 나오는 것일까? 타인의 칭찬에서 어떤 사람의 잘생겼다는 칭찬 나오는 것일까? 물론 잘생김을 목격한 것은 타인일지 모른다 그리고 칭찬함으로써 “잘생겼다는 칭찬”이 정의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어떤 사람의 잘생김이 없었다면 칭찬은 존재할 수 가 없다. 물병이 먼저 존재해야 내가 그 물병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존재자체에 대하여 질문할 때 새로운 능동과 수동의 형태를 목격한다. “본다”는 존재를 말할 때는 당연히 “보는 것”이 능동적이다. 또한 “잘생김”이라는 존재를 말할 때는 당연히 “잘생긴 것”이 능동적이다.
경건의 능동성, 곧 그 존재의 시작은 신들의 사랑이라는 것으로 인하여 수동적이게 경건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건은 경건으로 존재하며 그 능동적인 존재에 대해 신들의 사랑은 그저 작용되는 수동의 입장인 것이다.
경건은 사랑을 낳는다. 결론은 이것이다. 그럼 이 글의 초반부 에우티프론이 경건에 대해 정의 내린 것을 가져와 보자. “경건이란 신들에게 사랑 받는 것.” 이제 이 명제는 틀리게 된다. 경건이라는 요소의 대한 신들의 반응이 사랑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잘생겼다고 칭찬할 때 그 잘생김은 우리의 칭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 잘생김은 애초에 눈이 크고, 코가 오뚝하며, 턱살이 없고, 이목구미가 뚜렷한 등 “잘생김” 자체의 정의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이런 정의를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정의에 반응하여(곧 수동적이게) 잘생겼다는 칭찬을 하게 된다. 경건도 마찬가지다. 신들이 사랑하는 그것, 눈이 크고, 코가 오뚝한 것 같은 보다 확실한 경건이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에우티프론은 점점 길을 잃고 결국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미루자고 하며 이 장황한 대화의 무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경건이란 무엇일까? 에우티프론과 소크라테스의 첫 대화에서 그 결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수많은 의문점과 반론과 반박들만 서로에게 오고 갈 뿐이다.
나에게는 한가지 질문이 남는다.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능동과 수동의 형태에 집중했을까? 소크라테스의 능동, 수동의 결론을 이렇다. 능동과 수동이 있을 때 수동은 본질이 될 수 없다. 과연 그러하다. 보는 것이 있기에 보이는 것이 있고 잘생김이 있기에 잘생겼다는 칭찬이 있으며 경건이 있기에 경건을 향한 신들의 사랑이 있다. 하지만 예시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한가지 상황에서 생기는 두가지의 입장이다. 그리고 그 입장에는 인과관계가 있다. “내가 저 물병을 바라본다.” 이 한 상황에서 보는 입장과 보이는 입장이 생기며 보는 입장이 있기에 보이는 입장이 있다는 인과관계가 생긴다. 물론 잘생긴 것, 잘생겼다는 칭찬을 하는 것도 똑같다. 하지만 다른 점은 인식의 문제가 들어간다.
보는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무의미 하다. 모두가 이에 대해 같은 의견을 내고 있으며 다르게 해석할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물병을 본다고 했을 때에 이 보는 입장은 하나이다. 다만 잘생김은 좀 다르다. 잘생긴 것이란 무엇인가? 눈이 큰 것? 쌍꺼풀이 있는 것? 이에 대해 완전히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을 찾는 게 오히려 어려울 정도이다. 잘생긴 것에서 칭찬이 나온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정의이다, 이 정의는 말하자면 본질에서 행동(반응)이 나온다는 것이다. 본질이 능동의 형태이며 행동(반응)은 수동의 형태다. 하지만 질문이 생긴다. 잘생김이란 무엇인가? 그 본질은 무엇인가? 본질이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을 때 소크라테스의 능동과 수동의 형식은 붕괴된다.
잘생김의 정의가 없다면 잘생긴 것은 되려 수동적인 것이 되고 잘생겼다는 칭찬이 능동적이게 된다. 내가 쌍꺼풀이 잘생김의 기준으로 인식하고 행동함에 따라 이것은 능동적인 형태가 되고 “잘생김이라는 단어”는 나의 행동에 반응하여 달라질 뿐인 수동적인 것이 된다. 이 점에 알 수 있는 것은 행동은 인식에 기원한다는 것이다. 잘생긴 것에 대해 개인은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인식으로 행동이 나온다. 질문을 던져 본다. 잘생겼기 때문에 (잘생겼다고)인식되는가? (잘생겼다고)인식했기 때문에 잘생겼는가? 소크라테스의 결론은 전자이지만 잘생김의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인식이 존재의 문제를 뛰어 넘을 수 밖에 없다. “잘생긴 것은 쌍꺼풀이 있는 것이다”는 기본 명제가 준비 되어 있다면 당연히 이 명제가 능동성을 띄우며 잘생겼다는 칭찬을, 곧 사람들이 잘생김에 대한 인식과 행동의 일관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잘생긴 것은 쌍꺼풀이 있는 것이다”는 명제가 준비 되어 있지 않다면 각 사람이 이 잘생김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능동에 따라서 잘생김(본질)은 수동적인 형태가 된다.
현 시대의 메커니즘도 이러하다. 개인의 인식이 능동성을 가지고 다른 외부 요인들은 수동적으로 이리저리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큰 문제를 불러온다. 잘생김에 대해서 만 인식을 상위로 두는 것이 아니라 죄, 법, 올바름, 성품 등 사회와 인간의 중요 요소에도 개인의 인식 만을 중요하고 놓고 보고 있기 때문에 융통성 있고 일관적인 도덕성은 기대할 수 없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는 그저 자기 주장이라는 칼을 든 사람들이 한 방에 뭉쳐 있는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도 이 문제점을 알았다. 그는 인식을 이성이라 소개한다. 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성에 대한 “앎”이다. “이성의 앎”은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다운 것”은 어떤 존재의 최상위 단계이다. 이성을 아는 것은, 곧 올바르게 이성을 활용하는 것은 인간의 최상이다. 이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 곧 언어를 확실히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잘생김을 말할 때, 경건을 말할 때 그 언어의 본질(뜻)이 일치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을 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그 본질을 본 삼아 더 훌륭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뜻을 정해야 한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적어도 세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첫째로 훌륭한 상태란 무엇인가? 둘째로 훌륭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과 어떤 것의 존재의 본질과 대립한다면-예시로 잘생긴 것은 쌍꺼풀이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을 훌륭한 상태에 도달하게 하기 위해서 라면 잘생긴 것은 쌍꺼풀이 없는 것으로 정의 되어야 할 때-훌륭한 상태를 위해 존재의 본질을 왜곡 할 것인가? 셋째로 애초에 어떤 존재(명제)의 본질을 우리가 알 수 있는가? 누군가 본질을 결론 짓더라도 그 또한 그저 개인의 인식, 혹은 불특정 다수의 인식에 불가 한 것 아닌가?
에우티프론과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사실 아직 시작도 안 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아직 본인의 말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에우티프론의 의견에 대한 변론 과정에서 무어라 말할지 우리는 기대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