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하는 사도들 12-3
이 백서는 당시 조정 안팎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는 11월 5일 대역무도 죄인으로 능지처참의 극형에 처해졌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하느님 앞에 오직 조선 교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는 일편단심으로 임했다. 그는 그의 총명한 두뇌를 혼탁한 벼슬길에 쓰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천주의 도리를 깨닫고 이를 전하는 데 썼다.
백서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로서는 윤유일의 사촌 여동생 윤운혜 의 남편 정광수와 홍익만, 김계완, 손경윤, 김의오. 송재기, 김귀동, 최설애, 김일효 장덕유, 변득중, 이경루 황일광, 한덕운, 황인 권상문 등 16명으로서 모두 순교했다.
이 백서의 원본은 근 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께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관계자가 필연코 천주교와 관련된 것이라 싶어 천주교 신자인 친구에게 넘겨주었고, 신자는 뮈텔 민주교에게 전했던 것이다.
황사영이 순교한 후 그의 홀어머니는 거제도, 부인은 제주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황사영은 당시 두 살 난 아들 경헌을 두었는데 그의 부인이 제주도 유배 길에 아들 하나만은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뱃사공을 매수했다.
「사공어른, 내가 갖고 있는 것 모두를 주겠으니 아들만은 살려 주시오. 이 아이가 커서 훌륭하게 자란다면 반드시 후사가 있을 것이요.」
하며 사공에게 갖고 있던 패물을 모두 주었다. 그리고 포대기에 감싼 경헌을 사공에게 인계했다.
늙은 사공은 패물보다도 정에 이끌려 부인의 청을 들어주었다.
「염려 마십시오. 보아하니 귀부인임에 틀림없는데 어쩌다가 그리 되었소.」
하며 동정한 뒤 아들을 친자식처럼 감싸 주었다. 배에 함께 탄 나졸들에게 사공은 술을 먹여서 그들을 매수했다.
나졸들은 관가에 보고하기를 뱃길에서 아기가 병에 걸려 수장했다고 했다. 이 아기는 그 후 오씨 성을 가진 집안에서 양육되었다. 소에게 풀을 뜯기던 한 부인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바닷가에 웬 어린 아기가 있어서 집으로 데려다가 아들로 키웠다.
아기의 동정에서 나온 이름이 황경헌이었음은 물론이다. 한국판 모세가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아기가 버려졌던 추자도에서는 지금도 황씨와 오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황경헌의 어머니 정난주는 제주도가 맞이한 첫 신앙인으로서 천수를 다한 후 모슬포 뒷산에 묻혔다.
구전에 의하면 황경헌의 묘는 추자섬에 있다고 하나 창원 황씨의 족보에는 충남 옥천 땅 성가산에 있다고 돼 있다.
황사영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에 있음이 지난 90년에 확인됐다. 황사영의 묘소는 후손들에 의해 그해 봉분 절개 작업을 해본 결과 가로 130센티 세로 20센티 크기의 십자혈을 나타낸 표지석이, 머리맡에는 백자 그릇이 나와 학계의 관심을 끌었었다.
백자 그릇 안의 썩은 헝겊은 어무(御拇)를 싼 붉은 비단임이 틀림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황사영은 그의 천재적인 총명과 준수한 용모로 벼슬길에 나가 출세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큰 진리를 따랐다. 그의 장인은 정약용의 맏형인 약현이었던 그의 처삼촌 정약종으로부터 천주교를 이수 받았다.
그리고 입국한 주문모 신부로부터 알렉산델이란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가 따른 길은 진리의 길이자 죽음의 길이기도 했다.
그는 장인 약현에게,
「이미 저는 천주의 도리를 익혀서 더 이상 배울 학문이 없게 됐습니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을 마다한다면 그릇 된 일입니다.」
하면서 벼슬길에 나갈 것을 단념하겠다고 했다.
장인인 정약현은 사위 황사영의 재질을 아끼고 있던 참에 이 말을 듣고 실망했으나 곧 그의 말을 따랐다.
황사영은 주문모 신부를 찾아다니며 명도회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교리서적을 번역하기도 하고 일선에 나서서 전교를 했다. 황사영의 백서는 조정 대신들로부터「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치게 하는 문구」로 거센 비판을 받았으나 외세를 끌어들임이란 나라를 망치게 할 목적이 아니라 뿌리째 뽑혀지려는 우리나라 천주교회를 합법적으로 인정케 하고 순교자를 없애자는 데 그 뜻이 있었다고 하겠다.
황사영 백서사 편으로 문서를 미처 전달하지 못한 채 황심, 김한빈, 옥천희 등이 모두 처형됨으로써 이 사건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이 순교 했다.
1801년 신유 대박해 때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를 했다. 그러나 포청에서 배교하여 평생을 자책의 한을 안고 살다가 죽은 사람도 있다. 형리의 무서운 형벌과 배교하면 목숨만은 부지할 것이라는 꾐에 빠져 인간적 유혹을 푸리치지 못하고 배교한 사람 가운데 최해두(崔海 斗)가 있다.
최해두는 윤유일의 처사촌이다. 그는 1801년에 배교하여 경상도 흥해(輿海)로 귀양 가서 자책(自責)이란 글을 남기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울에서 양반으로 살았고 교회창설 당시 처사촌인 윤유일의 권고로 입교를 했다. 한때 정약종과 황사영, 최창현 등 교회 지도자급 인물들과 함께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강완숙의 집에 은거하고 있는 신부와도 여러 번 만나 교리문제와 아울러 조선 교회의 나갈 길에 대해서 의논도 한다. 1801년, 그는 여주에 사는 그의 숙부 최창주가 포청에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창주는 1791년 진산사건 때 잡혔으나 배교를 한 후 석방되었었다. 그는 이때의 일을 참회하는 뜻에서 더욱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1801년 10월에 여주 포교에게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감옥에서 3개월 동안 고생 하는 가운데도 함께 갇힌 신자들에게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교리를 강론하여 용기를 잃지 않게 했다.
이런 최창주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최해두는 그 불똥이 조카인 자신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피신을 했다.
그러나 그의 부친 최상은이 대신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자수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포청에서 배교를 했다. 그해 5월 10일 유배형의 선고가 내려졌고 흥해로 유배가 되었다. 최해두가 얼마나 오래 유배생활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유배지에서 사망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아들 최영수는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홍해로 가서 시체를 거두어 묻은 후 서울로 와서 동생 최병문과 함께 살았다. 최병문은 그 후 기해박해(1839) 때 잡혔으나 배교하여 석방이 되었다. 2년 후 최해두의 큰아들 최영수가 잡혔다.
그러나 그는 7개월간의 옥중생활을 이겨내고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최해두는 자신이 배교한 죄를 두고두고 뉘우쳤다. 비록 그는 배교를 했지만 한 지식인으로 후세에 양심선언을 한 것으로서 높이 평가 된 것 같아 그의 고뇌에 찬 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두루 심사가 답답하여 두어 줄글을 기록하노니 슬프고 슬프도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본디 주(主)를 모르는 이 없거니와 나는 이미 문교(聞敎)하여 근 이십 년 죽기로써 봉사하노라 하다가 시절이 불행하여 성교의 간군이 대거하니, 평일에 열심 봉사하여 신공을 세운 이는 오주 예수를 효칙하여 치명대은으로 다 돌아가시고 나같이 무공무덕하고 유죄 유실한 인생은 썩고 썩어 신유년(1801) 동국(東國) 봉교인에게 그리 흔한 치명의 대은을 참례치 못하고 절박 원통히 나 혼자 빠져나와 이 흥해 옥중에 잔명이 붙어살았으니 이 무슨 일인고! (중략)
살아 금세 세복도 잃고 죽어 후세 천복도 또한 잃을 것이니 세복 천복을 양실할 것이고 금세 세옥을 면치 못할 것이니 세옥 지옥을 어찌 다 견디라는 말인고!
목숨은 날로 사후가 가까와 오고 행사는 날로 지옥이 가까와 오니 뉘를 원망하며 뉘를 탓하리까?
진복팔단에 가로되 고난자가 진복이라 하였으니 범간 고난이 곡절 이 있으니 오직 예수의 삼 십 삼년 받으신 고난과 옛적 저 성인 성녀의 지내신 자취를 본받아 고난을 감수하더라도 비록 미고라도 다 공이 되어 육신이 세상에 있으나 이미 천상 사람이라, 진복의 사람이어니와 주모의 홍은을 잊고 고성(古聖)의 표양을 따르지 아니하고는 비록 온 세상 괴로움을 나 홀로 받은들 무슨 진복의 사람이 되리요 내 행위를 생각컨대 무슨 교우의 도리였느뇨? 육신의 복을 취하여 이 옥중에 와 앉았느냐?
만일 영혼은 돌보지 아니하고 이 모양으로 방탕하여 회심하기를 바삐 아니 하여서는 받는 바 다 헛 고난이고 짓는 바 다 참 죄악이며 잃는 바 다 진복이고 얻은 바 다 진화(眞禍)일 것이니, 주의 사랑하는 자 식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속한 원수 됨이 애달플 뿐 아니라 이해를 의 논 해도 정심치 못한 연고로 비류한 마귀의 종이 되어 독한 해를 억만 년에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 너그럽지 못한 사람이 됨을 면하리오?
(중략)
천주는 지존지귀 하시고 우리 사람은 지비지천 한데 영혼을 수직하여 조찰케 하면 오주 강림하시느니, 세상 존객을 내 집에 유하게 하려 하여도 고운 자리에 불이나 밝히고 쇄소를 극진히 하여야 즐겨 머무는데 지존지귀 하신 주를 모시려 하면 내 영혼을 조찰케 하여야 즐겨 강림하시려니와 만일 사욕과 편정과 잡념을 채워 영혼을 더럽혔으면 어찌 더러이 여기사 바삐 떠나지 아니시라.
영혼이 결정하여 주 강림하사 총광을 잃지 않으면 자연 선공에 부지런하고 스스로 낙이 나려니와 영혼이 오예하여 주 떠나서 총광을 잃으면 더러운 행실의 마음과 악한 행실의 근본되리니 마귀의 해 날로 심 하리라.』
최해두는 이 글을 써가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천주 십계를 나름대로 해석하여 자신은 비록 배교의 죄를 지어 고통을 받지만 후세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고 경계를 했다. 또 그는 예수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 이 지상에서의 짧은 쾌락을 좇는 것보다 훨씬 복되다고 강조하였다.
『예수 가라사대「너희 이제 죄를 지으면 다시 나를 두 번 십자가에 못 박으라」하시니 어찌 놀랍고 망극치 아니하랴.
죄를 짓고 한 번 통회는 아니 할 리 없으되 다만 때가 지극히 다르니 금세에 뉘우치면 내세에 뉘우침을 면할 것이고 금세에 뉘우치지 아니 하면 내세에 뉘우침을 그치지 못하리니 작고 잠깐 통고를 아껴 아니하다가 크고 먼 회(悔)를 기다리느냐?
그럴 뿐 아니라 금세 회는 작고 잠깐이라 유익은 무궁커니와 내세의 회는 비록 크고 무한하나 하릴없다. 늦었도다. 무익한 중에 또한 그칠 길도 없으리라.
이제 나는 통회를 기다리려 하고 눈이 말끔하여 무죄한 듯이 염연히 있느냐?
범간 자기 공부 전혀 자기에게 있으니 자기가 힘쓰지 아니하면 비록 주모의 인자와 신성(神聖)의 권고로도 선이나 악이나 우격으로는 시키지 아니하시느니, 예수와 성모와 신성을 의뢰하여 자기 힘써 선을 행하면 도우실 따름이니 의뢰할 곳이 곧 이에서 더 지날 곳이 없으리라.
(하략)』
최해두는 자신의 배교에 대하여 더할 수 없는 죄라고 자책하면서 후 세 사람들에게 한 가지씩의 예를 들어 배교하여 갖게 된 고통을 일러 주었다.
1801년 신유 대박해가 지나간 후 교회는 다시 재건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끝없이 반복되는 박해 속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배교자로 인한 많은 피해자들도 나왔다. 조선조의 대표적 유다스라고 알려진 김순성이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