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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악의 꽃은 견자見者의 꽃이다. / 심은섭
악의 꽃은 견자見者의 꽃이다.
(심은섭∣시인‧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학 교수)
나의 군말
인간의 삶 속에서 늘 공존해왔던 시란 무엇인가. 시의 개념을 분명하게 정의해 온 시인도 없다. 그것은 어떤 용어에 대해 완전한 정의를 내릴 수도 없거니와 각각의 사람마다 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게 때문이다. 게다가 도대체 시란 무엇이기에 그 많은 사람이 시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또 많은 시인이 불면의 밤과 싸우며 시를 쓰고 있는 걸까? 또 그러한 시를 쓰는 것에 대해 어떤 시 창작기법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궁금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번 세 번째 시집 『천마총에 달이 뜨지 않는다』를 출간하면서 나름의 생각해 해오던 시론을 이쯤에 밝혀두는 것이 혹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해설’보다 ‘시론’을 붙이게 된 이유다. 평소에 나 자신이 스스로 지켜왔던 기존의 시 창작기법이나 개인적으로 시 쓰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얻은 결과를 토대로 시 창작기법의 일부를 간략하게 요약하여 싣는다.
IT(information technology)와 대중매체(mass media)의 발달로 종이산업이 점차 위축되어 가고, 시의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는 불행한 작금의 시대에도 분명히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있으며, 당연히 시의 사회적 역할도 있다. 그 역할이란 것은 누가 알아주느냐 알아주지 않느냐의 문제에서 벗어나 시인으로서 혼탁한 사회의 투명성 제고와 정서함양과 같은 공리적 가치를 실천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주변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조명을 받지 않는 시인이라고 해도 언어예술에 종사하는 문학인이라면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철저한 자기 극복을 통한 사회적 역할을 다해야 한다. 문학은 개인의 위상을 높이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즉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리성을 추구하는 공공행위이다. 문학창작 활동으로 부를 축적하거나 힘의 원리를 작용시키려는 자, 창작활동을 빙자한 사회적 신분을 높이려는 자, 그것 자체가 문학인으로서 스스로 자격을 잃는 행동이며, 문학의 본질을 왜곡하는 일이다.
이런 일이 없도록 진정 시인이란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도록 강단에서 강의해 왔고, 지금도 시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리는 일에 지금도 전념하고 있다. 이런 필자의 목적이 외연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대했으나 그 진척 속도는 매우 느리다. 1998년을 기준점으로 계산하여 보면 필자가 시인으로서 시에 매달린 세월도 30년 가까이 흘렀다. 그 많은 시간 속에서 개인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제외하면 정작 문학에 종사하는 다른 문인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를 들어 이번에 출간하는 세 번째 시집 『천마총에 달이 뜨지 않는다』의 시해설보다는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시 쓰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앞서 시론 「악의 꽃은 견자見者의 꽃이다」를 게재하게 되었다.
시의 정의
시는 사람의 사상과 정서를 유기적인 구조를 지닌 운율의 언어로 형상화한 운문문학이다. 그런데 이 시란 용어에 대해 어떤 철학자도, 어떤 시인도 명쾌하게 정의한 사람이 없다. 오죽했으면 T‧S 엘리엇이 “시의 정의(定義)의 역사는 오류(誤謬)의 역사이다.”라고 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시를 정의하는 일이 힘들고 고된 일이다.
S. 존슨은 “시란 이성의 조력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리와 즐거움을 결합하는 예술이다. 시의 본질은 발견이다. 예기치 않은 것을 산출함으로써 경이와 환희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했고, 러시아의 투르게네프는 시를 “신(神)의 목소리다”라고 정의했다. 시를 통해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다. 투르게네프가 말했던 “시는 신의 목소리다.”라는 의미는 시인이 메시아와 같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는 뜻이다. 시는 자기감정을 개별적으로 언어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가 주체가 되는 시를 써야 한다. 지나치게 자기감정이 주체가 되는 시를 쓰게 되면, 그것은 자기 푸념이나 신변잡기이다. 그런 시를 쓰지 않으려면 자신의 체험을 보편화한 시를 써야 한다.
사전적 의미로 보편화(普遍化)라는 것은 ‘보편화하다’라는 것으로 ‘일부에 한정되어 있다가 일반적으로 널리 퍼지다’의 뜻이다. 즉 개인의 체험을 개인화하지 말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보편화한 시를 써야 한다. 시를 쓸 때 개인의 체험을 보편화하지 않으면, 그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자신이 쓴 시가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실패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쓸 때는 보편성과 개연성이 동시에 작용해야 한다. 그러할 때 비로소 시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대체로 독자들이 애송하는 시를 보면 보편성과 개연성이라는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시를 쓸 때 자신의 체험을 보편화하는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시(詩)에 능했던 조선 시대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시는 세상을 가르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라고 했다. 이것은 서거정이 시를 생각함에 있어서, 교훈적 사관을 드러냈다고 말할 수 있다. 서거정이 내린 시의 정의를 바탕에 두고 생각해 보면 시는 단순히 정서를 전달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서가 독자들에게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조선 시대에 정립한 시의 개념이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시에 대해 정의한 것과 근접하게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서거정은 누구보다도 시의 개념을 분명하게 교훈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동양의 시관(詩觀)과 서양의 시관은 서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동양의 시의 개념은 대체로 교훈적인 성격이 짙어 보인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이 중국의 『시경(詩經)』이다. 공자는 시를 보고 “시삼백 일언폐지 왈사무사(詩三百 一言蔽之 曰思無邪)”라고 했다. 이것을 풀어 보면 『시경(詩經)』의 시 삼백 편은 한 마디로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특히 ‘사무사(思無邪)’에 대해 많은 사람이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을 보면 ‘시는 권선징악을 담고 있는 까닭에 사람으로 하여금 정(正)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성정(性情)을 얻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같이 동양에서 말하는 시의 개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권선징악과 같은 도덕적인 교훈에 역점을 둔다는 사실이다.
그 반면에 서양에서 주장하는 시의 개념은 동양에서 바라보는 관점과 차이를 보인다. 서양의 어떤 한 사람이 정의한 시의 개념을 서양 전체를 대표하는 수용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지만 대체적으로 서양에서는 시의 개념을 창의성에 역점을 둔다. 가령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가 자신들의 저술에서 밝힌 내용을 살펴보면 “시는 ‘비실재성’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규칙에 종속되는데, 그 규칙은 기본적으로 문법과 수사학에 적용되는 것과 같은 규칙”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들은 “시는 베일 뒤에서 모든 것을 재현하는 아름답게 구성된 언설이다. 여기서 시를 규정하는 특징은 미와 알레고리”이며, “시는 열정과 미(美,) 창의성을 특징으로 하는 언설”이라고 말한 것을 비추어 볼 때 서양의 시관(詩觀)은 동양의 시관(詩觀)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시라고 할 때는 주로 그 형식적 측면을 가리켜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시작품(poem)을 말하는 경우와 그 작품이 주는 예술적 감동의 내실적(內實的)인 시정(詩情) 및 시적 요소(poetry)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서양에서는 세부적으로 형식과 정서를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문인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옥타비오 파스가 자신의 저서 『활과 리라』에서 주장한 시의 개념을 살펴보면 시인들이 시를 쓰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되어 적어 본다.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들숨과 날숨이며 근육 운동이다.
시는 무의식의 승화이자 보상이고 응집이다.
시는 경험이며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시는 고독한 자의 말이다.
시는 여기-지금의 탐색이다.
시는 순간이지만 절대를 엿볼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관점이다.
시는 타자성의 회복이다.
시는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세상이 되고자 하는 초월이다.
시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여기와 저기의, 너와 나와 그와 우리들의 순간적 화해다.
시는 현존이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에서
이처럼 시의 정의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시인이나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의적으로 주장해 왔지만, 여전히 시의 정의를 내리기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에드거 앨런 포는 “시란 미(美)의 운율적인 창조이다”라고 말했고, 매슈 아널드는 “시는 인생의 비평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견자見者와 타자他者
한 편의 시를 쓸 때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이 과정에서 첫 번째로 알아야 할 부분이 시의 ‘소재’ 선택이다. 즉 소재(제재)를 정하는 일이다. 소재를 정하는 일이 시작(詩作)의 출발점이다. 시 쓰기 5단계 중에서 어느 단계이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히 ‘소재’ 선택은 시작(詩作)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으로 강조된다. 그러나 소재의 선택은 선택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그 사물을 보고 누구도 알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나 새로운 세계가 발견되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은 견자(見者, voyant)가 되어야 하고, 이 견자가 되려면 타자(他者)가 되어야 한다.
이 ‘견자론’과 ‘타자론’은 주지하듯이 아르튀르 랭보(1854-1891년)의 ‘창작시론’은 이른바 ‘견자(見者)의 편지’로 불리는 두 통의 편지에 집약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랭보가 샤를빌중학교 재학 시절 담임교사였던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1871년 5월 13일에 보낸 편지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틀 뒤인 1871년 5월 15일에 그 스승의 친구이자 저명한 시인이었던 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랭보의 나이가 17세 되던 해인 1871년에 발송한 이 편지에서 ‘견자(voyant)’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견자가 되는 것은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하여 미지(未知)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때의 ‘미지(未知)’는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와 같은 시인들이 추구하던 공통의 목적지로서, 정신과 언어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모든 시인은 시적 대상을 보고 일상의 눈으로 발견한 의미를 시의 소재로 삼을 것이 아니라 타자가 된 견자의 눈으로 발견된 미지계(未知界)를 소재로 삼아야 한다.
랭보의 ‘견자론’이란 시인은 모든 감각의 뒤틀림에 의해 견자가 된다는 주장이다. 랭보는 ‘견자(見者)의 편지’로 불리는 두 통의 편지에서 의식적으로 ‘견자’로서 고통의 세상을 바라보고, 또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목격하고, 어떤 사람도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시로써 표현해 보겠다는 의미심장한 다짐이다. 그렇다. 시 쓰기 1단계인 ‘소재 선택’은 노래할 대상에서 새로운 세계나 미지의 세계가 발견되었을 때 시의 소재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를 쓸 대상인 사물로부터 어떤 세계도 발견하지 못하고, 사물 그 자체를 노래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컨대 ‘꽃’이라는 대상을 바라보고 단순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 또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일반적인 세계이다. 즉 미지의 세계를 발견했다고 볼 수가 없다.
김소월의 「산유화」는 단순히 ‘산에 있는 꽃’으로 본다면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견자의 눈이라 말할 수 없다. 「산유화」가 ‘산에 있는 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김소월은 「산유화」에서 발견한 새로운 세계란 꽃이 피고 지는 자연 현상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근원적 고독감이다. 따라서 시인은 사물의 본질을 일상의 눈으로 바라보려면 평범한 시각, 또는 일상의 관찰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다운 시를 쓰려면 시인은 일체의 인습을 거부해야 한다. 시는 평범함으로부터 비범한 시가 나올 수가 없는 유기체이다. 이런 명제를 배제한 상태에서 시를 쓴다면 무미건조한 시가 나올 수밖에 없다.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시인의 내면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나거나 마음의 깊은 상처, 무엇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trauma) 등과 같은 고통을 많이 경험한 시인일수록 격렬한 창작력이 화산처럼 분출된다.
다시 언급하거니와 시인이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는 견자의 눈을 갖추려면 랭보가 17세에 주장했던 것처럼 시인 자신의 눈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대상(세계)을 바라보아야 한다. 랭보는 ‘감각의 착란’이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여기서 ‘착란’이란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를 뜻한다. 따라서 시인은 그 같은 착란 속으로 자신의 전부를 밀어 넣을 때 비로소 ‘가장 위대한 범죄자’, ‘가장 위대한 저주받은 자’, ‘최상의 박식한 자’가 된다는 것이 랭보의 주장이다. 이같이 시인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 진정한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시인은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고, 그곳이 바로 ‘시인의 본질이 완성되는 상태’이며, ‘견자의 시인’으로서 시 쓰기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다.
견자에 대해 상세하고, 폭넓게 알아야 둘 필요가 있다. 견자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해석해보면 ‘견자’는 ‘남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 자’, ‘통찰력을 갖춘 자’, ‘깨달음을 얻은 자’, ‘초자연적 본질의 세계를 파악한 자’, ‘신의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 등과 같은 능력을 갖춘 시인이다. 이같이 모든 시인은 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견자가 되려면 또 하나의 벽을 또 뛰어넘어야 한다. ‘나’라는 주체를 버리고 ‘타자’라는 객체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견자’가 되려면 ‘나’라는 주체가 ‘타자’로 전환 되어야 한다.
시인은 즉, 시 창작의 주체인 ‘나’가 ‘타자’가 된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국외자가 되는 것”이다. 그 까닭은 시적인 추진력은 신의 자기 훼손, 고의적인 추화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이다. ‘경험적 자아’인 ‘나’의 존재가 ‘타자’가 되어야 ‘미지의 것’을 직관하는 시를 쓸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세계나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견자’가 되려면 ‘타자’가 되어야 한다. 시인은 일반적인 사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나’가 ‘타인’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내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이미 주관이 개입되어, 객관성을 잃게 된다. 그래서 시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것은 시가 1인칭 문학에 해당하지만, 사물을 바라볼 때는 ‘타자’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타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누구도 알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 시인은 사막을 사랑하고, 가뭄을 사랑하고, 해일과 태풍을 사랑해야 한다. 폭설을 사랑하고 천둥과 번개를 사랑해야 한다. 지칠 대로 지친 삶의 애환과 더러는 치유할 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노래해야 한다. 감정으로부터 지나치게 매료되거나, 일정한 규격을 흠모하는 시선, 환희와 낭만을 벗어날 수 없는 고정관념으로는 결코 미지의 세계를 발견할 수 없다. 또한, 시인은 시적 대상을 바라볼 때 정면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기울어진 상태이거나 비대칭적이어야 한다.
아르튀르 랭보는 ‘조화로운 삶을 노래’한 고대의 시에서부터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를 ‘리듬을 붙인 산문’이라고 통박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것은 ‘우둔한 세대들의 장난이며, 무기력함’이라고 힐난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이 ‘견자의 편지’에서 ‘구리쇠가 잠깨어 나팔이 된다고 하여도 구리쇠의 잘못은 아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이 ‘구리쇠’가 지난 2천 년 동안 인류의 시문학이라면, ‘나팔’은 랭보 자신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랭보는 “나는 새 사상의 개화를 목도한다.”라고 천명하면서, 견자를 향한 의지를 ‘견자의 편지’에서 다짐했다. 이처럼 랭보가 ‘미지의 그곳으로 도달’하는 것을 시의 최종 목표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인도 견자가 되어야 하고, 여기에서 ‘견자’는 랭보가 꿈꿔오던 ‘미지의 것을 직관하는 견자’인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도 그의 저서 『활과 리라』에서 타자성(他者性)을 강조한 바 있다. 타자성의 개념은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도외시 되는 인간의 성질을 뜻한다. 옥타비오 파스는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철』의 시문학사적 의의를 논하면서, 현대시의 변증법적 상호 투쟁 양상을 적시했다. 즉 랭보의 시는 시적 경험에 대한 비판이며, 언어와 의미에 대한 비판이며, 시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시적 언어는 언어의 부정을 먹고 자란다. 이렇듯 랭보는 ‘시에 대한 단죄’를 선언하면서 시를 시작했고, 현대시의 위대한 금자탑을 떠받드는 초석이 되었다.
많은 시인이 랭보의 ‘견자론’과 ‘타자론’을 왜 이토록 열광하는가에 대해 온전하게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랭보는 열다섯 살의 나이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스무 살에 붓을 꺾었다. 그리고 집을 떠나 노동자, 용병, 노무자, 무역상, 탐험가, 무기 거래상 등으로, 유럽과 중동을 포함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편력(遍歷)하며, 부초처럼 떠도는 방랑자로 삶을 영위하다가 서른일곱 살에 안타깝게도 객사하였다. 인간이면 누구도 꺼렸던 일들을 랭보가 자처하였던 것은 미지의 세계를 찾아내는 능력, 그것이 견자이며, 이런 견자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체화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랭보는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백일장에 참가하였고, 그것도 라틴어로 시를 지어 장원에 당선되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이놈의 머릿속엔 평범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악’의 천재가 되든지, 아니면 ‘선’의 천재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살아온 천재 소년이다. 또 열일곱 되던 해에 프랑스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그 유명한 시 「모음들」과 「취한 배」를 쓴 천재 시인이다. 같은 해 1871년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이 봉기하여 수립한 혁명적 자치 정부였던 파리코뮌(Paris Commune) 때에 자신의 스승이었던 조르지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가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노동자가 죽어가고 있습니다.”라면서 “저는 노동자가 될 것”임을 선언했던 풋내기 혁명가다.
랭보는 청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폴 베를렌을 비롯한 당대의 기라성 같은 대시인들과 교류를 했으며, 또 「꽃에 관해 시인에게 말함」이라는 풍자시를 테오도르 드 방빌에게 보내어 금전욕과 물질주의에 빠진 현대사회의 타락상을 비난했던 이단아다.
이처럼 랭보가 프랑스 시사에 신화적인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그의 시가 기존의 시인들이 쓴 시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과 새로운 언어라고 할 수 있는 ‘공감각적 언어’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적인 운문형식의 시를 파괴하고 최초의 자유시를 썼다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불과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시인이란 어떤 자인가’에 대해,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파격적인 시인론에 힘입은 바가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랭보가 주장했던 ‘견자론’이나 ‘타자론’과 같은 원형적인 자기 다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랭보의 ‘견자론’과 ‘타자론’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1871년 5월 15일 자로 조르지 이장바르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랭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저는 최대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구요? 전 시인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위대한 견자(Voyant)가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실 터이고, 저는 선생님께 도무지 설명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모든 감각의 방탕을 통해서 미지계(inconnu)에 도달하는 것이 관건이니까요. 어마어마한 고통입니다. 하지만 강해져야 하고, 시인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저는 제가 시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건 전혀 제 잘못이 아닙니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한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말장난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타자입니다. 자신을 바이올린이라고 생각하는 나무라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궤변을 늘어놓는 몰지각한 자들은 엿이나 먹으라지요.”
이 편지에서 랭보는 자신의 ‘견자론’과 ‘타자론’으로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시인론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먼저 타자론을 살펴보면 랭보는 “나는 타자다(Je est un autre)”라고 했다. ‘나’는 어떤 이유로 ‘타자’일까라는 말에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궤변이 아니다. 즉 ‘나라는 인간은 다른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시인을 가리키므로, 결국 ‘나는 타자’라는 표현은 ‘시인은 다른 인간’이라는 의미로 귀결된다. 그러나 ‘다른 인간’이라고 하여 ‘나’와 전혀 무관한 ‘절대적인’ 타자가 아니다. 그것은 ‘나-나무’와 ‘나-바이올린’의 관계와도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폴 드므니에게 보낸 「견자의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편지에서 랭보는 “나는 타자이기 때문입니다. 구리가 나팔로 깨어난다고 해서, 구리의 잘못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제겐 명명백백합니다”라고 말했는데, ‘나-구리’가 ‘나-나팔’로 변신했다고 해서 책망당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요컨대, ‘타자론’의 요지는 ‘나-시인’은 ‘나-다른 인간’이라는 데에 있다. ‘다른 사고’를 하고, ‘다른 언어’로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본분이자 사명이라는 것이다. 시인 랭보는 ‘시인은 모든 감각의 방탕을 통해서 나’를 알고 ‘미지계(未知界)’를 탐험하는 자라고 했다. 랭보는 1871년 5월 15일 자에 두 번째로 폴 드므니에게 보낸 「견자의 편지」에서 ‘견자론’을 더욱 구체적화하고 있다.
나는 감히 견자이어야 하며, 의식적으로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로 만듭니다. 사랑과 고통과 광증의 모든 형태가 다 그런 것입니다. 시인은 그 자신을 추구합니다. 자신의 몸속에 모든 독소를 걸러내어 오직 그 정수만을 간직하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신앙과 초인적인 모든 그의 힘이 필요할 수 없는 고역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가장 위대한 죄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범죄자, 가장 위대한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의 박식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영혼을 단련해서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누구보다도 풍요해진 영혼을!
그는 미지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미쳐 날뛰며, 자기 환각들에 관한 지식을 상실하고 말 때 그는 반드시 그 환각들을 볼 것입니다. 그는 지극히 엄청나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사물들에 의한 약동 속에서 죽어도 좋습니다. 그때에는 가공할 만한 다른 작업자들이 올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쓰러진 바로 그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랭보가 말하는 시인-견자는 스스로 자기를 파악하고 스스로 자기를 정립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단, 한 가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이성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최대한의 방탕한 자유를 만끽하는 감각들의 ‘광기’를 통해 자기인식에 이르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다. 즉, 견자의 코기토는 이성의 코기토가 아니라 감성의 코기토이다. 그런데 감성 코기토의 광기로 자기인식에 이르려는 시인에게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시련이 있다. 그것은 ‘자기 내면의 온갖 독을 다 짜낸 뒤 오로지 그 진액만’을 추출해서 간직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독성이 미미한 황제 전갈에서 치명적인 독을 가진 ‘죽음의 추적자’라 불리는 이스라엘 사막 전갈로 변신하는 과정이다. 요컨대, ‘사이비’ 전갈이 아니라, ‘진정한’ 전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괴물 같은 영혼’의 소유자로, ‘자신의 얼굴에다 무사마귀를 심어 키우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숙명의 고통’이고 ‘침묵의 고문’이 아닐 수 없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ergo sum)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초인간적인 힘’으로 이겨내야 하는 혹독한 시련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위대한 병자’이며, ‘저주받은 자’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련을 이겨냈을 때만이 비로소 시인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혜안과 미지의 세계를 투시할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진 견자, 즉 ‘지고로 위대한 현자’로 거듭날 수 있다.
시는 왜 쓸까
시인은 물질과도 멀리 떨어져 있고, 명예와도 그렇게 가깝지 않다. 권력과는 더욱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시이고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얻기 위해 시인은 시를 쓰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수없이 많다. 따라서 시인은 왜 시를 쓰는지에 대한 목적을 분명하게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목적 없이 시를 쓰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부조리한 사회와 부도덕한 규범과 싸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시인도 시인이 아니다. 시인은 시인이 먼저가 아니라 시가 먼저다. 시보다 시인을 앞세우는 시인은 허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시가 시인에게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시에 종사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또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슬퍼할 줄 알아야 하고, 비겁한 행위에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시인은 흔한 것일수록 더욱 귀히 여기는 품위를 가져야 한다. 흔한 것이 귀한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대부분 정신이 나약한 시인일수록 자기감정에 빠진다. 이것이 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시적 태도다. 시를 철학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시는 문학이다. 철학과 문학은 엄연히 구분된 학문이다. 시를 철학으로 생각하고, 시를 쓰는 시인의 유형을 보면 시 속에 아는 체하는 의식을 자꾸 끌어다 넣기를 원한다.
평소에 학생들에게도 강조해 왔지만,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반성이며, 자기성찰이다. 이것을 통해 시인은 자기 구원을 얻는다. 더 나아가 자기 구원이라는 목적은 인류구원이라는 대명제의 세계로 진정 확대된다. 그러나 시인의 반성과 성찰은 사물의 이치를 자각할 때만이 가능해진다. 그 자각은 깨달음이고, 이 깨달음은 완성된 자비의 본질이다. 한발 더 나아가 완성된 의식의 결과이고, 이 의식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우리들의 도리이다. 이런 도리를 실천할 때 시인은 자신을 스스로 실천의 도구로 삼거나 부정한 장애물을 뛰어넘어 공리적 가치를 추구할 때에 도(道)에 이른다. 결국, 시를 쓴다는 것은 도(道)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이런 시인의 시 쓰기는 시의 소비자(독자)들에게 정서함양과 인성 제고, 그리고 불안한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는 혜안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래서 시는 쾌락적 기능(즐거움)과 교시적 기능(교훈)이라는 두 가지의 문학적 기능을 염두에 두고 시를 써야 한다. 문학적 기능을 벗어난 시를 쓴다면 그 시를 읽는 사람들로부터 만족할만한 공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실패한 작품이다. 예술의 카타르시스(catharsis)는 감정만이 정화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된 규범과 제도에 대해서도 정화할 수 있어야 한다.
시는 시인의 자기감정을 단순히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자기감정일지라도 모두(冒頭)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감정을 보편화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시인의 개인적인 푸념으로 치부되기 쉽다. 힘들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시를 써야 한다. 자기 푸념은 절대로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고, 어떤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삶을 영위하는 데에 독자들도 지쳐 있는데, 시인 개인의 푸념까지 받아줄 마음의 여유도 없거니와 친절하게 그 푸념을 받아줄 독자는 한 사람도 없다.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절망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 땅에 모든 시인은 시를 통하여 부패한 세상과 악한 것들을 순화시키고, 때로는 추방하는 사람들이다. 또 시인은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더 고양된 정신세계를 걷게 하거나 즐거움을 주어야 하고, 어떻게 사는 길이 올바른 삶인지를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시인은 삶이 추운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언어로 보듬어주는 마음과 눈이 발달해 있어야 한다. 시는 감정을 유희하는 작업이 아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과 독자들에게 항구적인 정서를 제공하거나 시의 미적 가치를 생산하는 시인이어야 한다. 그런 연유로 시인이라는 사실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는 시를 쓰거나 한낱 명함용 라이센스(license)로 생각하며, 시를 쓴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이다.
현대시의 기법
시의 창작기법은 논의하기에 앞서 먼저 올바른 현대시의 이해가 필요하다. 현대시라는 용어는 전통시(서정시)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즉 현대시의 사전적 의미는 ‘지금의 이 시대에 알맞은 특성’이라는 뜻을 지니며, 문학에서 말하는 현대시는 현대성(modernity)이라는 성분이 시 속에 배어있어야 한다. 즉 현대성이란 M. 칼리니스쿠(Kalinescu)가 그의 저서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에서 주장했던, 현대시가 지녀야 하는 다섯 가지의 성분을 말한다. 그 성분이
1) 모더니즘(Modernism),
2)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3) 아방가르드(Avant-garde),
4) 데카당스(Decadence),
5) 키치(Kitsch)이다.
모더니즘은 현대문화를 이끄는 가장 대표적인 정신적인 세력이다. 지금까지 지켜오던 전통의 규범들을 모조리 배척한다. 보통 근대주의라고 부르는 모더니즘은 18세기에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가 신봉했던 이성(합리성, 논리, 경험적 실증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과학적 발견과 산업혁명에 의한 기술적 실현이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가져오리라는 신념,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자본에 의해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번영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먼저 모더니즘은 이성적 사고에 의해 시적 대상을 파고 들어가 중심에 있는 그것을 찾아내고, 찾아낸 것을 시화(詩化)하는 일이다.
모더니즘은 근대의 대도시 문화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산업사회의 도래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 학문, 예술 등 삶의 모든 분야를 주도하고 지배하는 문화적 성격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인 부르주아적 모더니즘은 사회의 모순에 예민한 예술가들에 의해 중산층의 위선적 속물근성(philistinism)으로 비치면서 근대의 자기분열 현상이 일어났다. 바로 이성을 앞세워 중심을 뚫고 들어가 계급사회를 만드는 자기모순을 합리화하는 것에 대해 거부하는 세력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암시하는 바와 같이 모더니즘으로부터의 탈출과 대안이라는 양면적 성격을 갖는다. 모더니즘이 과거의 전통과 단절하고 ‘이성(합리성, 논리, 경험적 실증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과학적 발견과 산업혁명에 의한 기술적 실현이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가져온다는 신념,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해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번영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를 토대로 삼았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가 합리주의의 이름 아래 재구성해 낸 자기 이해와 과거와의 관계설정을 모든 의문에 부치고 또 하나의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려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처음부터 모더니즘의 허구를 지적하고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자 한다. 즉 이성을 비판하면서 표층에서 중심으로 뚫고 들어가 본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주장이다. 모더니즘이 계층적 구조(모더니즘의 사회)를 가졌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수평적 구조(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의 구조다. 사회학에서 모더니즘의 사회,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로 부른다면 문학에서는 노마드(nomad, 유목민)적 사유로 일컫는다. 노마드적 사유는 차이와 반복을 낳으면 미끄러지고 횡단하며 결과를 말하지 않고 연기한다. 그래서 모더니즘이 대칭적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대칭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횡단하고 가로지기로 사유가 자유롭다. 이런 사유로 쓴 시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라고 하며, 소위 현대성, 즉 모더니티가 들어있는 시이고, 이것을 현대시라고 칭한다.
또 M. 칼리니스쿠의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중의 하나가 아방가르드(Avant-garde)이다. 시위대의 맨 앞에 서는 ‘전위대’나 ‘전술’을 뜻하는 것으로 영원하고 불변하는 미와 진리의 기준에 대한 전투적인 반발과 미래의 세계에 대한 선구적 모험과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을 내포하는 신념체계이다. 시단(詩壇)에서 말하는 실험시가 이에 속한다. 어떠한 세력일지라도 아방가르드 자신보다 새롭거나, 앞서가는 꼴을 용납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늘 앞장서서 태양 아래에 하나밖에 없는 새로운 것을 최초로 창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세력이다. 아방가르드의 근원은 낭만적 유토피아주의로서 모더니즘보다 더 급진적이고 독단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아방가르드는 그 모든 구성요소를 모더니즘으로부터 빌려 오지만, 그것들을 과장하고 뒤죽박죽으로 만들어서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네 번째의 ‘모더니티 얼굴’이 데카당스(Decadence)이다. 인류의 타락과 미래의 어두움을 상징하는 데카당스는 고대의 모든 신화에서 나타났던 파괴와 몰락의 이야기에 이미 드러나 있다. 당시의 유명한 프랑스의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의 말을 빌리자면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사고 및 모호한 것을 표현하고자 하면 신경증과 타락할 정도의 열정과 광기와 환각을 번역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데카당스다.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자고 일어나면 아버지가 죽어가고, 자고 나면 형이 끌려가 죽는 나날이 계속되는 한 내일은 오늘보다 더 타락한 세상이 올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재에 가장 아름다운 예술 활동으로 최고의 미(美)를 창조하는 아티스트가 되고, 동시에 머리도 깎지 않으며, 내일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지금 남아 있는 술을 모조리 퍼마시자는 세력으로 그들은 평화를 사랑했다.
마지막으로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중에 독일의 극작가 베데킨트에 의해 부각된 키치(Kitsch)라는 예술형식은 일종의 ‘가짜예술’로서 진정한 예술 경험에 대한 대체경험이며 거짓 감각을 의미한다. 키치는 지속적으로 소비되도록 유행에 따라 변하면서도 모조품으로서 항상 동일한 형상으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이발소에 걸려 있는 과사용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는 모나리자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또 고려청자를 흉내 낸 주방 선반에 놓여있는 사기 주발이 키치에 해당된다. 신흥 부유층의 과시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급조된 고급 예술품들로부터 연애소설과 싸구려 브로마이드(bromide)에 이르기까지 키치는 대중의 소비와 손쉬운 만족과 연결되어 있다.
키치는 환경의 장식과 여가의 만족을 위해 계속 ‘아름다운(예쁘장한, 재미있는, 선정적인) 가상’을 만들어 내며 재미와 흥분을 제공해 준다. 오늘날의 문화산업은 대중의 기호에 부응하기 위해 키치의 특징인 유아적 퇴행과 과잉자극을 제공한다. 즉 문화산업에 의해 어느 분야에서 아방가르드적인 새로운 형식이 대중의 호응을 얻으면 그와 유사한 키치문화가 대량으로 복제된다. 우리나라의 조직폭력배 영화나 멜로드라마, 에로비디오도 이러한 키치의 일종이며 비슷비슷한 댄스그룹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대중음악계 역시 전형적인 키치 현상이다.
지금에 이르러 시창작의 방법은 예전보다 많이 진화한 것만은 사실이다. 의복이 유행을 타듯이 시단(詩壇)의 시에도 시류(時流)라는 것이 존재한다. 가령 사람은 사유(思惟)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한곳에 머무르는 것을 싫어하며, 늘 변화를 요구한다. 즉 인간은 이동의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이동의 습성을 지닌 인간은 이동하면서 일하기를 원한다. 예컨대 유선전화기는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방해한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동하면서도 전화를 사용하여,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휴대폰(무선전화기)이 탄생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스피디(speedy)한 세상에 적응하려면 멀티플레이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주부들도 거실 청소를 하면서 설거지를 하는 초멀티플레이의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AI무선청소기가 발명된 것이다.
문단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현대시의 창작기법 중에서 문장의 마지막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또 문장의 서술어 중에 ‘~했네’, ‘~했구나’와 감탄사에 느낌표(!)를 사용하지 않는다. 서술형은 생동감을 주기 위해 현재형을 사용해야 하며, 한문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이 따른다. 이런 방법이 시를 쓰는 데 있어서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현대시작법에서 요구하는 조건이나 제약은 세월이 흘렀을 때 의복이 유행을 타는 것처럼 시단의 시류(時流)로 여길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러나 현대시에서 이러한 조건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현대의 시류를 무시하고 오랫동안 관행처럼 지켜온 관습적인 전통시의 기법을 고수하는 시인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행은 유행이고 시류는 시류로 보고, 과거의 창작기법의 우월성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에 과거의 창작기법과 차별되는 기법의 하나가 시의 대상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시의 표현은 두 가지로 크게 크게 나눈다. 즉 진술과 묘사의 방법이다. 과거 전통시는 감정이 주체가 되어 시를 썼기 때문에 진술의 방법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감정은 추상적인 개념이고, 이 추상적인 시적 대상을 진술을 통해 시를 쓰는 것이 수월한 방법이었고, 그런 까닭에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반면에 현대시에서 추구하는 표현기법은 시적 대상을 묘사(image)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심상(心象), 혹은 이미지(image)화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대상을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 그 대상을 언어로 그리는 방법을 말한다. 이런 방법에 따라 회화시가 탄생하게 된다. 이때 시적 대상을 묘사(심상)할 때엔 대상을 빗대어 말할 수 있는 보조관념을 잘 이용해야 한다. 그것은 보조관념이 시적 대상을 이미지화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대시는 시적 대상을 언어로 그리는 회화시를 요구한다.
*(이글을 펌하는 자의 생각) 대략적으로 묘사 8, 진술 2 정도가 적당
상상력과 시의 기능
모든 창작 문학작품이 그러하듯이 특히 시도 인간의 삶이 반영되지 않고서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가 없다. 그래서 시를 정의할 때에 릴케는 체험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했고, 이것은 다시 인간의 삶에 대한 새로운 가치평가나 다름이 아니다. 그래서 시어나 시행, 또는 연마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전제로 할 때, 시는 어떤 주제를 노래하더라도 인간의 삶이 반영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체험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된다. 시는 이미 체험한 인간의 경험을 재구성이라는 재생을 통해 사람들을 반성하게 하고, 성찰하게 만들고, 깨닫게 함으로써 자기 구원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를 쓴다는 것의 본질은 자신을 위한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고대의 시인들은 종교나 정치의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사회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시인들은 또한 전쟁의 역사를 노래하고, 권력을 비판하고, 인간의 무상한 삶을 노래하고 한때는 신들을 찬양했다. 신 중심의 사회에서는 신을 예찬했지만, 왕이 중심이 되는 시절에는 왕을 찬양하는 시를 썼다. 그러므로 포악한 왕은 자신을 찬양하지 않는 시인들을 죽였고, 반대로 훌륭한 왕은 시인들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시의 이런 기능은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로 이어오면서 시인들은 이런 권력이나 실제적ㆍ현실적 효용보다는 근대 미학의 특성인 이른바 순수예술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현실적 효용성보다는 시 자체의 아름다움, 그러니까 현실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혹은 현실과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에 몰두한다.
이렇게 시 자체를 사랑하는 태도는 현실과 다른 공간, 곧 상상력의 세계를 강조하고 상상력의 세계는 과학적 진리도 아니고 종교적 진리도 아닌 이른바 미적 진리를 추구한다. 이런 근대 미학이 심화하면서 이제 시인들은 단지 시 자체를 사랑하는 태도에서 한 걸은 더 나아가 언어 자체에 관심을 두게 된다. 시인들은 부패한 사회적ㆍ일상적 언어를 순화하고 정화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사회적‧일상적 언어가 소유하는 가치나 기능과는 다른 시적 언어의 가치를 추구하고, 나아가 사회적‧일상적 언어를 파괴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파괴가 노리는 것은 새로운 언어, 사회, 유토피아다. 결국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자각이 심화하면서 우리가 맞이하게 된 것은 시적 언어의 특성에 대한 성찰이고, 이런 언어가 소유하는 사회적‧현실적 가치와 기능이다.
시의 기능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세계경제포럼〉의 회장(창립자)을 맡고 있는 독일의 클라우드 슈바프가 ‘2016년 세계경제포럼’에서 주창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사는 시인들은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초지능, 초연결, 초융합이다. 이 혁명의 핵심을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면 사물 인터넷(IoT), 인공지능(AI), 로봇공학, 자율주행, 3D프린트, 나노기술(NT), 블록체인(Blockchain) 등과 같은 기술 혁신이다. 또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지능을 가진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여 일을 하거나 인간과 공존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형 법무법인 베이커 앤 호스테틀러(Baker & Hostetler)가 ‘인공지능(AI) 로봇 변호사’를 채용했다. 2016년 5월 16일에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인 로스 인텔리전스가 제작한 로봇 변호사 ‘로스’(ROSS)는 ‘인간’ 변호사 50명과 함께 파산 관련 업무를 맡는다는 기사를 냈다.
앞에서 워싱턴포스트(WP)가 말한 것과 함께 공업화로 인하여 도시의 노동자들은 폐쇄된 공간에서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하도록 만들어 생산성 향상에 전념토록 강요함으로써 인간의 지위는 이미 상실되어 가고 있지만, 그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할 방법은 묘연해 보였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학자인 보웬과 보몰은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방법은 문화예술로서 가능하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왜 사회는 인문학(문학, 철학, 역사학)을 요구하는가이다. 그것은 기계 중심에서 인간중심의 사회(제품)로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때문이며, 또한 새로운 제품 개발에서 한계점을 보여 왔던 기술력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만든 원인이다.
무한경쟁과 급변하는 기술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지속적 혁신은 단순히 최첨단 기술만의 지향이 아닌, 사람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인문학적 토대로 실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상상력을 무기 삼아 창작활동을 하는 시인의 역할이다. 지금은 기술의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전 애플의 회장이었던 스티브 잡스와 같은 전문가들이 속속히 내놓고 있다. 많은 국내·외 ICT 관련 기업들도 인문학적 접근으로 차별화와 창의성에 기반을 둔 성공적인 기술 혁신 제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그러한 노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스티브 잡스(前 애플 회장)는 2011년 iPad2를 런칭(launching)할 때 “애플의 DNA는 우리의 가슴을 노래하게 하는 기술과 인문, 교양의 결합”이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제품 혁신은 단순한 기술상의 진보를 넘어 ‘인간중심’이라는 철학과 새로운 기술이 결합하여야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 기술적 우위만으로 시장에서의 성공 보장이 어렵다.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장’과 ‘시장’에서 구매자의 역할을 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시장’과 ‘인간’을 이해하려면 ‘시장’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insight)을 갖추어야 한다. 이 통찰은 인문학에서 나오는 힘이며, 그 중에서도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능력이라 할 수 있는 바로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은 문학의 장르 중에서 시가 가지고 있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상상력은 감각과 오성을 종합해 현실적 인식을 성립시키며, 감각을 통해 현실에서 체험하는 것과 사유하는 것을 연결해주는 의식적 장치이다. 이 말은 결국 상상력이 특수한 능력이 아니라 능력을 조직화하는 양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코울리지(S.T Colerige)는 “예술적 상상력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다. 일상적 인식의 세계와 같은 것이기는 하나 재구성하기보다는 고도한 보편의 차원으로 승화된 세계를 창조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해즐리트(Hazlitt) & 셸리(Shelley) 역시 ‘시’는 오직 ‘상상의 언어’이며, ‘상상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시는 상상력의 산물로써 산업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상상력은 알지 못하는 사물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사물을 관조하고 그것을 상상력으로 변용시켜야 한다. 다시 말하면 상상력은 사물을 상식이란 이름의 인습이 거울에 비친 그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는 태도로 지금까지 해오던 것으로부터 탈피하여, 다른 새로운 각도에서 낯설게 변용하여 바라보게 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이 이론화를 추구하는 지적 사유능력에 의존한다면 예술은 예술가의 상상력에 의존한다. 상상력은 특수한 현상과 보편적인 예술이념과 종합하여 자연계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또한, 제작의 모든 과정에 들어가 체험의 잡다한 요소들(감각·정서·의미 등)을 융합하고, 생기를 주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상상력은 영감이나 직관처럼 우리의 체험을 새롭게 하고, 나아가 그러한 체험들을 종합적으로 구성해 우리가 현실에서 보지 못한 것을 새롭게 창조하거나 완전하게 한다. 따라서 시인은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문학, 역사, 철학 등과 같은 다양한 시대적 산물을 끊임없이 접해야 한다. 인간을 잘 이해하는 사람만이 조직뿐만 아니라 시대를 이끌어갈 리더로서의 역할을, 세계를 감동하게 하는 따뜻한 기술을 빚어낼 수 있는 것처럼 시인도 이와 같은 것이다.
최첨단 기술을 다루는 SW/ICT 등의 분야도 결국 사람이 활용하는 것이므로 앞으로도 기술 중심이 아닌 인간중심에 바탕을 두고 계속 진화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계몽주의자 달랑베르(1717~1783)는 학문을 분류할 때 기술 혁신의 출발점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본질적인 해답 찾기는 ‘기억의 축’으로 보는 ‘역사’가 있고, ‘이성의 축’으로 보는 ‘철학’이 있으며, ‘상상의 축’으로 보는 시학(詩學)이 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창조적 상상력의 기본은 시, 소설, 디자인, 음악 등에 있다고 했다.
시는 문학이다. 따라서 시를 쓰는 것은 인간의 정서를 전달하여, 성찰과 반성, 깨닫게 함으로써 자기 구원을 이루고, 더 나아가 인류를 구원하고, 결국은 자신을 도(道)에 이르도록 만든다. 시는 인간을 인간다움을 찾게 해주는 일이다. 종속된 물질로부터 이탈을 유도하기도 하며, 사회문제를 해결하거나 통합하게 한다. 시는 인간을 연구하는 인문학의 범주에 해당한다. 따라서 시의 발달은 인문학의 발달이며, 인문학의 발달은 그 사회구성원을 지성의 집단으로 만든다.
산업혁명의 와중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직업이 있다. 바로 시인이다. 그것은 시인이 오랜 역사의 부침 속에서 소멸하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인은 한 편의 시로 반성하고, 한 편의 시로 성찰을 하고, 한 편의 시로 기도하고, 한 편의 시로 절망으로부터 구원받고, 한 편의 시로 혼탁한 세상을 청명하게 만들고, 한 편의 시로 부조리한 세력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이런 역할은 신이 내려준 시인만이 가지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시(작품)를 쓴다는 것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디자이너이며,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언어에 머슴인 셈이다.
결어
시인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다. 또 달라야 한다, 시인이 일반인들과 차별성이 분명하지 않을 때 시인이라는 신분을 유지하는 데 매우 위태로워진다. 등단 이후에 계절마다 정기적으로 간행되는 계간지 그 이상의 문예지로부터 원고청탁이 없는 것에 대해 얼핏 문예지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원고청탁서를 받지 못하는 시인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최소한 시인이라면 랭보가 말했던 견자(voyant)가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시인에게는 견자의 질곡에 스스로 갇혀야 하는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시인은 타자(他者)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서도 필연적이고, 숙명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마음의 태도를 절실하게 취할 필요가 있다.
시인으로서 랭보의 ‘견자론’이나 ‘타자론’에 대해 시인들 사이에 치열한 토론이 필요하기도 하고, ‘견자’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세미나도 필요하다. 무엇이든 처음 시도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지만 시인은 견자가 되어야 하고, 견자로서 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시인은 견자로서 사물의 깊이와 넓이와 질량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데 혈안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시인으로서 숙명적인 일이며, 또 숙명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시인은 왜 시를 쓸까라는 명제에 대해 지금까지 논의해 보았다. 시를 쓰는 일은 자기 구원이며, 자기성찰이며, 자기반성이다. 이것은 다시 자기 구원으로 귀결되고, 인류의 구원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이 인류의 구원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주의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달으며, 결국 시인 자신이 도(道)에 이르는 일이다. 따라서 시인이 인류의 구원에 주체가 되려면 일반적인 사람들이 사유하는 것과 같아서는 안 된다. 남다른 통찰력이나 직관으로 불확실한 미래로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 적어도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혜안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 시인을 독자들은 필요로 한다. 또 시인은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심을 버리지 않도록 집단 지성이 유발하는데 불쏘시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역할이란 분열하는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이며, 혼탁한 사회를 투명한 사회를 정화하는 일이다. 또 다변적이고 복합 다다한 현대에 이르러 산업사회의 고도화로 인하여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역할에도 서슴없이 나서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 시인은 많으나 시는 없고, 시는 많으나 시인이 없다는 암울한 경구들이 나돌아다니는 현대에 살고 있다. 시인은 한발 앞서기는 사유로 절망에 빠진 세계를 구원하는데 조금도 망설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가을 연못 같은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 The End
-출처 : 심은섭, 시집 『천마총엔 달이 뜨지 않는다』의 시론
심은섭 시인
⦁2004년 『심상』으로 시인 등단
⦁2006년 〈경인일보〉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08년 『시와세계』로 문학평론 당선
⦁시집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외
⦁평론집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 외
⦁수상 〈제22회 박인환문학상〉 외
https://naver.me/GkRrOZst
견자시학 랭보
견자 시인으로 불리는 랭보는 감각의 착란과 언어의 연금술에 의해 현실과 다른 세계의 비전을 제시한 천재 시인이었다. 평상적인 경험과 습관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완전히 계시에 의해 빚어지는 듯한 비전을 제시하였으며 보들레르가 시작한 산문시를 적극적으로 계발하기도 했다. 사물이 배후에 지니고 있는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평소의 습관과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을 냉철히 투시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감각을 평소의 무뎌져 있는 상태에서 예리하게 분리하여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지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반항과 방랑의 어린시절을 보낸 랭보는 경이로운 조숙성과 때 이른 절필로 일찍 전설의 세계로 편입하였다. '견자(voyant)'시학에서 랭보는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고 세상의 비밀을 꿰뚫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그는 새 시어를 창조하고 이른바 '언어의 연금술(alchimie du verbe)'에서 불경스러운 비전과 색감짙고 진동하는 음의 울림을 뒤섞으면서 시의 혁신에서 출발하여 세상의 전복을 꿈꾸었다.
見者le voyant = the indicator
예견자..
출처: 네이버 지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