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스물 아홉. 실험극장에서 김아라(연극 연출가)씨가 「에쿠우스」를 무대에 올린다고 했다. 김아라는 극단 「무천」을 조직 중이었다. 이때 김아라가 에쿠우스의 알런役을 제의해 왔다.
『열일곱 살짜리 소년役을 소화하기엔 내 나이로는 무리입니다』
『괜찮아요.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하긴 얼마나 맡고 싶었던 알런役인가.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알런役을 해 볼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한여름 6, 7, 8월을 내리, 잠자는 시간만 빼곤 연습에 매달렸다. 체중이 7~8kg이나 빠졌다. 상대역(다이사트 박사)은 탤런트 신구였다. 9월에 무대에 올랐다. 호평이었다.마침 이 연극을 드라마 작가 나연숙이 봤다. KBS 담당 PD에게 나연숙은 귀띔했다.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 쿠숑 역을 맡을 배우를 찾았다. 「에쿠우스」에서 알런 役을 맡은 친군데, 최민식이라고 하더라』
최민식은, 낙하산 출신 탤런트가 된다. 「야망의 세월」의 쿠숑 역으로. 「야망의 세월」은 1990년 초부터 1년 간 방영됐다. 주말 드라마로 시청률 45%였다. 현대건설의 신화적 인물 이명박을 다룬 것이었다. 여기에 정인숙 사건까지 보태졌다는 풍문이 돌며 시청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최민식은 벼락 스타가 된다. 연극 「에쿠우스」 출연료는 한 달 개런티가 50만원이었다. 연습기간 3개월 간은 한푼의 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TV에선 상상도 못할 거금을 안겨 주는 게 아닌가. 눈이 돌았다. 월 몇백만원을 만졌다. 쏟아지는 돈을 주체하기도 어려웠다. 허파에 살살 바람이 들었다. 여기다 TV광고까지 붙어 월수입은 600~70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자가용도 샀다. 내친 김에 결혼까지 했다. 주위에선 악평이 돌았다.
솔직히 민식은 결혼해서까지도 궁핍하게 살고 싶진 않았다. 더구나 남의 집 귀한 딸을 고생시키고 싶진 않았다. 「야망의 세월」 이후 역시 나연숙 극본의 「정든 님」에 출연했다. 그러나 「날마다 장날」은 아니었다. 시청률이 올라갈 줄 몰랐다. 쿠숑으로 한껏 주가를 올린, 민식을 두고 동네사람들부터 소곤댔다.
『왜, 요즘은 TV에 안 나와요?』
할 말이 없었다. 「정든 님」은 악몽이었다. 인기는 곧장 추락했다. 날이면 날마다 들어오던 인터뷰도 딱 끊어졌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期數(기수)별 군기(?)는 대단하다. 나이 어린 선배라도 「선배 대우」는 제대로 해야 한다. 「몽둥이질」은 전통(?)이다』
드라마 「서울의 달」 이후 두서너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시청률은 저조했다. 또 다시 슬럼프에 빠졌다.
1996년 MBC-TV 드라마 「그들의 포옹」에 출연한다. 최민식은 전직 형사役. 심부름센터 소장을 하면서도 형사 근성을 못 버린다. 한 번은 버스 정류장에서 소매치기를 발견하곤 쫓아간다. 이 장면을 촬영하다 보도 블록에 발이 끼여 아킬레스腱이 끊어진다. 모두들 이젠 배우생활은 끝이라고 했다.
그러나 드라마는 목발을 짚고 출연했다. 대본 일부가 수정되긴 했으나 주인공이어서 중도하차하기는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사고까지 겹쳐 허벅지까지 깁스를 해야만 했다. 이때 아내와 이혼한다. 위자료로 全재산을 줬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소형 아파트로 옮긴다. 무위도식한다. 깁스한 다리를 끌고도 저녁만 되면 술을 마셨다. 일쑤 친구들에게 업혀 돌아오는 세월이 반복됐다. 다행히 영동 세브란스병원 한대용 박사의 치료로 불구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배우로서 부활하기가 쉽지 않았다.
『경제적·정신적으로 모두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 나이에 부모님께 손벌리기는 더욱 싫었다. 당초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했던 배우가 아닌가. 제대로 아들 구실을 못했다는 게 맘에 걸렸다. 매일 술에 절지 않으면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었다. 술 먹고 친구들에게 「꼬장」도 많이 부렸다. 전봇대를 이마로 들이받기도 했다』
그러나 주위 친구들이나 친지들은 그런 민식을 따뜻하게 대했다. 박권수 화백(51)은 술에 취해 별 짓을 다하는 민식을 잘도 다독거렸다. 그러나 잡초는 밟아도, 밟아도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