쾰른 대 성당에서, 생각에 잠기다
그의 사춘기 시절 –학창 때에 독일어 선생님은 무척이나 착하셨다.
그리고 여린 마음씨에 아름다운 미모. 살짝 웃음을 머금고 흰 이(빨)를 들어내 보이면,
마흔 아홉 명이 좋아라 할 만큼 키 작은 독일어 여(女)선생님.
그가 독일어를 선택한 것은, 누군가 '불어(佛語)보다 독어(獨逸語) 가 쉽다'라는 말에
'그럼, 나도 독어'라고 했으며, 독어는 제2외국어라는 이름으로 일주일에 두 어 번 정도 그와 마주했지만,
영어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그는, 독어 또한 수학만큼 어려웠고, 그에게 주어진 독어 시간은 대학 수능
시험의 비중치가 눈꼽 만큼 있다는 이유로, 수업 시간에 소설책을 읽었고, 마음 착한 여선생님은 못 본 척하고 하셨다.
아마도 선생님과 그 사이에는 ‘독어’는 시험 가치로써 인정을 받지 못했고, 우리는 묵시적 동의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지금 독일에 있고, 쾰른 성당(Cologne Cathedral)에 가만히 앉아
고딕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를 바라본다. 그의 머리는 텔레비전에서
들려준 '이히 리베 디히 (Ich liebe dich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며 중얼거린다.
‘이히 리베 디히’(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누군가는 사랑해선 안될 게 너무 많다고 슬퍼했지만, 그는 오래된 이 건물을 가슴 한 구석에 담아 두려 한다.
여행을 하며, 그가 흔하게 쓴 언어는 제 나라말이며,
그 깊이는 인사나 감사함에 머물렀지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어(英語)로 말을 해야 되는 경우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인 냥, 혹은 모기 소리를 내곤 한다.
그는 언어의 쓰임보다 시험지에 나올 듯한 문법을 종종 더 신경 쓰곤 한다. 말을 하면서 말을 배우는 게 아니라,
‘준비된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려고 머리 속으로 몇 번이고 단어를 줄 세워 보지만 결국에는 순서가 뒤죽박죽이라는
걱정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한다.
갓 말을 배우는 아기에게 정확한 문장 구사를 통한 언어 표현을 요하며,
그에 대해 시험을 매긴다면 아이는 과연 입을 열 수 있을까.
어쩌면 모국어(母國語) 마저 문법에 대해 신경을 쓰며 우물쭈물하지 않을까. 어떠한 경우이든 언어(言語)는 시험 문제가 되어서는 아니 되고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점수-회화, 소통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언어는 제2 외국어라 하여 홀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언어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불어, 독어를 너머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을 읽혀야 한다.
세상은 점점 좁아지고, 사람의 교류는 활발한데 '영어' 하나에 집착하는 것과 이 집착이 대학을
가는 지름길 내지 지향점 앞에서는 대학을 지양하는 이네들에게는 쓸모 없는 수업으로 변형될 수가 있다. 대학을 가지 않고도 세상으로 나올 수가 있으며, 대학을 가지 않고도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대학 시험 문제집에서 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야 하며,
사람과의 소통이며 교류이기에 완벽한 언어를 통한 채점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학창시절, 그는 독일어 선생님과 마주하고서는 몇 번이나 이야기를 주고 받았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분명 선생님은 그에게 이렇게 우아하고 고고한 성당을 들려주지 않았다.
독일에 가면, 당신이 이제까지 보아온 것과는 또 다른 성스러운 건물이 있으며, 신(神을 향한 인간의 지고
지순한 열정이 위대한 건축물을 탄생시켰으며, 우리는 이를 [위대한 유산]을 보존하고,
나를 다듬거나 가꾸어 가도록 되돌아보는 시간을 한 번 즈음 가진다면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들려주시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간간히 말씀을 건냈을지 모른다.
그때 그는 덩치 큰 아이 뒤편에 바짝 붙어 앉아 삼중당 소설책을 읽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촛불 하나를 켜며 -내 나라의 젊은이들이 다양한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하길 잠시 바래본다.
영어가 시험 문제가 아니길 바래본다.
오후 5시, 스테인드글라스에 서 계신 이들은 모두 기도를 올리고,
성당 안을 서성이는 이는 여행객은 사진을 찍거나 가만히 앉아서, 성당 안에 울려 퍼지는 음(音)을 듣는다.
가슴 깊이 들어와, 심장의 피를 타고 손끝에서 발끝까지 질주한 음은 그를 경악케 한다. 몸은 전율하고,
그는 어디를 본다거나 사진을 찍는다는 모든 행위를 벗어 던지고, 오로지 오래된 교회 안의 나무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
수 백 년을 서 있는 성당, 수 백 년을 노래한 오르간,
아주 짧은 시간을 살다가는 그에게, ㅡ그 짧은 조차도 깃털보다 가벼울 시간 동안 그는 앉아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이야기가 나뉘는 자리. 그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라 한다.
누군가 쾰른에는 볼 것이 성당 밖에 없는데 왜 가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고 들려 줄 런지 모른다. 사람들은 너무 빨리 이곳을 벗어난다.
사람들은 너무 많은 사진을 찍는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자꾸만 보려고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쾰른 대성당에서 2012, 07.01
FROM 손희상 글,..
사설(私說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어느 여행책에서, 쾰른에는 볼꺼리가 성당 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러면 된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 여행자는 자기가 본 것 만큼만 진리인냥 설명을 늘어놓았다.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여행책에 주관을 담는 행위는 주관을 객관화할 우려가 있기에 무척이나 조심하거나
주관을 담을 경우, 깊은 성찰이 이루어진 다음에 글을 녹여 내어야 한다.
몇 번의 여행을 하였다고, 여행 전문가인 냥 글을 쓰는 것은 어리석거나 무모하다.
글은 절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길을 나서는 여행자는 어느 여행자가 들려준 글이 전부이 냥 맹신해서도 아니된다.
그는 무수한 여타의 책을 통해 그 만의 색을 가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내 여행은 언제나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쾰른 성당(Cologne Cathedral), 크기와 역사로 순서를 매김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도시와 그 속의 사람 그리고 역사를 함께 읽어낼 때에 비로소 쾰른 성당은 내게 이야기를 걸어 올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잠시, 성당에 앉았다가 일어선다. 그리고 몇 권의 책을 더 읽고,
다시 쾰른을 스치게 되면 다시 찾아가 잠시 앉아 있다가 올지도 모른다.
첫댓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