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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트랼로프의 실험대가 된 핀란드의 전황은 그를 제외한 대부분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서부전선으로 파견되었던 러시아 원정군의 일부가 노농적군에 합류하고 핀란드에까지 흘러들어오며, 우스트랼로프는 그들의 경험을 받아들이는데 거리낌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탄총을 비롯한 무기의 도입 외에도, 겉으로 ‘민주적 온건파’를 가장한 우스트랼로프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과 나아가 물리적 생명까지 걸린 핀란드 내전에서 무조건 승리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체카 요원과 아나키스트 특공대의 협조를 얻어가며 그는 백군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관료와 장교들의 가족을 상대로 위협과 테러를 저질렀으며, 독극물과 부비트랩의 사용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야만적인 공산당’의 이미지가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아닌 소비에트 러시아와 공산당에 씌워지도록 여론을 흔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핀란드 사회민주당을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으로 포장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죠.
이 계획의 마지막 단계는 우익 공화파까지 포함하는 ‘대연정’ 정부 수립안의 발표였습니다. 내전의 향방을 가릴 탐페레 전투가 적군의 승리로 끝나자, 우스트랼로프는 핀란드에서 친구가 된 공산당원 [이바르스 스밀가]와 함께 정부 수립안에 격렬히 반대하다가 쫓겨나는 ‘붉은 대러시아주의자’로 가장해 여론전을 펼쳤습니다.
핀란드의 소비에트 러시아 가입 요구나 핀란드 공용어로 러시아어 제정 등을 요구했다는 얼토당토않은 헛소문이 거짓이라고 반박하며, ‘자신들이 반대하는’ 대연정 정부 수립안을 상세히 떠드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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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여론전이 백군을 뒤흔들 만큼 아주 강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약한 틈새를 공략하는 데 효과가 있기는 하였습니다. 특히 백군의 총사령관 만네르하임에게는 적지 않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죠.
니콜라이 2세에게 충성하는 만네르하임으로써는 핀란드의 적화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막아야 할 만큼 위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부를 전복하는 것이었죠. 콜차크 제독이 그와의 관계를 단절한 뒤에도 로마노프 황가에 대한 만네르하임의 충성심은 한결같았습니다.
문제는 그를 둘러싼 핀란드 백군의 수뇌부였습니다. 독일 제국은 마침내 전쟁의 승리가 코앞에 다가왔다는 듯 센강으로 번개처럼 진격해 아브빌과 파리에 포탄을 쏟아부었습니다. 독일의 승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여긴 핀란드 백군 내의 친독파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 공자를 핀란드 국왕으로 추대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핀란드 백군 내 공화파는 좌익의 여론전에 ‘정권에 참가한 뒤 좌익을 토사구팽’한다는 핀란드판 테르미도르 반동을 상상 중이었죠.
이윽고 만네르하임은 최후의 수단으로 포르부에 머물러 있던 키릴 대공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키릴 대공은 이미 지노비예프의 이름으로 적힌 우스트랼로프의 ‘망명 후 친소비에트 여론을 조성하는 대신 황가를 데려가도록 노력하라’라는 편지를 받았던 바 있었죠. 만네르하임의 편지는 키릴 대공을 핀란드의 군주로 추대한 뒤,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해 러시아를 공산주의의 마수에서 해방하자는 야심 찬 계획이 적혀 있었습니다.
문제는 눈치 빠른 키릴 대공이 보기에 이 편지는 만네르하임의 진심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키릴 대공을 설득하든 모욕을 주든 어떠한 방법으로든 핀란드에 머무르게 하려는 게 만네르하임의 목적이었으리라고 키릴 대공은 추측했습니다. 러시아 백군과의 관계를 회복하거나 다른 방법을 쓰거나 하는 쪽이었을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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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 대공은 결국 덴마크로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우스트랼로프의 이름이 핀란드 백군에게 알려져 비난과 분노의 대상이 되는 동안, 핀란드 적위대 내 러시아군 최선임자인 [미하일 스베츠니코프]는 스밀가와 함께 우스트랼로프의 오른팔이 되었습니다.
몇 없던 정치적 아군이 생기면서 우스트랼로프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좌파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먼 우스트랼로프는 자신이 주장하는 ‘정치적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는 불변의 신념은 맞으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으로써’ 두 가지를 중시해야 한다는 의미였죠.
그러나 목적이 아닌 과정에 불과한 것은 언제든 수정되거나 훼손될 수 있는바, 우스트랼로프의 그럴듯하게 치장된 설명을 들은 스베츠니코프와 스밀가는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레닌은 독재로 정권을 안정시키고 민주주의를 하려 한다면, 우스트랼로프는 민주주의를 가장해 정권을 안정시키고 독재를 하려 한다’라는 것이었죠.
정치적 다원주의에 대한 그의 화려한 수사도 도덕적인 이점을 가져가려는 입바른 소리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핀란드 적위대 내에서 지휘관 선거제 같은 말도 안 되는 제도를 가차 없이 제거해버리고 형벌부대 등을 만드는 모습이 증거였죠.
핀란드로 내몰린 극한의 상황에서 정치적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혁명이 성공하면 무효화시켜버릴 타협안’ 정도로 훼손해버린 우스트랼로프의 행적은 이러한 스베츠니코프와 스밀가 두 명의 생각을 긍정했습니다. 문제는 우스트랼로프 본인이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단 것이었고, 이는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 줄 몰랐습니다. 자고로 미친 사람은 아직은 자기가 미치지 않았다고 믿기 마련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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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러시아 지도부는 핀란드의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남부전선의 승리에는 고무되었습니다. 비록 남부전선 최고사령관 스워지니치니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린 상태였음에도요. 국방위원 트로츠키는 ‘적기훈장’을 만들어 남부전선에서 활약한 장교들에게 속속 지급하였습니다. 흑군 최고사령관인 네스토르 마흐노, 중국인 연대 지휘관인 요나 야키르, 스워지니치니와 더불어 동부전선에서 활약 중인 [바실리 블류헤르], 체코 군단과 함께하는 표트로프 등이 수훈자였죠.
그러나 잘 풀리는 전황에도 잠시, 1918년 5월 11일에는 이들을 당혹하게 한 소식이 서유럽에서 전해졌습니다. 백일 동안의 파쇄공격을 통해 독일의 공세를 막아내겠다는 협상국의 계획이 대실패로 돌아가고 독일군이 파리를 점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파리의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죄다 부서졌으며 에펠탑은 뼈대만 남았고, 개선문은 반으로 갈라져 무너졌다는 소식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부는 이 소식이 어떻게 도움이 될지 논의하느라 바빴습니다.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다시금 러시아를 쳐들어올 것이란 부정적인 전망, 백군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협상국이 러시아에서 완전히 발을 뺄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 등이 나왔지만 대체로 지금의 내전 정세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할 것이란 전망이 많았습니다. 유럽 대전쟁의 즉각적인 종전을 원하는 멘셰비키들은 탄식했지만, 대전쟁을 ‘유럽 내전’ 정도로 인식하는 레닌은 오히려 유럽대륙이 전쟁으로 완전히 황폐해지고 사회주의 혁명이 전파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죠.
폰 렌넨캄프 사살 사건 이후로 레닌의 미움을 받고 있던 스탈린이 또 ‘유럽 사회주의 혁명은 기대할 수 없다’라고 발언하였다가 공개적으로 레닌에게 비난받는 동안, 독일의 승승장구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지역도 존재했습니다. 바로 핀란드였지요.
독일에 지속해서 도움을 요청하던 핀란드 백군은 ‘단 한 명의 병력도 보낼 수 없다’라는 이유로 핀란드 내전 불개입을 천명한 독일 외무성의 답변에 충격받았습니다. 독일의 입장은 대전쟁의 승리 이후에 핀란드를 돕겠다는 것이었지만, 핀란드의 아무리 머리가 빈 수구 왕당파라도 파리 함락이 대전쟁 승리로 이어지리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즉, 독일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었죠.
결국 1918년 6월, 만네르하임이 스웨덴으로 비밀리에 떠나버리며 백군은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스트랼로프는 기존에 기획했던 대로 계급독재를 배격한 사회민주주의 국가인 ‘핀란드 민주공화국’의 기틀을 잡고, 중도파 정치인인 스톨베리를 수반으로 삼는 대신 사회민주당이 좌익 빅텐트 정당이 되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공작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윽고 백군은 지리멸렬하게 붕괴하였고, 우스트랼로프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면서 정치적인 승리를 얻어올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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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7월 22일, 7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하는 파티가 모스크바에서 열렸습니다. 레닌은 파리 코뮌과 로베스피에르의 공안위원회보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더 오래 지속된 것이 기쁘다는 소감을 밝혔으며, 여러 참석자도 소비에트 러시아가 가건물의 형태로나마 형태를 갖춰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물론 모두가 파티에 참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겨우 시간을 내 참석할 수 있었던 우스트랼로프와 표트로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전선이나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보직이 나오기 전까지 대기발령 조치를 받은 스워지니치니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레닌은 매서운 눈으로 파티장 곳곳을 노려보았습니다.
초법적인 적색테러를 저지른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스테인베르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스워지니치니가 처벌받지 않게 보호했지만, 스워지니치니에게는 적기훈장 수훈 외의 어떠한 명예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극좌파와 온건파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는 레닌의 식견이라고 찬양하기에는 그 동기는 개인적이었습니다. 레닌의 생각에 무장봉기를 통한 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는 자신이어야만 했습니다. 겨울궁전을 습격한 스워지니치니의 존재는 그러한 레닌에게 위협이었죠.
레닌은 제도적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개인숭배를 배격했지만, 자신에게 향하는 개인숭배를 이용할 정도의 냉정함은 있었으며 필요하다면 그러한 개인숭배를 강화할 생각도 존재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7월 혁명의 영웅인 스워지니치니를 강경파로 낙인찍고 자신에게 온건파의 이미지를 씌우는 것도 레닌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지였죠.
문제는 스워지니치니의 머릿속엔 아직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고, 7월 혁명이 예상하지 못하게 일어났듯이 그 불길이 어디로 번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레닌은 이때의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해야만 했습니다.
파티에 참석하지 못한 채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는 카튜셰프는 우스트랼로프와 비슷하게 한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중이었습니다. 차이점이라면 카튜셰프의 뒷배로 노농적군이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었죠. 그의 손으로 재건된 소비에트 러시아의 자치공화국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국제주의자들로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수반은 사회주의 원로인 [미하일로 흐루솁스키]에게 돌아갔고, 각료직은 20~30대의 혁명가들로 채워졌죠. 우크라이나인 수상 [유리 퍄타코우]는 1890년생이었으며, 내무상 [크리스티안 라콥스키]는 불가리아계 루마니아인이었고, 외무상 [안젤리카 발라바노바]는 우크라이나 출신이지만 이탈리아로 이주한 유대계 집안의 여성이자 이탈리아 사회당원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페틀류라의 쿠데타 이전 기존의 관직과 사회체계 등은 유지되었지만, 그 내용물은 훨씬 좌경화된 것이었습니다.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도피한 시몬 페틀류라에 대한 추적도 계속되었습니다. 카튜셰프는 진실 대부분에 약간의 거짓을 섞어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 열풍과 포그롬의 원흉이 페틀류라라는 선전문을 뿌렸습니다. 페틀류라는 포그롬을 ‘지시한’ 적은 없고 일어나는 포그롬을 방조하거나 암묵적으로 권장하여 자신의 정치 행위에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카튜셰프의 선전문에서 페틀류라는 드레퓌스 대위를 핍박한 프랑스 군부를 능가하는 반유대주의의 화신으로 재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선전에 넘어간 유대계 아나키스트들이 그를 암살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향했다는 소문까지 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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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배너 속 인물(부하린, 카메네프, 스탈린, 레닌, 지노비예프, 트로츠키, 퍄타코우)이 다 나왔네요.
첫댓글 이거 빨간색을 황금색으로 바꾸고 밖에 있는 글씨만 빼면 비트코인처럼 보이네요. ㅋㅋㅋㅋㅋ
후회한다라...뭔일이 벌어지길래...?
청년들로 꾸려진 내각.. 역시 혁명은 로망이 있습니다(?)
참고로 라콥스키가 본래 총리인거 빼면 고증입니다
여러모로 어질어질 하네요 ㅋㅋㅋ 신념 버리는 우스트랼로프 + 그걸 아는 동지에, 스워지니치니 풀 견제 거는 레닌, 청년들이 주류가 되는 혁명 내각에 ㅋㅋㄱ
저 퍄타코우는 레닌 유언장에도 나온 거물이었죠. 10월 혁명 자체가 연령대가 대단히 낮은 급진주의자들의 정권장악이었으니..(1878년생이어도 30대니까요)
생각보다 빠른 우스트랼로프 흑화 ㄷㄷ..
아직 겉으로는 정상인입니다(?
소확행 본편에 참가는 안했지만... 이 소설은 재밌게 보고있습니다.
지금 RPG 진행이 이것보다 약간 느린지라 후다닥 쓰고 있습니다 ㅋㅋㅋ 역전당하면..
@렌지파일 근데 체르노프를 카메오로 소설에 출연시켜주실수 있나요? 저는 소확행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대신 제 캐릭터라도 소확행에 참가시켜보고 싶습니다.
@로콘 알림이 많아서 이제야 봤네요. 다른 RPG 등장인물들을 통틀어 카메오 출연이 있기는 할 예정입니다.
@렌지파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