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시작되는 자리/
"딸 아이가 머리를
감지 않고 있는
것이 화날 일입니까?"
이런 물음과 대답,
물음과 대답,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열렸던 '아하!' 체험.
그런 세계가 열렸던
감격의 첫날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때는 새벽 4시였더라.
'아하! 우리가 속았구나.
잘못 생각하고
그래서 잘못 살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일어난 회개의 눈물.
등골이싸늘했던 그 새벽,
몸에서는 무엇인가 나간
듯한 시원함과 가벼움.
눈에서는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하늘은 하늘로,
땅은 땅으로 보여지면서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한
세상을 발견하던 그 밤.
아하! 이것이 계시로구나.
내 생각이 끝나야 하늘이
시작된다고 하는
말이 이 말이구나!
성령의 역사! 거듭남!
이런 감격의 부푼 가슴을 안고
이제는 화날 일이 없는 세상
에서마음껏 살 것 같은
자신감으로 세상에 다시 와서는
처음 얼마 동안은
잘 살아지는 것 같더니,
요즘은 그렇지 못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많은 분들이 시달리고
계시리라 짐작이
되는데 어떻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니까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력하거나 애쓰는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동안 이런 스타일의 삶
때문에 얼마나 지치고
고달프고 기죽어 살았는데
내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거기에다가 또 저도
못질 짐을 지우겠습니가?
화가 일어났는데, 압력이 찼는데,
그것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면
속으로 들어가 속병이
될 수밖에 없지요.
자꾸 참아 두면 그것이
모아져서 어느 한 순간
에 큰 화산이 되어
터질 수도 있습니다.
몸의 원리상으로도 화가 있으면
어떻게든 해소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간을 상하게
하고 각종 질병을
유발하게 되어 있거든요.
세계 의학계에서 인정 받은
홧병, 가슴의 죄입니다.
그렇다고 마구 화를
내고 살 수는 또 없지요.
분냄, 성냄, 격분으로 인해
서로가 상처받고 망가지는
인간 관계가 얼마나 많은지
모두가 체험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우주 여행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가 무엇일까?
사람은 왜 화를 내고 살까?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정말 당연한 것인가?
그런 물음 속에서 여행을 했지요.
잘 보고 다시 보고
다시 듣고 또 들어 보니,
아! 글쎄 화를 내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보여지면서마침내는 화날
일이 없는 세상을 보게 되었고,
거기에서 보니 화는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삶의 한
에너지로 알아차리게 되었지요.
우리 모두가 함께 말입니다.
화는 밖에서 그 무엇이
나게 하는 줄 알았는데,
글쎄 그것이 아니
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날 일이 아니
더라는 사실의 세계,
실제의 영성 세계를
보던 그 감격의 순간!
이것이 바로 영성이지요.
깨어남이요, 깨달음이요,
자기 이해요,
설득당함이지요.
회개요 거듭남입니다.
수련회에서는 화날 '일'이
없다고 했지화가, 성냄이,
분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지요.
또 화를 내서는 안된다
고는 더욱 아니했구요.
무엇을 해서는 되고, 안 되고
하는 규정을 가르치는 것은
영성과는 거리가 먼 도덕이요
윤리이지 종교는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화를 내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하고 노력하고
다짐하고 참는 것은
나사렛 예수가 전하는
영생의 삶이거나
바울이 전하는 하늘의 법,
성령의 법에 따르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자기 의(義)이지요.
땅의 법이요, 육체의 길이지요.
성령의 법은 생명이고,
육체의 법은 사망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도
자유가 없고, 기쁨이 없고,
삶은 지치고 건조해져 불평이
일고 불만이 쌓이는 것은
아직도 여전히 자기가 살아서
자기 의로 어떻게 성서에
나오는 삶을살아 보려고
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은
애쓰면 애쓸수록
원하는 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며
살게 된다는 바울의 고백
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이는 마치 애벌레가 나비
처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애벌레는 절대로 나비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고장이 나게 되어 있지요.
애벌레는 나비의 삶을
말로도 할 수 없지요.
논리적으로 체계
있게 했다 해도
그것은 나비가 사는 실제,
사실 세계와는 다른,
아니 아무 상관이
없는 자기 관점,
자기 생각,. 자기 경험을
말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반드시 다시 태어
나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머니 자궁으로 난 것이
자기인 줄 알고
살던 의식에서,
그것이 아닌 내 자궁으로
난 내가 진짜 나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혈과 육이 아닌 물
과 성령으로 말입니다.
자, 다시 '화날 일입니까’
로 돌아갑시다.
그동안은 화날 일,
그 일이 있어 화가 났으니
그 일을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것이 삶이었지요.
그래서 자꾸만 자꾸만 일에
매달리고 일하는 것이
사는 것인 줄 알고
결국은 일의 노예로 전락해서,
일이 자기인 줄 알았지요.
목사 일을 하는 것인데
목사가 자기인 줄 알아요.
사장 일을 하는 것인데
자기가 사장인 줄 알아요.
목사도, 사장도 내가 필요에
따라 입는 옷 중의 하나인데,
옷이 자기인 줄 알고
옷 치장에 온 생애를
매달려 살고 있지 않아요?
'성공, 성공' 하면서요.
성서는 이런 삶은 사망이라고,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한 좋은 세상을 처음
본 그 첫 새벽.
열린 눈으로 보니 화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화날 일은
애초부터 없었구나로
보여지던 순간.
이 얼마나 큰 은총이요,
축복입니까?
아! 하나님께서는 화날
일이 없는 세계로,
싫음이 없는 세계로,
원망과 탓이 없는
세계로 지으셨는데,
죄와 허물의 기운에 씌워
내 생각과 내 느낌으로
보고 산 것이구나!
실제와는 아무 상관 없이,
화날 일과 그동안 싸웠
는데 그것이 아니지요?
화날 일이 없으니 이제는
더 이상 밖에서의 싸움은
저절로 그치는 것입니다.
결심이나 노력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이것이 영성의 원리입니다.
원리를, 이치를 발견하면
이렇게 저절로 내 삶의
방향이 바뀌고주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로
저절로 나아가게
되어 있지요.
이렇게 이해가 되면
사랑이 시작됩니다.
영성은 바로 이렇게
내 결심이나 내 노력이나
내 에고(ego)가 아닌
성령께서 전적으로 인도
하도록 나를 비우고
비우고 비우는 삶입니다.
채움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이 인간 존재이지요,
존재는 무한한데 유한한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습니까?
비울수록 채워지고,
채울수록 비워지는
이 오묘한 신비의
내면 세계.
그동안의 신앙생활이
매달리고 채우고 달라고
요구하던 것이었다면
경험한 영성은 내려놓고
비우고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잠시 명상함으로 마칠까 합니다.
편안한 자세로 앉으시고
들려오는 소리 그냥
다 듣고, 냄새, 빛깔,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들숨과 날숨,
그 사이를 바라봅니다.
마음이 얼마나
굳어졌는지, 조급한지,
단단해져 있는
지를 그냥 봅니다.
가슴의 안부를
물어보세요.
세포를 즐겁게 해주세요.
지금 행복하시지요,
지금 말입니다.
카페 게시글
서정호 목사님방
하늘이 시작되는 자리
서정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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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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