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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와
By Kim Jinsu of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 와 한국의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이름 앞에는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경영의 신(神)’이라는 단어이다.
‘불굴의 인간(人間)’이라는 단어이다.
다른 점은 한 사람은 ‘신’의 칭호를 받았고, 한 사람은 ‘인간’의 칭호를 받았다는 점이다.
일본은 신의 나라답게 ‘신’의 호칭을 사용하였고, 한국은 인간의 나라답게 ‘인간’의 호칭을 사용하였다.
두 사람 다 무일푼에서 시작하여 세계적 대기업을 일궈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다 초등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다.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였다.
두 사람의 경영스타일은 비슷했다.
두 사람 다 남달리 영악한 경영수단이나 전략적인 경영수완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경영스타일은 오히려 묵묵하였고, 담담하였고, 우직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소비자의 관점에서 ‘좋은 물건은 잘 팔린다’는 기본 원리에 충실했다.
일본인의 장인기질에 딱 맞는 스타일이었다.
신상품을 개발하고, 이를 개량해 다음단계로 도약하는 과정이 마치 도를 닦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9살 때 화로가게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16세에 오사카전등에 취직하여 7년간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24세에 독립해 마쓰시타전기제작소를 혼자 차렸다.
첫 제품은 전기소켓을 만들어 팔았다. 자전거용 램프도 만들어 팔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소비자가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며 제품개량을 거듭했다.
쌍 소켓도 그의 고안품이다.
1925년에 자신의 제품에 ‘National’라는 브랜드를 붙였다.
일찍이 통합브랜드에 눈을 뜬 것이다.
한국이 식민의 암흑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국민 브랜드를 생각 하고, 그 브랜드의 세계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쓰시타의 제품은 큰 인기를 모아 ‘나쇼나루’(영어 ‘내쇼날’의 일본식 발음)는 말 그대로 일본의 국민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1930년부터 생산한 라디오는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부의 지시로 군수품을 생산했다.
1943년 마쓰시타조선과 마쓰시타항공기를 설립해 군용선박과 항공기를 납품했다.
이런 이유로 패전 후, 일본에 진주한 미군정 청에 의해 공직 추방자 대상에 올라 회사를 사직하였다.
미군이 물러간 다음 1947년 다시 사장에 복귀하였고, 그는 군수품 사업을 접고, 오로지 전기전자 사업에 집중하였다.
1961년에 회장에 취임하였다.
‘파나소닉’ ‘JVC’ 등의 새로운 브랜드로 전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종합가전 제조업체로 발전하였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회장으로 있을 때, 경영이 어려워지자 스스로 영업본부장을 겸임하여 영업현장을 진두지휘 하여 경영위기를 극복하였다.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항상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솔선수범 형’ 리더였다.
경영이 안정되자 그는 인재육성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좋은 기술과 좋은 제품을 개발하려면 훌륭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그런 철학을 바탕으로 그는 회사를 소개할 때 마다 “마쓰시타 전기는 사람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부산물로 가전제품도 만들고 있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이런 어록은 오사카에 있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기념관’ 입구에 걸려 있다.
마쓰시타는 기술혁신에 대해서는 직원들을 못살게 굴었을 정도였다.
신상품개발을 막 끝낸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수고 했네. 아주 쓸 만한 물건이 나왔구먼. 그럼 오늘부터 이게 안 팔릴 정도로 더 좋은 신상품을 만들어 봐. 당장.”
말년에 이르러 그의 관심은 정치에 다다른다.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을 보면서, 일본의 경제는 1류인데 일본의 정치는 3류라는 생각을 할 때 마다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3류에 머물고 있는 일본의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 계획을 세웠다.
경제대국에 걸맞은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를 직접 해결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측근들이 한사코 말렸다.
정치는 권력투쟁의 진흙탕으로 협잡과 배신, 음모와 공작이 판을 치는 곳이라서, 3류의 정치를 1류로 끌어 올리기는커녕, 오히려 경제마저 3류로 전락시킬 가봐 염려 된다는 것이었다.
그 보다 일본경제계에 끼친 ‘경영의 카미사마(神)’ 이미지가 훼손 된다는 것이었다.
측근들은 그에게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하도록 조언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1979년 사재 70억 엔을 출연하여 ‘마쓰시타
일본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젊고 개혁적이고 국제적 안목으로 무장한 새로운 리더십을 가진 인재를 키우겠다는 일념에서다.
그러나 새로운 인재가 배출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일본정치의 후진성이 너무 답답했다.
그는 내심 정계진출의 꿈을 버리지 못하였다.
1985년에는 은밀히 신당창당을 추진하였다.
10대 정책목표를 만들고 1차 발기인 10명을 영입해 1988년 창당대회를 연 다음, 이듬해 참의원 선거에 후보를 낸다는 세부계획까지 세웠다.
당시 그는 “나의 재산과 지위를 다 잃어도 좋다.” 라며 신당 창당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주위의 강력한 만류와 본인의 갑작스런 건강악화로 신당의 창당은 구상 단계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의 순수한 의도로 기획한 정치선진화 계획은 끝내 현실화 되지 못했다.
1989년에 그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장례식에 나는
나의 자리 바로 옆자리에 일본의 나카소네 히로유끼 전 수상이 앉아 있었다.
오사카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장엄하고 성대하였다.
나는
그의 영전에 국화송이를 바치면서 생전에 두 번 뵈었을 때 느낀 어르신의 따뜻한 체취를 떠 올렸다.
마스시타 고노스케가 ‘화로가게’에 처음으로 직장을 구한 것과는 달리, 서울로 단신 올라 온
온돌이 없는 일본은 가정마다 화로를 사용하였고 화로가게가 많았다.
그러나, 다다미 방이 없는 한국은 화로가게 대신 쌀 가게가 많았다.
나이 16살 때
그는 23살 때 그가 다니던 쌀 가게를 인수하여 경일상회를 차렸다.
1940년 아도써비스 공장을 만들어 자동차 수리업을 시작했다.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고 이듬해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했다.
1950년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을 설립하여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1967년 현대자동차 설립, 1969년 현대시멘트 설립, 1973년 현대조선 설립, 1974 현대엔지니어링 설립, 1975 현대미포조선 설립, 1976 현대종합상사 설립, 1977년 아산사회복지사업제단을 차례로 설립했다.
당시 농업과 경공업 밖에 없었던 한국에 중후장대형의 산업을 창조한 최초의 산업전사였다.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제품 스타일은 경박단소형(輕薄短小型)이었다
한국의
사훈도 가훈을 직접 가져다가 썼다.
‘근면’ ‘검소’ ‘친애’는 현대의 종업원이면 회사가 달라도 바꿀 수 없는 사훈이 되었다.
70년 대에서 80년 대에 걸쳐 한국경제계에는 ‘사람의 현대, 조직의 삼성’이라는 말이 유행했었을 정도였다.
1991년 초 일본에 온
“국가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청와대에만 들어가면 돈을 너무 밝혀……”
그로부터 일 년 뒤인 1992년 초에 그는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다.
기업인들로부터 음성적으로 돈을 뜯어내는 부패정치, 부패권력을 청산해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할 수 있다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1992년 3월에는 ‘통일국민당’ 전국구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 해 12월에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다.
가족, 측근, 주변에서 그의 대통령출마를 극력 말렸다.
그러나
한 번 결심하면 꼭 실천해야 하는 호걸이었다.
아무도
대통령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그의 불굴의 신념은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경협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 하였다.
그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 전인
5개항에 달하는 ‘남북합영 의향서’를 체결하여 돌아 왔지만, 당시
1998년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001마리의 소를 북한에 보냈다.
소 때는 휴전선을 넘어 육로로 갔다.
남북분단이래 최대의 이벤트였다.
미국 CNN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면서, 남북분단의 현실과 현대의 기업이미지를 높이는 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
이미 9년 전에 추진하여 ‘남북합영 의향서’에 올라 있던 5대 사업내용이 마침내 실현의 물꼬를 트는 역사적 재추진이 다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번에는 ‘햇볕정책’을 내 세운
남북합영사업을 전담하는 현대아산㈜은 즉시 남북교류협정을 맺고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등 1차 협력사업을 현실로 이끌어 내었다.
그 후 북한의 핵실험, 테러지원 사건 등으로 대화가 단절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개성관광’사업과 ‘백두산관광’사업이 차례로 현실화 될 예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자신이 직접 대통령이 되어 ‘부패권력, 부패정치’를 일소하고 진정한 시장경제를 이루겠다던 그의 ‘정치선진화’ 꿈은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남북교류의 초석에 모든 것을 던져 산화하겠다던 그의 다른 꿈은 분명한 현실이 되어갔다.
그러나 그가 계획한 ‘정치선진화’ 꿈의 좌절은 ‘불굴의
뿐만 아니라, 남북합영 사업의 실현과정에서 들어간 엄청난 투자비용은 현대 기업군의 지갑을 송두리째 열게 만들었다.
그가 한 말 그대로
나는 일본에서 3월22일에 귀국하여 청운동 자택에 차려진 빈소로 달려갔다.
그리고 3월 25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치른 장례식장에 참석하였다.
나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의 장례식과
동경에서 매주 월요일
“그래 네 생각은 어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라고 보고 드리면,
“아냐, 이렇게 하면 더 좋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셨다.
세밀한 방법까지 일일이 당신의 생각을 일러주셨다.
너무도 자상하고 너무도 치밀하여 젊은 내가 항상 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밖에서 벌어서 안을 살찌워야 해!”
“우리는 외화를 벌어야 해! 그 돈을 외국에서 쓰지 말고, 국내에서 우리국민을 위해 써야 해!”
80년대 중반 한국의 대기업들이 일본에 투자를 하고 동경의 부동산을 사들이고 있을 때, 나는
그는 이렇게 반응했다.
“열심히 달러를 벌어서 왜 일본사람을 위해 돈을 써! 국내에서 써야 한국인이 잘 돼지!”
동경에서 근무하는 나를 청운동 자택으로
자택의 문은
현관 미닫이를 열고 응접실에 들어 서는데
그때 응접실에 걸려 있는 액자에 붓글씨로 쓴 ‘一勤天下無難事’가 내 눈에 인상적으로 들어왔다.
‘사람이 자기가 부지런하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목숨보다 중한 것이 신용이고, 사업은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신용은 한 번 잃으면 끝장”이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사람이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신뢰만 얻으면, 그것을 자본으로 인생을 얼마든지 확대 발전시켜 나갈 수가 있다.”고도 말씀했다.
“사치는 부패를 낳고 다른 사람에게 소외감을 주기 때문에 윗사람은 검소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여, 근검절약의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았다.
나는
그렇게 대범한 사람, 그렇게 세밀한 사람, 그렇게 투명한 사람을, 일의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행운이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유학(儒學)을 세운 공자(孔子)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공자는 육경(六經)과 육예(六藝)를 편찬하여 인류의 4대 스승으로 추앙 받고 있는 사람이지만, 장사의 원리를 최초로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가르쳐 준 위인이기도 하다.
공자는 자공에게 두 가지를 가르쳤다.
하나는 장사를 하려면 반드시 ‘의로움을 토대’로 하라고 가르쳤고, 또 하나는 장사를 하려면 반드시 ‘이윤을 남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공자가 가르친 장사의 원리는 ‘견리사의(見利思義)’ 정신이었던 것이다.
‘견리사의’ 란 ‘이익이 있을 때는 의로움을 먼저 생각하라’는 뜻이다.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 와 한국의
인류는 근대사회를 형성하면서 ‘공산주의 전체경제’, ‘사회주의 통제경제’, ‘민주주의 시장경제’ 라는 3가지 타입의 국가체제를 만들었다.
오늘날 지구촌에 있는 모든 국가는 3가지 타입의 국가체제 중에서 어느 한 가지의 정치체제를 선택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북한은 ‘공산주의 전체경제’의 정치체제이고, 다행하게도 남한은 ‘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지만, 혼신의 정열을 바쳐 남북통일의 길에 최초의 물꼬를 연 그의 백년대계는 지워질 수 없는 대한민국의 목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 선 일본의 지리멸렬한 3류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직접 정계진출을 계획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미래에 일본의 정치를 일류로 이끌어 올릴 정치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마쓰시타
그러나, 그가 가장 염원했던 남북통일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남북경제협력의 시금석’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깔았던 것이다.
1998년 11월 최초의 금강산 관광이 시작 된지 10년 만에 개성관광이 이루어지고 2008년 5월부터는 백두산 관광이 시작될 예정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이끌 세계적 정치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마쓰시타
‘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진정한 정치지도자 양성의 뜻과는 달리 재벌당을 만들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는 비난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내일을 위한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
“진실로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고, 새로운 인간관에 기초해 정치-경영의 이념을 탐구하고 인류의 번영행복과 세계의 평화에 공헌하자”
‘
1년 차는 수신(修身), 2년 차는 입지(立志), 3년 차는 자립(自立)이 세부 목표다.
전반기 일년 반은 기초과정, 후반기 일년 반은 실천과정으로 나뉜다.
실천과정 중에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한 달 동안 노동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다.
“노동의 신성함과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마스시타 고노스케의 신념을 반영한 것이다.
‘마쓰시타
매 년 7명 내외의 입학생을 선발한다.
평균경쟁률은 40대 1 정도다.
작년까지 졸업생은 227명이 배출되었다.
102명이 정치계, 69명이 경제계, 42명이 학계, 14명이 문화예술계에 진출했다.
졸업생들은 일본정계의 ‘신인류’로 꼽힌다.
총선이 치러지면 다음 날 언론은 ‘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졸업생은 29명으로 ‘정경숙당’을 만들 수 있는 수준이 된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일본정치 개혁의 꿈이 이들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아 올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사장경제’체제의 조국통일을 꿈 꾸었던
한국에서는
和元
첫댓글 두 분의 대붕이 나래를 펴지 못함을 더욱 가슴 아프게 합니다. 실로 시대의 거물이요 선각자 였는데 말입니다.
소제는 늘 화원 형의 힘이 넘치는 글을 보고 아직 이러한 건강을 준 신에게 감사합니다. 혹독한 투병의 긴 터널을 지나 온 형의 의지에도 감탄을 하고...지난 서병길 형의 이별의 자리에도 함께하고.. 고마웁기 그지없어라.
선비 리더쉽, 양반 리더쉽, 독특하면서도 우리 풍토에 맞는 화원의 새로운 리더쉽 추구 이론이 요즈음 경영대학원에서도 인용되고 있다합니다---.
참으로 위대하신 분들의 좋은 인생사 동행 참관과 관찰을 몸소 하셔서 너무 행복하겠읍니다.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