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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랩소디 - The Daybreak Rhapsody
written by 소류溯流
1부. 안단테 Andante - 느리게
1장. 새벽하늘 아래에서 만난 우리들 Us, whom had met under the Daybreak Sky - 03
003화.
5대대 단장 엘피는 피보다 더 진한 붉은 적발에 자안(紫眼)을 지닌 ‘겉보기’ 에만 12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다. 하지만 실상은 백 살이나 먹은 할아버지.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아이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것도 보통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사항일 뿐이지만. 그렇기에 그 또한, ‘이중인격’이라 일컫는 병 아닌 병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엘피는 원하는 상황에 따라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가 있으며 그에 따라 자신의 인격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엘피, 풀 네임(Full name) 엘피스 룬 케이르 (Hellphyees Luanne Kairee)는 보다시피 인간이 아닌 존재이다. 확실한 종족을 따지자면 ‘반 마족’, 흔히 말하는 ‘반인반마’인 것이다. 마족에도 여러 종족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피오르네(Fiorrne)는 외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마족의 평균 수명이 600살에서 750살 정도 되는 가운데에, 피오르네 족은 그보다 약간 짧은 400살 중반 정도가 최대 한계의 수치이다. 마법의 고위급에 속하는 7서클 폴리모프보다 정확성이 뒤따르고, 마법을 구현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 – 마나의 소비가 따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만의 선천적인 능력이니까.
수명이 보통 마족보다 짧고, 이렇게 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피오르네 족은 마계에서도 그리 많지 않은 수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에 (라고 해 봤자 천 년이 조금 안된 시기) 마계에서 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생겨나고, 외형을 바꿀 수 있는 것 외엔 별다른 능력이 없는 그들- 특히나 전투적인 성격이 아니기에 – 은 거의 멸족 당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드문 능력과 수도 그 만큼 희귀해 종족사냥 이라는 것까지 펼친 마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저 자신만의 탐욕을 위해 피오르네 족을 멸살시키기로 마음 먹었고, 참혹한 광경을 보고야 만 아이들은 광분에 휩싸였으며 하루도 피가 대지 위에 뿌려지지 않은 날이 없었다. 평화주의자인 그들이 화친을 청하고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부분의 마족들이 잡혀간 뒤였다.
그러나 아예 멸족되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출산한 아기들을 타계에까지 보내버리는 상책을 고려한 덕이었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바로 엘피였다. 반인반마인 탓에 눈의 색이 자줏빛이 된 채로 태어난 불쌍한 아이. 적어도 완전한 마족이 되었더라면 이보다 조금은 덜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그였다.
인간계로 내려오자 마자 고아원 앞에 버려진 후로,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외모를 지니고 있는데다 소위 ‘백내광’이라 불리는 병으로 하얗게 변해버린 왼쪽 눈까지로 인해 항상 핍박을 당하고 온갖 구타와 따돌림이 숱한 그의 주변엔 희망의 희 자도 보이지 않은 듯싶었다. 만약 그가, 새벽녘이 틀 무렵 아이들을 피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 날은 레히테른 제국의 기둥 중 하나인 페르디시엔 이란 이름을 가진 자를 대지의 안식으로 떠나 보내는 날이었다. 하지만 상당히 정보통이 느린 편에 속했던 엘피는, 수도 안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조금은 외진 곳에 있던 펠립스 고아원을 벗어나 수도 중앙의 광장으로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향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의하면 이 날은 광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 같았으니 잘만 하면 두툼한 돈주머니를 가져와 좋아하던 사과를 하나 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떤 음성인지는 몰랐지만, 상당한 수가 있는 걸로 보이는 광장이었다. 혹여 장이라도 서는 가 싶어 발걸음을 빨리 했다. 문득문득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엔 비도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이란 것을 여태까지 모르고 살았던 엘피에겐 아무런 감흥도 없었을 뿐 더러, 아예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그저 멀리서 풍겨오는 향긋한 사과의 향내뿐 이었으니까.
아뿔싸,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렇게까지 머리가 많이 보일 수는 없는데. 축제 기간은 이미 이주일전에 지났으니 그것도 아니겠고, 장이 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머리 수를 계속 보니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나는 그저 사과만 사면 장땡이다.
물밀듯이 몰려오는 사람들의 사이로 몸을 꾸역꾸역 집어넣어 광장의 중간쯤에 도착했다. 작은 몸집이다 보니 키가 크고 뚱뚱한 사람들 사이로 잘만 걸어나갈 수 있었다. 이윽고 중간에 뻥 뚤린 장소에 도착했다. 왜 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의 옷 색깔이 검정색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이 새벽에 뭐 하자는 짓 걸이람.
엘피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무척이나 증오하는 해가 눈에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 졌지만, 자신이 이러는 이유는 타인과는 전혀 다르다고 언제나 말하고 다녔다. 태양을 계속해서 쳐다보면 망막에 손상이 가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오직 그것은 인간에게만 통하는 이론일 뿐이다.
해는 밝다. 해는 뜨겁다. 해는 눈이 부시다. 따뜻하고, 언제나 비비드 컬러(vivid color)만을 연상시키게 하는 태양.
… 그래서 싫다. 증오한다. 자신과는 너무나도 상반된 본질을 가지고 있는 태양이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빛과 따뜻함을 지닌 해를 언젠가는 이 두 손으로 직접 파괴해버리고 싶었다. 피오르네 족의 피를 가진 자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잔혹한 냉철함이 엘피의 눈에 띄어졌다.
그 때였다.
“오늘은… 열 번째 네페드리카님의 고요한 안식이 흐르는 오늘, 30일입니다.”
아 맞다, 그래. 오늘은 10월 30일이었다. 그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오늘의 날짜를 그제서야 확인한 엘피는 갑자기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났다. 오늘 날짜는 10월 30일,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이면 새해를 맞이해야 하지만 그와 함께 한 해를 끝내야 할 날이다. 그래서인가? 그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애절한,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그런 음성이었다.
“오늘 우리는, 레히테른 제국을 위해 천의(天意)를 바쳐오신 古 아페른 시니겔스 고르딕 페르디시엔님을 대지의 안식으로 떠나 보내야 할 날입니다.”
아페른 페르디시엔. 그는 엘피가 알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상당한 냉철함과 절제된 카리스마를 지닌 성인군자라고 세간에서 떠들고 다니던 작자였다. 얼마나 정의로운지는 모르지만, 영지 민에게서 받아내는 세금의 양을 대폭 줄였다는 것을 행복한 얼굴과 함께 내뱉던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 예로, 그 작자의 장례식인 것처럼 보이는 이 광장에 모인 인간들의 머릿수는 대단했고, 모두가 다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세간에선 그를 향한 찬양가도 수두룩 할 만큼이라니.
그 중 하나를 그가 알고 있었다.
- 새벽녘 동이 틀 무렵…
모두가 광장 가운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가운데엔 엄숙한 분위기와 함께 교황청에서 친히 몸소 이끌고 오신 교황 나으리, 열 명도 넘게 보이는 신부와 추기경들, 황실 사람들과 울고 있는 공작 가의 인원들, 마지막으로 투명한 관에 들어있는 시신이 뉘어져 있었다. 차갑게 식은 시체의 얼굴엔 너무나도 깨끗한 미소가 평안한 자태에 녹아 깃들어 있었다. 교황의 미사를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소리 없는 흐느낌을 흘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의 주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나는 그대의 얼굴을 보았네.
엘피는 사람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의 돈주머니에 손 하나도 갖다 대지 않고 있었다.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음에도 사과를 하나 몰래 집어가지도 않았다. 그저, 이 장엄하고 웅장한 분위기에 휩싸여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생각나던 노래 한 자락을 부를 뿐 이었다. 고아원에서도 많이 듣던 노래. 몇 번 듣다 보니 어느새 다 외워버리게 된 그 노래의 제목은 아직까지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바뀌고 바뀌다 못해 음유시인들 마저 다 제 각각이 되어버린 노래의 정확한 음률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만큼은, 모두가 통일성을 가지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노래를 부를 자신이 있을 것이라 엘피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확신이 맞아 떨어졌다.
- 밝지 않은 햇빛과 어둡지 않은 달빛이 어우러진 하늘의 풍경은
모두가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피의 옆에 있던 사람의 입에서 같은 소절의 문장이 나왔다.
- 그 어느 때 보다 화려했네.
장례식에 어울리지 않는 감미로운 미성이다. 그 만큼 엘피는 확실히 자신의 목소리 하나만큼은 자부할 수 있었다. 그의 노래를 따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광장에는 울음은 그쳐지고 노랫소리만 가득할 뿐 이었다. 황제가 서거할 당시에도 이와 같은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었다. 성군이라 불리던 리스트랭크 리히텐베르크 3세의 장례식 때에도, 레히테른 제국을 역사적으로도 크게 발전시켰던 헤이란트 드 리히텐베르크 15세마저, 이렇게 성대한 마지막 길은 전혀 걸어가보지 못했었다.
새벽녘 동이 틀 무렵
나는 그대의 얼굴을 보았네
밝지 않은 햇빛과 어둡지 않은 달빛이 어우러진 하늘의 풍경은
그 어느 때 보다 화려했다네
아침의 그림자에 의해 잊혀진 시간
저녁이 지나면 모두가 자고 있을 시간
나는 그런 새벽을 사랑했네
그대를 마주할 수 있었으니
나는 그런 새벽을 사랑했네
나와 닮은 곳이 많은 새벽을
해와 달이 서로 만나는 유일한 시간
오늘의 마지막이자 떠나 보내야 하는 후회
기대하지 않았던 절망의 나락
내일을 시작하는 희망의 소리
나와 그대의 관계처럼
상반된 두 존재가 만나는 시간
나는 그런 새벽을 사랑했네
나는 새벽에 태어났다네
이제 새벽의 품으로 돌아가네
나는 새벽에 안식을 맞았다네
노래가 끝마침과 함께 시계탑의 종소리가 여섯 번 울려 퍼졌다. 군중들도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입이 움직이고, 노래 가사를 모르건 알건 모두 다 엘피의 아름다운 가락을 따라 불렀다. 종소리로 인해 놀란 새들이 날개를 휘저으며 광장 위를 돌아다니고, 가로수로 주변에 자란 글래디올러스 나무의 새하얀 꽃잎이 바람과 함께 흩날려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잿더미로 변해버린 유골을 담아 단지 안에 넣은 공작의 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며 오열할 뿐이었다.
사람들의 귓가로 아련하게 들리는 노래자락은, 후에 정확한 음률과 가사로 아페른 페르디시엔 공작 각하를 기리는 추모 곡으로 다시 태어났다. 미정이었던 제목은 다시금 붙여지고, 장례식의 절정을 장식했던 적발의 꼬마 아이는 종적을 감추고 잠적했다.
- 새벽의 랩소디.
그것이 노래의 제목이었다.
“으윽-”
여기는 어딜까. 사방을 둘러봤지만 여전히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시야는 잘 구분이 가질 않았다. 잠에서 막 깨어난 상태인지라 정신은 몽롱하고 정체성이 흐려져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오랜만에 꾸는 옛 기억에 대한 환상은 이토록 인간을 괴롭고 미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그것이 뜻하지 않았던 경우라면, 더욱이.
옛 일을 회상하고 그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결코 좋다고 말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만 피해서만은 안됨을 엘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쉽게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납득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축에 속하기에, 그저 흐르는 세월을 따라 시간이 흘러 점차 기억이 쇠퇴해지고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를 기다릴 뿐.
그렇다, 자신은 겁쟁이다.
이 악몽 아닌 악몽이 나타나는 시기는 드물지만, 그만큼 그것의 여파는 상당한 데미지를 가져다 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바이다. 아무리 자신뿐만이 아닌 다른 아이들도 종족에서 강제적으로 이탈하고 부모와 생이별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버림받았다’ 라는 꼬리표는 절대로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 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결과와 책임은 오로지 자신의 것. 이 삭막한 사회와 더러운 세상을 비뚤어진 관점으로 몇십년 간을 살며 터득한 신념이자 이치이다. 개인의 발상에서 ‘인류’라는 집단 전체의 정의가 되어 버린 이 사실은, 반 마족이란 이유 하나로 세상에서 분리 되어 어린 나이에 고통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엘피에겐 불변의 진리가 되어버렸다.
엘피는 깨질 듯 한 머리를 부여 잡고 앉아 있던 주방의 테이블 의자에서 서서히 일어났다. 잠잘 때의 자세가 나빴던 것 때문일까, 아니면 꿈 속의 장면이 엘피를 괴롭혔기 때문일까? 어쨌든 지금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지난 세월의 기억 속 파편들은, 흔하진 않았지만 매번 이렇게 엘피를 힘들게 했다.
인간은 신이 내린 최대의 축복인 ‘망각’이란 선물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선 자신의 무모한 도전과 쓰라린 패배를 맛본 그 때 시절을 기억하지 못해 안달이다. 아무런 힘도, 선천적으로 내려지는 능력도, 빼어난 외모도, 그 아무것도 받지 못한 인간이지만, 그렇기에 신은 이 모든 사실을 하루빨리 잊을 수 있게끔 ‘잊다’라는 의미를 부여하셨다고 한다. 그래, 마족이나 천족, 엘프와 드워프 등 이 종족들이 넘쳐나는 이 일리오스 대륙에선 당연하게 납득할 수 있는 단어인 ‘잊다’(Forget).
이 최대의 선물을 받지 못한 나머지 것들은 어떡하란 말인가?
신은 부당하다. 세상엔 ‘공평’이나 ‘공정’이란 말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음이 옳다. 만약 정말로 그런 것 있다면, 왜 나에겐 부모가 없고 가족이 없으며, 하다못해 그 깊이가 깊지 않더라도 세상엔 흔하다 못해 주변을 대충 눈어림 짐작으로 둘러봐도 볼 수 있는 ‘우정’이라던가, ‘사랑’ 등의 감정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거지?
따지고 보면, 하물며 화선지 위에 수직으로 대충 그린 직선에도 위와 아래가 있듯이 질서정연하게 구성 된 ‘사회’ 라는 집단에는 절대자인 군주와 그 또는 그녀를 떠받드는 신하들이 있다. 애초부터 그런 의미를 가진 단어를 만들 것이라면, 현실적으로 그 의미를 증명할 수 있게끔 해야 확실하게 이해하고 납득하지 않겠는가? 갑자기 말이 너무 삼천포로 빠졌군. 나는 사전에 관해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굉장히 오랜만에 그에 대한 꿈을 꿨다. 구타와 모진 욕설을 받던 고아원에서 자랐을 무렵, 사과를 훔치기 위해 광장으로 나섰던 그때의 광경을. 수도권의 모든 이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심지어 그 오만하다던 황제마저 눈물을 흘리고 오열하던 그때의 상황을.
그것은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지독한 악몽 아닌 악몽.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알게 되었던 그 날의 광경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았다. 아니, 잊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처음’이란 것은, 그 가치가 결코 작진 않았으니까. 그 날은 처음으로 감정을 알게 되었고, 처음으로 눈물이란 것을 흘려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에 대한 수치스러움과 인생의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반 마족으로 태어난 것을 여태까지 증오하고, 세상에 자신을 태어나게 해준 그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고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어미를 혐오했었다. 마지막으로 이 각박하고 인심 없는 구질구질한 자신의 인생마저 참혹하게 느껴졌다. 그래, 나는 대체 왜 사는가.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그 자질구레한 목표도, 목숨까지 버려가며 지켜 주고픈 정인도, 생물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가족애나 우정, 뭐 이 따위 것들에 대한 집착마저 없는 내가. 대체 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살기 싫으면 죽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자신은 죽기는 싫었다.
참 희한했다. 살기도 싫으면서 죽기도 싫다니, 이 보다 더한 모순이 어디 있단 말인가?
대체 왜지? 얼굴도, 포근한 품도 기억나지 않는 어미를 찾기 위해서? 됐다, 그딴 것은 개나 주라지. 어미 따윈 필요 없다. 이미 자신을 향한 애정을 무자비하게 무너뜨리며 살아온 지가 어언 몇십년, 자세하게 세어보지 않은 지라 심지어 정확한 나이조차 알고 있지 않았다. 그저 건물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햇빛과 달빛을 어림짐작으로 세어본 게 그 정도이니까. 더 이상은 바라지 마라.
그럼, 그 동안 자신을 핍박하고 놀려댔던 아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됐다, 복수 따윈 필요 없다. 그 자식들은 그냥 그 대로 살다 죽으라고 해. 어차피 자신보다 수명도 짧아 불쌍하기만 하다. 아무리 심하게 맞더라도 마족이란 종족에게 있어선 유일한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체치유력을 이용하면 하루 사이에 금방 낫게 되니까. 이름도 기억하지 않는 애들을 뭐 하러 귀찮게 되 갚아준담, 그냥 죽여버리면 되지.
광장에서 고아원까지의, 그 짧은 거리를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애초에 망각이란 능력이 주어지지 않은 마족아이는, 눈을 뜨자 마자 보였던 은은한 달빛과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쳐다보던 녹색의 중년 여성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눈동자 색뿐. 새벽이지만 아직은 어두컴컴했던 달빛에 의해 그림자가 졌던 얼굴을 갓난애기가 눈에 야광등을 켜서 볼 가능성은 없으니까.
노래를 끝 마친 뒤,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만 갔다. 외형상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뒷모습만은 마치 어른처럼 보여 사람들 입에 맴돌던 단어, ‘적발의 꼬마아이’. 그 때문일까, 지금쯤이면 유골 함을 부여잡고 울기만 해야 했던 죽은 공작의 아들이 갑자기 내 어깨를 잡아 날 돌려 세웠었다.
‘네가, 헉, 네, 네가 바로, 그-,’
그때는 정말이지, 정말로 ‘바보’ 같았다. 숨이 차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이 소 공작 이라니, 갑자기 문득 들던 제국의 앞날이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 없었음에도.
‘네가 바로 그, 노래 부른 아이지?’
멀뚱멀뚱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가 가쁜 숨을 내쉬며 겨우 진정을 되찾은 그의 말을 되씹어 보았다. 노래? 그렇지, 노래. 맞다, 노래. 그것은 노래야.
노래가 맞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맞는데요.’
마치 벌레를 씹어먹은 것 같이 상당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한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던 그. 키가 크고, 나보다 더 훤칠하던 청년이었다. 하지만 뭐, 그깟 키쯤이야 내 능력을 써도 상관 없는 거였는데, 근데 왠지 예감이 불길했다.
‘너, 나랑 같이 가자.’
...뜬금없이 ‘같이 가자’ 라니. 누가 들으면 순진한 아이를 꾀어내는 능글맞은 아저씨와 농락당하고 어딘가에 감금당하고 마는 아이의 대화와도 흡사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결코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게 만들 것만 같았던 순진한 얼굴.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굉장히 새하얀 피부와 짙은 남색 눈동자가 왠지 모를 위화감을 자아냈다. 얼핏 마주보았던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지만, 초면인 상대에게 보이는 살기가 어렴풋이 자리했었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내가 왜요?’
그것은, 단순히 이유를 물어보는 것뿐 이었다. 그래,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면 그에 맞는 이유가 있어야지. 나는 정말이지, 정말 합당한 행동을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겐 난감함이 되어버렸던 것 같았다. 참, 멍청했지 그는.
‘아, 저기… 그게,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
됐어요.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인간계의 나이로 따지자면 내가 훨씬 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예의 바른 아이라는 이미지를 주입시키고 싶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내 갈 길을 가려고 하자 금세 다시 나를 되돌려 놓는 멍청한 청년 하나. 아니, 한 마리 인가.
‘자, 잠깐!’
대체 뭐냐, 이건. 첫인상은 되게 덜 떨어지게 보였던 걸로 기억을 한다. 내가 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자, 그제서야 진짜 이유를 말하는 남자.
‘이유는…… 간단해. 그저, 너의 노래를 다시 한번 듣고 싶어서.’
‘그럼 여기서 들으시면 되겠네요. 지금 불러드릴까요?’
‘아, 아니야 그런 게! 그게… 그러니까..’
시간 없다고요. 얼른 빨리 끝내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웃겼었다 그는.
‘나와 같이 공작 성에 가겠어?’
사람, 아니 마족 무안해지게 손을 건네 정중한 말투로 청해왔다. 뭐야 그럼. 고작 노래 하나 듣겠다고 공작 성에 초대를 하냐? 나 원, 이것 참. 그렇다고 여기서 순순히 응해 줄 수도 없고, 그러자니 내가 너무 인하무인이 되어버리는 것 같단 말이야. 속으론 궁시렁 거리면서 겉으로는 침착한 면모를 유지한 채 또렷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응? 같이 갈래?’
깨끗하고 순수한 눈. 타락하고 찌들어진 자신의 눈동자와는 상반된 그의 이미지는, 후에 청렴한 페르디시엔 공작으로서의 연대기에 한 줄이 더 붙여졌었다. 왕이 되었다면 성군이, 평민이 되었다면 반란을 일으켜 선의의 지도자가 되었음이 분명하였을 그의 면모를 다시 보게 되었을 줄이야.
하지만 그때의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페른의 아들 아그리스를 따라 공작 성에 머무르게 된 이후로 자신은 그제서야 목표를, 지켜내야 할 사람을,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느끼게 되는 가족애를 얻게 되었으니까. 참고로, 내가 만약 그때 정말로 그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더라면 이 맛있는 셰프 특선 디저트인 이 딸기 케이크를 절대로 못 먹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정말로 싫다.
잠에 들었던 시각이 24하르(약 45분)쯤은 전 이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주방장이 만들어주는 그 시간까지 합쳐서 총 다섯 조각의 케이크를 못 먹게 된 것이다.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이 맑다고 하지 않던가? 이것을 나의 식으로 바꿔서 인용하자면, 윗물이 달면 아랫물도 달게 되는 것이다. 나의 주군 시엔님이 단 것을 좋아하시니, 덩달아 나도 단 것 이라면 사족을 못 쓰게 된 것이다.
페르디시엔 가의 직속 셰프의 실력은 정말로 좋다. 대대로 내려오는 실력이란 정말, 내가 너무나도 닮고 싶은 요리실력이다. 하지만 내 능력으로는 실력이나 스킬 같은 것은 절대로 따라 할 수가 없으니 그게 문제지. 그래도, 아그리스를 따라 공작 성으로 가 매일 그의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던 그 때를 상상하니 왠지 모를 아련함이 가슴에 남는 것 같다.
“아스… 그 바보 녀석.”
나이로만 따지자면 내가 그 자식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다. 아니, 이건 조금 무린가. 어쨌든, 공작 가를 비롯한 여러 군데에서 노래를 요청하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니, 결국 황성에까지 초대를 받았었다. 결과는, 내가 말도 안 되는 작위를 받은 걸로 끝났지. 엘피스 룬 케이르라니, 그것도 기사까지? 망할 제국, 내가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전투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는다고. 그래도 그게 어디야, 금세 샤텐 기사단의 5대대 단장이 되었으니까. 그래도 내 이름이 바뀌지 않은 것에는 불만이 없다.
“그러고 보니, 새벽에 깨어나신 시엔님을 뵌 후로 한번도 찾아 가질 않았잖아.”
이안은 명을 받고 성을 나갔을테고, 네스는 자고 있을게 분명하고(이미 성 안에서는 불변의 진리이다) 아일은 또 자기세계에 빠졌음이 자명한데. 칼은 시엔님과 티파티를 가진다고 했었지?
“흐음… 찾아가 볼까.”
오랜만에 내 첫 주인에 대한 꿈을 꿔서 일까, 그녀에 대한 생각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아차차, 갔다 오면 주방장한테 케이크 한 판 더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주방에서 시엔님의 방까진 조금 머니까 빨리 가야겠다. 시엔님이 내 얼굴을 보지 못해서 많이 화가 나셨을지도 모르니까. 데헷★
“제길!”
...시엔은 분명히 화가 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이유가 달랐다.
“이거 완전......”
예전의 시엔 성격이라면, 꿈도 못 꿀 상황이었다. ‘제길’이라는 그 아름다운 단어의 출처가, 그녀의 아름다운 입이라니. 다행히도 이 고운 미성을 들은 자는 그녀의 방을 몇 하르(분)쯤 밖으로 나간 칼을 비롯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그녀가 홧김에 주먹으로 벽을 쳤을 때의 소리도 어느새 암묵적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엔 이 귀여운 녀석, 감히... 감히, 이 따위 일 때문에 나를……”
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자 하니, 화가 심하게 난 것 같았다. 게다가 정황을 살펴보아 화를 낸 입장이 시엔으로서가 아닌 시현임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엘피의 얼굴을 보지 못해 이렇게 화가 났다는 것도 전혀 말이 되지 않음이 옳다. 도대체 시엔, 아니 시현은 왜 화가 난 것일 까.
[ (중략) 드림워커(Dream Walker). 이것은 일리오스 대륙에 몇 안 되는 소수의 인원으로 이루어진 라르띠(Larte) 부족의 능력으로, 자신 혹은 타인의 무의식 속으로 침범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대체적으로 선천적 능력으로 알려져 있어, 이 희귀한 본질을 자각한 이들도 라르띠 족 내에서도 몇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잠을 자고 있는 사이나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의 자각몽이 가능하며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내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중략)]
시엔의 손에 들린 책이 한 권 보인다. 제목은 [일리오스 대륙의 소수민족에 관한 진실과 전설]으로, 저자가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서적이다. 이 책은 페르디시엔 家의 고서에서만 볼 수 있는 책인데, 대륙에서도 고작 다섯 부 밖에 출판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만큼 희귀하고 가치가 높은 책임이 분명했다. 근데 왜 시현은 이 책의 한 소절을 보고 이리도 광분하는 것일까.
“이 녀석 자신이 드림워커 라는 뜻인 거잖아?!”
책 속의 글을 풀이하자면, 라르띠 족이라는 소수민족의 선천적 능력인 드림워커는 자타인의 잠재의식을 불러일으키거나 무의식 속으로 침투 할 수가 있으며 현실에선 절대로 불가능한 ‘가상의 자아’를 만들어 낼 수가 있으며, 외부에서의 조종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시현이 시엔의 기억을 살펴본 결과, 시엔은 라르띠 족의 피를 가지고 있음이 사실로 밝혀졌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시엔이 이토록 긴 잠을 자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드림…워커라.]
은빛의 생머리를 높은 포니테일로 묶은 모습이 마치 엘프의 신비롭고 깨끗한 이미지를 연상시켜, 시엔의 옆에서 페르디시엔 영지의 공무를 보좌하던 이안이 잠시 동안 흐트러진 모습과 함께 멍한 얼굴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산뜻한 봄바람이 차갑지만 알싸한 꽃 내음을 실은 채 시엔의 집무실을 향해 불어왔다. 기운이 약간은 찬 듯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따뜻한 세 번째 스퓌겔리나의 행복을 드디어 몸으로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나른하지만 날카로운 시엔의 목소리가 이안의 정신을 일깨웠다.
[좋았어, 이걸로 결정이다.]
[드림…워커요? 그게 무엇인가요 시엔님?]
[흐음- 그다지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 능력의 일부일 뿐이야. 신경 쓸 거 없어.]
나름의 무표정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안의 눈에는 그녀가 마치 어두운 미로 속에서 한줄기 얇은 빛을 본 심정과 비슷한 얼굴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암흑으로 물들어진 낯선 곳에서 혼자 가두어진 때 뜻밖에 발견한 열쇠를 손에 쥔 사람의 표정이랄까. 현재 그의 주군이 들고 있는 책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언어로만 잔뜩 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서적임이 분명했고, 상당히 낡은 가죽표지와 케케묵은 먼지로 보아선 꽤나 오래된 창고에 쳐 박혀 있다가 그녀의 손에서 우연히 발견된 페르디시엔 家 고서의 책임을 믿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흥분하는 일은 별로 없는데-. 혹여 시엔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던가, 다행스럽게도 미수로만 끝났던 그녀의 자살사건과도 비슷한 것일까 싶어 노심초사하는 이안과는 다르게 시엔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 있었다.
[그나저나 이안, 샤텐 기사단은 현재 어떤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
[아, 양지에서 활동하는 제군들은 일과가 항상 똑같습니다. 연무장을 쉰 바퀴씩 돈 후 검술의 기본 동작을 각 천 번씩, 총 만 사천 번의 휘두르는 모습을 볼 수가 있고 마지막으로 응용 동작을 천오백 번씩 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웬만한 실력으론 샤텐 기사단에 들어올 수 없으니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라도 사기를 충전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지고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요. 샤텐 기사단이 항상 후방만 맡아서이지,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제국의 황실 기사단인 글로리아(Gloria) 기사단보다 월등하다는 것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당연시하게 여겨지는 사실이잖습니까. 그리고 음지에서 일하는 아이들은 여럿 정보 길드와 암살 길드에서 고위급 간부 직책을 맡고 소임을 다하는 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그으래-?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라…. 자극이 없다면 자만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지. 좀 더 활발한 활동반경을 지니고 각 연습 동작을 오백 번씩 추가해.]
[에-, 예? 아, 네. 명은 바로 받들겠습니다만, 응용 동작을 하루 안에 이천 번은 조금 무리가 아닐지…]
[맘 같아선 오천 번도 넘게 하고 싶은 심정이야. 내가 아버지에게 배웠을 때엔…]
밝은 어조로 일관하던 그녀의 표정이 ‘아버지’라는 단어와 함께 급박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안도 ‘아뿔싸’ 하는 생각과 함께 시엔의 표정을 눈치를 보며 쳐다보지만, 살짝 찌푸려진 것을 빼곤 정상인 상태에 나지막이 안심의 한숨을 내뱉는 이안이다.
[내가 예전에 검술을 배울 때엔, 하루 32하르 중 세끼 밥 먹을 두 레밀(시간)과 잠을 자는 네 레밀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다 검술로만 채운 적이 있어. 뭐, 그것도 고작 일주일 만이지만.]
시엔의 말을 듣고 굉장히 놀란 기색의 이안이 보인다. 하긴, 일주일간 만이라지만 하루의 사 분의 삼을 검에만 정진하는 모습은 아무리 정식 기사라도 힘든 일이니까. 그것을, 고작 열 살이 조금 넘은 시엔이 이루었다고 말 하는 것이다.
[하여튼 그때엔 기본이건 응용이건 손에 다 익히지 않았었어. 그냥 죽어라 목검만 죽어라 휘둘렀고, 목각인형은 너덜너덜해졌었지. 근데 한번도 부러지질 않더라고. 그러다가 오기가 생겨서, 하루는 어린 여자 꼬맹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살기를 내뿜으며 인형을 향해 내리쳤었거든.
결과는-, ‘파삭’.]
시엔이 오른손을 횡으로 날카롭게 긋자 바람소리가 휙- 하고 났다. 그래, 아무리 열일곱 살이라지만, 소드 마스터는 소드 마스터이다. 절대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시할 바가 되지 않는다.
[그때서야 처음으로 소드유저 초입에 들어섰고, 하라던 정치학과 경제나 산업 등등은 그냥 내던졌지. 그때만큼 내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몇 없을 거야. 얼마나 짜릿했던 순간이었던지.]
처음으로 검사에 대한 길에 한 발자국 내딛게 된 순간을 회상하는 시엔의 얼굴엔, 나이에 걸 맞는 순수함과 동심의 세계가 언뜻 보이는 듯 했다.
그래, 다 좋다 좋아. 시엔이 소드 마스터이건, 일주일을 검에만 열중했다는 것도, 다 좋은데 말이다.
[그러니까, 그 기억들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아. 절대로.]
그러니까 왜 이 좋은 기억들을 다 버리고 간 거냐고, 이 망할 꼬맹아.
여기까지가, 시엔의 지난날들 속 기억에서 ‘드림워커’에 대한 정보를 찾은 전부였다. 짐작대로 시엔은 라르띠 족의 혈통이었고, 드물다던 드림워커의 능력을 가진 자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온통 페르디시엔 가 뿐이니, 이름도 정체도 모를 어머니 쪽이 라르띠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어쨌든 나조차도 추측이 가능한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몇몇의 이유 때문에, 시엔은 무의식의 상태에서 가상의 인물, 즉 류시현을 만들고 내가 살고 있던 모든 곳의 배경과 환경, 지구를 비롯한 나의 성격과 외모까지 하나하나 다 자신이 조종하고 만들어 냈다는 소리이다.
즉, 류시현은 애초부터 가상의 인물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내가 화를 낸 것은 아니다. 시엔이 나였고, 내가 시엔 이었을 당시 그녀가 두 개의 자아 즉 잠재의식 속의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뭐라 할 바는 아니다. 다만, 아버지의 죽음과 떠맡겨진 공작이란 직위에 급무적으로 따르는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이런 극적인 방법을 선택한 시엔을 이해하지 못함이 그 이유이다.
내 딴엔 완벽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으니 납득하지 못할 이유는 충분하지만, 문제라면 이 모든 것들이 다 시엔의 손 안에서 태어났다는 말. 류시현도, 시영인도, 유한 기업도, 한국도- 심지어는 ‘지구’라는 배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비롯한 생명체들까지. 다 이론적으로 밝혀낼 수 없는 비밀에 불과한 시엔의 상상일 뿐이다, 적어도 21세기의 과학기술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일리오스 대륙 내에서만큼은.
“하아, 결국은 이런 것이었나.”
시엔의 말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이념과 이상이라…. 소드마스터라는 경외적인 경지와 무려 한 제국의 공작이라는 중대한 사회적 위치, 문(文)과 무(武)의 적절한 조화였다. 아니, 적절하다 못해 넘치고 차도 모자란 궁극의 정점이지. 황제라는 절대적인 통치자보다는 못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권세와 의견을 시간 장소 가리낌 없이 내세울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을 그냥 건네준 격이니까. 하지만 시엔은 가족 운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페르디시엔 家는 혈통이 작기로 유명한 가문이다 보니, 웬만한 친척은 별로 없는 듯 하게 보였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가 아팠다. 결국 무스 한 판을 다 먹고 나서, 안절부절 못하는 칼을 방 밖으로 내보냈으니 입안은 달달 하다 못해 설탕물이 녹여진 것만 같은 이 불쾌함. 말이 좋아야 ‘내보낸’것이지, 확실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엄연한 ‘축객령’ 이었다. 피곤하다는 말 한 마디로 계속해서 매달리며 호위를 자청한 칼의 부탁을 방 밖으로 내몰았으니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에겐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날렵한 눈치와 통찰력이 있으니, 잠시라 할 지라도 변해버린 분위기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터. 칼과의 대화 속에서 끄집어낸 기억 속 파편들을 회상하고 있자니 그가 걸렸던 것이다. 그 갭(gap)을 알아차릴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물론 그가 진실을 알아버릴 가능성은 미지수에 가깝지만.
창문이 열린 상태여서 커튼이 심하게 펄럭거린다. 온통 순백의 색으로만 휩싸인 이 방안은 시엔의 성격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는 듯 하였다. 모두가 없는 썰렁한 방 안. 테라스로 나가보니 하늘엔 어느새 밝게 빛나는 해가 보였다. 한국에서처럼 눈이 부실 만큼의 빛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물건의 색을 구별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땐 참 끔찍한 일이었지. 이것도 과연 드림워커와 관련이 있었을까? 보라색으로만 물들여진 시야를 통해 모든 사물을 구별해야만 했던 일이 몇 레밀(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하루는 거뜬히 넘겨간 것 같다. 이 달달하지만 약간은 씁쓰름한 얼 그레이 티의 노을 빛 영롱이는 빛깔도, 방금 방을 나간 칼의 옅은 남색의 머리칼도, 이계에서 깨어나자 마자 눈에 띄었던 이안의 녹안, 그 외의 내 시야 속 모든 색깔들의 확실한 구분선이 보여진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류시현이 아닌 에르시오네 페르디시엔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다.”
이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류시현이 아닌 에르시오네로서 살아 가야 할 나머지 미래는, 이제 시엔이 나에게 전부 다 떠맡겨 버렸으니. 두 개로 분리 된 시엔의 자아. 한 개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20년을 잠자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대로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선 1년, 630일이니까 지구에선 2년이라고 해도 무방한 기간. 하지만 한국에서 흘러간 기간은 20년이다. 그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시엔이 아닌 시현으로 살아갔고, 결국 기간이 다하는 날, 시엔은 모든 것을 나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말을 참고로 하자면, ‘소멸’이라고 했었지? 그 말인 즉, 시엔의 원래 영혼은 죽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씁쓸하지만, 이게 사실이라고 내 감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반쪽 영혼이지만, 완전한 자아를 이루고 있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일탈. 그래, 시엔. 나 스스로가 모두를 나의 사람이라고 말을 하였으니, 그 대가를 치르겠다. 적어도 모든 기억과 정보마저 내게 넘겼으니 그에 합당한 것을 치러야 할 차례.
네가 어떤 것을 바라고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망자가 되어버린 너의 마지막 부탁만은 들어주도록 할게. 아무리 같은 그릇에 담겨있던 것이라 할 지라도, 이 상황을 대면한 자의 관점은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아버지의 죽음, 가족의 부재, 떠맡겨진 책임과 반대급부적인 의무.
-똑똑
이젠, 나의 파티가 시작되었다.
Fragments - BY AUTHOR 'SORYU'
* 이게 대체 얼마만인가요!!! ㅠㅠㅠ 꺼이꺼이
한국으로 이사오고 나서, 어머니가 갑자기 열이 40도 이상으로 끓어오르셨답니다.
아버지는 연말까진 일본에서 계속 일을 하셔야 하셔서 저희 둘만 따로 온 것이지만.
랄까, 어휴- 이사하는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구요.
다행이 붙박이식으로 되어있는 오피스텔이라서, 가구를 살 시간은 버렸답니다;ㅂ;
* 동시연재도 참 힘든 일이란 걸 내심 깨닫게 되었습니다.
랄까, 마신의 딸. 끌끌끌끌끌끌끌끌끄르르ㅡ르르ㅡ르르름들밀;매절;ㅐ머ㅑ헤홈;
죽어어어어어어어-!!!!!!!!!!!!<뷁
음음 시엔과 루의 성격을 두고 따지자면, 글쎄요오오...
아직 마딸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 많은지라 감히 네타할 수는 엄꼬.
(이거슨, 간접적 홍보가 ,아닙네당, 절대로 결단코 네버 아니어요)
* 처음으로 독촉장 아닌 독촉을 받아봤습니다.
기분이 꽤나 묘하던군요. 뭐- 딱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는게 문제지만...
적어도 제대로 된 문장 기호라던가 독자로서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하며
쪽지를 보내주셨다면 저도 좋게 답장할 수는 있었을텐데.
* 저는 1차적으로 제 자신을 위해서 글을 씁니다. 웬만한 오타지적이라던가,
쓴소리는 잘 듣는 성격이라지만, 조금은 불쾌한 감정이 슬적 들더군요.
제가 꽤나 답답한 성격이어서 말입니다^ㅁ^;; 네, 그래서 감상은 좋아합니다만,
부정적인 요소가 잔뜩 들어있는 비평은 별로 선호하지 않습니다.
이제서야 올리게 되어서 죄송하지만, 일단은 미리 막아두려는 속셈이랄까요ㅎㄷㄷ
* 국제적으로 넓겨가는 CA활동(이라면 그렇겠지만)으로 인하여
삽화와 일러스트 문제로 요즘은 뜸할 수도 있겠습니다.
BG맹그는게 장난이 아니어요....ㅠㅠ
* 레이블리님의 따끔한 지적, 잘 받았습니다^^
음음 제가 심리학과에 대한 설명으로 이과를 적어놨었는데요,
죄송합니다ㅠㅠㅠ 오타였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대체적으론 문과입니다.
어흐흑 뭔가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이런 큰 실수를 범할 줄은...;ㅂ;ㅂ;
* 뜬금 없을 수도 있지만, 소제목이 이해가 가시나요?
랄까, 그래서 챕터 1은 약간의 지루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시엔과 관계가 가까웠던 사람 혹은 타 종족들을 노려야 해서 말이지요.
* 애칭 '시엔'은, 에르시오네에서 따온 말입니다.
페르디시엔은 이름이 아니라, 가문 즉 성씨어요.
혹여 헷갈리실수도 있을까봐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 이젠 완결이 문제네요. 새드로 할까 해피로 할까...ㅎㄷㄷ
* 글이 길어졌군요. 업뎃 쪽지는 프롤부터 올려주신 모든 분들께 자동 통보입니다.
혹여 댓글 안다실 속셈이시라면 그만 둬주세요ㅠㅠㅠ
여차하면 연중 들어갈지도 모릅니다ㅠㅠㅠ 인터넷 연결이 다음달로 미뤄졌어요ㅠㅠㅠ
망할.
첫댓글 아하하하-,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역시 길군요♡ 이런길이로만 쭉- 써주신다면, 아니 그 이상 더써주신다면 정말 감사할텐데♡ 그리고, 엔딩은 해피, 해피!!! 지요, 하하하하. 해피이다면야 바랄게 없을거에요. 무튼, 흠흠. 잘 읽고 갑니다. 다음편 기대할께요.
♬ 휘연님 감사합니다!! 랄까, 해피를 원하신다니... 음음 노력해보겠습니다!(불끈)
오옷 일단 발도장을 찍고!
안돼안돼안돼요!!!!! 해피로가요!!!!ㅋㅋㅋ...... 소류님이 원하시는데로~
흐흙...이해가 몇가지 안되는 바람에 정주행~
우와우와우와우 퀄리티 장난아님!!!!!!!! 그러면 시현이 가상인물이라...그럼 지구도 가상인건가요? 만약 주신이 있다치면 시엔이 지구의 주신?!?!?!?!?!
엘피의 과거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것!! 엘피가 12살의 모습이라니..헐헐헐헐헐헐헐헐헐 엄청 긔엽겠다!!!!!어머낫...<
♬ ㅋㅋㅋ 시엔이 주신이라... 그렇게도 설명이 가능한건가요;ㅂ;ㅂ; 랄까, 코료요님껜 요것이 퀄리티가 장난이 아니었던 거로군요!! 해피를 원하신다면야 노력은 해보겠습니ㄷ...(불끈)// 엘피, 물론 귀엽습니다/홍조 감사합니다 코료요님^^
잼있어 담편이 기대되요
♬ 감사합니다 키노모토 사쿠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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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익후, 수정을 한답시고 하긴 했지만 오타가 꽤 많이 나왔군요. 더 해주신다면야 저야 말로 감사하니, 지적은 아낌없이 해주세요!!! ㅠㅠㅠ // 아아 한자는, 제가 모르고 다른 것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워드가 짜증나긴 나군요=_= 인하무인까지;;;;; ㅎㄷㄷ합니다. 이래서야 문과 제대로 갈 수나 있을런지;;; 레이블리님 항상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것은 따끔한 지적과 감상일 뿐이지, 대놓고 맘에 안든다고 자삭하는게 낫다는 둥의 뭐 그런 쪽은 아니니까요.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님)
삭제된 댓글 입니다.
♬ ㅋㅋㅋ 엘피가 좋으신거로군요. 음음 엘피는 말이지요, 어떨 땐 정말로 아이같이 굴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어른과도 같은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고, 확실히 오래 살다 보니 웬만한 현자 못지 않답니다(후훗)//어어엌 이게... 긴건가요;ㅂ;ㅂ; 랄까, 현재까지 프롤을 합해서 네 편을 썼지만, 이번 편이 제일 짧았어요ㅠㅠㅠㅠ 감사합니다 리브님^^
이거 사람 정주행 하게 하는 데에 재능이 있으시군요! 재미있어요~ 해피해피해피를 사랑하는 해피한 소류님일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해피하게 정주행 갑니다~ 해애애애애애피이이이이이
♬ 해피를 원하시는 또 다른 분의 등장이로군요. 하핫 노력해보겠습니다!!//정주행까지 하셨나요? 끌끌 또 다시 감사드립니다 복숭아님^^
소류님의 소설은 집중하기가 잘됩니다아! /잘봤습니다 다음편기대할께요!
♬ 집중하기가 잘 된다니... (글적) 끌끌 감사합니다 비윤후님!!
오래 기다렸습니다. 순간 전편의 스토리가 기억이 안나 조금 당황했답니다. 이 놈의 기억력이란 단기적이라서 말입니다. 쿡쿡. 해피이든 새드이든 멋지게 써내실 것을 알기에, 저는 즐겁게 글을 읽으며 마지막을 기다리겠습니다. 쿡쿡. 음.. 저는 워낙 쪽찌를 확인 안하고 컴퓨터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밖에 못하는지라.. 쪽찌는 귀찮으시다면 제게는 안 보내주셔도 괜찮습니다. 쿡쿡. 시엔의 파티를 기대하며.. 쿡쿡. 다음편 기대하겠습니다^^
♬ 꺄우우울 월흔님 언넝오셔요!! 꺼이꺼이 오랜만에 뵙네요;ㅂ;//끌끌끌 원래 계획은 새드 아닌 새드였지만, 해피를 원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ㅅ...<//파티에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2월달에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