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8일 목요일 자 조선일보 A30 면에 실린 노석조 기자의 [이스라엘이 처음 패한 까닭]을 읽고 이 글을 쓴다.
이 기사 내용은 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의 위대한 작전들을 기록한 [모사드]의 347페이지 "오늘 전쟁이 시작된다."
("Today we'll be at war!) 에 나오는 실제 이야기다.
1973년 10월 5일 새벽 1시. 모사드 요원 두비(Dubi)는 카이로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상급 공작원인 두비는
런던에 있는 은신처에서 공작을 수행하고 있었다. 통화 내용은 엄청나게 충격적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모사드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비밀스러운 요원으로,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 소수였다. 그는 천사(Angel)라고 불렸다.
1970년대 초반부터 20여년간 모사드에 협력한 이 천사는 14년간 집권한 나세를 이집트 대통령의 사위였다. 그의
본명은 아슈라프 마르완이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서 2002년, 아슈라프 마르완의 존재가 부각되면서 그가 이중 스파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결론적으로 아슈라프는 2007년 6월 27일 런던에 있는 그의 집 테라스 밑 보도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런던 경찰국은 '천사'를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 참고로 [모사드]는 미카엘 바르조하르, 니심 마샬 지음/ 채은진 옮김 / 말글빛냄 출판 2013년 8월 2 쇄 발행 22.000원.
육이오가 발발하기 전에는 좌우 대립으로 시국이 극도로 어수선했다. 사관학교 생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교관들도 누가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육군사관에 관한 이야기는 요즈음 한국문인협회에서 발간하는
月刊文學에 연재되는 [행군]에 그 실상이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다. 여기서는 해군사관학교 이야기를 하겠다.
이 이야기는 해사 2기생인 고 박무호 대령의 증언이다. 박 대령은 평양 제일고등학교 출신으로 대령으로 예편한 후
싱가포르에서 < 한신 엔터프라이즈> 라는 선식업을 경영해다. 그때 자주 뵐 기회가 있었다.
해군 사관학교 동창회 명부에는 2기생 가운데 전사자가 많다. 어느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기록도 없다.
오래 전에 일어난, 자랑스럽지 못한 이야기라 사관학교 출신들도 그 사건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사건은 이른바 "추석연판장 사건"이다.
추석이 되었는데 집이 먼 생도들은 갈 곳이 없었다. 당시 학교 급식은 부실했고 명절이 다가오자 고향생각은 간절했다.
특히 고향을 떠난 이북 출신 생도들이 더욱 쓸쓸했다. 어느 진해 출신 생도가 그런 동기생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평양 출신인 박무호 생도도 초대를 받았다. 진해 생도의 집은 여좌동에 있었다.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가옥 2층에서
명절 음식상을 앞에 놓고 저마다 조국의 앞날을 걱정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한 생도가 일어나 지나가는 말투로
이렇게 제안했다. "동기생 여러분! 조국의 앞날을 위한 우리들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하여 우리 다같이 이 종이에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읍시다. 오늘 이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러자 몇 몇 생도가 "좋소! 찬성이요!" 하면서 박수를
짝짝 쳤다. 아무런 반대 없이 연판장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박무호 생도는 뭔가 이산한 기분이 들었다. 평양에서
많이 보았던 분위기와 흡사했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반대할 수는 없었다. 함부로 그랬다가는 나중에 목이 졸려
똥통에 처박힐 지도 몰랐다.
그 당시 사관생도 가운데에도 죄익 프락치가 많이 섞여 있었다. 학교 당국에서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워낙 혼란한 시국이라 빨갱이를 가려낼 수 없었다. 교관 가운데에도 수박형이 있었으니까. 좌익 프락치가
얼마나 많았는지, 밤중에 실종된 생도가(우익) 새벽에 똥통에 꺼꾸로 처박힌 시체 발견될 정도였다.
연판장이 박무호 생도 앞에 왔다. 박무호 생도는 연판장에 이름도 쓰지 않고 인장도 찍지 않았다. 장난 하는 듯
훌러덩 바지를 내렸다. 그러고는 껄껄 웃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야, 거 사내자식들이 손도장이 다 뭐냐! 남자는 이것보다 더 확실한 도장이 어딨어! 나는 ㅈ 도장을 찍겠어!"
박 무호 생도는 털방망이를 꺼내 거북 대가리에 인주를 듬북 묻혀 연판장에 꾹 눌렀다. 순진한 몇몇 생도들이
멋모르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웃음이 박무호를 살려주었다. 박무호의 속셈을 아는 좌익 프락치들은
속으로 이를 갈았겠지만 그 순진한 생도들의 웃음 때문에 덩달아 웃어주었다. 그래서 다른 위해는 없었다.
그날의 모임에 대해서 박무호 생도도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 후에 전쟁이 임박하자 좌익 프락치들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누가 고발을 했는지, 그날 연판장에 서명을 하고 인장을 찍었던 생도들은 전쟁 직전에 비밀리에 처형되고
전사라는 기록만 남았다. ㅈ 도장이 박무호 생도를 살려주었다. 털방망이 도장에는 에는
무늬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 물건인지 주인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해사 1기생으로 해군참모총장을 엮임한 함명수 제독도 평양 출신으로 박무호 대령과는 '냉면 그릇으로
소주 마시기 시합'을 할 정도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박무호 대령은 별은 달지 못하고 군복을 벗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