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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갱을 만나다, 열정의 화가 최동열!
날아라 마린보이 : 야생마~린 생생 리포트!/홍보마린의 스토킹
2011/01/28
그림보다 더욱 뜨거운 삶을 산 백발의 노신사.
60의 나이에도 일탈을 꿈꾸는 자유로운 영혼.
화가 최동열(61)은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
그림 공부를 해본 적 없는 그는 어느 날 돌아보니 화가가 되어 있었고,
어느 날 돌아보니 뉴욕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다.
미국에서 뜬 그는 한국의 고갱이란 별명까지 얻으며 화려하게 데뷔한다.
월남전에 참전하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간 그의 성공스토리는 한편의 영화와도 같았다.
국내 유명 미술관과 재벌가에서 그의 그림을 사들이기 바빴고 전시회는 연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흐른 지난 11월. 대구 인당박물관에서의 초대전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강렬하고 열정적인 그림으로 주목받은 본능파 화가이지만,
초승달 같은 눈매와 서글서글한 웃음이 너무나 매력적인 노신사였다.
하지만 그 눈매에는 젊은 시절의 자유분방한 기질이 여전히 남아 꿈틀거리는 듯 했다.
그가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 것은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화가가 될 마음도 생각도 없었으니 그림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최동열 화백은 1951년 서울 인사동의 99칸 한옥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머니는 ‘벙어리 삼룡이’의 작가 나도향의 누님으로 3대가 의사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소파 최진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을 대표하는 변호사였다.
일제의 간섭에도 사재를 털어 한국최초의 법학연구단체인 법학협회를 결성했고
3·1운동 민족대표 48인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1922년 신생활 필화 사건 등에서도 애국지사들을 변호하던 최진 선생은 6·25 전쟁 당시 납북 되고 만다.
할아버지가 납북되고 집안이 몰락하면서 그의 삶의 터전은 부산으로 옮겨갔다.
경기중에 입학할 만큼 영특했던 최동열 화백은 그의 롤모델로 이승만 박사를 삼았다.
경기고, 서울대, 프리스턴대를 졸업한 뒤 대통령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그의 큰 꿈은
경기고 진학에 실패하면서 좌절된다.
스스로 자신은 안하무인이라고 밝히던 그의 자존심에 재수란 있을 수 없었나 보다.
검정고시를 치러 15세에 외국어대학교 월남학과에 진학한 그는 또 다시 막무가내 같은 선택을 한다.
곱게만 큰 부잣집 도련님이 부모와의 상의도 없이 해병대에 덜컥 지원을 해버린 것이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서 대학교에서 게으른 생활을 하다 보니까 고생을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른 경험을 해보려고 해병대에 지원을 했죠.
특히 어머님이 좀 유별나셔서 해병대 가기 전 날까지 간다는 얘기도 안 했어요.
내일 입대한다고 얘기를 하고 훈련을 마치고 나니 실무 배치가 한남동에 보안부로 된 거예요.
나는 고생한번 해보려고 한건데 편한 자리인거예요.
마침 월남에 가는 첩보부대 얘기가 있기에 또 지원을 해버렸죠.
월남 가는 것도 그 전날에야 부모님이 아셨으니까 완전 정신없었죠. (웃음)”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나이에 전쟁터로 뛰어든 것이다.
그것도 일반 전투부대가 아닌 첩보부대(HID) 소속. 월남어와 영어 모두에 능통한 인재가 당시 얼마나 있었을까.
때문에 17살 소년이 맡은 임무는 나이에 비해 너무나 중요한 임무들이었다.
“시내에 있으면서 미국 CIA 산하의 피닉스에서 정보를 얻고
우리 아래 정보원들도 관리하고 새로운 포로가 오면 심문도 했지요.
주로 적들이 은신해 있을 비밀 동굴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심문을 했죠.”
포로 심문 외에도 베트콩을 아군의 협조자로 포섭하는 일도 그가 맡은 일이었다.
“비가 엄청 오는 겨울날, 혼자 베트남인처럼 위장해서 조그만 동네까지 나룻배를 저어서 가요.
부락의 촌장을 만나서 인삼주 같은 걸 선물하면서 베트콩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주면 쌀 몇 가마니를 주겠다.
이런 협상도 하곤 했어요.”
워낙 유창한 월남어 실력 덕분에
우리 군과 현지인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도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도 그가 나섰다.
“사고가 나면 시내의 기관장들을 만나서 해결도 하고 그랬어요.
내가 해결을 못하면 그 친구는 귀국을 못하니까요.
신문에 날 정도의 큰 일이 있으면 기자들을 만나서 공보활동도 하곤 했죠.”
특수한 임무 때문에 그는 호이완 시내의 아파트에서 생활 했다.
혼자 생활하는 게 외롭긴 했지만 그는 호이안이라는 도시에서 군 생활 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경기중을 같이 나온 애들은 경기고에 갔지만 전 전쟁터에 있었던 거죠. 사실은 좋았어요.
혼자 있어서 외롭고 위험하기도 했지만 전 호이안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월남 공부를 했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봐서 그 도시가 멋진 도시라는 걸 알고 있었죠.”
그가 해병 첩보부대(HID)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제 발로 찾아들어간 전쟁터에서 월남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의 존재는
비록 사병이지만 무척 소중했으리라.
특히 대학교에서 배운 격식 있고 유창한 월남어로 현지인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17살의 나이에 부대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다는 것.
그가 1년인 파병기간을 1년 더 연장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서울에 있다가 전역을 하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항에서 해병답게 군 생활을 마치겠다는 선택을 했다.
말 그대로 뛰어다니고 박박 기는 생활을 해보고 싶었던 것.
마침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져서 그의 소망은 이루어진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 사건이 일어나서 해병대 훈련 강도가 무척 세졌어요.
겨울이었는데 김신조가 어떻게 뛰어서 내려왔다. 우리도 해야 된다. 이러면서 지독하게 훈련을 했죠.
어휴 어려웠어요. (웃음)”
해병대를 전역한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교환학생 신분이었지만 그는 애초에 미국에 눌러앉을 생각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 자리를 잡기 위해 영주권을 따는 과정에서 이 첩보부대에서의 인연이 큰 도움이 된다.
“당시 첩보부장이 나중에 해군과 해병대가 합쳐졌을 때 정보부장을 하셨어요.
영주권을 받으려면 누군가 추천을 해줘야 하는데, 연락을 드렸더니 흔쾌히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대한민국 해군 정보부장이
최동열은 월남전에서 첩보부대원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추천해줘서 금방 받을 수 있었죠. (웃음)”
미국 영주권을 딴 그에게 닥친 일은 먹고 사는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유도를 했던 경험을 살려 도장에서 흑인들을 가르치기도 했었고, 술집의 바텐더로 일하기도 했다.
지금은 인심 좋은 농부 같은 최 화백은 한 때 잘 나가는 술집 기도였다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큰 클럽에서 기도로 일을 하는데 내 아래 미식 축구한 애들 4명이 있었어요.
해병대 생활을 안 했으면 그 생활을 못 했죠. 내가 얼마나 작았는데.
하지만 해병 출신이고 전쟁도 갔다 와서 그런지 눈빛이 달랐었나봐요.
클럽에서 젤 비싼 기도였죠. 당시 5시간에 백 불이나 받았으니까”
하지만 그 생활이 그리 정상적인 삶의 패턴은 아니었다.
싸움, 마약, 섹스에 탐닉하던 그는 이제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 ‘욕망의 전차’를 보고 무작정 찾아간 뉴올리언스에서 그의 삶이 또 다시 변화하기 시작한다.
“엘디를 만난 게 그 때였어요. 뉴올리언스에 나는 글을 쓰러 갔고 그 친구는 그림을 그리러 왔죠.
예술가 카페에 글과, 그림을 거는 이들 4명이 팀을 이뤘는데 그 중 한명이 엘디였어요.”
최동열 화백은 아내인 엘디가 자신의 에너지에 끌렸던 거라 얘기한다.
당시의 자신을 “에너지가 넘치고 낙관적이고 그냥 미친놈 같았지” 라고 거침없이 얘기하는 그 모습에 끌렸으리라.
첫 만남에 서로가 통하는 것을 안 그들은 동거에 들어갔고 거침없는 삶의 여행길에 오른다.
그가 어느 날 화가가 되어 있던 것도 그 때의 일이다.
붓글씨를 쓰던 어느 날, 갑자기 반 고흐와 폴 고갱을 동경하던 어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그는
정육점으로 가서 고기를 싸는 종이를 한 통 샀다.
100m나 되는 종이에 ‘뛰는 말’을 5~6회의 붓놀림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1000마리쯤 채워졌을까.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한 획으로 주욱 말 한 마리를 그려냈다.
그 그림을 카페에 걸면서 그는 홀연히 그림의 세계로 들어선다.
“산과 바다를 누비면서 작업을 했어요. 숙소는 필요 없었죠.
야영하고 차 안에서 차고. 돈이 떨어지면 중간에 바텐더를 하기도 했죠.
히말라야, 인도, 아프리카 곳곳을 다녔어요.
유카탄이라는 멕시코 정글에서 육 개월 있을 때는 움막에서 생활하면서 작업을 했는데
그 때 가장 좋은 작품이 나오곤 했어요.”
때로는 우글대는 독전갈을 막아줄 닭을 키우며 해먹에 몸을 누인 채 여름을 보내기도 했고,
때로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소라와 홍합으로 끼니를 때우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원시적인 수렵생활 속에서 거칠고 뜨거운 삶만큼이나 열정적이고 강렬한 작품들이 나왔다.
마침 당시 뉴욕은 마약과 폭력이 유행하는 험악한 상황에서 신표현주의, 힘 있는 그림들이 주목을 받던 때였다.
20대 젊은이들이 억지로 힘 있게 그려내려던 그림과,
전쟁을 겪고 원시인처럼 자연과 함께 살던 사람의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그림은 비교가 될 수 없었다.
“난 진짜 리얼 이어서 험한 이미지로 인기가 많았어요.
전시회에서도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미술잡지에 소개도 되기 시작했죠.
강렬한 삶을 살았지만 그 속에서 책을 많이 읽었던 인텔리한 면이 있어서
둘이 섞이면서 작품이 예술적이고 강렬하게 잘 나온 것 같아요.”
세계 미술의 초점이었던 뉴욕 이스트빌리지.
순수예술을 부르짖던 젊은 이스트빌리지 예술가들은
폭력과 공포마저도 아름다운 경지로 승화시킨 최동열 화백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스트빌리지에서 촉망받는 예술가들과의 단체전에도 연이어 초대됐다.
다운타운 잡지 예술란이나 가십란에 계속 이름이 오르고,
서서히 젊은 변호사와 의사, 은행가 등 수집가들도 꼬이기 시작했다.
그 인기를 토대로 개인전을 크게 열게 된 최동열 화백.
하지만 개막 전날 화랑 여주인이 그림 값이 비싸서 장사가 되겠냐는 딴죽을 부리자,
그는 두말없이 작품을 모두 철수시켜 버린다.
젊은 예술가와 평론가들은
“개인전 오프닝 전날 작품을 철수해버린 진정한 예술가” 라며 영웅으로 떠받들기 시작했지만
개인전을 못해 어지간히 속이 쓰렸다고 그는 회고한다.
결국 몇 달 후 열린 그의 개인전에는 관람객이 끊이지 않았고 잡지와 신문에 사진과 기사가 끊이지 않게 된다.
엘디와 함께 연 2인전 에서는 오프닝 날 작품이 다 팔려버릴 정도의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그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귀국해서 전시회를 열기로 마음을 먹는다.
혈혈단신 미국으로 떠날 때와는 달리 “뉴욕이 주목한 한국화가” 라는 타이틀을 단 채,
그리고 임신 7개월 차인 파란 눈의 신부를 데린 채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문에 대서특필 될 정도로 반응도 뜨거웠다.
뉴욕과 유럽에서 득세하던 신표현주의는 그에 의해 한국 미술계에 처음 소개되었다.
경기중을 나오고 전쟁 통에 뛰어들었으며, 미국에서의 밑바닥 생활을 거쳐 독학으로 뉴욕에서 성공을 거둔
그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의 뜨거운 작품은 젊은 예술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으며, 한국 수집가들의 침을 흘리게 했다.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나 같은 작가도 없었죠. 백남익 선생님과 나 이 정도였어요. 굉장했죠.
또 내 작품이 지금보다 훨씬 강렬한 작품이어서 한국에서도 그런 작품은 처음 봤던 거죠.
그림 좋아하는 재벌가 사람들은 다들 사들이고 그랬어요.”
유화로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언제부턴가 납화와 도화도 그리기 시작했다.
밀랍그림인 납화를 그릴 때는 물감을 직접 만들었고, 도화를 할 때는 도자기를 직접 구워냈다.
그러면서 그를 부르는 수식어에는 ‘괴짜화가’ 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이 1990년 중반.
정착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그가
시애틀 북쪽 올림픽 반도의 시골 마을에 정착해 자그마한 라벤더 농장을 하며 살기 시작했다.
그가 사람들의 기억에 점점 잊혀져가기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었다.
그 선택의 이유에는 사랑스러운 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이솔. 그의 자유분방한 삶만큼이나 딸을 자유롭게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는
도시를 떠나 어린 딸에게 승마, 운동 등을 가르치며 키웠다.
“외동딸은 나보다 성격이 더해요. 어릴 때부터 승마도 했고, 12살 때는 극진가라데 동부 챔피언이었어요.
검도도 했고, 15살 때는 혼자 여행도 다녔죠.
지금은 예술영화도 만들고 연극도 연출하고 그림도 그리고 디자인도 하고. 다방면으로 하고 있어요.
젊으니까 할 건 다 해야죠. 물론 돈 되는 것들이 아니라서 가난하지만 신나서 하고 있죠.
어릴 때는 해병대 캠프 같은 곳에 보내려고도 했었고 특수부대를 갈까 생각도 했었어요.(웃음)”
딸 자랑을 할 때만큼은 보통의 한국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았던 최동열 화백은 이제 왠지 홀가분한 기분인 듯 했다.
그가 ‘책임’ 져야 했던 딸의 인생이 이제 그녀의 손으로 진행될 수 있게 되자,
다시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홀가분함.
실제 그는 예전의 뜨겁고 열정적인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됐다고 얘기한다.
“나이는 들었지만, 다시 옛날에 강했을 때의 기분으로 하고 있어요.
굉장히 건강해서 지금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아요.
불의를 봤을 때 아이가 있을 때는 기분 나빠도 때리지도 못하지만,
요즘은 한 번씩 패버릴까 라는 기분도 들곤 해요. (웃음)
그런 기분이 드니까 작품도 그런 강한 느낌이 나오는 것 같고 다시 전성기가 오는 것 같아요.
실제로 한 동안 뜸했던 그의 소식이 언론을 통해 자주 보도되기 시작했다.
굴곡 같은 사람의 리듬이 있다면 이제 그 리듬이 다시 올라가는 때 같다고 그는 얘기한다.
“그 리듬이 내려가서 평이하게 있으면 굉장히 건강해져요. 조용히 작업하고, 산을 걷고, 여행을 하고.
괜히 신문에 폼 잡고 그럴 필요도 없죠. 그러다가 리듬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그걸 재미있게 탈 수 있어요.
하지만 내려갔을 때 고생하고 힘들어하면 자기 상처가 많아져서 올라갈 때 그걸 탈 수 없죠.
그 리듬이 올라가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오는 것 같아요.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한 중턱쯤 오지 않았나 싶어요. 모든 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되고 있어요.”
첫 번째 전성기 때의 인기와 경험은 그를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월의 연륜은 젊은 시절 강렬함과 더해져 힘이 있으면서 성숙한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지금 다시 전성기가 시작되면 그 때는 대가가 되는 거죠.
내가 좋아하는 세잔 같은 화가들을 보면 마지막 작품들이 정말 좋아요.
작가는 마지막에 불태우는 게 있어야만 대가예요.
전성기에 대해서 늘 생각을 해왔었는데 요즘 보면 그 생각보다 더 잘 되가는 것 같아요.
이렇게 잘되기 시작하면 불이 붙기 시작하죠. 작품도 잘 나오고. 그런 상태예요.
이제부터 진정한 전성기가 시작되는 거죠.”
그는 오는 2012년에 그 전성기가 다시 올 거라고 스스로 예상했다.
한국에서의 활동은 2012년 전시회까지 계획되어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
이를 토대로 그는 다시 뉴욕을 공략할 계획이다.
내년 1월 시애틀 아트센터 전시회는 미국과 뉴욕 공략의 시작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진짜 욕심은 작품 활동 그 자체에 있는 듯 했다.
내년에는 다시 라벤더 농장을 떠나 자유롭게 이집트나 인도를 장기간 여행하면서
작품 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밝힌 그는 전시회에 대한 소망 한 가지를 이야기 했다.
“전시회를 하게 되면 화랑이나 관객들을 위해서 찾아가야 되자나요.
그런데 진짜 하고 싶은 건 전시회 때 안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작품만 보내고 안 가는 거죠. 피곤하거든요.
인사하고, 기분 좋아서 마셨지만 술 마시는 것도 정신없다고.
몸이 건강해야 되는데 돌아가면 또 시차 바뀌니까 시간 낭비도 많고. 그러면 또 금방 그림이 안 나와요.
그래서 나를 초청할 때도 “그림만 보내고 오지 마세요.” 이랬으면 좋겠어요.(웃음)”
이 화가. 자유분방해도 너무 자유분방했다.
백발에 스웨터를 입고 커피를 마시며 웃는 그의 모습에서
월남전이나 마약, 술집 기도의 모습은 찾기 힘들 정도였지만,
그가 터뜨리는 너털웃음에는 아직도 20대 때의 자유분방함이 묻어났다.
“해병대와 전쟁터에 갔다 온 데서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삶을 깊게 볼 수 있었거든요.
해병대도 그렇고 전쟁도 그렇고 난 자원해서 갔으니까. 힘든 점도 있었지만 하나의 모험처럼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걸 이겨냈던 것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해병대에 그런 것이 있자나요.
안되면 될 때까지 하는, 어려워도 그걸 즐기면서 이겨내는 것. 그런 정신이 제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됐죠.”
화가 최동열만큼 자유분방하게 인생을 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다.
한국말의 억양이 조금은 낯설게 느낄 정도로 미국의 삶이 더 편안하게 된 그이지만,
17살 해병대 시절의 기억은 그에게 아직도 반가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해병대 정신, 해병혼, 영원한 해병.
이런 것들을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생각해보면 우리 해병대라는 게 얼마나 다른가 느끼게 되죠.
미국에서 미 해병만 만나도 나도 한국해병이라고 그러고, 또 월남 갔다 왔다고 하면 너무 반가워하지~”
공항에서의 짧은 만남이 있은 몇 일후. 라벤더 농장에서 찍은 그의 사진이 메일로 날아왔다.
라벤더를 깔아놓고 시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가 내후년쯤엔 주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에 실린 전시회장에 있을 그를 보면서 혼자 웃게 될 것만 같다.
‘아이고 이 아저씨. 어지간히도 귀찮아하고 있겠구먼.’
너무나 뜨겁고 자유로운 삶을 산 최동열 화백.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하고 싶은 건 다해봤다는 그가 보여줄
뜨거운 열정과 강렬함이 철철 넘치는 그림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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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혼이 자유로운 멋진 분이네요.^^
이광열 형님이 최고 화가(묻혀진 원석)
해병대출신에 영혼이 자유로운 선배님이 계시다는것에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