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전쟁 연재를 위해 자료를 모으던 도중 희한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중에 이번 2부작 연재 중 유방과 항우의 대결을 다룰 용쟁호투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생각이지만 일단 발견한 김에 올립니다.
사기 진초지제월표, 자치통감에 의하면 기원전 205년 4월(물론 음력) 팽성전투가 벌어집니다. 이 전투에서 항우의 3만 정예병력들이 유방을 격파합니다. 이 전투야 다들 유명합니다만... 이 전투 후 기원전 205년 동안 초한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자치통감과 진초지제월표를 통해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4월 팽성전투. 항우의 대승.
5월 경색전투. 유방 승리. 유방 일단 한숨 돌림. 위표의 배신. 유방의 진평 의심.
6월 유방 역양으로 돌아감. 폐구 함락. 장한 자살.
6~8월 사이 유방. 역양에서 다시 최전선 형양으로 이동.
8월 역이기의 위표 설득 시도. 실패. 관중에 대기근 발생.
9월 안읍전투. 위표패망. 한신의 대나라 점령.
10월 정형전투. 조나라 멸망. 진여 사망. 연나라 항복
11월 경포가 유방에게 투항.
12월 경포 항우에게 패퇴. 형양성으로 도주. 항우군 형양 포위.
이게 팽성전투와 그 이후의 대략적인 연표입니다. 보시다시피 유방은 팽성전투 패배 이후 바쁘게 움직입니다. 일단 경색전투로 항우의 추격군을 격파, 한숨 돌린 후에 얼른 관중으로 가서 전열을 정비하고, 후방의 위협인 장한을 제거해버립니다. 그 뒤에 일단 배반한 위표의 설득을 시도하지만 실패. 그러자 한신에게 위표를 공격하게 합니다. 이로 인해 서위가 멸망해버리죠.
서위가 멸망한 후에는 아예 한신에게 3만 정도의 군대를 떼어주고 하북을 평정하게 합니다. 좀 많이 적은 숫자지만 팽성에서 대패한 직후인데다가 항우의 위협, 관중의 대기근과 잇따른 전란으로 인한 인력고갈(당장 노인과 아이까지 긁어모아서 병력으로 편성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을 감안하면 정말 쥐어짤대로 짜내서 준 병력입니다. 이 병력으로 한신은 단기간에 대,조를 멸망시키고 연을 복속시켜버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유방이 원정군을 쥐어짜내가면서까지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동안 항우는 딱히 움직임이 없습니다.
네. 더 정확히 말하면 기록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전횡에게 패배한 전가를 죽였다는 기록과, 제나라와 화친했다는 식의 기록은 좀 보이고 자기 친척인 항타를 위나라에 보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보이긴 하지만 항우 본인의 행적은 그게 다입니다. 초나라 전체로 따져도 경색전투가 끝입니다. 유방이 자신의 역량을 한계까지 쥐어짜내면서 바쁘게 움직인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제나라가 위협적이라 제나라가 걱정되서가 같지는 않습니다. 항우는 유방이 팽성을 공격하기 직전까지 유방의 군사행동을 놔두면서 제나라 평정에만 몰두하던 경력이 있는 자입니다. 거기다 이 제나라 원정 기간동안 제나라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항우가 팽성으로 돌아간 사이에 제나라는 영토를 전부 회복하긴 했지만 원체 국토가 쑥대밭이 된지라 후방을 위협할 여력이 없습니다.
일단 당시 상황상 항우는 유방보다 다른 모든 면에서 우위에 서있다고 해도 됬습니다. 경색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이건 예상치못한 반격에 당한 놀라서 당한 형국이라 피해가 딱히 크지는 않았고, 이전 제나라와의 전쟁도 단순히 제나라가 절대 항복하지 않아서 시간을 질질 끈 형국에 가까웠기에 병력 피해가 유방보다는 커보이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유방은 팽성에서 입은 피해가 크다는게 확실하게 묘사됩니다. 일단 유방은 최소 10만이 팽성에서 수장당했고,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병력들이 죽거나 달아나고, 제후들이 줄줄이 이탈했습니다. 당장 관중에서 인력이 고갈되어 노약자를 끌어오는 경지에 이르렀고, 그걸로도 부족해서 대기근까지 드는 개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방은 이 상황에서 가만히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힘을 쥐어짜내서 행동을 하고 있었고, 그 결과 하북을 평정했습니다. 항우는 조, 연, 대가 평정되고 나서야 조나라에 별동대를 보내 찔러보는 수준의 행동을 합니다. 그 자신이 본격적인 군사행동을 벌이는 건 11월에 경포가 배신하고 나서고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항우가 진작에 군대를 움직였다면 서위가 유방에게 망하는 건 못 막았다고 해도 대나 조나라가 망하는 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팽월이란 변수를 고려해야겠지만 적어도 당시까지 팽월이 항우의 발목을 제대로 잡거나 하지는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항우는 유방에 비해 꽤나 우세했습니다. 병력피해도 적고 적어도 이쪽은 대기근이 들었다는 묘사는 없으니까요. 만약 팽월이 거슬린다고 해도 적어도 7~8월에는 군대를 움직여 팽월을 밟아놓고, 그 다음에 유방을 공격해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항우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항우가 가만히 있던 저 7개월동안 유방은 한신을 통해 하북을 평정했고, 측면의 위협을 완벽하게 제거했습니다. 하북을 통해 팽월을 지원할 수 있는 간접적인 통로를 확보한 건 덤이고요. 하북이 아직 친항우성향의 세력들 손아귀에 있었으면 유방이 형양에서 작정하고 버틴다던지, 팽월을 지원한다던지 하는 일을 하기는 힘들었을겁니다.
그 점에서 항우가 저 7개월동안 뭘 했길래 움직이지 않은건지 희한합니다. 저 4~11월 사이의 기간 동안 항우는 충분히 군사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빨리 군사를 움직였다면 최소한 팽월은 제거했고, 한신의 조나라 점령은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당연히 초한전쟁의 향방도 바뀌었을 겁니다.
이런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이 7개월동안 항우가 움직이지 않은 것이 초한전쟁의 향방을 가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저 7개월간 가만히 있던 것이 항우가 해하에서 죽게 만든 셈이죠. 그렇다면 도대체 저 항우가 왜 7개월간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게 참 궁금합니다.
첫댓글 성고 형양전역에 묶여서 하북이 평정될때까지 아무것도 못한게 아닙니까? 한신이 하북을 평정한 것도 대단하지만 유방이 초군을 붙잡아 둔것이 더 대단한것 같습니다
위의 글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형양전역은 하북이 평정된 후에 시작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러기엔 좀 애매한게 후방은 없으나 측면은 위험했습니다. 근데 항우가 밍기적거리는 사이에 측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팽월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건 형양전역 과정이었고 제나라는 당시 쑥대밭이라 방어는 어찌 해도 초를 위협하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항우도 만약을 위해 제와는 화친을 했고요.
항우에게 한신 같은 믿음직하고 유능한 부하가 없는 게 결정적 이유인듯 하네요. 7개월동안에 유방도 본인이 직접 친정하기 보다는 한신을 통해 거둔 전과가 대다수죠. 당시로서는 항우나, 유방이나 오직 실력과 자기친위세력에 의존하는 군벌이기는 매한가지이니, 배신과 반란이 판치는 시대에 우두머리가 본진을 비우고 장거리 원정 나기기가 무척 어렵죠. 한군의 팽성점령도 항우가 제나라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중에 일어났으니
유능까진 모르겠지만 항우 본인이 나름 믿었던 용저가 있긴 합니다. 여차하면 용저 정도는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용저는 항우가 무려 20만이라 일컫는 대군을 떼어준 적도 있었던 만큼 유능함과는 별개로 항우가 믿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우희가 7개월 동안 아주 물이 오른게 아니었을까... 그러면 누구라도 밖에 나가서 일하고 싶지 않겠지이...;;
설마요.
아재요...그래도 그럴싸하다?????!!!
일단 항우의 세력이 그렇게 거대한 것 자체가 아니었을 공산이 큽니다. 애초에 항씨를 제외한 초나가 명문가들은 서초에 참여 자체를 안했고, 거병 당시에도 '좀 명망만 높으면' 수만명씩 모을 수 있는 시대에 거병한 건데 1만이 채 안됩니다. 유방은 3천이 아니냐고 했지만 군부 명문가 항씨와 패현 촌놈 유방은 격이 다르죠. 당장 항우의 최측근 일원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영포만 해도 항량 생전에는 독자적이고 대등한 군벌 대접을 받았어요. 거록대전의 선두에 서서 적극적으로 싸우면서 항우의 최측근 중 하나라는 이미지가 생긴거지...
항량은 자체적인 세력을 늘리기보단 다른 군벌들에게 일정한 대접을 주고 연합해 연합군의 주체로서
수장이 되었는데 이건 빠르게 세력을 확대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자기세력의 비중을 높이는데는 좋지 않았죠. 장한에게서 항복을 받아냈을때 항우군이 30만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 중 자체 세력을 확보하고 눈치보면서 따라가던 군벌들을 뺀 항우의 직속세력의 비율은 어느정도일까요. 항우는 종종 3만 남짓을 이끌고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알파 해서 5만(?) 정도가 항우 직속이고 나머지는 항우와 친밀하지만 어쨌든 독립된 군벌들, 항우의 기겁할만한 전투력에 눈치보던 군벌들 정도로 보면 맞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유방이 팽성으로 움직이니 그 눈치보던 군벌들이 우르르 유방쪽에 줄서면서 56만까지 부풀어 오른거고.
그렇기 때문에 항우가 18제후 분봉을 하면서 어떻게든 항우파 군벌들을 박아넣으려 노력한 거고, 해하전투 보면 이후로는 직속세력 아둥바둥 키우려 한 거 같고.
이런 점을 생각하면 유방의 팽성 점령은 항우에게도 만만찮은 타격이죠. 자체 세력이 크지 않고 상당수는 항우의 전투력 하나만을 바라보며 줄을 서 있는데 본거지가 점령된거니, 아무리 팽성전투에서 유방군을 떼몰살시켰다 해도 난장판 된 상황은 정리해야 합니다. 신뢰할 수 없는 군벌들과의 관계 재정립도 그렇고. 그런 관계 재정립과 상황정리에 몇개월씩 시간이 걸렸다고 보면, 문제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영포만 해도 관계 재정립 과정에서 유방이 잽싸게 낚아챈 거니.
1. 전 그 숫자 문제에 회계군이 벽촌이란 것과 회계가 월의 본거지였던 것도 있고, 왕전의 정벌 당시에 월인들 영역까지 접수, 통합해서 만든 군이라는 걸 고려해야한다고 봅니다. 즉 초나라화된지 꽤 되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월인들이 꽤나 많은 곳이고, 월인들에게 항씨의 명성이 얼마나 먹힐지는 미지수입니다. 동시대에서 월인들을 동원할 정도로 그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던 중화문화권 인사는 오예 한명밖에 안 보이는 상황이니 항량으로썬 월인들때문에 병력 모집이 힘들었을 가능성, 그리고 월인들의 습격을 대비해 수비대를 남겨뒀어야 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월인들 상대로 명성이 높아서 그들을
@롱기누스 마음껏 동원했던 오예 본인도 병력을 늘릴 목적으로 영포를 영입한 티가 팍팍 나고요. 반대로 패현 일대는 물이 풍부하고, 농사가 잘 되서 사람 많다는 소리가 나오던 곳입니다. 당시까지 변방이었던 강남과 비교하긴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2. 팽성 전투를 제외하고 항우가 병력을 얼마나 동원했는지에 대해 묘사된 전투는 해하전투의 10만뿐인거로 압니다. 처음 북상할때의 강동 8천자제랑요. 항우가 3만 남짓만 끌고 다녔다고 단정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팽성 전투의 예를 들자면 기록을 봤을 때 기동성을 위해 항우 본인이 가장 믿을만했던 정예병만 추린 것일뿐 기타 병력까지 합치면 그것보다 훨신 많았을거라고 봅니다.
@롱기누스 3. 그래도 관계 재정립 과정에서 제나라와의 화친, 단순히 항타를 위나라로 보내는 것 이상의 행동을 전혀 할 수 없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경포가 회유당한게 팽성전투 7개월 후인데 그 전부터 경포의 행동은 수상쩍었단 말이죠. 거기다 경포는 100프로 오예와 연합한 상태니 경포가 밍기적거린다는 건 곧 오예가 밍기적거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팽성전투가 끝난 후에 적극적인 회유를 해야하는데 7개월이나 지나서 경포가 유방에게 붙어버린 걸 보면(정황상 오예도 붙었을거고) 제나라와의 화친 이외의 관계 재정립을 생각한건지는 의문입니다. 이걸 봐선 항우가 경포에게 독촉만 한 것 같습니다.
@롱기누스 1. 이게, 단순히 거병이라면 당시로선 벽촌인 회계군에서 시작한거라 그렇다... 고 할 수는 있지만 그 후에도 딱히 초의 명가들이 참여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지금 확인하긴 조금 그런 상황이라 기억에만 의존하는 거긴 합니다만 서초 세력 하에는 딱히 초의 명가 출신이라고 할 게 보이질 않고 있죠. 애초에 초한대전시기 초의 명가 출신으로 확인되는건 항우에게 죽은 송의 한명 정도? 대부분 항씨 일족, 그외에 우미인과 인척관계인 사람들, 진짜 예외가 종리매, 계포. 호족들의 세력이 강했다는 초를 다시 세웠다는데도 보이는건 항씨 일족 뿐입니다. 호응하는 다른 명가가 없었다는 거죠. 이건 결국 세력이 그렇게 썩
@롱기누스 그렇게 강하지 않았고, 진에 의한 멸망 전 초의 주류 세력들이 그렇게 손을 거들어 주지 않았음으로 의미한다 봐도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항씨 일족 단독의 힘이라는건데 그것이 어느정도의 크기인가. 항량-항우가 직접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직속 세력은 얼마인가, 그게 문제가 되는 거죠.
2. 거록대전때 경포와 포장군의 2만과 항우 직계 세력... 정도였던가요. 다른 제후들은 지켜보기만 했던 것 같고(그래서 다들 전투 끝나고 나서 무릎꿇고 싹싹 빌었죠).... 착각했나... 좀 더 있었을지도 모르긴 하겠군요. 다만 유방이 팽성으로 진격할때 참여한 56만에 속한 제후들이 각자 이끈 전력을 제한다면 항우의 세력이 겉보기보다
@롱기누스 는 꽤 작았을 겁니다. 결국 제후들은 그들 자체의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항우와 유방 사이를 선택할 수 있었다는 거니까요.
3. 일단 본거지로 삼은 팽성 일대가 점령당한건 상당히 큰 타격입니다. 실제로 후대의 조조를 보면 조조는 굉장히 친정을 중시하는 인물입니다만 연주 수복 후 곧바로 이어진 협천자에서 협천자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처음에는 직접 나서지 못하고 조홍을 보냅니다. 연주를 되찾은 후 7~8개월 뒤에야 직접 친정을 떠나죠. 자기 근거지가 한번 날라가면 이걸 회복했다고 해서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죠. 내부 정리를 해야지. 그리고 이시기 항우에게서 보이는건 경포의 사례에서 보듯 일종의 관계 재정립이고.
@bookmark 1. 근데 초나라는 백기에게 과거의 거점인 후난, 후베이 일대를 상실한 적이 있습니다. 망하기 수십년전부터 쪼그라드는게 관측되던 상황에서 초나라 명가들이 과연 그 세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송의 하나 빼고 기록이 없다는 것은 곧 내분이나 몰락 과정에서 그 세가 엄청나게 약화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당장 경구나 송의 빼곤 항씨가 아닌 초나라 명가 인물들이 기록에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요. 거기다 초나라 왕족이란 미심은 양치기인지 염소치기를 하고 있던 판국이고요. 왕족이 이 지경이면 다른 초나라 명가들은 초나라가 망하는 과정, 혹은 망할 때 풍비박산 나서 난세에 끼어들 소지도 없었을지도요.
@bookmark 2. 사실 항우의 군사력 자체는 수수께기라. 기록이 너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홍문연 이전에 40만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문구는 있는데 이건 장이, 위표 등등 제후군도 포함된 것일테고. 일단 항우의 군사력 자체는 좀 생각을 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쪽은 기록이 너무 부족해서 추정하는게 쉽지가 않아서.
3. 하지만 여포와 조조의 연주 쟁탈전은 1년은 걸린데다가 메뚜기 재앙까지 겹쳤다는 걸 감안해야합니다. 팽성의 경우 4월에 유방이 점령했는데 달이 바뀌기도 전에 항우가 단번에 탈환해버립니다. 장기전에 메뚜기가 겹친 연주와 팽성을 1:1로 비교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팽성에서 약탈은 있었던 듯 하지만
@롱기누스 1년짜리 장기전에 메뚜기떼로 인한 초토화까지 동시에 겹쳤던 연주와 비교하면 아무리 봐도 팽성의 피해가 적어보입니다. 더군다나 팽성을 제외하면 그 근처이며 역시 항우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을 사천군이나 동해군 등 삼국지의 서주에 해당하는 지역이 당시에 딱히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정황이 별로 안 보입니다. 끽해야 패현에서 전투가 있지 않았나 싶은 정도라.
@롱기누스 1. 진에게 멸망당할때 얻어맞은건 초 하나만은 아니죠. 모든 국가가 얻어맞았지. 거기다 진시황은 이후 명가들을 관중으로 이주시키기도 했고. 그런데도 초한전쟁기를 보면 각지의 명가들, 심지어 왕족까지 상당한 세력을 획득하고 호이호이 퐁퐁 튀어나옵니다. 제일 약하고 제일 많이 얻어맞아 나라가 두쪽으로 갈라졌다 흡수당한 한나라까지도 그렇죠. 그런데 초나라만 모조리 세력을 잃었다...고 하기엔 좀 그렇죠. 초나라 명가들은 항씨의 서초에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았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겠지.
그리고 미심은 회왕의 후손이라 합니다만, 그 회왕은 무려 90여 년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일부러 회왕의 후손을 찾았다는건 허수아비를
@롱기누스 세우기 위해서로 보는 편이 맞겠지요. 그 뒤로 왕이 여섯이나 있고 그들은 분명 회왕의 직계일텐데도 일부러 '회왕의 자손'을 찾은건 의도가 너무 명백해서... 거기다 회왕의 손자라고 하면 미심의 나이는 아무리 낮춰 잡아도 장년층이었을 거고. 현손이라고 해도 진의 천하통일 당시 장군 및 왕으로 활동한 창평군과 동일 향렬입니다. 일부러 노린 거겠지요. 허수아비만 하라고.
3. 일단 제대로 보급체계가 구축되지 않은 군대가 한번 지나간다는건 그 일대가 군대에 의한 약탈로 초토화됨을 의미합니다. 군대가 대규모일수록, 군기가 약할수록 더 심하죠. 56만이라는 거대한 군대가 싸그리 점령하면서 팽성까지 진격했다는건 일단 그 일대
@롱기누스 는 군대의 약탈로 난장판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이점에서는 지역 유력자인 진궁 장막이 여포에게 협조적으로 움직였던 연주 쟁탈전이 상황이 낫지요. 그것도 메뚜기 재앙이 있으니 그게 그거로 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걸 정리할 시간을 갖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방은 본거지인 관중을 체계적으로 장악하고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일단 유방과 그 수뇌부가 안전을 확보하면 바로 지원을 받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항우는 일단 본거지가 56만이라는 대군의 공격을 받아 그 중심부인 팽성까지 함락당했으니 그거 뒷정리할때까진 함부로 움직이기 뭐한 상태였던 게 아닌지.
@bookmark 1. 음. 한나라의 장량, 조나라의 사마씨, 그리고 이목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는 이좌거를 빼면 초를 제외한 6국의 명가들이 딱히 튀어나온 정황은 없습니다 연나라의 경우는 전부 몰살이라도 당한건지 왕족조차도 안 튀어나오고요. 왕족들만 해도 왕과 가까운 왕족이 나타나는 건 제나라뿐이고, 그나마도 옹립된 형태에 금방 쫓겨났죠. 다른 왕족들이 복귀한 나라들만 해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옹립된 경우입니다. 그리고 그 옹립자들이 딱히 명가 출신은 아니고요. 장이, 진여는 명사의 범위엔 들어가겠지만 기록을 봤을 때 능력과 인품을 인정받아 명사가 된 경우라 명가라 보기 힘들긴 매한가지고요.
@롱기누스 그리고 어차피 초나라 왕실은 회왕 이후로 회왕 자손들에 의해서 세습되어왔습니다. 그 점에서 미심이 회왕의 후손 혹은 부추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어떤 경우든 회왕의 후손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부추부터가 어찌 되었든 회왕의 후손이니까요. 거기다 회왕의 직계에서 그나마 미심이 가까웠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장 초나라 고열왕은 자식이 고작 셋이고, 그나마 둘은 어린 아이일때 죽었고 부추는 서자인데다가 찬탈자입니다. 거기다 부추 대에 망했으니 망국의 문제에서 자유롭기 힘들죠. 그런 상황에서 고열왕의 자손이 아닌 가까운 왕족을 찾아서는 회왕의 후손이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bookmark 3. 확실히 팽성 일대가 난장판이 됬을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연주 공방전은 주 단위로 쑥대밭이 된 사례입니다만 팽성은 팽성과 근처 패현을 빼곤 전화를 입기는 한건지부터가 의문입니다. 거기다 근처의 동해군 등 다른 군현들도 있고요. 거기다 유방이 팽성으로 향하면서 점령한 다른 지역들은 옛 위나라 땅이 대부분인데 그 지역들은 팽성 전투 직후 팽월이 활동하고, 유방과 대치하는 최전선 비스무리한 곳들이 됩니다. 애당초 항우의 본거지라고 하기도 힘든 곳이었고요. 팽성 하나 정도로는 어느정도 정비하는데 7개월 씩이나 걸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롱기누스 장한에게 죽은 위구는 위나라 왕족이었고 유방이 만나러 갔을때 항량이 한참 싸우고 있었던 경구도 초나라 왕족 방계(보통 이런 방계는 최고위 명가죠)로 초왕으로 세워졌고, 진승 패사시 같이 죽었던 사람 중에는 공자 후손도 있고. 다른 후손은 유방 아래서 끝까지 살아남아 공신까지 됐죠. 결국 살아남은게 기존 명가가 아닌 패현 촌놈들이어서 묻힌게 아닌가 싶은 부분이 꽤 있습니다. 항량이 경구와 한참 죽어라 싸운 걸 생각하면 자기들끼리 싸워서 나가떨어졌을 수도 있고.
그리고 초회왕 다음에 경양왕, 고열왕, 그리고 고열왕 자식들인 유왕, 애왕, 부추, 창평군이 돌아가면서 즉위했죠. 특히 창평군은 최후의 저항을 주도했는데도
@롱기누스 묻혔습니다. 보통 이런 최후의 저항을 주도한 왕의 생존설이나 그 자식이라는 게 봉기지도자 명분일 때가 많은데도요. 그런데도 항량은 회왕의 직계라 할만한 자손들 대신 90여 년 전에 죽은 회왕의 자손을 찾았다는건 결국 '초의 왕위를 계승한 직계 라인(=자체적인 세력이 있을 가능성 높음)'을 배제하고 회왕의 명분만을 가져올 허수아비를 바랬고, 그것이 미심이었다... 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항렬로 처도 꽤 높아보이니 나이도 제법 먹었을 가능성이 크고요.
사실 방계 왕족만 따지면 더 심하게 몰락한 사례(몽염전에 따르면 몰락한 조나라 왕족이었다는 환관 조고)들도 있어서 직계 라인에서 멀어지면 대접이 박한건 꽤 있는 듯도 하고.
...그러니까 복잡한 생각 머리 아프니 ...그냥 "우희의 패왕색 색기발동"으로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원래 정사보다 야사가 늘 재미있는 법이여...!
아.. 프로디갈옹은 1000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지금 즈음 야사로 이름날리고 있을텐데....
@Che Guevara 지금이라도 늦지않았..읍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