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과 차별의 차이
무슨 일이나 하나의 현상이 있으면 상반된 현상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인간의 마음이 지혜와 어리석음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또 선한 마음과 선하지 못한 마음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이나, 또 다른 이면이 있는 것을 알아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빛과 그늘을 함께 보는 힘이 있을 때 선하지 못한 마음에 물들지 않는다.
인간이 당면한 가장 분명한 목표는 오직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이 전부다. 괴롭지 않은 것이 행복이고, 인간의 삶 자체가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괴로움은 어리석음에서 온다. 이런 어리석음이란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고, 나고, 나의 자아라서 영원하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은 오온을 분석하는 분별 지혜다.
오온을 분별하는 것은 오직 내가 있다는 어리석음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이다. 붓다께서는 정신과 물질을 오온으로 나누시고, 다시 오온을 육 내처와 육 외처로 나누어 12처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여기에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을 포함하여 18계를 말씀하셨다. 이러한 분석은 오온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여러 가지 무더기가 조건에 따라 결합한 것임을 밝히기 위한 분별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위밧자와다(vibhajjavāda)라고 하는데 분석적인 교리, 해체를 설하는 교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분석적인 이론을 가르치는 자라고 한다. 이러한 별칭으로 붓다를 분별론 자라고 하며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곳이 상좌 불교다. 분별력은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하여 가르치는 능력이다. 이것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 아닌가를 아는 힘이다.
이렇게 분별하려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눈이 형상과 접촉해서 아는 마음이 생겨서 아는 것임을 안다. 하지만 이렇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않을 때는 내가 보고 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보고 안다고 생각할 때는 눈이 대상과 접촉할 때 내 눈이 본다는 갈애가 생긴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아만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눈이라는 견해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단지 마음을 내 마음이라고 아는 잘못된 견해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 분석하지 않아서 생긴 차별이다. 이러한 차별을 빠빤짜(papañca)라고 하는데 희론(戱論), 억측, 망상, 장애, 지체라는 뜻이다. 이런 희론에 얽매이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는 오직 분석에 의해서만 밝혀진다. 가장 높은 진리는 언어에 있지 않다. 그래서 개념에 있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있다. 진리는 어떤 고정관념으로 확정된 명제 너머에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전제를 집착하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 수 없다. 대상을 분별지로 보면 무상, 고, 무아로 보아 집착이 끊어진다. 하지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않고 차별하면 내가 본다는 갈애와 아만과 잘못된 견해가 생긴다. 이것이 어리석음이다.
이때 차별이란 희론으로 볼 때는 내 눈이 접촉하고 내가 안다는 유신견이 생긴다. 이것은 진실을 희롱하는 것이라서 희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희론으로 느낌이 일어날 때 갈애가 생긴다. 이렇게 희론으로 접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느낌이 일어날 때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분별과 차별의 차이다.
분석하면 내가 없어 괴롭지 않지만, 차별하면 내가 있어 집착한 결과로 다시 태어나는 업을 생성하여 괴로움이 지속된다. 분별은 사물을 제 분수대로 나누어서 가름하여 오온이 무상하며 괴로움이고 나라로 할 것이 없는 무아라는 통찰 지혜가 나게 한다. 두 가지의 차이는 나의 오온을 어떻게 보느냐로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