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 잔투의 영웅들
요사이 모임에서 반주로 말걸리를 마시는 경우가 많은데
'지평리 막걸리'가 있다
맛도 순하면서 입에 땡기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나 보다
다른 막걸리에 비해 조금 비싼 것이 흠이랄까
지평리는 경기도 양평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고 경의선의 지평역이 있는 곳이다.
한국 전쟁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 중 하나이다
몽크리어와 맥아더 장군
6·25 때 중공군 3만을 격퇴한 몽클라르 장군을 아십니까
“아버지는 억압받는 민족을 돕는 게 프랑스의 오랜 전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은 군인의 신념이자 본분이라고 말씀하셨고, 유엔군 최초로 평화를 위해 파병됐다는 사실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2010년 방한한 파비엔 몽클라르의 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평리 전투’의 영웅 랄프 몽클라르 (Ralph Monclar)다. 1, 2차 세계대전에서 용맹을 떨쳐 각종 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으로, 육군 중장으로 전역한 군인이었다. 전투에서 18번이나 부상을 입고, 18개의 훈장을 받았다.
1개 프랑스 대대의 한국전 참전이 확정되자 몽클라르는 스스로 4계급을 낮춘 중령 계급으로 대대의 지휘관을 자청했다. 국방차관이 걱정하면서 만류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지평리 전투는 몽클라르 외에 또 한 명의 영웅을 만들어 냈다. 바로 폴 프리먼 대령이다. 그는 지평리 전투 당시 몽클라르의 프랑스 대대를 배속받은 미23연대를 지휘했던 연대장이었다. 부상을 입었지만 끝까지 후송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싸워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6·25전쟁이 터지자 한국에 온 뒤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한국은 지금까지 미군이 파견된 전쟁지역 중에서 가장 험난한 곳이 될 것 같소…적은 뒤로 물러서거나 위축될 기미가 보이지 않소. 나는 연대장으로서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열정적으로 행동할 의무가 있소. 어떤 상황에서도 프로다운 모습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이오.” 과연 그는 낙동강 돌출부에서 벌어진 영산 전투와 지평리 전투에서 멋지게 승리했다. 진정한 ‘프로’임을 입증한 셈이다.
한국전 때 중공군 승세 꺾은 결정타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나흘 동안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미국 제2 보병사단 23연대와 그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 39군과 벌인 격전이었다. 1951년 1월 25일부터 유엔군은 선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 등 일련의 재 반격작전을 시도해 1·4후퇴로 적에게 내줬던 한강선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중공군은 미8군의 예상을 깨고 그들의 주력을 중부전선으로 이동시킨 후, 2월 13일 횡성을 탈취하고자 공격 방향을 지평리로 향했다. 중공군이 지평리를 노린 이유는 분명했다.
지평리는 미9군단과 미10군단을 연결하는 지점으로 중부전선에서 서울-양평-홍천-횡성-여주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다. 그래서 이곳을 잃으면 서부전선의 아군 측방이 크게 위협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중공군은 이곳을 공격하면 유엔군이 그 이남으로 철수하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평리는 피아가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삼마치 고개에 진출했던 한국군 및 미군은 중공군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후퇴했는데, 이때 미9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지평리에 진주한 미23연대의 진지만 홀로 남았다. 이에 따라 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은 알몬드 군단장에게 철수를 건의했다. 그러나 미8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입장은 단호했다. “적이 이번 공세를 성공시키려면 지평리를 꼭 점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군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평리를 확보해야 한다.”
결국 23연대는 중공군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죽음을 전제로 한 미끼였다. 지평리 주변의 직경 5㎞ 내에는 280m 내외의 고지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방어하기에 유리했다. 하지만 그 둘레가 18㎞에 달해 4개 보병대대 병력만으로는 배치할 병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고심을 거듭한 프리먼 대령은 결국 길이 1.6㎞의 사주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북쪽 1대대, 동쪽 3대대, 남쪽에 2대대를 배치했으며 서쪽에는 몽클라르 중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대대를 배치했다. 이제 지평리에 접근한 중공군은 서서히 목을 조여 왔다. 2월 13일 주간에는 중공군 2개 사단이 지평리 주변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례로 차단했다. 해가 지자 중공군은 일제히 횃불을 올린 뒤 특유의 피리를 불며 돌격을 감행해 왔다. 미군은 105㎜와 155㎜ 곡사포로 맹렬한 포격을 감행했으나 중공군은 8차례나 진격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치열한 격전 중에 프리먼의 지휘소 텐트에 중공군의 박격포탄이 떨어져 연대 정보장교가 전사하고 다른 장교들도 부상을 입었다. 프리먼은 운이 좋았다. 텐트 안의 침대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옆으로 자세를 고쳐 눕는 순간 텐트를 뚫은 파편이 그의 왼쪽 종아리에 박혔던 것이다. 잠시 응급조치를 받은 프리먼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총알이 날아다니는 최전방 진지를 돌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 사실을 안 미10군단장은 프리먼을 곧바로 교체하려고 했으나 그는 “제가 우리 부대원들을 이곳으로 끌고 왔으니 마무리도 제 손으로 직접 하겠습니다”면서 그 자리를 지켰다.
몽클라르 중령의 프랑스 대대도 위기에 빠졌다.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에서도 새까맣게 중공군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전투가 시작된 다음날인 2월 14일 새벽 2시쯤 중공군의 다음 진격 대열이 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공격해 왔을 때 전투는 극에 달했다. 프랑스군도 나팔소리에 맞서 수동식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며 적의 기세를 제압했다. 또 적이 진지까지 기어 올라와 백병전이 불가피해지자 몽클라르 중령을 비롯한 프랑스군은 철모를 벗어 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둘러매고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적과 싸웠다.
이 무렵 후방에서는 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미1기병사단 5기병연대를 주축으로 한 일명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가 편성되었다. 2월 15일 아침, 크롬베즈 대령은 1대대를 우측 산지로, 2대대는 좌측 산지를 목표로 중공군과 매우 치열한 첫 교전을 벌였다. 다음날 2월 16일, 결국 중공군에게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연대전투단과 프랑스 대대는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중공군에게는 참전 이후 첫 패배였다. 지평리 전투의 승리 소식이 알려지자 유엔군은 중공군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반격의 발판을 마련해 향후 6·25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도 큰 영향을 줬다.
6·25전쟁에서 중공군 공세를 처음 꺾은 지평리 전투의 두 주역이다. 왼쪽의 몽클라르 장군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과 오랜 친구다. 오른쪽의 폴 프리먼은 나중에 미 육군 대장에 올랐고 나토군사령관을 역임했다. [사진 라이프·위키피디아] |
혹자는 미국 남북전쟁의 판도를 가른 게티즈버그 전투와 지평리 전투를 함께 견주기도 한다. 부상을 입고도 자기 자리를 지키며 책임을 다했던 폴 프리먼 대령은 사관학교 교재에 실릴 정도로 유명해졌으며 훗날 대장으로 진급해 미 유럽주둔미군사령관들을 역임했다. 중장 계급을 떼고 중령으로 한국에서 싸웠던 랄프 몽클라르는 1964년 6월 3일, 전투로 인한 부상 후유증으로 시달리다가 72세에 사망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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