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 민주열사 김중배 추모비
▣ 충북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1964년 한일국교정상화로 한일굴욕외교 중단과 매국노 처단.
평화선 사수 등을 외치면서 성토대회를 전국 각 대학과 연계하여 주도하였다.
1965년 4월13일 서울 충무로 5가에서 시위중 안타깝게 사망하였다.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민주 헌정질서와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시켰다.
김중배 민주열사는 1945년1월14일 충청북도 중원군 엄정면 목계동 297번지에서 출생했다.
충주고등학교을 마친 뒤 나라의 미래을 이끌어갈 농업지도자가 되기 위해 1963년 동국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했으며
이듬해인 1964년,한일국교 정상화 협상이 시작되자 굴욕적인협상에 반대하는 학생.시민들과 더불어 시위을 주도하였다.
정부는 비상계업령을 내리고 군사력으로 민주시위을 진압했지만 김중배 열사의 올곧은 청년 기상은 물러나지 않었다.
다음해인 1965년4월13일 퇴계로5가에서 시위도중 진압경찰의 곤봉에 머리을 맞아 큰 부상을 당한뒤 이틀 뒤인 15일 오후 8시
서울대학교병원 응급실에서 두개골 골절상으로 운명하였다.
1964년 6월 3일 밤 9시 40분,
대통령 공고 11호로 서울특별시 전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한일협정(韓日協定)에 반대하는 데모를
잠재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학교 교문이 닫혔다.
8월 26일 새벽 1시,
충주시 호암동 수청골에서
유석현(劉錫鉉)이 긴급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바로 『6.3데모』의 민간인 주모자로
5만원의 현상금이 붙어있던
62세의 노인이다.
이는 작년에 개봉된 영화
『밀정』의 소재가 된
1923년 의열단 사건의 주역이다.
그런 관계로 그는
일체의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해가 바뀌고 닫혔던 교문이 열렸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데모가
1965년 4월의 대학가를 뜨겁게 달궜다.
사단이 났다.
4월 13일,
동국대 교문을 나서던 일단의 학생 중에
김중배(金仲培) 군이 경찰봉에 맞아 쓰러졌다.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
그러나 그는 곧바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오후 4시,
친구들이 떠메어 집에 왔다.
1시간 후
구토가 심해 을지로 6가의
한 이비인후과에 갔다.
그리고 시립병원에 밤 9시에 갔으나 거절,
수도의대 병원으로 갔으나 거절,
자정이 지나서야 서울대병원에 도착해
새벽 2시경에 입원했다.
데모하다 다쳤다고 하면 입원이 되지 않아
“친구들과 싸우다가 다쳤다”며
겨우 입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15일 오후 8시 15분 경에 절명했다.
16일,
이에 대해 집권당인 공화당의 김재순(金在淳) 부총무는
“김군의 사인은 친구들과 싸움을 하다가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라며 진화에 나섰다.
반면 민주당 김대중(金大中) 의원 외 30명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리고 4월 17일
한일간 청구권 실무협의를 위한
대표단 5명이 동경으로 떠났다.
이날 경찰은 고인의 부친과 장례절차를 합의했다.
20일에 화장하기로 하고
18일에 시신을 인수해
고향, 충주로 내려 왔다.
19일에 검찰은
‘지난 13일 동대생 데모에 참가하였다가
머리에 타박상을 입고 사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0일 아침, 김중배의 아버지는
“중앙 정세에 따라 장례 날짜가 결정될 것”이라며
예정된 장례는 미뤄졌다.
검찰은 가해자를 색출하기 위해 수사를 진행했으나,
범인은 가려내지 못했다.
결국 4월 23일,
추적추적 봄비 내리는 목계(牧溪) 자택에서
300여 명의 조객(弔客)이 모인 가운데
4H클럽 주관으로 장례식이 진행됐다.
그의 죽음과는 무관한 듯
한일협정 대일청구권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협정 타결을 통해
당시 가장 어려웠던 자금 마련에 성공했다.
1965년 소위 대일청구권 협상을 놓고 벌어진
선후 관계에서 충주 사람 셋이 있다.
1964년 6.3사태를 촉발한
민간측 주모자로 지목된 유석현(劉錫鉉, 1900~1987).
그는 1950년대에
소위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는 종로선거구에
3번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4년 6.3사태로 정치생명이 끊긴 듯했으나,
1980년대 5공 정권에서
대통령 특사로 해외 순방을 했고,
광복회장으로 전국의 회원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목계 버스정류소 옆에 있는 <민주열사 김중배 추모비>
1965년 목계 부흥산 뒤에 안장되었던
그의 묘가 옮겨간 2009년에
새로 만들어진 추모공간이다.
왼쪽에 6.3동지회, 오른쪽에 목계초동문회의
바닥비가 있고, 한켠에 그를 외롭게 지켰던
묘비와 입구안내비가 기념물로 서있다.
1965년 4월에 목계 출신의 동국대 농학과 3학년
김중배(金仲培, 1945~1965)의 아까운 희생이 있었다.
이와 상관없이 진행된
대일청구권 협상의 핵심 인물로
충주 노은면 출신인
정재덕(鄭在德, 1931~2004)이 있었다.
한일협정 후에 재정통으로 성장해
1971년에는 1급 관리관으로
건설부 서열 3위인 기획실장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목계다리 준공식 후에
정치적인 압력에 밀려 사직했다.
이후 국제건설 사장으로
국내 건설업계에 대변혁을 이루는 듯 했다.
하지만 국제그룹의 해체 과정에서 희생되어
힘든 만년을 보냈다.
그리고
“슬프다, 피지도 못하고 떨어진 한 떨기 무궁화,
그대 흘리신 피, 그대 간직한 얼,
3천만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남으리라”는
만장을 보낸 김중배의 중고등학교 동기들!
그 중에 반기문(潘基文)이 있다.
1965년
봄비에 젖은 만장에 드리운 변주곡(變奏曲)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의 행보를 추긴 것일까?
* 충주신문, 2017년 1월 25일자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