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편 51:6~12)
며칠 전,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개봉한 지 5년이 넘어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인데요, 이미 대강의 내용을 익히 알고 있어서 그리 큰 기대를 하진 않았습니다. 역시 이 영화에는 우리가 기억하는 ‘파트라슈’가 등장하지 않더군요. 파트라슈는 둘째치고 그와 비슷한 종류의 개도 나오지 않습니다. 푸들, 치와와 같이 작은 개들만 이따금 등장할 뿐이었습니다. 제목대로라면 분명 ‘개’가 중심이 되어야 할 영화인데, 내용은 ‘개’를 매개로 할 뿐, 전혀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건 ‘개’가 아니라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영화에는 전혀 다른 캐릭터의 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성재’와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인 ‘배두나’가 바로 그들입니다. 감독은 이 두 명의 행동과 성품을 대비시킴으로써 이 사회의 부조리와 우리 안에 잠재된 이기적 욕망, 그리고 부정직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성공에 방해되는 요소는 냉혹하게 제거해버리는 이성재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배두나의 모습은 흑백의 대비를 보여줍니다. 통과의례가 돼버린 뇌물상납이라는 사회 구조의 올가미 속에서 이성재는 결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반면 배두나는 ‘장기화된 경기 침체로 청년 실업이 50만에 육박하는 이 시대’에서 자살명령과도 같은 해고의 위협 속에서도, 남 도와주기를 계속합니다.
극의 분위기와 조금은 과장된 등장인물의 코믹한 캐릭터 때문에 이 영화는 역시 통속적으로 끝날 것으로 보였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이성재는 배두나와 겪은 사건으로 인해 참 깨달음을 얻고, 배두나 역시 그 착한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해고당하는 일 없이 주위로부터도 칭찬을 얻는 뭐 그런 식의 내용 말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끝은 달랐습니다. 그 마지막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이 영화가 마냥 가볍지만은 않게 느껴졌습니다. 끝내 거액의 뇌물을 상납하고 대학 강단에 올라선 이성재와 결국은 퇴출되어 청년실업자가 되고만 배두나의 엇갈린 행보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표정은 다시 한 번 극심한 흑백의 대조를 이룹니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명예를 얻은 대학교수의 얼굴엔 평생을 부정의 덫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아무 가진 것 없는 백수의 얼굴에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백만 불짜리 미소가 흐릅니다.
세상에는 추구해야 할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이 있습니다. 비록 많이 소유하진 못했을지라도, 세상으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지 못할지라도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삶이 참 자유인의 삶인지 ‘플란다스의 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두 주인공의 차이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개’를 무척 싫어한다는 것이고, 한 사람은 ‘개’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입니다.
벌써 두 번째 임신해서 배가 볼록한 우리 집 개, 베니의 배를 한 번 쓰다듬어줘야겠습니다.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치즈 한 조각 갖고서 말입니다.
첫댓글 익...사람 먹을라고 사다 놓은 치즈를 ..몰래 몰래 자꾸 갖다주네.. 자기돈 안 들어 간다 ..이꺼지...
재미없을 것같아 안본 영화인데 이글보니 한번 보고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