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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 (2주 째):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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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날, 그러니까 1주일 전, 우리는 삼례로 내려왔고 나는 그 다음 날부터 출근하였다. ‘우리’라는 것은 나와 작은 딸, 그리고 와이프를 가리킨다. 와이프는 물론 영정과 위패의 상태로, 보자기에 쌓인 채, 쇼핑빽에 들린 채...... 우리는 와이프가 사용하던 부엌 쪽의 작은 방에 작은 제단을 설치하였다. 나는 심심할 때면 그 방에 들어가 실컷 울고 나오곤 하였다. 와이프가 숨을 거둔 안양 집의 안방보다는 실감이 덜나지만, 그래도 방 안에 영정이 있고 위패가 있지 않은가? 그러다가, 나는 이 방에 들어가 울음을 우는 일을 자제하기로 결심하였다. 5월 21일 경이다. 문득 이 놈의 울음이라는 것이 상당히 유아적(幼兒的)인 무엇으로 느껴졌다. 최소한 내가 그 방에서 우는 그 울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으로 느껴졌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땅바닥에 주저앉아 다리질을 하며 통곡을 해대는 것이다. 그렇게 불쌍한 모습으로 떼를 쓰면, 할머니라든지 하여간 응석을 들어주는 누군가가 달려와서 일으켜 세워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게 되어있다. 그러나 내가 와이프 방에 들어가 우는 일을 자제하기로 결심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 이유가 더 크다. 작은 딸 때문이다. 내가 그 방에서 나오면 이 아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내 표정을 살핀다. 아, 아이의 불안해하는 그 눈빛을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그러고 보니, 안양에서도 그랬다. 나는 와이프가 쓰던 안방에 들어가, 무슨 대단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 무슨 떳떳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 실컷 운다. 그렇게 하고 나온다. 아이는 숨을 죽이고 그런 나를 지켜본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정말로 무책임하지 않은가?
아이들 작은 이모의 제안으로 아이들에게 카운슬링을 받게 하기로 하였다. (나는 딸만 둘을 두었고, 큰 아이는 출가하였다.) 아이들 이모는 의왕역 근처에 있는 ‘콩세알’이라는 깜찍한 이름을 가진 사설 카운슬링 센터를 알아내었고, 큰 아이가 벌써 그곳에 다녀왔다. 직장 생활을 하는 큰 아이는, 시간문제를 내세워, 카운슬링받기를 사양하였지만, 자기 동생에게는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작은 아이는 다음 주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그곳을 찾게 되었다. 아이들을 걱정하는 아이들 삼촌(영진)에게 나는 이런 계획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들 삼촌도, 나도 아이들이 카운슬링 받는 것에 찬성하였다. 이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지 삼촌이 보기에, 작은 놈은 의외로 강인하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삼촌이 제시하는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이 처녀 아이가 객지(경상북도)에 가서 소치는 아르바이트로 꼬박 한 해 겨울을 채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도 지 삼촌의 이런 평가에 동의하였다. 나는, 차라리 그 언니가 심리적, 정서적으로는 여려서, 카운슬링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작은 아이는 울지 않았다. 삼우제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지 삼촌이 이 아이를 가리켜 ‘의외로 강한 아이‘라고 말하였을 때, 나는 맞장구를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맞아. 조금 이상한데, 희주는 울지 않아. 그 대신에 일을 해.” 일을 한다는 말은, 엄마 제단을 깨끗이 닦아주고, 밥을 해서 엄마 제단에 올려주고, 지 언니와 상의해서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의 리스트 — 게장, 닭발, 참치회, 낚지복음, 돼지갈비, 순대, 떡볶이, 홍어무침 등 —를 작성한다는 뜻이다. 노인네들처럼 지 엄마 사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등 지 엄마를 산 사람 취급을 하기도 한다. 제단에 지 엄마의 안경을 놓아주기도 했다. 이런 일이 생기기 하루 전 아이 엄마는 가족들에게 구충제를 먹이고 자기 것은 남겨놓았는데, 아이는 그것을 제단에 올리기도 하였다. 가족 사진을 지 엄마 사진 맞은 편에 세워놓기도 했다. 좀 보라는 이야기다. 아예 유쾌하게 일을 한다. 농담도 잘 한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꿈 이야기도 웃으면서 천연덕스럽게 한다. 엄마가 드디어 자기 꿈에 나타났는데, 반은 죽은 상태로, 반은 살아있는 상태로 나왔더란다. 기괴한 이야기 아닌가? 합장묘라서 무덤의 반 쪽만 파고 그 안에 안치하였는데, 그 모습을 떠올리고 그런 꿈을 꾸었는지, 49재까지는 그 영혼이 이승을 떠돈다는 말을 듣고 그런 꿈을 꾸었는지...... 하여간 이런 식이다. 나는 아이의 이런 강인한 심리를 보면서, 내가 (너무 무책임하게 굴었을 뿐 아니라) 너무 허약하게 굴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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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오늘이 되었다. 아이가 오전부터 화를 내기 시작하였다. 언니 때문에 화가 나서 죽겠다는 것이다. 언니 때문에? 언니가 왜? 언니가 오늘 고양이를 한 마리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화가 난다는 것이다. 언니가 고양이를 사서 키우는 것이 어때서? 아이의 대답은 이랬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는데, 언니 때문에 키우지 못했다. 언니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언니가 반대한 이유는, 언니는 짐승털에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번은 엄마를 설득하여 일이 거의 성사될 뻔했는데, 언니의 알레르기 문제가 불거져나와 일이 틀어져버린 적도 있다. 그런데, 그런 언니가 갑자기 고양이를 사겠다니 자기가 화가 나지 않게 생겼냐는 것이다. 아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한테도 당장 강아지 한 마리를 사내라고 조르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이를 달랬다. 알레르기가 있는 것은 사실인데, 어떻게 고양이를 기르겠니? 지금 사러나간데는 데 뭘. 정말이니? 정말이야. 형부랑 같이 나가서 사온데. 그래? 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네가 자주 가서 보면, 네 고양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 아닐까? 꼭 강아지를 기르고 싶다면, 조금 더 두고 보자. 니가 키울 수 있다면 아빠가 사줄게. 됐지?
돼지 않았나 보다. 아이는 계속하여 막무가내로 화를 냈다. 언니가 자기한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제 보니 언니의 알레르기도 별 것이 아니어서, 예전에 우리가 이미 강아지를 키웠어도 되는 것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이런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아이는 하루 종일 화를 냈다. 밥도 먹지 않았다. 밥은 또 왜 안 먹니? 밥맛이 없어. 달래다 달래다 나도 화가 났다. 아무리 막내래도 그렇지, 이렇게 철이 없을 수 있나? 이렇게 말하면서 야단을 쳤다. 이렇게도 말했다. 네 엄마가 떠난 지 며칠이나 되었냐? 지금이 그까짓 고양이 문제로 화를 낼 때냐? 이게 말이 되느냐? 야단을 맞은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 엄마 방에 들어갔다. 엄마 제단이 차려져 있는 방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문을 꼭 닫았지만, 훌쩍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참 내, 삼우제 이후 한번도 울지 않던 녀석이 그까짓 고양이 때문에 울다니, 어려도 너무 어린 것 아냐? 엉엉 소리가 나기도 하였다. 아이는 그렇게 두 시간 동안을 엄마 제단 옆에 누워서 울었다. 그리고 나는 그 동안 아이의 철없음을 한탄하면서, 내가 아이를 너무 응석받이로 키웠나 하는 생각도 하였고, 갑자기 고양이를 사려고 하는 큰 아이를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렇다. 내가 바보다. 내가 이렇게 바보다. 내가 바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늘 밤 늦은 시간이다. 큰 아이가 전화를 하였다. 여러 번 카톡을 보냈으나 동생이 답장을 하지 않아 걱정이 되어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알고 보았더니, 큰 아이는 오늘 고양이를 사지 않았고, 고양이를 살 계획도 없었으며, 그 점은 동생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어디에 고양이를 보러가는데, 너무 예쁘면 자기도 한 마리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 모르겠다고, 알레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그런 마음이 생길지 모르겠다고 동생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 때까지도 지 엄마 방에서 울고 있던 아이가 울먹이면서 털어놓았다. 아빠는 내가 지금 고양이 때문에 이러는 걸로 알고 있지? 그렇지 않아. 내가 어린애야? 아빠는 내가 집에서 우는 것을 보지 못했지? 그래서 내가 울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지? 사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 아이는 목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더불어 섭섭한 심정이 되기까지 하였다. 나는 정말 바보다. 아이는 아빠가 없을 때, 특히 학교에 가느라 집을 비울 때 울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지 엄마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막내가 아닌가? 아직도 엄마 손길이 많이 필요한 막내가 아닌가? 그러면서도 아이는 내가 집에 있을 때는 울음을 자제하였던 것인데, 오늘은 공휴일이라 내가 종일 집에 있었던 것이다. 아이한테는, 마음 놓고 울어도 될 무슨 핑계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아이가 강인한 것이 맞다. 심리적으로 강한 것이다. 많은 것을 혼자 속으로 삭인다. 삭일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이는 주변 사람을 고려하고 배려한다. 특히 나를 걱정한다. 아빠가 우는 모습을 불안한 표정으로 숨죽여 보면서,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즉 아빠를 불안하게, 아빠를 숨죽이게 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이는 심리적으로 강인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최소한 그 애비보다는 그렇다. 그 애비는 이런 것, 저런 것 아무 것도 고려하지 않고, 심지어 반(半)고아가 된 딸 아이도 안중에 없이 자기 감정을 쏟아내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그 애비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는 줄 알고, 울음을 자제하는 자기 딸을 목석으로 보기도 하고 울음의 핑계를 찾은 딸 아이를 철없다고 나무라기도 하였다. 이 사람은 정말로 인식 능력에 문제가 있다.
5월 30일 (3주 째): 용렬(庸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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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귀하의 따님께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첫째 따님입니다.” 처갓집 식구들 -- 나의 두 처제와 그녀들의 남편들 -- 이 의논을 하였다. “알릴 수 없다.”거나 “나중에 적절한 때에 알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장모님은 인천에 있는 카톨릭 계통의 실버 하우스에서 혼자 생활하고 계신다. 그 충격을 어떻게 견뎌내실지, 자식들이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식이 세상을 떠났는데, 어떻게 알리지 않을 수가, 혹은 알리는 것을 장례 이후로 미룰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내 의견이었다. 하여간, 장례식 둘째 날, 입관식에 참여한 후 막내 딸(내 작은 처제)이 인천으로 가서 알렸던 모양이다. 그 이후 막내 딸은 그곳에 머물며 어머니를 돌보았고, 그러느라 발인식도, 매장의식도 참여하지 못했다.
장지에서 매장의식을 끝내고 점심식사를 한 후 -- 그러니까 장례식 절차가 일단락된 후 -- 나는 곧바로 장모님을 뵈러 인천으로 가려고 하였다. 궁금해하실 사항을 내가 직접 자세하게 설명하고, 야단을 맞든지, 종아리를 맞든지, 가슴 찢어지는 원망의 말씀을 듣든지 해야지. 내 몸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긴장을 해서 그런지 인천에 갔다 오는 것 정도는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내가 지금 감당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만류하였다. 물론 처갓집 사람들이다. 노인네는 지금 아주 힘들게 계실텐데, 나를 보시면 더 힘들어하시리라는 것이다. 큰 동서, 작은 동서, 큰 처제가 그렇게 말했다. 그 중 어떤 사람은 나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고, 어떤 사람은 나를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고, 어떤 사람은 화를 참으며 나무라는 듯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하여간 그들이 일제히 그렇게 말했다. 용인 공원의 관리사무소가 위치한 넓은 광장의 한 쪽 구석에서였다. 우리는 햇볕을 피하느라 덩굴 식물이 우거진 그늘막 아래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초여름이라고는 해도 햇볕이 아주 강했다. 순간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아, 저 사람들이 한 곳에 서서 나를 저 쪽으로 밀어놓고 나를 마주보고 있구나. 아, 저들이 갑자기 왜 저렇게 행동할까?
나는 내 의견을 말했다. 맞다. 장모님이 나를 보시면 더 힘들어지실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더 힘들어지실 것인가? 나의 출현이 주는 충격이 과연 얼마나 클 것인가? 따님이 세상 떠났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에 비해서 말이다. 게다가, 내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 따님을 묻고 가는 길에 그 어머니한테 들르지도 않는다는 말인가? 나는 위축된 마음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내 생각은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그러자 작은 동서가 나섰다. 형님 말이, 말로는 다 맞습니다. 말로는 다 맞습니다만, 지금 상황이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역시 장모님이 나를 보고 충격을 받아 상태가 더 나빠지실지 모른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나는 타협을 하였다. 이런 제안을 하였다. 우선, 장모님을 모시고 있는 작은 처제에게 지금 전화를 하여 상황을 물어보고 작은 처제의 의견을 들어보자. 작은 처제에 의하면, 장모님은 가슴이 심하게 답답하다고 하셨으며 신경안정제를 드시고 계속 주무셨다. 작은 처제의 의견 역시 내가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 이 사람들이 내 길을 막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승복하였다.
그 다음, 다음 날, 우리는 다시 장지를 찾아 삼우제를 올렸다. 어머니를 돌보느라 매장의식을 보지 못한 작은 처제도 이번에는 참석하였다. 그 시간에는 작은 처제 대신 큰 처제가 인천에 가서 어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제사가 끝난 후, 나는 이 길로 인천에 가서 장모님을 뵙겠다고 말했다. 다시 의외의 반응이 나타났다. 작은 동서였다. 작은 동서가 다시 나를 막고 나섰다. 가지 마시라는 것이다. 오늘도 가지 말라고? 예. 가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 저 사람이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저렇게 말하는 것일까? 나는 속으로 이런 질문을 하였다는 것을 숨기지 않겠다. 아, 저 사람이 평소에 나에게 무슨 불만이 있었던 것일까? 아, 저 사람은 나를 인천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어떤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속으로 이런 질문을 하였다는 것도 숨기지 않겠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한 것은, 그가 얼토당토않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내가 지금 장모님에게 가야만 하는 이유를 작은 동서에게 다시 설명하였다. 작은 동서는 또 다시 “형님 말이, 말로는 다 맞습니다. 말로는 다 맞습니다만, 지금 상황이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라고 말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동서의 말이야말로 ‘말로는 맞는 말’이다. 나의 인천행을 저지하는 그의 말은 상대방의 심정을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도 없고, 사태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지혜도 없는, 그냥 그럴 듯한 말, 그런대로 말이 되는 것도 같은 그런 말이다. 나는 ‘용렬(庸劣)’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이 때 그의 아내가 나서서 남편을 나무라며 저지하였다. “자꾸 그러지 말라니까.” 처제는 꼭 그렇게 말했다. 역시 의외였지만, 그 남편은 아내의 그 한 마디에 물러섰다. 아무런 토를 달지 않은 채 말이다. 처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내 큰 딸과 카운슬링에 관해 의논하였다. 내 작은 딸이 너무 침울해 보여 심리상담을 받을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며, 자기가 주선해 보겠다는 것이다. 천사 같은 마음에 빼어난 지혜까지 갖춘 셋째 딸이라고 말한 바 있는 그 처제, 내 작은 처제다. 마누라 덕분에 살아가는 녀석들이 많다. 남편이 까먹는 것을 아내가 벌충하는구나. 혹은 아내가 벌어놓는 것을 남편이 다 까먹는구나. 내 동서는 자기가 지금 상대하는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면서 논쟁을 벌였던 것일까? “형님 말이, 말로는 다 맞습니다. 말로는 다 맞습니다만,.....” 장례 기간 내내 모든 사람이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내 뜻에 어긋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였고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동서로부터 위로의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위로의 표정이나 위로의 제스추어도 받은 적이 없다. 그 대신에 그는 나에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행동을 보였다. 내 작은 아이와 그의 딸은 친한 사이라서 평소에 항상 손을 꼭잡고 다녔는데, 발인 후 장지로 이동할 때도 두 아이는 손을 꼭잡고 같은 차에 타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몇 번이나 간청을 하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허락을 하였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아이들에게 훼방을 놓았던 것일까? 내 딸이, 친구의 손이 절실하게 필요한, 일생일대의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말인가? 내 딸에게 심리상담을 받게 해주려는 그의 아내와 너무 대조가 되지 않는가? 매장의식 중 삽으로 흙을 떠서 묘혈에 붓는 절차가 있다. 나는 돌아다니면서 참석자들에게 그 의식에 참여하기를 권하였다. 그 때 작은 동서는 “됐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거절하였다. 거절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양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퉁명스러웠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거절 혹은 사양하였던 것일까? 다른 가족 혹은 친척들은 모두 삽을 들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만, 장례식 기간 내내 그는 내 곁에 온 적이 없다. 나는 그가 내 옆에 혹은 내 뒤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다가 그는 급기야 내 앞에 서서 내 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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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는 장례 기간 내내 그 동서를 향해 섭섭한 심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며, 한 동안은 어쩌면 분노까지 섞인 섭섭한 심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내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가 삼우젯 날 나의 인천행을 제지했을 때는 정말로 폭발할 뻔하였다. 그의 아내가 “자꾸 그러지 말라니까.”라고 하면서 다행히 그를 저지했다고 말했지만, 그의 아내의 저지와 별도로 나는 그에게 따지고 들었을 수도 있고 감정을 폭발시킬 수도 있었다. 너, 자식아, 니가 임마 무슨 자격으로 내 길을 막고 있는 거야? 내가 가겠다는데, 니가 뭐기에 앞에 나서는 거야? 니가 임마 만약 고인의 남동생이고 장모님의 아들이라면, 나도 니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겠어. 너 임마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거야? 너 그 동안 행동하는 게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나는 이렇게 저자거리의 막돼먹은 놈처럼 굴 수도 있었다. 그 날 나는 “그래 오늘 누구든지 한번 걸려봐라. 너 죽고 나 죽고 하는 것이다”라는 심리상태였으니까.
내가 그렇게 폭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무런 감정도 노출시키지 않은 것은 또 다른 목소리가 나에게 들렸기 때문이다. “왜 당신은 사태를 꼬아서 보는가? 당신 동서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은 것만 해도 그렇다. 그로서는 순수하게 장모님의 안위를 걱정하였던 것이 아닐까? 다만 다른 사람들, 예컨대 자기 아내나 당신보다 더 심하게, 지나치게 보일 정도로 심하게 걱정하였던 것이 아닐까? 당신의 인천행을 제지한 그의 행동을 그러한 순수한 마음의 발로로 보면 어째서 안 되는가?”
그 목소리는 계속하여 말하였다. “매장의식 중 삽을 들기를 사양하였던 데에도 무슨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지 않소? 당신 딸과 자기 딸이 같은 차를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한 데에도 무슨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 예컨대, 당신 딸은 최종적으로 시신을 운구하는 리무진에 타기로 결정되었는데, 당신 동서는 자기 딸이 그런 차에 타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르지 않은가? 당신 동서는 당신 곁에 온 적이 없다고 당신은 말했지만, 그것은, 당신 곁에는 당신 동생들과 당신 친구들이 항상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사실, 당신 동서는 이른바 사교성이니 사회성이니 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요? 그것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어떤 때는 도리어 높이 평가해주기까지 한, 그런 사실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당신으로서는 그의 그러한 면모를, 친 형이 친 동생의 결함을 보듬어주듯이, 보듬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니요? 잘 좀 해봐요. 당신은 잘 할 꺼야.”
아내의 목소리였다. 귀신이 되더니 판단력과 더불어 예언력까지 생겼는지, 아내의 예언이 맞아떨어졌다. 나는 잘했다. 최소한 어색하거나 불편한 장면은 연출하지 않은 채 나는 동서와 헤어졌다. 아내라면, 정말로 저렇게 판단하여 저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은 아내의 생전의 행동을 근거로 한 것이다. 아내는 생전에 자기의 작은 제부(弟夫)(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내 동서)에 대하여 나쁘게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 이 말은, 나쁘게 말할 만한 기회가 몇 번 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 예컨대 우리 집 큰 아이는 동서의 권유로 동서가 운영하는 신문사에서 일하다가 사직한 적이 있다. 나는 동서가 우리에게 사직 사유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리라고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알고 보았더니, 동서는 우리 아이에게 실업수당을 받을 기회까지 허용하지 않았다. 그 후 동서는 우리 아이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그런 동서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원망도 하지 않았고 섭섭한 기색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러그러한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을 때조차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인품 일반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아내가 자기 동생들과 맺고 있는 관계다. 아내는 자기 동생들에게 정이 도타왔으며 그들을 깊이 신뢰하였다. 아내는 제부를 흉보는 것은, 자기 동생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아내의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그래서 잘했다. 마누라 덕분에 살아가는 녀석들이 많다. 정말로 많다. 내 동서와의 갈등을 이야기하는 중에 앞에서 나는 내 속내까지 다 털어놓았다. 나의 그 속내를 들은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알 것이다. 내가 얼마나 용렬한 사람인지를 말이다.
내가 용렬한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정작 장모님의 안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지 않았는가? 삼우제 후 장지에서 곧바로 장모님에게 갔을 때, 장모님은 최소한 겉으로는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장모님은 대동한 작은 아이를 끌어안으면서 “아이고 희주야, 너 이제 어떻게 사니?”라고 말씀하셨다. 장모님을 돌보아드리고 있던 큰 처제가 과일을 내와서 우리는 그것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극 배우랍시고 옷도 이상하게 입고 다니더니......” 장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고 “내가 요즘 눈물이 나오지 않아. 아예 나오지 않아.”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그 날 그 자리는 그렇게 끝났다. 며칠 전에, 우리 아이들이 장모님과 주고받은 문자를 보았더니, 장모님은 다시 게이트볼을 시작하셨다. 장모님은 안양시 범계성당에 50만원을 내고 50일 기도를 신청하셨다. 미사 시작 전 타계한 교우들에게 명복을 빌어주는 시간이 있는데, 그 교우 명단에 ‘이영복 데레사’를 올리신 것이다. 큰 처제가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성당에 가서 언니 이름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내가 용렬한 것은 정말 틀림없다. 지난 번에, 나는 내 딸들보다 내가 더 힘들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 어머니보다 내가 더 힘들지도 모른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내가, 자식 잃은 어버이의 심정을 어찌 알까?
6월 28일 (7주 째): 49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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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한테 알리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알릴 것인가? 즉 사실대로 알릴 것인가? 알린다면, 언제 알릴 것인가? 친정어머니도 아니고 시어머니인데, 뭘 그렇게 걱정하느냐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생각이 달랐다. 우리는, 어머니는 큰 며느리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감정은 예컨대 “없는 집에 시집 와서 고생 많이 했다”거나 “몸이 약해서 평생을 힘들게 지냈다”는 말로 표현될, 그런 것이다. 삼우제가 끝난 후, 나를 힘들게 하였던 일 중 하나가 어머니한테 이 사건 -- 어머니가 이 집에 시집 온 이래 이 집안에서 일어난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의 하나인, 이 사건 -- 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힘든 일인 것은, 우선, 그 사건을 알릴 때, 나는, 가급적 잊어버리고 싶고, 잊지는 못하더라도 가급적 입에 담고 싶지 않은 그 사건을 입에 담아야 하고 상기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를 힘들게 한 일이 몇 가지 더 있었다. 먼저, 사망신고. 나는 삼례 읍사무소를 찾아가 아내의 사망신고를 하였다. 이제, 그녀는 법적으로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몇 해 전, 딸들 중에서 그녀가 친정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하였는데, 그 때 그녀는 아주 많이 울었다. 나는 이제 그 심정을 이해한다. 그 다음으로, 예금 상속. 큰 아이가 금융기관을 조회하여 제 어머니의 통장을 찾아내었다. 국민은행과 동네의 새마을금고에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이 들어있었다. 참으로 알뜰하게 모아두었더라. 이제 그 계좌들은 폐쇄되었다. 그녀 이름으로 된 계좌는 이제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삼성 생명에 건강 보험도 들어 있었는데, 그것도 처리하였다. 직원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사무적인 어조로 “사망자가 있어서요”라고 무심한 듯 대답하였다. 다 됐다. 이제 어머니한테 알리는 일만 하면 된다.
그녀가 떠난 것은 5월 11일(월요일) 오전이다. 그 날 오후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일단, 당분간은 알리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11일 오후에 큰 아이가 장례 준비를 하러 우리 집에 잠깐 들렀는데, 바로 그 때 어머니가 집에 전화를 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 자주 전화를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 전전 날, 어버이날이라 하여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그 때 며느리가 몸이 좋지 않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시고 며느리의 안부를 물으려고 전화하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출가한 손녀가 친정에서 전화를 받으니 의아하게 생각하셨다. 그것도, 직장에 다니는 아이가 평일날 그곳에서 전화를 받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물론 아이에게 니 엄마를 바꾸라고 말했다. “엄마 지금 집에 없어요.” 아이는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러나 침착하게 적당히 둘러대었다.
그 뒤로 그녀는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되었다. “어느 병원이나?” “한림대 평촌 병원이예요. 항상 다니던 병원이예요.” 그 병원은 장례식이 치루어진 병원이다. “무슨 병이나?” “큰 병은 아니예요. 지난 번에 폐렴끼도 좀 있고, 또 디스크도 있었잖아요......”, “에미 핸드폰 번호를 대라” 어머니는 평소에 집전화로 연락을 하셔서 다행히 이 사람의 핸드폰 번호는 모르신다. 만약 이 사람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셨으면, 아들이 전화를 받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셨을 것이다. “병원에서 전화를 못하게 해요. 안정을 취해야 한다면서요.” 그 뒤로 나는 어머니를 슬슬 피해다녔다. 어머니 전화를 받고도 안부만 물은 채 끊어버렸고, 내가 먼저 전화를 하고도 그렇게 했다. 어머니 집에 갈 생각은 아예 하지를 않았다. 동생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는 동생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상적인 통화를 계속하였다. 어버이날 선물한 옷이 어머니에게 맞지 않아 교환해드리러 어머니를 찾아간 누이동생도 시침 뚝떼고 어머니와 같이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물론, 계속 이런 식으로 끌고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어머니는 한 달이 되자 “무슨 병이기에 이렇게 오래 입원해있어? 전화는 왜 또 안되는 거고?”라고 따지셨다.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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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대는 데도 한계가 있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가족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라졌다. 작은 어머니(재당숙모)는 애당초 사실대로 알렸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병원에 입원했다고 둘러댄 것이 벌써 잘못이니, 이제라도 사실대로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어머니는 노인들이 의외로 잘 견딘다고 말씀하셨다. 매제도 같은 의견이었다. 매제 역시 처음부터 이 입장을 일관되고 단호하게 주장해왔다. 그러나 내 남동생은 정반대의 의견이었다. 물론 형수를 계속 입원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외국에 내보낸다거나, 심지어 형과 별거를 시킨다거나 하는 방안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동생은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였다. 사실을 알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충격으로 응급실로 실려가실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가능성이 높은 것은, 장기간에 걸쳐 우울증에 시달리시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타계하실 때를 전후하여 우울증을 앓으신 적도 있다. 동생의 우려에 일리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매제는 고인의 입장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특히 ‘별거’를 겨냥하여, 그렇게 둘러대는 것은 고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양 쪽 다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중에 49재가 가까워졌다. 우리는 49일 째 되는 날 묘소를 찾아 제사를 올리고 그 날로 탈상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영혼이 이승을 떠돌다가 49일 째 되는 날 저승으로 떠난다는 말을 믿기로 한 것이다. 49재까지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49재를 치르기 전전 날 나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아무 것도 모르시는 어머니는 좋아하시는 돼지갈비로 저녁 식사를 잘하셨지만, 지나가는 말처럼, 또 다시 며느리의 안부를 물으셨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입원한 날짜까지 계산하고 계셨다. 어머니 계산으로는 그 날이 45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45일나 되었어. 병원에 너무 오래 있는 것이 아니야?”
그 날 밤 나는 새벽 여섯시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결심을 굳혔다. 사실대로 말씀드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그 사람을 떠나보낼 수 있고, 또 그 사람도 마음에 남겨둔 것 없이 이곳을 떠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맞다. 그 다음 날, 49재를 치르고 우리 형제들은 그 길로 어머니에게 갔다. 노인네는 “아이고 불쌍해라, 아이고 불쌍해라” 하면서 아이처럼 엉엉 우셨고, “그렇게 살다 갈꺼면, 그렇게 살다 갈꺼면” 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으셨다. 며느리의 영정 등 장례식 때의 사진을 보여드리자 또 다시 한참을 통곡하셨다. 불효로다. 불효로다. 노인네를 저렇게 목놓아 울게 하디니 이런 불효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마른 나무 등걸같은 저런 몸에서 저렇게 많은 눈물을 뽑아내다니 이런 불효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이 사람이 쓰러져서부터 응급실과 중환실을 거친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해드렸고, 장례식의 절차도 자세하게 설명해드렸다. 어머니는 잠자코 들으셨다. 그 힘든 일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이 일이 있은지 며칠이 지났는데, 어머니는 최소한 겉으로는 평온해보이신다. 어머니는 그 날 보지 못한 큰 손녀에게 전화를 하여 애통함을 표현하기도 하셨다고 한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가 슬픔과 고통을 잘 견디고 계신다고 생각하면서 사실대로 알리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7월 5일(8주 째):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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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우리는 삼례와 안양을 오르내리면서 생활하였다. 주중에는 삼례에 머물렀으며 금요일에 안양으로 올라왔다. 안양으로 올라와서, 작은 아이는 일주일에 한번씩 받는 심리상담을 받았고 나는 나대로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였다. 부녀는 고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다니면서, 자기들이 머무는 곳에 작은 제단을 차리고 음식을 올렸다. 그 사람이 평소에 즐기던 음식을 올리기도 하였고 자기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올리기도 하였다. 출가한 큰 딸 아이가 장만해서 보낸 음식을 올리기도 하였다. 부녀는 49일 동안 그 사람과 식사를 같이 했던 것이다. 정말이다. 이 점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49재를 치룬 다음 날, 더 이상 음식을 올릴 필요가 없게 되었을 때, 참으로 의외지만, 우리 부녀는 몹시 섭섭해졌는데, 이러한 심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다니면서 우리는 마치 그 사람과 동행하는 듯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49재를 치룬 다음 날, 위패는 그녀의 시아버지 위패 등 조상들의 위패와 같이 보관하였고, 영정은 영정대로 보자기에 싼 채 따로 보관하였다. 아, 이만큼 또 멀어지는구나.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녀가 받은 핸드폰 문자들을 모두 지우기로 결심하였다. ‘농민유통’이라는 곳에서 보낸 농산물 광고 문자가 많다. 5월 11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차마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보인다. 사고 나기 직전(5월 10일 점심)에 받은 것인데, “막내 딸이예요, 엄마 밥은 먹어야지. ㅠㅠ”라는 것이 나온다. 그 전전 날의 것으로 “해피 어버이날, 엄미 사랑해. 아따가 점심시간에 전화할껭.” 하는 큰 딸의 문자도 나온다. 연극 협회 일과 관련된 문자들이 많이 나오고, 예컨대 시어머니에게 배달된 풀무원 녹즙의 대금 액수와 계좌번호를 알리는 문자, 분당서울대병원의 예약 상황을 확인해주는 문자 등등이 나오는 중에, 친정 동생들(내 처제들)에게서 온 이모티콘이 많이 들어간 문자들, 예컨대 “우리 집으로 오세용”하는, 깔깔거리는 듯한 문자들이 나온다. 나는 이것들을 다 지웠다. 너무 아까와 그 중 몇 마디는 여기에 이렇게 옮겨놓고 다 지웠다.
나를 더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과거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세워놓은 계획들이다. 그 중에는, 그녀가 계약해 놓은 주상복합아파트 같은 커다란 것도 있지만 작은 것들도 많이 있으며 아주 작은 것들도 있다. 그녀는 삼례로 가지고 가서 쓰기 위해 나무로 된 항균 도마를 하나 사두었고, 삼례로 가지고 가서 먹기 위해 현미쌀 커다란 푸대를 사두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안양 집 식탁 밑에 놓아두었는데, 그것들은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 계획들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이다.
작은 아이는 ‘반은 죽고 반은 살아있는 엄마’를 꿈에서 보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며칠 뒤 또 엄마 꿈을 꾸었다고 하였다. 꿈 속에서 엄마는 건강을 회복하고 퇴원을 하였다고 한다. 엄마는 중환자실을 나와 집에 왔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 일상적인 행동을 하였다고 한다. 나도 한번 아내의 꿈을 꾸었다. 떠난지 4주일 정도가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쓰고 있었다. 색깔이 바랜 듯했지만 흰 색이었다. 무표정이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아내를 조수석에 태우고 강원도나 전라도의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아주 좋아했다. 이 말을 아내 생전에 아내에게 해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달리다가 어두워지면 눈에 띠는 팬션이나 모텔에 들어가서 자는 것이다. 나는 사실 집 떠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데, 저녁 어스름이 깔린 이후에 집이 있는 쪽을 향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움직이면, 나는 알 수 없는 여린 불안감에 젖곤 했다. 그러나 아내와 같이 움직일 때는 달랐다. 특히 나이가 든 후 아내를 조수석에 앉히고 달릴 때면 불안감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다. 아내가 있는 곳이 곧 집이니까. 이 말을 아내 생전에 아내에게 해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제 나는 집이 없구나. 그러니 어디에 있어도 나는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 청룡열차를 타고 내리막길을 달릴 때의 느낌, 허공에 붕 떠있는 듯한 그 느낌, 그 느낌이 약간 완화된 상태로 긴 시간 동안 지속된다고 생각해 보라. 나는 자꾸 전화를 하려고 한다. 무슨 일이 생겨서 그 일을 알리려고 전화를 해야 하는데...... 혹은 기차에서 내려 집에 들어왔으니, 잘 들어왔다고 전화를 해야 하는데...... 전화를 받을 그 핸드폰이 내 손에 들려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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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입장이 바뀌어 내가 사고를 당했다면, 아내는 내 뒤를 따랐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최소한 아직까지는 입원해있거나, 일어나지 못하고 몸져누워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런데 나를 보라. 나는 뻔뻔스럽게 식사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운동을 하지 않는가? 영악스럽게도 아내가 남긴 계좌를 찾아 남아있는 돈을 인출해내고 이사를 할 계획을 세우지 않는가? 그러면서 이런 한, 두 마디 글귀나 남기려고 하지 않는가?
그래도 나는 이 글을 마저 쓰려고 한다. 문상을 해준 친구들이 내 안부를 걱정하고 내 근황을 궁금해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런 이유로 쓰는 것은 아니다. 먼 훗날 우리 가족은 힘들었던 그 시절을 어떻게 견디어냈는지를 궁금해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런 이유로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친구들 보고 읽으라고 쓰는 것도 아니요 내가 나중에 읽어보기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은 내 아내 보고 읽으라고 쓰는 것이다. 자기 부고(訃告)에 답글로 올리면 그녀도 발견해내지 않을까? 그녀는 몹시 궁금해할 것이다. 자기가 떠난 후 나와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밥은 제대로 먹는지 몹시 궁금해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이 글은 그냥 기록해두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받은 문자들을 차마 지워버릴 수가 없어서 잠시 전에 그 일부를 여기에 적어놓았다. 그것도 그녀의 삶의 흔적이니까. 나는 그녀의 화장대 서랍과 안방의 문갑을 정리하다가 그녀가 휘갈겨 쓴 낙서들을 발견하였다. 처음에 발견한 낙서에는 ‘자존심’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 같으며, ‘야성(野性)’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 같다. “자존심을 죽인다”는 문장과 “그러나 야성을 간직해야 한다”는 문장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찢어서 버렸기 때문에 정확하게 옮겨놓지는 못하겠다. 그 종이에는 ‘작두콩’이니 ‘양파, 마늘, 생강’이니 ‘신안함초 탓 컴’이니 하는 단어도 적혀있었다. 그런 메모가 또 발견되었다. 이번에는 찢어버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녀의 심정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냥 없애 버릴 수가 없어서 여기에 적어둔다. 이렇게 적어 인터넷 공간에 띠워 놓으면 영원히 남게 되지 않을까?
명월이 언제 뜨냐고 물어보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가르쳐주는 이 없고
바람타고 떠나고 싶어도
님이 올까봐 떠나지 못하네
춤을 추면서 기다려본다
밤새도록 춤을 추어보아도
한이 맺힌다
소식 없는 그 님 때문에
인간사 희노애락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 완벽한 것 없네
그 님의 마음만은
변치 않길 빌자.
이 글귀 옆에는 “3천 5백, 10프로, 1억 7천만원......” 등등 주상복합아파트의 중도금을 계산한 낙서가 적혀있는데, 그것으로 봐서, 위의 글귀를 쓴 것은 사고 나기 두, 세 달 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마지막에 발견한 것은 어느 인디언의 묘비에 적혀있다는 글귀다. 아내는 미국에 머물던 시절에 이 글귀를 알게 되었는데, 당시에 아들을 잃고 슬퍼하던 사촌 언니에게 이 글귀를 보내주기도 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나 자신이 인터넷에서 인쇄하여 아내에게 주었던 바로 그것이지만, 아내가 남긴 글이 아닌 것은 아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며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볕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숨죽인 듯 고요한 아침에 당신이 깨면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말 없는 새이며
밤 하늘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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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문의 글을 보니 마음은 조금이나마 정리가 된 것 같구나. 시간이 잘 해결해주리라 믿는다.
영태성! 글 읽는 네네 사람의 인연,관계라는 단어가 머리속에서 맴 도네요. 한편 재차 인간의 삶과 죽음도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고요. 부디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장문에 나타난 고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에 나도 눈시울을 많이 적시며 데면데면 대하고 있는 집사람과의 관계를 반성했네. 여러 모습으로 곁에서 지켜보실 고인을 생각하며 힘 내시게나
재작년 우리 합창단에서 연주했던 "내 영혼 바람되어"를 고인께 바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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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혼도 이승을 떠나 아무 미련이나 원망, 회한 없이 편안하실 테니 어머니가 게이트볼 시작하셨듯이 일상으로 돌아오시게. 진주, 희주도 원할거고 자유로와진 집사람 영혼도 그런 자네 모습을 바라실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