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와 가짜
김철
정부에서 코미디언 자니 윤을 한국관광공사의 상임감사로 발탁하여 보은 인사라는 소리를 듣지 않나, 박종철 군 물고문과 관련이 있는 박상옥 검사를 대법관 후보자로 올리지를 않나, 잇따른 인사검증 실패 문제로 2013년 물러난 곽상도 민정수석을 법률구조공단 이사장으로 내정하여 靑피아라는 비난을 듣지 않나, 또 정부 밖에서도 스스로 치매환자라고 한 라응찬 전 신한금융그룹 회장을 농심에서 사외이사로 영입하려 하지 않나, 참으로 어리석다고 볼 수밖에 없는 부실 인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선거를 도와준 사람이라면 떡 하나 더 주어 잘 살게 해 주면 될 것이지 꼭 그런 공적인 자리에 앉혀서 연금 등으로 후일을 보장시켜 주면서까지 국민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있을까 싶다.
게다가 이러한 부적격자가, 어찌 보면 가짜라 할 수 있는 부류들이 늘어나면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눈을 조금만 크게 뜨면 교수들이나 시사평론가들 중에 정말 진짜가 많은데, 늘 보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정부에는 희한한 가짜들만 판을 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독일의 메르켈(Merkel) 총리는 정적인 우르술라 폰 데얼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을, 차기 총리로 가는 디딤돌이라 할 수 있는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는데, 우리나라에도 앞으로 이처럼 좀 드라마틱한 인사가 있었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이 세상은 사실 진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진짜 옆에는 가짜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오죽했으면 서양에 <There are a dozen of poetasters around a poet.(한 명의 시인 주변에는 12명의 엉터리시인이 있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얼마 전에 온 문예지의 문인 주소록을 보니 현재 공식적으로 등록된 한국 문인 수가 약 12,000여명이고, 이 중 시인이 50%가 넘는 7,000여명이고, 수필가가 3,000여명으로 25%였다. 아마도 미등록된 인원을 합치면 이 보다 훨씬 많을 텐데, 문제는 이 속에 가짜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이다.
모 소설가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 가서 “시인들, 나오라!”라고 하면 거의 다 나온다며 자탄을 한 적이 있다.
시인이 만 명이 넘고, 수필가가 삼천 명을 넘으니 얼마나 좋은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으니 걱정인 것이다.
어느 스님은 승가(僧家)도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라 했지만, 문단에도 별의별 인간이 다 쌀의 뉘같이 섞여 있어,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존경하는 선배를 단체장으로 추대하던 미풍양속도 어쩌다 정치판을 닮아 선거로 바뀌어 원로와 새파란 후배가 같이 후보가 되어 정견 발표를 하는 낯 뜨거운 장면이 선거철마다 연출되는 것도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진짜와 가짜가 구분되는 기준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지성(知性)이라 하겠다.
지성은 분별력이고 판단력이다. 필자가 여기저기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누차 강조하는 바이지만, 지성은 정상적인 인간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지성은 독재와 독선과 편견을 제어하는 소중한 지적 자산인 것이다. 눈만 뜨면 살인이요, 방화요, 사기요, 성희롱이요, 집단 따돌림이요, 靑피아요, 官피아요, 稅피아요, 軍피아요, 海피아요, 檢피아요, 鐵피아인 이 사회도 그 동안 지성에 대한 교육만 착실히 실시되었다면 이토록 절망적일 정도로 썩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어, 수학에 밀려 음악도, 미술도, 역사도, 지리도 열심히 하지 않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우리가 어릴 때는 고등학교 때까지 여름방학이면 곤충채집, 식물채집 등의 숙제가 있었다.
이러한 정서적인 생활과 담을 쌓아 왔으니 메마를 대로 메마를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의 사람들 마음이다. 게다가 지성까지 돈과 욕정에 짓눌려 맥을 못 추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1992년 2월 15일자 경향신문 선데이매거진 페이지에도 1억짜리 중투(中透)[서울 K난원 소유]에 대한 기사가 실려 충격을 준 바 있었는데, 지난 1월 16일 새로운 품종인 원판소심 <단원소(短圓素)> 한 촉이 국내 난 경매사상 최고가인 1억 500만 원에 낙찰되었다는 뉴스가 방송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2011년 등록 당시에는 촉당 6억 원을 호가했다는 이 난에 대한 보도를 본 순간 아직도 난 메이니액(maniac)은 건재하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단원소>가 조그맣게 보도된 1월 17일자 조간지를 다시 한 번 보다가 내려놓고 필자는 누구에게는 초라하게 보일지 몰라도 필자에게는 당당한 발코니 난실로 눈길을 돌린다.
홍화라고 입수한 난이 완전 민춘란 꽃을 피우는 난실이지만 필자는 결코 난 자체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난을 수 년 전 필자에게 건네 준 난인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난 잡지에도 이름이 가끔 실리는 그를 나는 가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그의 난이 어디선가 홍화를 계속 피우고 있기를 바라는 심경일 뿐이다.
난인들은 자신이 바라는 꽃이나 잎을 난이 보여주지 않으면 흔히들 “배신 때린다, 배신당했다.”라고 한다. 그러나 난은 절대로 배신을 하지 않는다. 그저 언제나 자신의 실체를, 정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난은 말이 없다. 그러니 거짓말을 하지 않고, 항상 진실된 모습으로 사람을 바라본다. 이처럼 난은 처음부터 진짜일 뿐인데, 사람들이 난을 욕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난에는 진짜밖에 없는데, 난을 하는 사람 중에는 가짜가 꽤 많이 섞여 있는 것 같다. 그 가짜 속에 행여 “내”가 포함되어 있지나 않을까 저으기 두렵다.
무학대사가,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라고 했으니, 가짜 눈에는 가짜만 보인다고 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