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과 평창에 다녀오다 - 강릉빙상장, 오죽헌, 등명락가사, 평창 올림픽스타디움 - 벌써 열흘이 넘어 다 식어 버린 글을 올리고자 하니 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다가 올려 봅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바쁘다 보니 틈이 잘 생기지 않아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 지난 토요일인 3월 17일에 모처럼 틈이 생겨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어디를 갈 것인가 숙고하다가 평창동계올림픽에도 가지 못했던 평창에 한번 가보고자 했습니다. 평창페럴림픽도 막바지인데 한 번은 가야지 않겠느냐는 비니초님의 의견에 따라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전날부터 경기를 관전할 수 있는 것이 있나 살펴보니 강릉빙상장의 아이스하키 대이탈리아전이 남아 있다고 해서 우선 강릉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좌석은 이미 매진인지라 현장에서 입석이라도 구할 수 있나 하고 가보자 했습니다. 설사 표를 못 구해도 '매진되면 좋은 일이다' 생각하고 올림픽 기간 중 거기에 있다는데 의의를 두고자 했습니다. 또한 페럴림픽 폐막식 입장권도 매진이 되었다니 그냥 올림픽스타디움이라도 구경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을 하고 카페에 올릴 글도 올리고 나서 아침을 한 다음 6시 30분경에 집을 나섰습니다. 이 날의 백우거 마부는 비니초님이 자처하여 내부순환로를 타고 중부고속으로 달리다가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개통된 바 있는 제2영동선으로 막힘없이 달리니 기분이 상쾌하였습니다. 날씨는 쾌청하고 기온은 약간 싸늘했습니다. 원주를 지나 대관령 방면으로 오니 별천지네요. 올림픽 스타디움은 대관령IC로 확실히 평창 대관령방면은 눈으로 덮여 있네요. 기온도 영하권 달리는 차 안에서 즐기는 풍광입니다. 대관령터널 대관령을 지나 강릉지경에 접어드니 기온이 확 바뀌어 영상권으로 변하더군요. 확실히 영동과 영서는 기온 차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평창올림픽 강릉 빙상경기장 모습 오전 10시경 이곳에 도착하여 이 근처에 주차장이 어디 있는가 물어 보니 여기는 없고 7km 떨어진 북강릉환승주차장이 있어 셔틀버스가 무료로 운행된다고 해서 환승주차장을 자원봉사 안내원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안내해 주어 북강릉환승주차장을 찾아 차를 주차시킨 후 셔틀버스를 타고 빙상경기장으로 향했습니다. 10시 40분 경입니다. 빙상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강릉스피드스케이트경기장 강릉스피드스케이트경기장 강릉하키센터 정오 12시에 열릴 대이탈리아전 3,4위 경정전 예매표를 사기 위한 행렬. 장사진에 우리도 합류하였으나 혹시나 될까 조마조마한 마음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인파 500표 정도 남았다고 했을 때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우리 훨씬 앞부터는 안 된다고 거듭 자원봉사자의 안내가 있었으나 줄을 이탈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 뒤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그들도 혹시나 하고 줄을 벗어나지 않더군요. 허탈하게 매진을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입석 완전매진!! 입석 완전매진!! 창구의 문이 모두 닫일 때 우리는 입석의 행운도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매진이 되었다니 기분이 좋아 축하의 박수를 쳤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경기에 관심을 가져 표가 매진 되었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하키장에서 우리 선수들이 선전하기를 빌며 돌아섰습니다. 경기장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밖을 돌아보았습니다. 저도 이 날 여기에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스케이트조형물 앞에서 반다비가 있는 곳은 기념품 판매처입니다. 수호랑이 있으면 어디나 관심이 많더군요. 슈퍼스토어
반다비가 손님을 끌고 있습니다. 조카 지현이에게 수호랑과 반다비를 선물하고 싶어서 가게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상점 안의 모습 여기에 들어오니 기분이 좋더군요. 상점 안을 두루 살펴보고 수호랑과 반다비 한 쌍을 구입한 다음 오후 1시쯤 경기장을 나와 셔틀버스를 타고 북강릉환승주차장으로 간 다음 백우거를 몰아 인근 오죽헌으로 향했습니다. 오죽헌 정문 오죽헌 근처에서 순두부로 점심을 해결한 다음 오후 1시 40분 경 오죽헌으로 향했습니다. 오죽헌의 명성은 일찍이 들은 바 있고 근처를 지나친 적은 있지만 한 번도 관람한 바가 없어 이번 여행에 자세히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비니초님은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통해 간 바 있다며 옛일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오죽헌(烏竹軒) 「오죽헌(烏竹軒)은 원래 조선 초기 강릉의 선비 최치운(崔致雲)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그의 아들 최응현(崔應賢)에서 외손에게 상속되어 오다가 1975년 정화 사업 때 강릉시로 이관되었다. 경내에 율곡 이이(栗谷李珥)의 사당인 문성사(文成祠)와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과 율곡인성교육관을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가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5만원 권과 5천원 권 도안 인물인 신사임당(申師任堂)과 이이(李珥)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 안내문에서 옮김 - 율곡 이이(栗谷李珥) 율곡 이이(栗谷李珥 1536(중종 31년) ~1584(선조 17년)) 「이이(李珥)는 어머니인 신사임당(申師任堂)에게서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29세에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호조좌랑에서 시작하여 황해도 관찰사ㆍ대사헌을 거쳐, 호조ㆍ이조ㆍ형조ㆍ병조 판서 등을 지내며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다. 『천도책(天道策)』ㆍ『성학집요(聖學輯要)』ㆍ『격몽요결(擊蒙要訣)』ㆍ『학교모범(學校模範)』등의 저술을 남겼다. 오죽헌에서 태어나 자랐던 이이는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를 뵙기 위해 자주 강릉을 다녀갔다.」 - 안내문에서 옮김 - 오죽헌 가는 길 자경문(自警門) 앞에서 오죽헌(烏竹軒) 오죽헌(烏竹軒) 「보물 제165호. 이 건물은 1452년(문종 2)에 등제하여 대사헌까지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고택에 딸린 별당으로, 1536년(중종 31) 이이가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일자집이며 대청ㆍ온돌방ㆍ툇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이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한다. 커다란 장대석으로 쌓은 단층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결구했으며,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익공으로 처리한 이익공집이다. 앞면에는 띠살창호를, 옆면에는 골판문을 달았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이 건물은 한국주택사에서 현존하는 유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방과 대청으로만 구성된 별당만 남아 있고, 본채가 없어 조선 초기의 주택구조를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 [Daum백과] 에서 옮김 -
오죽헌 앞에서
오죽헌(烏竹軒) 편액
몽룡실(夢龍室) 편액 율곡은 외가인 오죽헌에서 태어났는데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밤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 주는 것을 보았다 하여 아명(兒名)을 현룡(見龍)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율곡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신사임당영정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년(연산군 10년) ~ 1551년(명종 6년))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조선 시대의 예술가이다. 자수, 시문, 그림 등 여러 방면에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생존 당시에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초충도(草蟲圖)」ㆍ「산수도(山水圖)」ㆍ「묵포도도(墨葡萄圖)」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룬 그림, 간결하고 단정한 필치의「초서(草書)」ㆍ「전서(篆書)」 등의 글씨,「사친(思親)」ㆍ「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등의 한시가 전한다.」 - 안내문에서 옮김 - 문성사(文成祠) 문성사(文成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제각(御製閣)이 있었는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서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文成)'은 1624년 인조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諡號)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달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政事)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성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율곡 이이(栗谷李珥) 선생의 영정 오죽헌의 명성은 이 오죽으로부터 오죽(烏竹) 줄기의 빛깔이 까마귀처럼 검은색이어서 오죽(烏竹)이라 불립니다. 다년생 초본으로 죽순(竹筍)은 5~6월에 나오는데 첫해는 초록색이였다가 다음 해엔 검게 되고 60년을 살다가 꽃이 피면 죽게 됩니다. 죽을 무렵이 되면 색깔이 흰색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살펴보니 흰색으로 변한 것도 있습니다. 어제각(御製閣) 어제각(御製閣) 편액 1788년 정조 임금은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여렸을 때 사용하던 벼루를 직접 보고 격몽요결 서문과 벼루 뒷면에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며 별도의 집을 지어 보관하도록 하였습니다. 어명(御命)으로 지었다고 해서 어제각(御製閣)이라 부르며 벼루 뒷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제(御製) 어필(御筆) 涵婺池 함무지 무원(婺源) 주자(朱子)의 못에 적셔 내어 象孔石 상공석 공자(孔子)의 도를 본받아 普厥施 보궐시 널리 베품이여! 龍歸洞 용귀동 율곡(栗谷)은 동천(洞天)으로 돌아갔건만 雲潑墨 운발묵 구름은 먹에 뿌려 文在兹 문재자 학문(學問)은 여기 남아 있구려. 오천원 권 지폐에 오죽헌과 벼루가 도안 되어 있습니다.」 -안내문에서 옮김- 율곡 이이의 유품인 벼루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 ※ 후학(後學)을 위한 학문(學問) 입문서(入門書).
오죽헌 전경 기념사진 신사임당상(辛師任堂像) 이상으로 오죽헌을 돌아보고 오죽헌 경내 마당에서 벌어지는 '평창따라 농악놀이'를 흥겹게 지켜 보노라니 시간이 많이 흘러 다음 행선지인 정동진으로 향했습니다. 오죽헌에 대해서 간략하게 올렸지만 더 상세하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강릉에서 정동진으로 간 것은 낙가사를 순례하고자 한 것입니다. 낙가사는 약 20년 전에 제가 소속된 단체에서 하계연수를 했었던 기억이 떠올라 얼마나 변모했나 궁금하기도 하고 이 기회에 돌아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또한 정동진에 온 김에 일출에 대한 희망도 없지 않았습니다. 일요일에는 흐리고 오후엔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되었기에 일출에 대한 기대는 접었지만 일출을 볼 수 없다면 바다라도 보자고 생각하고 새벽부터 달려오느라 고단한 몸을 쉬었습니다. 정동진역 바다에서 일출을 보고자 했으나... 3월 18일 일요일, 우선 해맞이로 유명한 정동진에서 일출을 보고자 6시 30분경에 바다로 나갔으나 역시나 흐린 날씨로 일출은 볼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20년 전에 낙가사에서 1박 한 후 모든 일행을 이끌고 바닷가로 갔는데 그날도 날씨가 흐려서 일출을 보지 못했던 기억이 있는데 또 똑같은 이유로 불발되었으니 아직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 30분 정도 바닷가에 머물다가 7시경 정동진역에서 강릉쪽으로 약 7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등명낙가사로 향했습니다. 7시 19분에 등명낙가사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드넓은 주차장에 제1착으로 주차했습니다. 곧바로 일주문이 눈에 들어왔는데 모든 것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두 번이나 바뀔 세월이었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수다사(水多寺, 혹은 燈明寺)인데 자장율사는 북쪽의 고구려와 동쪽의 왜구가 쉬임없이 침법하여 변방을 어지럽히므로 이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 나라를 지키고자 사찰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등명낙사에 대한 순례기는 따로 올리기로 하고 여기서는 대략만 적어 봅니다. 괘방산등명낙가사(掛榜山燈明洛迦寺) 일주문 앞에는 커다란 포대화상의 좌상과 입상이 건립되었는데 상태로 보아 최근에 세워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위에는 부도전이 있어 예를 표하고 오르자 등명감로약수가 나타나는데 이 약수는 빈혈증, 부인병, 위장병, 피부병 등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합니다. 예전에도 맛을 보았지만 철분이 많이 함유 되어 물맛이 특유의 맛이 납니다. 불이문을 통하여 주전인 영선전을 참배하고 전각을 두루 참배했습니다. 대웅전이어야 할 전각이 영산전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 것은 청자로 빚은 오백나한을 모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여겼는지 한 옆으로 새로 지은 전각이 하나 있는데 앞으로 그곳이 영산전이 될 것이라 합니다. 지금의 영산전은 대웅전으로 바뀔 것 같습니다. 주법당인 영산전(靈山殿)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제화갈라보살(提和渴羅菩薩)과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에 청자로 조성된 오백나한이 모셔져 있습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는 아미타불과 좌우로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등명사지 오층석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 이밖에 삼성각, 만월보전, 소림선원, 범종루 등이 있는데 나중에 순례기에 자세히 실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대강만 적어 보았습니다. 등명낙가사에서 1시간 반 정도 머물며 차례로 순례한 후 8시 50분쯤 일주문을 나섰습니다. 다시 정동진역으로 다시 가서 아침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마땅히 취할 것이 없어 10시 30분 경 인근 모래시계공원을 찾았습니다. 정동진 밀레니엄 모래시계 이 모래시계는 지름이 8.05m이고 폭이 3.20m인데 모래량이 8t이라고 합니다. 1990년 8월 15일착공하여 1999년 11월 15일에 준공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해시계 등이 설치되었고 열차 8칸에 전시된 <정동진 시간박물관>에는 시계의 발달사를 볼 수 있는 세계의 진귀한 시계가 전시되어 있어 배고픈 줄도 모르고 관람하였습니다. 이곳은 교육적인 면에서 자녀를 데리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1시 40분 경 이곳을 떠나 결국 밥은 평창으로 가기 위해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가는 도중 휴게소에서 해결하고 대관령으로 향했습니다. 평창올림픽스타디움은 말이 평창이지 실은 대관령에 위치해 있습니다. 평창군 대관령면이니...^^ 12시 35분 쯤에 대관령 환승장에 백우거를 주차하고 셔틀버스로 환승하여 올림픽스타디움에 근처에 내렸는데 그 거리가 비교적 짧아 금방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스타디움입니다. 밤에 패럴림픽 폐막식이 있는데 이미 입장권은 매진된 상태라 볼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역사의 현장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자 했습니다. 평창올림픽 스타디움이 보입니다. 오후 1시경에 드디어 역사의 현장인 올림픽스타디움에 발걸음을 했습니다. 이 올림픽스타디움 근처는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어 안으로 진입불가였지만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애초에 안으로 진입하고자 한 것도 아니니... 올림픽을 밝힌 성화를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이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된 열정으로 정열을 불태웠고, 평화올림픽으로 세계의 찬사를 받았고, 얼어붙었던 남북대화의 물꼬가 터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성취되는 단초가 되었으니 그것으로도 이번 평창올림픽은 위대한 올림픽으로 남을 것입니다. 패럴림픽도 또한 그 연장 선상에서 장애를 극복한 선수들의 열정을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이날 날씨가 수상하여 비를 내릴 조짐이 엿보였기에 폐막식의 대과가 없기를 바라며 1시 25분 쯤 물러났습니다. 귀경길에 약 20년 전 쯤 살았던 횡성군 안흥면, 안흥찐빵으로 유명한 찐빵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녀왔는데 이곳도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모처럼 비니초님과 뜻하지 않게 강릉과 평창을 오가면서 올림픽 현장을 겉핥기식으로 단편적으로 발걸음을 했지만 나름대로는 뜻 깊은 1박 2일을 보내지 않았나 생각되어 적어 보았습니다. 오죽헌과 등명낙가사는 다시 자세히 올려 보고자 합니다. _(())_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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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경기장의 표가 매진되어서 많은 관심을 가지신 많은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오죽헌을 제 기억으로는 두 번 정도 다녀왔습니다...또 가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강릉쪽으로 가면 매월당 김시습님의 기념관에 꼭 갈려고 하고 있습니다.
백우님과 비니초님의 강원도 기행기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경기장표가 매진되고 폐막식표가 매진 되었다니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_()_ _(())_
무슨 일을 하든 관심을 보이는 분들이 제일 반가운 법입니다.
오죽헌에 지금쯤 홍매화가 피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거기에 매월당 기념관도 있군요. 그리고 여기에는 언급을 안했지만
농악도 끝내주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 농악은 행동하면서 보여 주는 세계에서 독보적인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나무묘법연화경()()()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번개 여행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_(())_
오죽헌을 2년전에 갔다 왔는데도 이렇게 설명을
해 주시기 더욱 감회가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디....._()_
오죽헌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다음 기회에 보충하여 올려 볼 예정입니다. _()_ _(())_
감사합니다.
저는 동계올림픽을 관람하러 평창으로 다녀왔습니다. 패럴림픽이야말로 감동적인 경기였을 것 같습니다. _()_
아, 그러셨군요. 대단하십니다.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큰 추억이라 생각합니다. _()_ _(())_
88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근처에 잠깐 있었던 사실에
스스로를 위로하면 돌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