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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위 설교는 제가 가입한 개혁주의 카페에서 의견이 분분한 김성수(남가수 서머나교회)목사님의 설교문입니다.
위 설교가 개혁주의 신앙과 신조를 훼손하고 벗어났다고 하여 토론 중입니다. 물론 이 목사님은 개혁주의를 표방하신 분이시구요.. 목사님의 입장에서 한번 검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두 가지 질문을 한 번에 드려서 죄송합니다 ;;;;;)
창세전 언약과 하나님의 작정 (남가주 서머나 교회 사사기 강해중에서)|이근호신학 건전한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전쟁, 즉 하나님의 새 창조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창조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아세요? 창조란 말은 ~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입니다. 創이라는 단어는 ‘비롯할’ 창이고 造라는 단어는 ‘지을’ 조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어 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 있고 그 무엇 때문에, 그것으로 비롯되어 나타나는 것이 창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창세전에 이미 있었던 ’무엇‘에서 비롯된 것이 창조라는 것인데 그게 무엇일까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창세전 언약입니다. 다시 한번 그 창세전 언약을 확인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엡1:4-12)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보시다시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창세전 언약은, 죽은 흙에 불과한, 아니 없음에 불과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의 피로 창조해 내어 그들의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겠다는 언약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창세전 언약에 의해 만물이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 만물 안에는 인간도 포함됩니다. 아니 인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 하늘의 존재, 천사들과 그들의 영역 또한 창세전 언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청사진(blue print)에 의해 창조가 된 모든 존재는 다 그 창세전 언약을 담아내는 언약적 도구여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묵시라고 하면 이 역사와 존재는 다 그 묵시를 그려내는 붓이요 물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보세요, 인간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들까지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다른 말로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는 언약의 도구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지켜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켜낼 필요도 없는 것이라는 것이 자명해 지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는 것이 역사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역사의 운행과 방향에 조금도 개입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다니엘서의 70이레 안에 아주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69이레까지는 역사인데 나머지 한 이레가 묵시로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묵시를 사는 성도에게 있어서는 나머지 한 이레를 사는 동안의 인생과 역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와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무거운 짐을 70이레의 정점인 십자가 앞에서 벗어 버릴 때 성도라는 사람의 입에서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를 대적하여 여호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면, 헌신을 하면서 바로 그것을 이해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뿐 아니라 불신자들도 전부 하나님의 영광, 창세전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타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 절간의 스님도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역사는 완료된 묵시를 펼쳐서 설명하는 기능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역사자체는, 그리고 그 역사를 메우고 있는 존재들은 묵시 속의 참 가치와 참 존재에 대한 설명용 교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세례 이후로 이어지는 마지막 한 이레에 해당하는 기간을 사는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묵시로 편입이 되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과 그들의 인생을 가득 채우는 그들의 행위가 그 자체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해 버립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받지요? 그 인이 하나하나 떼어질 때 이 세상에 사건과 현상이 생기지요?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이미 완료되어 있는 하나님의 책,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의해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묵시가 펼쳐지니까 역사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를 창조하신 분이 ‘너는 평생 간장만 담고 살아라’라고 하시면 군소리 없이 간장만 담고 있으면 돼요. 그러한 토기장이의 뜻 앞에 ‘저는 고추장을 담고 싶은데요’라고 나설 수 있는 그릇은 없다는 말입니다. 총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목사의 역할을 맡기시면 목사로 사는 것이고, 중으로 살라고 하시면 중으로 살아야 해요. 따라서 중으로 살아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옥가라고 중으로 만드셔서 지옥 가는 것입니다. 이걸 잘 이해하셔야 해요. ‘그럼 우리 인간은 뭔가?’ 하고 따지시면 안 됩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분수니까요. 창세전 언약이 뭐라고 했습니까? 죄 속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만 구원해 내심으로, 거기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입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디에 빠져 있어야 합니까? 죄 속에 빠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않고 버려두시는 모든 존재와 상태가 다 죄인 것입니다. 그걸 로마서에서는 ‘내어버려 두심’이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 손을 대지 않으시고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시는 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죄인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지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으시고 그냥 놔두는 상태가 죄인 것이고, 그 상태가 바로 사망, 죽음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이 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어떤 상태여야 합니까? 죽은 상태여야 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죄 속에 갇혀 있어야 합니다. 그게 곧 죽은 상태니까요. 없음의 상태니까요.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죄인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을 설명하기 위한 필연적 장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 세상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3:22_23)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롬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누가 우리를 죄 아래 가두었습니까? 하나님이 가두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담의 타락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두신 감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요? 없지요? 가두신 분이 그분의 힘으로 빼내주실 때까지는 아무도 못 나옵니다. 때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자들을 권능의 손으로 빼내는 이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죄에 빠져 있는 자들이 역사 속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 자들의 실체와 구원을 하시는 이의 권능 이 극명하게 대조가 되고 구원하시는 이의 영광이 드러나실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이사야서 47장에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전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을 설명하는 용도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22절을 보면 죄 아래 가두어졌던 자들을 가리켜 ‘율법 아래 가두어 졌던 자’라고도 표기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믿음’이 와서 그들을 풀어 주는 방법밖에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 즉 없음에서 있음으로 살아 올라오는 방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가 가치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믿음 앞에서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부정되고 기각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기능적 존재로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민족적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능적이라는 말은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이 된 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기능으로 선택이 된 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나옵니까? 야곱에게서 나오지요? 야곱이라는 인물과 에서라는 인물, 둘 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한쪽은 무엇을 하기도 전에 이미 태중에서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자로 결정이 되어졌고, 한쪽은 사랑을 받는 자로 선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무엇을 잘못해서 지옥엘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는 자로 창조가 되어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의 있으신가요? 그게 토기장이에게 대드는 진흙인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능적 이스라엘은 그 속에서 구원받는 자와 유기되는 자를 우발적으로 튕겨내면서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나누어준 차표를 하나씩 받아들고 하나님이 타라고 하는 차를 탄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행선, 어떤 사람은 하행선입니다. 왜 내가 그 방향의 차를 타야 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손에 주어진 대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젖어 살던 인본주의가 박살이 나니까 너무 자존심이 상하시지요? 그런데 그러한 구별은 우리 성도의 몸 속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옛 사람과 새 사람이 공존합니다. 그런데 한쪽은 계속 공격을 당하여 멸망의 자리로 가고 다른 한 쪽은 계속 살아납니다. 그리고는 결국 한쪽이 멸망하고 남아있는 존재로 영원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능적 이스라엘은 바로 우리 성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러니가 민족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는 세대주의는 정말 얼토당토 않는 주장인 것입니다. (고전 10:5-6, 10-12)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 하였느니라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렇게 이스라엘은 우리의 거울로 미리 기능적 존재의 삶을 살고 사라진 것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욕하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나’란 말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아담을 비롯한 구약의 인물들과 이스라엘이 기능적으로 택해진 것뿐이니까요. 그렇게 성도의 삶에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관람석에서 성경이라는 무대로 밀어 넣어 버리십니다. 성도는 그 무대에서 이스라엘을 비롯한 성경의 수많은 엉터리들의 삶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이 되어서 성경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이 바로 나였구나, 즉 내가 바로 예수 죽인 자이고, 내가 바로 하나님께 수시로 대든, 죽어 마땅한 자구나’라는 고백을 하는 자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만 성령이 임하신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그 어떤 조건과 자격과 배경으로도 근거하지 않으시고 그냥 일방적으로 ‘선택’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냥 ‘너 믿음의 조상 해’그랬더니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인간의 조건에 의해 선택이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조건과 행함에 의해 선택이 취소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어지는 사람이 두려움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이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하는지 아시겠지요? 그들은 아직 자기의 행위에 목을 매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 거니까요.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죄란, 사건화 되어 밖으로 튀어 나온 몇 가지 오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형벌을 받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창세전 언약의 위대함을 증거하는 증거물들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존재를 존재케 하는 힘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들켜져야 하나요?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도저히 살 수도 없고, 살아있어서도 안 되는 그런 존재로 폭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잖아요? 이스라엘은 누구를 나타내는 기능적 존재다? 바로 ‘나’란 말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하면서 하나님께 바락 바락 대든 모든 사건들이 내 속에서 똑 같이 튀어 나오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위를 덮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오롯하고 위대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