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지(2006.9)-
솔바람 이는 소리 24
<
전주의 차, 그 뿌리 깊은 풍류- 2 >
“대관절 차가 뭐간대 그토록 차를 좇아 댕기는 거요?”
남도
길로 떠날 때마다 으레 듣던 물음이었습니다.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안개와 저녁노을이 좋아 입산하는 사람에게 연하벽(煙霞癖)이 있다고 하듯이 이른바
차벽(茶癖)이라고 할까요. 얼마 전 자기소개서에 취미를 써야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 흔한 ‘여행’커녕 ‘쏘다니기’라고 썼더니 막말처럼 여겨지는지
소개서를 받아든 이가 마뜩찮게 쳐다보았습니다.
색이나
향이 강한 꽃은 이내 질리고 향수를 덕지덕지 바른 여인네는 찌푸린 시선만을 받을 뿐입니다. 진하지 않기에 외려 멀리서 끌어당기는 차향을 좇아
여기저기 돌아다닌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차향 따라 길을 나선 또 다른 이와 우연히 만나 도란거릴 수 있는 것도 차의 은근함에서
비롯함이 아닌지요. 애초에 길은 없었다지요. 희망으로 오가다보면 생겨나는 것이 길이듯 ‘어떤 제다법(製茶法)’이 이루어졌던 ‘다문’에서 또
하나의 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만들어
진 차를 품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가 자라는 숲을 가봐야 합니다. 얼마나 건강하게 자라고 그 차를 어떻게 만드는가를 지켜봐야, 마니아를 위한
차의 진정한 품평이 되는 것이지요.” 다문의 주인장은 보성이나 화개의 단장된 차밭을 둘러봤던 이들이 순창 등지의 어질러진 ‘다문’ 차밭에서
실망하는 것을 보았답니다. 하지만 다문의 야생 차밭은 한데 어우러지는 데 그 귀함을 둔다고 했습니다. 그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의
고증이나 지역민들에게 수소문해가며 고창, 정읍부터 전북 지역의 차 자생지를 15년간이나 찾아다녔답니다. 그러다보니 전북의 지형적 특성으로 차의
질이 뛰어나다는 것도 알았다지요. 어차피 차로 시작했으니 차로 귀결해야 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누군가가 해내야 한다는 것이 그를 끝내 차 생산자로
나서게 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을 넣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살리려하니 주전자에서 우러나는 찻잎이 애초의 나무에 매달렸던 입술로 되는 ‘어떤
제다법(製茶法)’과 같은 시가 나온 게 아닐까 헤아렸습니다.
몇 몇 선입견이 높은 벽이 되어 대중화되지 못한 차를 다양한 문화와 더불어 받아들인 그는 문화와 차의 어울림 터로 ‘다문’을 만들었답니다.
다문에 모여든 사람들은 오륙 년 전부터 차밭의 현장을 둘러보고 차 한 잔에 기울이는 공과 정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북지역에서는 이렇다 할
경쟁관계가 없고 한편으로, 외국에서 싼 값에 들여온 차로 제다하는 일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주인장은 고집대로 다문차(茶門茶)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문은 오목대의 자생차도 함께 시음하게 해 이 지역 삶의 바탕을 결국 한 단계 높였답니다.
교동 오목대는 조선 왕조의 태조 이성계가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새 왕조의 건립에 대한 계획을 밝힌 곳입니다. 그 비탈진 곳에 차나무가 이백년
전부터 자라왔답니다. 박시도 님은 여기서 차밭을 발견한 후 전주의 문화적 자산으로 가꾸어 왔습니다. 그러니 ‘전주에는 차와 그 문화가
없다’던 설을 불식시키고 오래전부터 이미 전주사람들이 차를 즐겨 마셔왔음을 알리게 되었지요.
사람살이에도 차 하나로 채울 수 없듯이 전주의 차는 전주의 풍류와 이루어진다고 덧붙이던 안주인 정정숙 님은 강경차밭의 찻잎으로 만든 발효차를
다려 주었습니다. 달큼한 황차로 배를 불린 뒤 오목대로 향했습니다.
오목대로 들어서는 길목에 가람 이병기 선생이 머물던 양사재가 있습니다. 방구들 덥히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양사재 뒤꼍이 바로 오목대의 차밭이
우거진 곳이지요. 지금은 한옥체험관으로 누구나 온돌 방구들에서 묵을 수 있지만 전주의 향교로 문을 연 양사재는 가람 이병기 선생이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으로 머물던 관사였지요. 가람 선생이 차나 먹고 살까나... 란 시구를 남긴 것도 오목대에 차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겠는지요.
혼자가
아닌, 더불어 하는 사람이 아름답듯이 여러 나무와 어우러져 놀 듯한 오목대의 찻잎은 육질이 두텁고 유난스레 반질거렸습니다.
고도 전주의 천년 역사에는 역시 흐르는 물이 그 바탕이 됩니다. 전주의 물은 콩나물 국밥을 비빔밥과 함께 전주 대표음식으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물맛이 차 맛을 좌우하듯이 콩나물도 물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답니다. 서울의 ‘전주 삼백집’에서 콩나물국밥을 맛있게 먹던 기억으로 전주의 원조
삼백집을 찾았습니다. 서울의 맛을 싹 달아나게 한 원조의 맛이더군요. 삼백그릇만 판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전주 삼백집을 박정희 대통령이 찾았을
때 “이놈아, 누가 보면 영락없이 박정희 인 줄 알것다. 그런 김에 이 계란 하나 더 처먹어라” 던 욕쟁이 할머니의 일화가 유명한 집이지요.
콩나물부터가 달랐습니다. 키 큰 사람치고 싱겁지 않은 이가 없다하더니 콩나물이 꼭 그 짝이더군요. 밍밍한 서울의 키 큰 콩나물과 달리 짧고
가늘고 질긴 편인 삼백집 콩나물은 고소한 맛이 일품인데 콩나물을 키우는 물이 그 맛의 비결이라고 했습니다. 노른자 생생한 계란이 얹혀 나온 국밥
뚝배기에 소고기 장조림과 새우젓, 구운 김을 잘게 부서뜨려 넣어 먹으니 과연 깊은 맛이 나더군요. 새벽부터 사람이 북적이는 콩나물국밥집을 전주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손님이 주무시는 시간에도 육수는 끓고 있습니다.’라는 간판처럼 사람들이 종일 모여드는 왱이콩나물국밥집은 왱이,
엥이, 욍이, 웽이, 앵이, 왕이 라는 특허 받은 별난 이름처럼 그 맛도 별났습니다. 잘게 썬 오징어로 해물맛 나는 콩나물국 뚝배기에 밥 따로
계란 따로 내어왔습니다. 계란을 넣어 살짝 익힌 반숙의 맛에 양푼이의 김치를 길게 찢어 걸쳐먹으면 사람들이 왱왱 모여드는 까닭을 알 수 있지요.
후식으로 한 주먹씩 튀밥을 먹는 것도 별난 맛이었지요. 관광객들의 단골집인 삼백집, 왱이콩나물국밥집 말고도 남부시장 안의 현대옥은 전주사람들이
참맛으로 찾는 국밥집이지요. 어디 두세 집만 전주를 대표하겠습니까. 전주천이 빚어낸 맛의 고장으로도 손색없는 예향의 도시입니다. 이렇듯 차와
콩나물의 맛을 키워주는 전주천변에서 물장구치는 아이들을 지켜보다 다시 발길을 옮겼습니다.
< 삼백집의 콩나물국밥은 콩나물이 다르다>
<왱이 콩나물 국밥은 밥따로 계란 따로>
<왱이콩나물 국밥을 먹은 뒤 한주먹씩 들고나가는
후식,튀밥>
해질녘 사적 제288호로 비잔틴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손꼽히는 전동성당을 들렀습니다. ‘사랑은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전부를 주어야 전부를 가질 수 있지요.’라는 신부님의 강론 말씀처럼 다문의 주인장 내외는 차와 그 문화를 통해 전주
사람의 향과 멋과 맛을 우려내려고 오늘도 그들의 전부를 걸고 살아갑니다.
복효근
시인은 “ ‘차(茶)’가 ‘도(道)‘에 이르는, 혹은 그 자체가 ‘도(道)’라고 일컬을 수 있다면 ‘시(詩)’도 사람을 참답게 하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 ‘어떤 제다법(製茶法)’으로 차 마시는 이들이 이르러야 할 길을 일러주었지요.
“저 여린 찻잎을 따서 뜨거운 불에 덖어 그 잔인한 단련 후에 인간이 음용한다면 그에 값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 시가
그런 경지를 흉내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차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모진 단련을 이겨낸 찻잎의 흉내를 내기나 했는지, 차 한 잔에 들어있는 삶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기나 했던지, 전주
‘다문’에 얽힌 시 ‘어떤 제다법(製茶法)’으로 살아가는 법을 다시 깨우치며 이슥한 서울 길에 올랐습니다. 전동성당의 종탑을 밝히는 불이
켜지더군요.
ryuotea@hanmail.net">ryuote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