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마케팅' 전문가 佛 슈발리에ㆍ카페레 교수 인터뷰
"고급브랜드 안 팔린다고 인터넷 저가판매·바겐세일…망하는 지름길 되기 십상 럭셔리 이미지는 꼭 지켜야
한국 등 후발주자는 고유 전통에 국제감각 갖춰야 화장품 '설화수'는 성공사례"
- ▲ 지난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한 모델이 화려한 액세서리와 의상을 선보이고 있다. / AP연합뉴스
지난 6월 초 파리 패션업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1987년 파리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최고급 맞춤복) 시장에 혜성같이 등장해 새 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라크루아(Christian Lacroix)가 자금난에 빠져 법정관리를 신청했기 때문이다.
라크루아의 몰락은 글로벌 경기 침체의 파도에 럭셔리 산업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세계 럭셔리 업계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라크루아는 자신의 이름을 건 최고급 패션으로 한동안 전성기를 누렸으나, 불황의 파고에 휩싸여 지난해 3000만유로(약 540억원)의 매출에 1000만유로(약 18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라크루아는 재봉사 8명을 데리고 파리 교외의 한 창고로 들어가 '와신상담'하고 있지만, 부도난 럭셔리 브랜드가 재활한 경우가 거의 없어 재기 여부는 불투명하다.
라크루아는 극단적인 사례이겠지만, 루이비통이나 에르메스를 비롯한 럭셔리 업계가 전반적으로 이번 불황의 직격탄으로 매출액이 급감하면서 위기감에 빠져 있다. 세계 최고의 럭셔리 제품 그룹인 LVMH(루이비통의 모그룹)도 올 1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7%나 감소, 비상 경영에 돌입했다.
럭셔리 업계는 누적되는 재고를 줄이기 위해 과거 금기시됐던 할인 판매, 인터넷 판매 등의 자구책을 동원하고 있다. 하지만 럭셔리 브랜드의 저가(低價) 할인 판매는 고급스러운 브랜드 이미지를 실추시켜 미래의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는 모순을 럭셔리 업계에 안겨주고 있다.
럭셔리 산업 분야에서 수십년째 부동의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에서, '럭셔리 마케팅' 분야 최고 이론가로 꼽히는 HEC의 장 노엘 카페레(Jean-Noel Kapferer) 교수와 미셸 슈발리에(Michel Chevalier) 교수를 만나, 전례 없는 불황에 직면한 럭셔리 업계의 고민과 해법, 럭셔리 브랜드를 구축하기 위한 기업의 마케팅 전략에 대해 물어봤다.
HEC는 프랑스 최고의 명문 경영대학원으로 '럭셔리 마케팅'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HEC는 최근 한국 기업인 '서울 럭셔리 비즈니스 인스티튜트(SLBI)'와 손을 잡고 교수진을 서울에 직접 파견, 럭셔리 마케팅 교육프로그램의 진수를 조만간 선보일 예정이다. (교육 과정 8월 오픈 예정, www.slbi.co.kr)
- ▲ 지난 7일 미국 뉴욕의 한 보석상 진열대에 75% 세일을 알리는 문구가 놓여 있다. 최근 베인&컴퍼니는 경기 불황의 영향으로 올해 전 세계 럭셔리 산업 매출액이 작년보다 10% 정도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 AFP연합뉴스
■"럭셔리산업, 비용 절감과 고급 이미지 사이의 줄타기"
―글로벌 경기 침체가 럭셔리 산업엔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
"(슈발리에 교수) 럭셔리 산업의 불황은 2008년 7월 미국 시장에서부터 감지됐고, 유럽에서는 그해 10월부터 시작됐다. 미국에서 발생한 불황의 여파는 매우 강력했다. 어떤 매장에선 매출이 50%까지 줄었다. 유럽은 10%, 일본은 20%가 줄었다. 올해 럭셔리 산업의 매출은 낙관적으로 봐도 5~10% 줄어들 것이고, 상황이 더 나쁘면 15%까지 줄어들 수도 있다."
―럭셔리 기업들이 판매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인터넷 저가(低價) 판매나 바겐세일에 나서고 있다. 자충수 아닌가?
"(카페레 교수) 그런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럭셔리 제품에는 '취득의 장애', 즉 기다려야 한다는 개념이 있어야 한다. 페라리 자동차를 언제든지 살 수 있다면 페라리 소유자가 되는 즐거움의 절반이 날아가는 셈이다. 방트 프리베(vente prive·단골 고객을 대상으로 명품을 한정 할인판매 하는 것·아래 관련 기사 참조)의 경우도 큰 위험이 존재한다. 방트 프리베에서 이브 생 로랑의 고급 드레스를 산 고객은 방트 프리베 로고가 박힌 비닐 봉투에 담긴 드레스를 받게 된다. 이런 식의 판매 방식은 소비자들에게 전통적인 럭셔리 개념과의 단절을 야기한다."
"(슈발리에) 인터넷 쇼핑몰을 통한 럭셔리 제품 판매가 가져오는 문제점 중 하나는 제품에 대한 품질 보증이 제대로 안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모조품 판매 비율이 높다. 이런 식의 판매가 지속되면 럭셔리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될 가능성이 크다."
―불황에 대처하기 위해 럭셔리 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슈발리에) 연간 10%의 성장률을 기록했던 기업이 10%의 성장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경영학 원리에 따르자면 모든 비용을 10% 절감해야 한다. 하지만 제품의 가치를 우선해야 하는 럭셔리 산업의 경우 저가의 재료와 저가의 노동력을 사용해서 비용을 절감하기는 어렵다. 럭셔리 브랜드는 한 번 이미지가 손상되면 회복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비용 절감과 고급 이미지 보존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카페레) 랑방 향수제품의 아이콘이었던 아르페쥬(Arpeges)가 좋은 예다. 비용 절감을 위해 크리스털 병을 다른 재질로 바꾸는 등 자잘한 비용 절감 노력이 계속됐는데, 불행하게도 이 때문에 고급 향수의 이미지를 상실했고 결국 시장에서 퇴출됐다. 비용 절감만 생각한다면 몽블랑 만년필 몸체를 저가의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선 망하기 십상이다."
―럭셔리 기업들이 수익 확대를 위해 세컨드 라인 진출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전략이 기존 럭셔리 브랜드의 이미지를 갉아먹을 가능성은 없나?
"(카페레) 럭셔리 산업이 안고 있는 '역설(逆說)'과 관련된 문제다. 럭셔리 브랜드는 특정 소비 계층을 위한 소량 생산이 기본 개념이다. 하지만 소량 생산을 고집해서는 수익 확대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루이비통의 경우 3000㎡의 대형 매장에서 제품을 파는데, 이렇게 큰 매장에서 핸드백 한 가지만 팔아선 수익을 내기 어렵다. 대형 매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판매 대상 상품의 확장이 필요하다. 세컨드 라인을 만드는 것도 이 때문에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보석 전문 럭셔리 기업인 불가리가 럭셔리 시계 '불가리불가리' 모델을 처음 출시했을 때 7년 동안 한개도 팔지 못했다. 소비자들이 시계를 시계로 보지 않고 보석의 일종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럭셔리 브랜드가 상품 영역을 확장할 때, 상표의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 미셸 슈발리에 / 장 노엘 카페레
―럭셔리 제품이라고 정의하는 기준은 뭔가?
"(카페레) 패션 산업에서 고급 제품만 럭셔리 산업에 포함하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스파(spa)나 고급 성형외과, 뱅앤올룹슨과 같은 하이테크 제품도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슈발리에) 1954년 프랑스에 콜베르 위원회(프랑스 명품업체들의 이익단체)가 등장하면서 럭셔리 산업이 탄생했다. 하지만 럭셔리라는 명칭에는 '낭비', '음탕', '무절제한 소비'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깃들어 있어 나는 용어 선택이 잘못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럭셔리 산업의 정의는 세 가지다. 첫째, 창조성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둘째, 제품의 질을 위해 구체적인 면까지 신경 쓰는 장인(匠人) 공예가 뒷받침돼야 한다. 셋째, 제품이 국제화돼야 한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어우러져야 진정한 럭셔리 제품이라고 볼 수 있다."
―소비자들이 럭셔리 제품에 열광하는 이유는?
"(카페레) 럭셔리 제품이 되기 위해서는 제품 자체가 럭셔리한 특성을 갖고 있어야 하며, 이를 사람들이 인정해줘야 한다. 예컨대, 럭셔리 와인의 경우 와인 자체가 희귀하고 고급이어야 하는 것은 물론, 파리의 고급식당에서 우아한 서비스와 함께 마시는 와인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또 럭셔리 제품은 전문 유통 구조를 갖고 있어야 한다. 뛰어난 공예품이라도 럭셔리 전문 유통 시스템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냥 값만 비싼 제품으로만 남게 된다."
"(슈발리에) 미국에선 럭셔리 소비자를 최상류층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럭셔리 산업의 성장 동력은 중산층이다. 럭셔리 산업이 성장하는 국가는 중산층이 성장하는 곳들이다. 중산층이 럭셔리 제품에 열광하는 이유는 창조적인 유행에 동참하려는 소비 욕구 때문이다."
―럭셔리 산업의 마케팅과 경영이 다른 산업과 다른 점은?
"(카페레) 럭셔리 산업은 무엇보다 창조성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다른 산업과 다르다. 창조는 뛰어난 공예가나 창조적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결국 지적인 과정인 셈이다. 예컨대, 리처드 밀(Richard Mille)은 시계 분야에서 포뮬라1(세계 최고의 자동차경주대회)과 같은 명품을 창조하길 원한다. 비용은 상관하지 않고, 첫해에 20개만 생산하는 식이다. 표준화된 시계 산업에 이런 고급성과 희귀성이 식상한 소비자들을 만족하게 한다. 이는 전통적인 마케팅에 반하는 마케팅이다. 이처럼 수익을 무시하는 희귀 제품 창조의 즐거움이 럭셔리 산업의 마케팅의 토대가 된다."
- ▲ 지난 7일 미국 뉴욕의 한 보석상 진열대에 75% 세일을 알리는 문구가 놓여 있다. 최근 베인&컴퍼니는 경기 불황의 영향으로 올해 전 세계 럭셔리 산업 매출액이 작년보다 10% 정도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 AFP연합뉴스
■"제품이 아니라 문화를 팔아라"
―프랑스는 럭셔리 산업 분야의 세계 최강자다. 남다른 경쟁력의 비결은?
"(카페레) 프랑스에는 럭셔리 산업에 관한 체계와 지식이 오래 전부터 축적돼 왔다. 프랑스 럭셔리 산업의 기초에는 귀족 계층이 있다. 루이 14세 때부터 럭셔리 산업 개념이 발달했다. 졸부들은 남을 모방해 부를 과시하지만, 순수 귀족들은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지 않고 지위에 맞는 복식을 갖추어야 했다. 이런 귀족 계층의 소비 패턴이 럭셔리 산업이 발달하는 토양으로 작용했다. 프랑스에는 또한 여러 세기에 걸쳐 럭셔리 산업 장인(匠人)들이 발전시켜온 두터운 기술적 전통과 문화적 유산이 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경우 중산층이 두터운 데다 국민들의 패션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럭셔리 제품의 소비 기반이 튼튼하다. 럭셔리 시장이 발전하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국내 시장부터 존재해야 한다."
―한국과 같은 후발 산업 주자가 럭셔리 산업 대열에 동참할 수 있는 방법은?
"(슈발리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일본과 중국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고유 럭셔리 브랜드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 반면, 중국은 세계적인 럭셔리 상표 구축에 성공하고 있다. 1969년 내가 경영대학원을 졸업할 당시 일본 시세이도 화장품이 에이본에 이어 세계 2위의 화장품회사였고, 프랑스의 로레알은 4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로레알은 세계 1위가 됐고, 시세이도의 사세는 로레알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일본은 파리 진출을 럭셔리 브랜드로의 도약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적인 제품을 만들면 세계가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반면 중국은 국제적인 럭셔리 브랜드가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전통에 바탕을 두면서도 창조성과 국제적 비전을 잘 가미하고 있다. 중국 시아치첸(shiatzy chen·중국의 패션 브랜드)의 경우 이미 럭셔리 패션 반열에 있다. 이 밖에 향후 10~15년 내에 럭셔리 브랜드로 도약할 상표가 상당히 많다."
"(카페레) 럭셔리 브랜드가 되려면 다른 제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지녀야 한다. 이런 경쟁력의 원천은 역사에서 나온다. 한국 기업에는 우선 유럽이나 중국시장에서 잘 팔리는, 프랑스 럭셔리 제품을 모방한 향수나 화장품 생산을 권하고 싶다. 또 럭셔리 이미지는 문화적인 전통과 깊이 관련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화장품 '설화수'의 성공 사례가 좋은 예다. 이 제품은 한국의 녹차 전통과 결부돼 있다. 해외의 설화수 소비자들은 한국의 전통 한의학에 뿌리를 둔 고급 녹차 문화를 접하는 셈이다.
럭셔리와 가장 가까운 분야는 예술이다. 서울은 현대 예술이 상당히 발달한 도시다. 창조적인 디자이너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조건은 갖춰져 있는 셈이다. 한국 정부에 20~30명의 창의적 디자이너를 집중적으로 키우라고 조언하고 싶다. 이 정도 규모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서울에서 활동한다면 서울도 세계적인 패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