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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金奭鎭 (1847 ~ 1910)】 "오로지 충신은 김석진뿐이다"
847년 1월 21일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부친 김낙균(金樂均)과 모친 남원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천실기』에는 1843년생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이다. 10세 되던 1853년 생부 김낙균의 족형(族兄) 김도균(金道均)과 연일 정씨의 아들로 들어가 후사를 이었다. 가문은 조선 중기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던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형제가 선대로서 그의 11대조이다. 김상헌의 3대손으로 조선 후기 시문과 문장, 글씨로 소위 ‘6창(昌)’이라 추앙받았던 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김창업(金昌業)·김창집(金昌緝)·김창립(金昌立) 형제가 8대조이다. 생부 김낙균은 이들 ‘6창’ 중 여섯째인 김창립의 후손이고, 양부 김낙균은 김상용 계열이다. 조부 김병주(金炳疇)는 순조의 둘째 딸 복온공주(福溫公主)와 혼인하여 부마로서 창녕위(昌寧尉)에 제수되었다.
1858년 처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받았고, 1860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에서 가주서(假注書, 정7품)로 입사하였다. 20대에는 홍문관 교리, 홍문관 부수찬·사간원 정언(종6품), 호조정랑(정5품), 홍문관 응교(정4품)를 거쳐 병조참의·형조참의·우부승지(정3품)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평소 “선비는 차라리 정도(正道)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권력을 좇아 살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시세에 민감하게 권력을 좇는 것을 극히 경계하였다. 30대에는 평안북도 병영소재지 안주(安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였고, 황해도 수안군수(遂安郡守)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이어 정2품 5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종2품 동지의금부사, 승문원 제조, 동지춘추관사, 한성부 좌윤을 역임하였다. 이때 수안에서 탐학한 관리들을 처리하였으며, 1876년 경주에서 흉년이 들자 백성들의 구휼과 관리들의 부정 방지에 힘써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얻고 칭송을 받았다. 1876년 2월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될 즈음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사직소를 냈다. 40대에 여러 차례 관직에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그때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아 직임을 계속하였다. 이 시기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공조·이조·호조·예조·형조의 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독권관(讀券官)·고관(考官) 등의 직책과 광주부(廣州府) 유수(留守)를 역임하였다. 1892년에는 3도(三道) 육군통어사(陸軍統禦使)로서 충청·전라·경상 지역의 육군을 총괄하였다.
51세가 되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경기 양근(陽根) 연양(延陽, 현 경기 양평군 강상면 연양리)으로 낙향하여 1896년 5월 사안당(思安堂)을 짓고 그곳에서 통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로 밤을 새우는 등 시세를 한탄하며 두문불출하였다. 1902년 모든 관직에서 사퇴 의사를 밝히고, 다음해 1903년 11월에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폐후(廢后)의 글을 작성한 이승오(李承五)와 폐후조서를 위조하여 외국 공관에 통보하였던 김윤식(金允植)에 대한 처단을 주장하였다. 두 사람을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일본의 침략과 관련된 일체의 매국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노구를 끌고 급히 상경하여 을사늑약 파기와 5적 처단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토역소(討逆疏)」를 올려 “외척과 재상과 일반 신하와 군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순국함에 그 충성을 포상하는 것을 극진히 하니, 이 여러 신하를 충신이라 하면 저들이 역적임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 하며 지사들의 자정 순국이 을사늑약 가결에 서명한 5명을 역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임을 제시하였다. 이어 “외부(外部)에 명하여 각국 공사관에 성명하고 공법을 펴 당일 가(可)라고 쓴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5적을 극한 벌로 다스려 종사를 편안케 하소서”라고 하여 각국 공사관에 조약 무효를 밝히고 을사 5적에 대한 엄단을 주청하였다. 1905년 11월 자결한 조병세(趙秉世)의 문상을 다녀오는 길에 남문(南門)의 청시(淸市)에 들러 아편을 구입하여 자결을 준비하였다.
1910년 9월 4일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총독부에서 만나자고 초청하자 영문을 몰라 일단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9월 6일에는 자신과 어린 시절을 보낸 인척 윤용구(尹用求)에게 당도한 문서를 통해 일제가 고위 관료와 명망 있는 유학자들에게 남작(男爵)의 작위를 주고 25,000원의 은사금을 주어 회유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다음 날 자식들과 자신의 처신을 논하면서 어찌할까를 묻자, 큰 아들 김영한(金寗漢)이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습니까”하니, 기뻐 웃으며 “바로 그렇다”라고 하여 일본의 지배하에 한시도 살아갈 수 없음을 밝히며 결심을 굳혔다. 다음 날인 9월 8일 아침, 문안을 온 큰아들에게 평소와 다름없이 “날씨가 어떠한가” 물어본 후, 5년 전 미리 구입해 둔 아편을 복용하고 오후 5~7시경 오현(梧峴, 昌寧尉宮齋舍)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당시 일반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사망 소식에 외국 공사들과 상인들도 ‘오로지 충신은 김석진뿐이다’라고 하면서 칭송하는가 하면, 사우(士友)들은 집에서 스스로 조상하며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 또한 김복한(金福漢)·김인식(金寅植)·윤긍주(尹兢周) 등 전국의 우국지사들이 애통해 하는 제문(祭文)과 애장(哀章)을 보내왔다. 한말 독립운동의 귀감을 삼기 위해 우국지사들의 행적을 모은 각종 기록물에도 그의 행적이 열거되었다. 대표적으로 박은식의 『한국통사』, 조희제의 『염제야록』, 송상도의 『기려수필』 등에 일제의 침략 정책에 항거한 대표적 인물로 소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847년 1월 21일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부친 김낙균(金樂均)과 모친 남원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천실기』에는 1843년생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이다. 10세 되던 1853년 생부 김낙균의 족형(族兄) 김도균(金道均)과 연일 정씨의 아들로 들어가 후사를 이었다. 가문은 조선 중기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던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형제가 선대로서 그의 11대조이다. 김상헌의 3대손으로 조선 후기 시문과 문장, 글씨로 소위 ‘6창(昌)’이라 추앙받았던 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김창업(金昌業)·김창집(金昌緝)·김창립(金昌立) 형제가 8대조이다. 생부 김낙균은 이들 ‘6창’ 중 여섯째인 김창립의 후손이고, 양부 김낙균은 김상용 계열이다. 조부 김병주(金炳疇)는 순조의 둘째 딸 복온공주(福溫公主)와 혼인하여 부마로서 창녕위(昌寧尉)에 제수되었다.
1858년 처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받았고, 1860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에서 가주서(假注書, 정7품)로 입사하였다. 20대에는 홍문관 교리, 홍문관 부수찬·사간원 정언(종6품), 호조정랑(정5품), 홍문관 응교(정4품)를 거쳐 병조참의·형조참의·우부승지(정3품)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평소 “선비는 차라리 정도(正道)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권력을 좇아 살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시세에 민감하게 권력을 좇는 것을 극히 경계하였다. 30대에는 평안북도 병영소재지 안주(安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였고, 황해도 수안군수(遂安郡守)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이어 정2품 5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종2품 동지의금부사, 승문원 제조, 동지춘추관사, 한성부 좌윤을 역임하였다. 이때 수안에서 탐학한 관리들을 처리하였으며, 1876년 경주에서 흉년이 들자 백성들의 구휼과 관리들의 부정 방지에 힘써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얻고 칭송을 받았다. 1876년 2월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될 즈음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사직소를 냈다. 40대에 여러 차례 관직에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그때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아 직임을 계속하였다. 이 시기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공조·이조·호조·예조·형조의 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독권관(讀券官)·고관(考官) 등의 직책과 광주부(廣州府) 유수(留守)를 역임하였다. 1892년에는 3도(三道) 육군통어사(陸軍統禦使)로서 충청·전라·경상 지역의 육군을 총괄하였다.
51세가 되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경기 양근(陽根) 연양(延陽, 현 경기 양평군 강상면 연양리)으로 낙향하여 1896년 5월 사안당(思安堂)을 짓고 그곳에서 통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로 밤을 새우는 등 시세를 한탄하며 두문불출하였다. 1902년 모든 관직에서 사퇴 의사를 밝히고, 다음해 1903년 11월에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폐후(廢后)의 글을 작성한 이승오(李承五)와 폐후조서를 위조하여 외국 공관에 통보하였던 김윤식(金允植)에 대한 처단을 주장하였다. 두 사람을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일본의 침략과 관련된 일체의 매국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노구를 끌고 급히 상경하여 을사늑약 파기와 5적 처단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토역소(討逆疏)」를 올려 “외척과 재상과 일반 신하와 군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순국함에 그 충성을 포상하는 것을 극진히 하니, 이 여러 신하를 충신이라 하면 저들이 역적임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 하며 지사들의 자정 순국이 을사늑약 가결에 서명한 5명을 역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임을 제시하였다. 이어 “외부(外部)에 명하여 각국 공사관에 성명하고 공법을 펴 당일 가(可)라고 쓴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5적을 극한 벌로 다스려 종사를 편안케 하소서”라고 하여 각국 공사관에 조약 무효를 밝히고 을사 5적에 대한 엄단을 주청하였다. 1905년 11월 자결한 조병세(趙秉世)의 문상을 다녀오는 길에 남문(南門)의 청시(淸市)에 들러 아편을 구입하여 자결을 준비하였다.
1910년 9월 4일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총독부에서 만나자고 초청하자 영문을 몰라 일단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9월 6일에는 자신과 어린 시절을 보낸 인척 윤용구(尹用求)에게 당도한 문서를 통해 일제가 고위 관료와 명망 있는 유학자들에게 남작(男爵)의 작위를 주고 25,000원의 은사금을 주어 회유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다음 날 자식들과 자신의 처신을 논하면서 어찌할까를 묻자, 큰 아들 김영한(金寗漢)이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습니까”하니, 기뻐 웃으며 “바로 그렇다”라고 하여 일본의 지배하에 한시도 살아갈 수 없음을 밝히며 결심을 굳혔다. 다음 날인 9월 8일 아침, 문안을 온 큰아들에게 평소와 다름없이 “날씨가 어떠한가” 물어본 후, 5년 전 미리 구입해 둔 아편을 복용하고 오후 5~7시경 오현(梧峴, 昌寧尉宮齋舍)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당시 일반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사망 소식에 외국 공사들과 상인들도 ‘오로지 충신은 김석진뿐이다’라고 하면서 칭송하는가 하면, 사우(士友)들은 집에서 스스로 조상하며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 또한 김복한(金福漢)·김인식(金寅植)·윤긍주(尹兢周) 등 전국의 우국지사들이 애통해 하는 제문(祭文)과 애장(哀章)을 보내왔다. 한말 독립운동의 귀감을 삼기 위해 우국지사들의 행적을 모은 각종 기록물에도 그의 행적이 열거되었다. 대표적으로 박은식의 『한국통사』, 조희제의 『염제야록』, 송상도의 『기려수필』 등에 일제의 침략 정책에 항거한 대표적 인물로 소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