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인(檀君神人)과 구이(九夷)의 조선(朝鮮)
조선인을 식민국민으로 개조하라!
"조선인들은 유구한 역사적 자부심과 문화에 대한 긍지가 높아 통치가 어렵다. 그들을 대일본제국의 식민으로 만드는 방법은 그들의 가장 큰 자긍심인 역사를 각색하여 피해의식을 심는 것이다. 조선인을 뿌리가 없는 민족으로 교육하여 그들의 민족을 부끄럽게 하라. 문화 역시 일본의 아류임을 강조하여 교육해야 한다. 그렇게 될때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스스로 대일본제국의 시민으로 거듭나고 싶어할 것이다. 창씨개명을 통해 먼저 조상 단군을 부정하게 하라. 그것이 식민국민을 식민국민답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일본총독부 <조선식민통치사> 중에서-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들어라.
"조선인들이 자신의 일,역사,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여,민족혼,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라. 조상과 선인(先人)들의 무위,무능,악행들을 들추어내,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의 청소년들이 부조(父祖,부모,조상)를 경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을 만들라. 그리하여 점차 자아혐오증으로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면, 배움에 갈증 심한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부정적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그들은 반드시 경멸적 혐오증에 걸려 실망과 허무감에 빠질 것이다. 그러한 때에 미화 과장된 일본사적, 일본문화, 일본의 위인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과 첩경이다. -조선총독부 3대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문화통치 교육시책-
고서를 모조리 태워 단군조선을 말살하라!
1910년 8월28일 일제는 한일합방으로 조선을 멸하고,식민통치를 시작하였다. 조선총독부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취임후 1910년11월부터 1년2개월 동안 단군조선관련 고사서 51종 20여만권을 수거하여 불태웠다. 1916년 왜왕의 명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한 후 본격적인 역사왜곡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결과, 총 35권 2만4천여쪽으로 조작한 [조선사]가 발행되었고,그로부터 한민족의 역사는 뿌리째 단절,왜곡되었다.
-조선총독부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도대체 알 수 없는 한국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만큼 단군 조선은 아시아 고대사에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는데 당신들 한국인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이다." - 러시아에서의 고대사 세미나 중 U.M 푸틴이라는 사학자의 말 -
이조선(李朝鮮)의 구서령(求書令) -환국,조선 고사서 강제수집.
이 조선은 제7대왕 세조, 예종, 성종조 3대에 걸쳐 전국에 산재한 고서들을 모두 강제 수거하였다.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예종 7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9월 18일(무술) 3번째 기사-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세조 7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5월 26일(무자) 3번째기사-
조선 2천년은 세계사의 기적이다.
조상이 있어 나있고, 나 있어 조상 있다. 조상 없이 못 태어나고, 조상 없는 자손 없다. 2천년을 이은 단일왕조가 단군조선 말고 또 있던가! 세계문명사의 최초, 최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동방에 군자국이 있다"고 했다. "단군신화"는 총독부가 1938년에 조작했다. 우리 5천년사, 어느 문헌에도 "단군신화"라는 기록은 없다.
총독부가 단군조선 없앤지 7년 만에 패망했다. 총독부가 퇴각한지 환갑이 다 되도록, 아직도 총독부 사학파 잔당들은 "단군실사"를 안믿는다. 단군사 진서를 위서라 하고, 총독부 "단군신화론"은 정론이라 한다. "단기고사, 환단고기, 규원사화"와 아직 공개못한 "홍사, 동국역대, 단서" 등 새로운 고전을 서로 보완하여 엮었다. 우리 역사의 총체적인 진실이 여기에 있다. -조선 4333(2천)년 상달 초사흘,개천제 한터 송호수박사-
단군신인(檀君神人),구이(九夷)의 추대받고 조선(朝鮮)을 열다.
홍사(鴻史) 서문
동방에 나라가 있었으니 가로되 동이(東夷)라, 별의 분포로서는 기미(箕尾)이고 땅은 선비(鮮卑)에 접해 있었다. 처음에 단군신인(檀君神人)이 있어, 드디어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니, 요(堯)와 더불어 나왔다. 우순(虞舜)이 동이에서 났으니 포의자(浦衣子)로부터 수학(受學)하였다. 중국에 들어와서 천자가 되어 백왕을 뛰어 넘는 정치를 했다. 광성자(廣成子)는 남보다 월등한 지혜의 도학(道學)이 있어, 황제(黃帝)가 그의 내문(內文)을 받아 요제(堯帝)에게로 그 대를 이은 임금이었다.
소련(少連) 대련(大連)이 거상(居喪) 석달을 게으르지 않고 피눈물로 3년을 잘했으니, 나의 부자(夫子=孔子)가 착하다고 칭찬했다. 하우(夏禹)와의 도산회의(陶山會議)에서 부루사자(扶婁使者)를 보내어 국경을 정하였다.
유위자(有爲子)는 한얼이 낸 선인으로서 그 빛나는 이름이 중국에 넘쳤다. 이윤(李尹)이 그 문중에서 수학하였다. 은나라 탕(湯)이 이윤을 불러 현인(賢人)을 물으니, 동방(朝鮮)을 일러,
- 그 나라는 국세가 크지만 교만하지 아니하고,
- 그 나라는 군사가 강하나 침략하지 아니하며,
- 그 나라는 풍속이 어질어 가는 길을 양보하고,
- 그 나라는 배고픈 사람에 밥을 주어 안 굶기며,
- 그 나라는 남녀가 거처를 달리하여 유별하고,
- 그 나라는 남녀가 자리를 한테하여 안 앉으니, 가히 예의바른 동방의 군자국이다.
이런고로, 은태사(殷太師) 기자(箕子)도 주(周)나라에 신하될 마음이 없고, 동이(東夷) 땅으로 피해 살았다. 나의 선조인 부자(夫子 = 孔子)도 더럽지 아니한 동이에 살고자 했다. 나의 벗 노중연(魯仲連)도 또한 동해(東海)를 밟고져 하는 뜻이 있었다. 나 또한 동이에 살고 싶은 뜻이 있다.
지난해 동이 사절이 입국하는 늠름한 모습을 보았는데, 과연 대국(大國)다운 금도(襟度)가 역력하였다. 대저 동이는 수천여년 이래로 우리 중화와 우방의 우의가 있었다. 백성들이 서로 가서 살고, 와서 살아 접하는 기회가 끊이지 않았다. 나의 선조 공부자(孔夫子)께서도 동이가 더러운 곳이 아니라고 한 그뜻이 여기에 있었다. 고로 나또한 여기에 있었다. 고로 나 또한 느낀바 있어 그 실정을 기록하여 뒷사람에게 보이고져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