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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복음의 능력(갈1:11-24)-2018.7.15
기독교 신앙은 복음을 말하지 않고는 설명할 것이 하나도 없고, 복음을 빼놓으면 드러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복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복음으로 시작해서 복음으로 마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정확히 알고 말하는 것일까요? 혹은 복음을 믿는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참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은 가짜 복음이 수두룩하고 유사복음이 판을 칩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래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영혼들이 가짜 복음에 농락을 당하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속고, 무지해서 속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속을지라도 다른 복음에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에 속으면 영혼이 끝장납니다. 한마디로 복음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심판과 저주만 받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1장 7절을 보겠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런데 시대마다 다른 복음은 존재해왔습니다. 교묘하게 위장된 복음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사단의 간계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이비 복음들이 훨씬 더 현란하고 요란합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미혹을 당합니다. 마치 불나방이 자기 죽음을 모른 채 불을 찾아 가듯이 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말하면서도 복음을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복음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에 대한 어설픈 지식과 몇 조각의 정보만 가지고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은 복음으로 횡설수설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때문에 복음에 대한 확신도 없고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몇 구절의 성경을 아는 것으로 복음을 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몇 구절의 성경을 믿는 것으로 복음을 믿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혹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복음을 가졌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니면 교회의 직분을 가졌기 때문에 당연히 내 안에 복음이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믿고 확신에 거해야 합니다. 복음 안에 살며 복음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소유하지 못하면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이방인과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1) 바울이 경험한 복음(11-12절)
복음은 분명하고 정확합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도록 단순합니다. 복음은 무식해서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아니요, 유식하다고 무조건 깨달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단순한 것이 복음이요, 어떤 것보다 복잡한 것이 복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것이 복음입니다. 있는 자나 없는 자,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 건강한 자나 건강치 못한 자, 혹은 어린이나 어른, 남자나 여자 모든 사람에게 가장 평등한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만일 복음이 평등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제한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서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지극히 공평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새 언약의 중보자로 친히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때문에 복음을 알려면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9:15). 한마디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첫 언약 때에 범한 죄가 무엇입니까? 첫 언약은 옛 언약이요, 모세의 율법입니다. 이른바 첫 언약인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를 알게 되었고, 깨닫게 되었으며, 죄인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율법으로 우리는 진노를 이루게 함을 알았습니다(롬4:15).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갈3:12). 이것이 바로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우리가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우리는 한 사람도 의인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죄의 삯이 사망임을 알았습니다(롬6:23). 율법의 반대적인 개념은 복음입니다. 율법이 자기 의를 드러내는 행위라면,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새 언약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의 중보자로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가 복음을 믿는 자요, 복음 안에 사는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고아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성령을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하게 사는 것이 복음이라고 정리합니다. 아마 이 정도가 지금까지 우리가 들어온 복음의 전부일 것입니다. 그런데 표현이 맞을는지 모르지만 2%가 부족합니다. 우리는 그런 복음을 듣고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한 구석은 항상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느껴왔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복음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하나님은 복음을 예수님으로 시작하십니다(막1:1). 예수님이 복음의 시작이요 복음의 전부이십니다. 예수님이 복음이십니다.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도 복음만 증거합니다. 복음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의 모든 초점이 복음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성부 하나님의 책이라기보다는 성자 예수님에 관한 책이요, 성령 하나님의 책이라기보다는 성자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성경의 모든 스토리가 성자 예수님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관한 책이요,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관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의 결론과 같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려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10).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으신 목적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역설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어야 의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11절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서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한마디로 죽어야 삽니다. 다시 말해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느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답니다. “여러분, 사람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나요?” 그러자 아이들은 일제히 “아니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교육이 아주 잘된 학생들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교회 열심히 다니면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아이들은 이번에도 여전히 “아니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수 있나요?”라고 선생님이 다시 물었더니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죽어야 천국가요!”. 맞습니다. 웃고 넘길 수 없는 정확한 대답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두 번 죽고, 두 번 죽으면 한번 죽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주님이 죽으신 목적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 깨든지 자든지 말입니다. 문제는 그분이 우리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셔야 합니다.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될 수 있겠습니까?(고후6:14-16). 한마디로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주님께서 죄 중에 거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탕감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량하시는 구원의 한 방편이셨던 것입니다.
이제 첫 언약으로 범한 죄를 속량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새 언약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새 언약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 주님이 왕권을 가지시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과 함께 다시 영으로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나를 성전 삼으시고 내 심령 안에 왕으로, 주인으로, 전부로 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이제는 예수님과 한 생명 되어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나는 그분의 몸이 되어 예수님이 주는 마음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게 해주시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요10:27). 이것을 깨닫고 믿어 이렇게 사는 것이 복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가르치고 배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에게서 듣고 배운 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육신의 생명으로 가르침을 받고 배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육신으로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복음은 내안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그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목적입니다. 요한복음14장 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주님의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안에 적용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없고, 영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12:3절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내안에 복음이신 주님이 나를 성전 삼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그 일을 위하여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고, 예수님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모든 관심도 성자 예수님께 집중하시고, 성령 하나님의 관심도 성자 예수님께 집중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면 내 안에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이 확신이 없으면 믿음은 무너집니다. 보십시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그렇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내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때문에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옛 언약 안에서 죽은 내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인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12절).
(2) 바울을 변화시킨 복음의 능력(13-20절)
그러면 복음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복음의 능력은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복음의 능력은 천차만별이요, 감히 만입이 있을지라도 어떻게 다 사람의 입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이라면 날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살아갈 테니까요.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만물이 조화를 이루며 운행되어지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문에 세상에 속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복음의 능력아래 되어지는 셈이지요.
그러면 복음의 능력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말씀드리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물론 바울이 경험한 복음의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이 경험한 복음의 능력을 또렷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증언한 복음의 가장 큰 능력은 회심입니다. 그는 본문 13절에서부터 20절까지 복음의 능력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회심했는지를 고백합니다. 그래서 13절은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라고 시작합니다. 그가 복음을 영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고백합니다.
복음을 영접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복음을 영접하기 이전의 상태를 증언해야합니다. 이것은 간증의 순서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영접하기 전의 모습과 영접한 후의 달라진 모습을 비교해서 간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복음의 능력을 간증하는 셈이지요. 복음을 영접하기 전의 바울은 유대교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종교적인 열심이 특심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괴롭혔습니다(13절). 그는 스스로도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고 자기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도 열심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14절).
그렇게 율법으로 강한 자를 거꾸러뜨리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증언하기를 자기 어머니 태로부터 자기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이가 계셨다는 것입니다(15절). 그분은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택정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택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으로 초대받은 것이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를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로 만났습니다(행9:3). 이는 모태로부터 택정을 받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 때가 바울의 회심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바울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핍박하며 유대종교에 미쳐 살았던 바울이 이제는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를 증거 하는 사명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바울을 회심하여 전도자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안에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셨습니다(16절).
바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16절). 한마디로 복음이 바울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바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내 안에서 나타나심이요, 일하심입니다. 새 언약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안에서 일하심을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안에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결정만 따른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자기들보다 먼저 되었던 사도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바울의 사도직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12절). 그래서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지역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른바 아라비아 광야입니다(17절). 복음이 왕성하게 활동할 것 같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 광야로 들어 간 것입니다. 굳이 사도들에게 가서 자기의 사도성을 입증 받거나 검증받는 절차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직 그가 복음을 믿었고, 복음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로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기보다는 복음의 주변 것들을 더욱 신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복음보다는 복음외의 어떤 것에 더욱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른바 복음의 능력을 믿노라면 복음만 신뢰하고 복음의 능력을 믿어야 할진대 복음과 관련된 것들에 민감하고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작 우리 안에서 나타나야 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복음을 빙자한 자신들의 의로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빙자한 자신들의 의로움으로 사는 것이 율법입니다. 미안하지만 율법으로 사는 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의 결과는 저주입니다(1:8). 이 얼마나 무서운 경고요, 두려운 책망입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율법을 복음과 혼동하거나, 율법을 복음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종교적인 열심이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종교적인 열심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공로요, 자기 의로움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 은혜에 아주 미세한 것이라도 자신의 의가 추가되면 전적은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일하지도 아니한 나에게 거저 주시는 시혜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4-5). 복음의 가장 큰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각 사람에게 나타나는 회심이요, 구원입니다. 그것이 복음으로 나타나는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3) 바울을 통해 입증된 복음의 열매(21-24절)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은 바울에게 복음의 열매가 각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장 궁극적인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의 드러남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입니다(롬14:8). 한마디로 바울은 이미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는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 자연인으로서 바울은 있을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언약을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23절). 물론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며 살았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바울을 보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도적질하지 아니하였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열매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것은 열매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열매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얼마든지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고, 가릴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참 복음을 소유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 영광은 다양한 열매를 통해서 드러날 것입니다. 때로는 선행으로, 때로는 복음전도로, 때로는 찬양으로, 때로는 예배로, 때로는 기도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23절). 그들은 주로 유대에 거주하는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바울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지만 복음을 핍박하던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일등공신이 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의 소식만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23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바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은 바울의 드라마틱한 개종과 함께 그가 전한 복음의 사역을 충분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돌렸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이루신 복음의 열매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열매를 통해서 거두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조용하게 내 삶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참된 복음 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영광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신은 복음을 믿습니까? 당신은 복음의 사람입니까? 당신 안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당신을 통해 하나님이 복음의 영광을 받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참 복음을 믿으십시오. 다른 복음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거짓 복음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복음은 하나입니다. 복음을 믿으십시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요, 그 주님이 나를 성전삼고 왕으로, 주님으로, 머리로, 전부로 계심을 확신하며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결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안에서 나와 함께 사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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