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6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20주)
어린이와 같이
욥1:1, 2:1-10; 히1:1-4, 2:5-12; 막10:13-16
가을이 무르익어가면서 찬연한 색감과 깊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더없이 맑고 아름다운 가을을 잘 누리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최근에 이런저런 일들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 숨이 잘 안 쉬어졌습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늦은 밤 호수공원을 찾았습니다. 하늘이 어찌나 맑은지 밤인데도 낮인 것처럼 구름이 하얗고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신비로운 하늘 아래 부는 시원한 바람은 제 마음 한 구석에도 살랑살랑 바람을 일으켜 틈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끄고 살만해지자 저는 다시 자기소외를 하면서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숨이 잘 안 쉬어졌습니다. 저는 또다시 호수공원을 찾았습니다. 이번엔 아침이었습니다. 하늘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맑고 청명한 하늘이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하늘도, 나무도, 꽃도 다 너무 아름다운데, 제 시선은 자꾸만 발끝으로 갔습니다. 지지고 볶고 있는 현실에 골몰하느라, 자연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지금 여기에서 즐길 수 없었습니다. 자연으로부터 힘도 받고 위로도 받고 싶어서 의지를 내어 하늘을 보고 호흡을 하다가도 이내 시선은 발끝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용을 쓰면서 호수공원을 절반쯤 돌았을 때, 잘 익은 도토리가 나무에서 ‘탁’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저는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시선이 저절로 위를 향했습니다. 한곳에 고정되고, 고착되어 있던 시선이 전체를, 하나를, 온전함을, 바탕을 마주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일본 시인 바쇼의 표현을 빌리자면, 늙은 개구리가 고요한 연못 속으로 뛰어들면서 내는 고독한 ‘첨벙’ 소리 같았습니다. 저는 이 순간이 향심기도를 하다가 다른 생각에 빠졌을 때, 거룩한 단어를 부르며 중심으로 부드럽게 되돌아가는 우리의 자발적이고 가벼운 지향 같았습니다.
도토리 한 알이 떨어지는 이 고요한 소리는 생각에 빠져있던 저를 깨웠습니다. 해야 할 일들, 해결해야 할 일들, 반드시 이렇게 되면 좋겠다 하는 나의 희망사항들, 갈등관계 속에서 나를 위한 항변들을 생각하느라 놓치고 있던 지금 여기를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탁’ 떨어지는 도토리 소리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들에 골몰하던 제가 정말로 중요한 한 가지를 갈망하도록 일깨워주었습니다. 이 작은 알아차림과 깨어남은 대자연이 주는 힘과 위로와 생명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존재의 깊이에 숨겨져 있는 사랑의 근저에 다시 뿌리내리도록 저를 안내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 저는 숨이 안 쉬어질 때까지 버티지 않고, 매일 호수공원을 걸었습니다. 맑은 하늘 아래 부는 바람 속에서 호흡하고, 비우고, 단단함 안에 뿌리내리고, 그라운딩 되도록 천천히 걸었습니다. 향심기도도 그렇지만, 저에게는 산책도 마음의 여유와 시간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잠깐의 틈을 내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호수공원을 돌면서, 묵상했던 말씀들도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어제 교회 단톡방에 올라온 묵상말씀인데요, “주님, 주님께서 계시는 집을 내가 사랑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머무르는 그곳을 내가 사랑합니다(시26:8).” “주님,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하오니, 예배하는 모임에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12)” 이 말씀들은 지금 내가 끄달리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과 딱 붙어서 나를 동일시하지 않도록, 일상생활에 매몰되어서 휩쓸려가지 않도록, 중심을 향해 다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습니다.
‘Song of the Stars’라고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는데,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우리는 노래하는 별들이라네. 우리의 빛이 노래한다네. 우리는 불새들이라네. 우리는 하늘 너머로 날아가네. 우리의 빛은 하나의 소리가 되어 영혼이 건너가는(to pass over) 길을 만든다네.” 이 노래가사처럼 걸으면서 읊조린 시편 말씀이 지친 제 마음에 빛이 되고 길이 되어 제 영혼이 주님이 계신 집을 향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주님께서 계시는 집을 내가 사랑합니다.” “주님,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하오니...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일상이 버겁고, 불만스럽고, 짜증이 올라와서 이런 것들에 골몰하다 보면, 좋은 것들이 좋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맑은 가을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 그리고 곳곳에 물들기 시작한 단풍과 낙엽, 바람의 리듬을 타는 코스모스를 보고도 설레거나 기쁘지 않습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지 못합니다. 무언가에 골몰하고 집착하고 있으면, 선하고 좋은 것들을 자기를 성장시키고 살리는 자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고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오르는 자신을 고개를 들어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해롭고 위험한지 알려주는 중요한 싸인(sign)이 됩니다. 알아차리는 순간, 초점이 우리가 골몰하고 집착하는 것에서 집중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로 자연스럽게 옮겨집니다.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버거운 우리의 일상은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막10:15)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죽은 뒤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복닥거리면서 살고 있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자리입니다. 한없이 맑은 가을하늘에 시선이 가지 않고 자꾸만 발끝으로 시선이 떨어진다면, 시원한 바람결을 따라 호흡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싸인(sign)입니다. 내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선하고 좋은 것을,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표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바라고 생각하는 조건들이 다 갖추어졌을 때, 누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따스한 햇살 가운데 쏟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흠뻑 받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자기 마음 안에도 불어서 먼지처럼 정신없이 떠다니는 생각들을 떠나보내고, 한없이 맑은 하늘을 보면서 자기 안에 있는 순수함을 떠올리는 순간과 공간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좋은 것을 좋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유쾌함을 잃지 않는 것, 지금 자기를 무겁고 아프게 하는 문제들도 결국은 지나갈 것임을 아는 것, 자신의 삶 속에 고통과 고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우리의 삶이 지금 있는 그대로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순수한 믿음을 마음에 잘 간직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품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저절로 하게 되는 일들입니다.
좋은 경험들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먼저 열려 있어야 고통과 아픔도 잘 만날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나는 그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랑덩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어린이의 순진무구함을 잘 경험하고 충분히 만난다면, 오늘 함께 읽은 욥의 이야기를 기존에 갖고 있던 고착된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욥의 이야기가 불편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의 삶에 켜켜이 쌓여있는 고통과 아픔이 건드려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견디기 힘든 아픔과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현존도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와 고통, 아픔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고, 더 과장되게 느껴져서, 왜곡된 인식을 갖게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직면할 수 없습니다.
욥은 정직하게 자신의 고난을 직면했고,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씨름했습니다. 그는 문제의 원인을 찾으면서 원망과 비난을 쏟아놓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두고 사람들에게 신세한탄을 하는 쪽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지만, 욥은 자기를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히2:10)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욥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씨름했습니다. 이런 씨름을 통해서 삶의 깊이와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더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그러나 이런 씨름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충분히 받고 누리는 일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온 세상을 통해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의 진심을 보고 들으십시오. 시원한 바람결에, 맑은 가을하늘을 통해, 자기 본연의 색과 아름다움을 펼쳐내고 있는 꽃들의 춤을 통해, 경쾌하게 지저귀는 새소리를 통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듣고, 묵상하고,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커피를 내리면 온 집안에 향기가 그윽하게 퍼지듯, 이 아름다운 계절에 온 세상에 가득 차고 흘러넘쳐 모를 수가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우리 안에 있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을 일깨워주시어 매순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은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품게 해주십시오. 그 사랑과 은총이 우리를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내적 자원임을 깨달아 갈망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