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 두 편 중 첫쨋것은 잉글랜드 목판화가·자연사서작가 토머스 뷰익(Thomas Bewick, 1753~1828)의 1818년작 〈개울물에 비친 자신을 노려보는 개〉이고, 둘쨋것은 미국 화가 헨리 워커 헤릭(Henry Walker Herrick, 1824~1906)의 1865년작 〈개와 물그림자(The Dog and the Shadow)〉이다.
☞ 메타문학(Meta-literature) 문학작품과 개(文學作品과 犬; Literatures and Dogs)(4) 그리스 로마 신화 호메로스 일리아스 아킬레우스 시리우스 파트로클로스 오비디우스 이카리오스 애견 마이라 별자리 오리온 큰개자리 견성 카니쿨라 천랑성
고대 그리스 노예출신 우화작가 아이소포스(Aisopos; 이솝; Aesop; 서기전620~564)의 작품집일 것이라고 추정되거나 학설되는 《아이소포스(이솝) 우화집(Aesop's Fables; 아이소피카; Aesopica)》에는 “자신의 물그림자를 다른 개로 착각한 개”의 우화도 수록되었다. 이 우화의 줄거리는 얼추 다음과 같다.
“고기 한 덩이를 물고 개울을 건너려던 개가 개울물에 비친 자신의 물그림자(영상; 影像)를 보았다. 그런데 자신의 눈에 보이는 자신의 물그림자가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를 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다른 개라고 믿어버린 개는 다른 개의 고깃덩이마저 뺏어먹으려고 사납게 짖자마자 자신의 고깃덩이를 놓쳐 개울물에 빠뜨려버린다.”
이 우화의 여러 판본 중에는 이 탐욕스러운 개의 고깃덩이를 뼈다귀로 대체한 판본도 드물지 않다.
그런데 이 개가 고깃덩이를 탐하든 뼈다귀를 탐하든, 하여튼, 아이소포스는 인간의 탐욕이나 과욕을 풍자하여 경계하느라 이런 우화를 창작했으리라고 추정될 수 있겠지만, 무려 2천5백여 살이나 묵었을 이 우화는,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인간의 탐욕과 과욕을 풍자하고 경계하는 교훈담이라고 인지되거나 감안되기는커녕 오히려 “결코 녹록잖은 세상물정도 모르고 한가하게 자빠진 이른바 ‘루저’나 실패자나 낙오자의 하나마나한 빈말이나 배부른 소리”라고 비아냥당하기 십상일 만치 ‘아예 아니면 거의’ 무효할 것이다.
왜냐면 적어도 한반도에 거주하는 모든 개체의 십중팔구가 현대 자본주의에 워낙 징글징글하게 찌들어서 그런지, 그들 사이에서는 “타개체보다 티끌만치라도 뒤처지는 즉시 루저나 실패자, 낙오자로 전락하여 온갖 갑질에 시달리며 신음하느니 차라리 ‘허망한 고깃덩이나 뼈다귀를 탐욕하는 개보다도 더 게걸스럽게 더 악착같이 자본을 탐욕하며 과욕’하도록 ‘영혼마저 박박 끌어모아!’ 노오력하라”고 “조직적으로!” 암시하거나 강조하거나 은근히 강요하는 무분별한 주입식 교육, 분위기, 풍조, 언론, 방송, 서적(도서; 책), 세상물정론(世相物情論), 통념이 만연할뿐더러, 심지어 “더더더더 악착같이 죽기살기로 자본을 탐욕하고 과욕해야만 ‘그나마 남부럽잖게 떳떳하게 버젓이 먹고살 수 있다’니까(☞ 참조↔兼參照) 모름지기 그래야 마땅하다”고 믿어 의심찮는 은밀하고 딱딱한 옹고집마저 횡행하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자신의 눈에 빤하게 보이는 자신조차 못 알아보는 개의 탐욕과 과욕보다 더 게걸스럽고 더 악착스러운 탐욕과 과욕’을 미감(未感)하거나 불감(不感)하는 개체는, 그러니까 한국 기레기들의 “혀를 내두르다”는 뻔질난 상투어를 걸치면 그런 “개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악착스럽다고 표현될 만한 탐욕과 과욕을 미감하거나 불감하는 개체는, 현대 자본주의의 최당미덕(最當美德; 탐욕)이나 최요덕목(最要德目; 과욕)을 미비(未備)하거나 불비(不備)하는 불온분자라고 인지되거나 지목되어 ‘쯧쯧거리는 손가락질에나 눈총에 시달리기’ 십상이리라.
(2023.03.03.07.18.)
아랫그림 두 편 중 왼것은 브리튼 화가 리처드 하이웨이(Richard Heighway, 1832~1917)의 1894년작 〈자신의 고깃덩이를 개울물에 빠뜨린 개(The Dog and Its Shadow)〉이고, 오른것은 미국 삽화가소설가 조지프 유진 대쉬(Joseph Eugene Dash, 1888~1956)의 1925년작 〈자신의 뼈다귀를 개울물에 빠뜨리는 개(The Dog and Its Reflectio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