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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들
1. 어려운 시들을 향한 출사표
2005년에도 많은 시집이 출간되었고, 많은 시평이 행해졌다. 그러나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는 글(시집이나 평론이나)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많은 시집들이 출간되었지만, 그 가치를 전적으로 인정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평들은 그러한 시집들의 가치를 긍정하기에 바빴기 때문에, 역시 전적으로 그 해석을 신뢰하기 힘들었다.
오해가 있을까봐 밝히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오래된 폐습 ‘전체’에 대해 논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그것은 다른 지면을 통해서 기회가 닿는 대로 해볼 요량이다). 다만 ‘어려운 시’(의 해석)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 기회에 꼭 한 번 해보고 싶다. 요즘의 시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시단과 시 비평은 그러한 어려움을 너무나 유연하게 해결하고 있다(나는 시 비평이 어려운 시의 함정을 너끈하게 뛰어넘은 것을 보고 감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시의 문법이 어려워지고 고급화되어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기도 있지만, 지나치게 주관적인 사고에 매몰되어 시의 기본적인 합의를 어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시에서의 말(언어)의 사용을 지나치게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국한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시 비평은 이러한 개인화와 암호화를 함부로 옹호하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문제는, 허술한 시집을 함부로 칭찬하는 것에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뛰어나고 정교한 시집들을 어렵다는 이유로, 손쉽게 해석하고 함부로 의미 부여하는 것에 있다. 함부로 의미 부여된 시집들이 세상에 널렸기 때문에, 진실로 의미 부여될 시집들은 사장될 지경이다. 또 그러한 해석이 판치면서 남이 알아듣지 않도록 시를 쓰기만 하면 좋은 시가 된다, 는 좋지 않은 속설도 유행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는 시 해석의 정직함이다. 먼저 시의 해석 과정에서 부딪치는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2005년에 내가 읽은 시집들 중에서 어렵다고 생각하는 시(집)들과 대화를 시도할 작정이다(비록 전적인 옹호는 아니지만, 시 해석 과정에서의 난감함을 통해 재음미할 가치가 파생되는 경우로 한정한다). 어떠한 해석이 난감하고, 어디가 해석되지 않는지, 어떠한 문제에서 해석의 갈림길이 생기는지, 그 과정과 어려움을 읽어내야 하는지, 가급적 정직하게 밝힐 것이다. 이러한 정직함만의 한 근의 시를 천근으로 다는 어리석음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2. 시가 그려낸 환상, 현실 뒤편의 풍경들
이민하의 시집 《환상수첩》(열림원, 2005)을 읽다가 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녀의 시는 습관적 언어 관습에 물들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충격을 준다. 그 충격은 1930년대 이상이 우리 시단에 준 충격과 근본적으로 동일할 것이다. 언어의 환경을 바꿈으로써, 시란 으레 이런 것일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난감함을 던져 주는 실험과 도전의 언어. 그러나 그러한 언어들이 가진 한계 역시 만만하지 않다. 그러한 언어들은 이질감이라는 정서적 충격을 가하지만, 동시에 몰이해라는 냉담한 반응도 감수해야 한다. 이민하의 시를 읽으며 내가 감지한 어지러움도, 한편으로는 이질감에 대한 흥미로움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를 읽기(이해하기) 위해서 하나의 샘플을 골라보았다. 시인에게는 다소 실례일 수도 있겠으나, 그녀의 시 중에서 가장 평이하고 그래서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시이다. 이 시를 통해 그녀의 내밀한 언어 감각을 살펴 보고 싶다.
참 아름답군요 딱 한 번 스쳤을 뿐인데 양파 같은 눈이 보기 좋군요 끝없이 즙을 짜는 세월의 물컹한 살점이 도려내기 좋군요 당신은 안경을 벗고 나는 창문을 벗어요 당신은 바지를 끄르고 나는 계단을 끌러요 당신은 가랑이를 벌리고 나는 활주로를 벌려요 당신은 혀를 내밀고 나는 비행기를 내밀어요 당신은 내 몸을 올라타고 나는 구름숲을 올라타요 구름숲에는 녹색 투명한 산들이 거꾸로 매달려 자라고 오렌지를 눈에 낀 태아들이 골짜기마다 우글거리고 오백 년 묵은 짐승들의 비명이 으스러져 보드라운 밀가루처럼 날려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릿길을 온몸의 발굽으로 숨가쁘게 내달리는 안경을 벗은 당신,
―〈안경을 벗은 당신,〉 부분
시인은 ‘당신’이라는 상대와 함께 있다. 당신이라는 뉘앙스와 둘 만의 행위로 보건대, 당신은 남자이고 연인이고 어쩌면 남편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은 사랑의 행위에 빠져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을 시인은 다소 윤색해서 시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가령 ‘당신은 안경을 벗고 나는 창문을 벗어요’ 를 보자. 성행위를 위해서 상대가 안경을 벗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상대인 ‘나’는 안경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벗어야 한다. 하지만 시에서는 ‘창문’을 벗는다. ‘옷’이나 ‘구두’나 ‘목걸이’가 아니라, ‘창문’이다. 그 다음을 보자. ‘당신은 바지를 끄르고 나는 계단을 끌러요’. 남자는 바지를 벗는다. 혁대를 푸는 행위를 강조해서 시인은 ‘끄른다’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나’는 ‘치마’를 ‘끄르던’, ‘브래지어’를 ‘끄르던’ 해야 한다. 이것이 일상적인 언어 습관이고, 반복과 변주가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는 시어 조합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기대를 무참하게 배반한다. 배반할 뿐만 아니라, 전혀 엉뚱한 단어를 그 자리에 삽입한다. ‘창문’과 ‘계단’은 해석이 불가능한 단어들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하다.
억지로 해석해 보자. ‘당신’이 안경을 벗는 동안, ‘나’는 그러한 ‘당신’을 보게 되고, 그런 상대를 향해 가지고 있던 마음을 연다고 가정하자. ‘당신’이 무언가를 벗어 새로운 차원으로 ‘나’를 보게 되는 것에 화답하기 위해서, ‘나’도 무언가를 벗어 새로운 차원의 시각을 확보하려 한다고 할 수 있다. 안경이라는 물리적 시야 대(對), 마음의 창문이라는 심리적 시야가 대조/비교된다고 할까.
‘바지’의 경우도 비슷하게 추정할 수 있다. ‘당신’이 바지를 끄르는 행위는 옷을 벗는 행위 중 일부이다. 모르긴 몰라도 ‘바지’를 벗고도 더 벗어야 할 것들이 있을 것이다. ‘나’가 여자라면 벗어야 할 옷들의 목록은 더욱 많을 것이고, 그것은 마치 ‘계단’을 오르는 과정처럼 순서와 단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시인은 물리적으로 바지를 벗는 행위 대(對), 심리적으로 그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행위를 대조/비교하고 있다.
이러한 언어적 추정은 그 자체로 맞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나마 이 시의 이 구절은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추정이 가능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언어적 습관이 시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용인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인용된 부분의 그 다음 부분을 보면, 보다 복잡하고 내밀해진다. ‘당신은 가랑이를 벌리고 나는 활주로를 벌린’다는 구절은 성교의 직전 단계를 묘사한 것 같다. ‘활주로’라는 의미는 성교 시 사용되는 은어 같지만, 상황을 통해 대략적으로 이해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어려워진다. ‘당신은 내몸을 올라타고 나는 구름숲을 올라타요’. 이 구절에서 두 사람은 육체적 합일에 이르고, 서로의 느낌을 표현했을 것이다(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그러나 시적 상황에 대한 모호성은 더욱 커져, 그 해석들은 일반적인 상식 혹은 각자의 정서적 직관에 의존해야 할 뿐, 시어나 문장이 조성하는 시적 환경에서 그 의미를 골라내기는 힘들어진다. 한 마디로 말해, ‘구름숲’의 실체를 각자의 경험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가장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나는 그 다음 구절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내 판단으로는 성애의 어떤 내밀한 감각을 묘사한 것 같지만, 지금의 상황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어쩌면 이민하의 시는 한 편 한 편, 한 구절 한 구절 떼어서 읽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또 전통적인 언어의 쓰임이 아니라, 시 전체가 풍기는 분위기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시는 시각성을 강하게 지향하고 있어, 단어 하나의 의미가 아닌, 단어와 단어가 만나 이루는 충돌과 파장에 주목해야 할지로 모른다.
그러나 나의 독법으로는 이민하의 시에서 먼저 재고되어야 할 지점은 언어에 대한, 언어를 이해받기 위한, 모색과 노력이다. 시가 ‘미스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어적 습관에 의해 해석되고 이해되는 부분도 포함되어야 한다. 만일 음악이나 미술처럼 그 자체로 의미가 탈색된 질료(매개체)를 사용할 수 있다면, 이민하의 실험이 보다 중립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언어(시어)는 이미 숱한 감정과 사상과 경험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함으로 무장한 질료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어를 다룰 때는 ‘음’을 다루거나 ‘색깔’을 조합하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이민하의 시가 한국시의 한 지평에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이 보여주었던 난해한 시 세계를 향한 도정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상의 언어 실험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시어의 굴절을 통해, 쉽게 이해되지 않으려는 시의 극한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이상은 시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화두처럼 던져주었다.
이민하의 시 세계가, 이상 이후 유일한 모색이라고도, 이상의 업적에 도달하는 가장 뛰어난 실험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상의 시 정신을 곁들인 것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래서 2005년의 비중 있는 성과로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언어 실험의 극한과 함께 언어의 통속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해받지 못하는 언어가 지나치다면 우리는 그녀에게 이해되지 않는 시 한 편만을 요구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 시는 그녀의 시 가운데 가장 친절한 그래서 가장 달라 보이는 시이다. 그녀의 시 이정표로 따지면, 기본적인 출발점을 상기시킬 수 있는 시일게다.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벼랑 끝에서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서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서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모래밭에서 알을 낳는 옥색 치마의 어머니를 집어삼키던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서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울고 있는 아이가 눈을 뜨는 모래밭에서 알을 낳는 옥색 치마의 어머니를 집어삼키던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서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중천의 해만큼 키가 자라버린 한 아이가 거울 속에서 혹은 거울 밖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며 울고 있네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이 시의 구조는 간단하다. 마지막 행을 제외하고는, 앞 행을 반복하면서 그 앞에 새로운 상황을 덧붙이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마지막에서 두 번째 행에 해당하는 시적 상황을 놓고, 가장 작은 일부부터 조금씩 상황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영화로 따지면 ‘점진노출’에 해당한다. 가령, 방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카메라가 물러나면서 그 앞으로 쇠창살을 보여주고, 더 물러나면서 간수들과 높다란 담을 보여주면, 관객들은 처음에는 즐거운 표정으로 방안을 움직이는 사람을 보고 있다고 믿다가, 나중에는 그 사람이 죄수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기법은 정보를 통제해서 점진적으로 노출하는 방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흥미 있게 보여주려는 의도를 지닌다.
위의 시도 마찬가지이다. 한 아이가 울고 있는데, 그것은 꿈에서 막 깨어났기 때문이며, 그 꿈에서 벼랑 끝에 서 있었기 때문이며, 그 앞으로 붉은 사자가 달려왔기 때문이다. 상황은 점차 확대되면서, 6행이나 7행처럼 애매한 구절도 양산된다. 아이의 어머니는 해변에서 실종되었을지도 모르며(6행), 그 때 아이가 그 장면을 보고 울었던 적이 있을 지도 모른다(7행). 6행이나 7행은 통사적으로도 비문이고, 시적 상황도 분명하지 않지만, 앞에 있는 행들의 도움으로 어렵지만, 그래도 대략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문제는 마지막 행이다. 8행은 변주되고 있다. 8행은 기존의 리듬을 깨고 시행의 확대가 아닌 축소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의외성을 느끼게 한다.
나는 이 시가 8행을 설명하기 위해서 앞의 7행이 존재했다고 믿는다. ‘중천의 키만큼’ 자란 아이가 과거의 한 시절을 회상하면서 울고 있는 상황을, 그 안에 담긴 공포를 표현하기 위해서, 길고 긴 시행들을 건너 마지막 행에 도착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선 일곱 개의 행이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를 미스터리로 끝맺지 않도록 보조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민하의 다른 시에서도 이러한 보조 장치가 반드시 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그것이 어려운 시를 쓰는 시인의 기본적인 소임일 것이다.
3. 간결하지만 복잡할 수 있는 배치들
평소 신해욱의 시가 어렵다고 생각해 왔다. 그녀의 시는 추상적인 느낌을 자아냈고, 그녀의 건조한 문체는 그러한 추상성을 쉽게 풀어주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의 첫 번째 시집을 읽으면서, 추상적인 시들 사이의 관계와 구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한 편으로 오롯하게 이해되지 않던 시들도, 이웃 시들과의 관계 혹은 전체를 고려한 배치 속에서, 과거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의미 있게 이해되었다. 그녀가 그러한 제목의 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집 제목을 ‘간결한 배치’라고 지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신해욱의 시집 《간결한 배치》(민음사, 2005)는 다섯 개의 중간 제목으로 구획되어 있다. 보통 한 구획 당 6~14개 정도의 시를 포함하고 있는데 반하여, 마지막 구획만이 단 한편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이 시집이 어떤 의도 하에 시를 배치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중에서 나의 흥미를 유독 끌었던 구획은, 두 번째 구획에 해당하는 ‘모텔 첼로’이다. 중간 제목을 ‘모텔 첼로’라고 작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번째 장(구획)에는 ‘모텔 첼로’라는 시가 없다. 다만 모텔 첼로와 관련 있는 시들의 제명이 차례로 늘어 서 있고, 그 밑에 모텔 첼로의 방 번호가 부제처럼 붙어 있다(밀실이라는 시에는 ‘밀실’ 답게 모텔 방 번호가 붙어 있지 않다). 그리고 2장 ‘모텔 첼로’로 들어가기 직전의 시, 그러니까 1장의 마지막 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모텔 첼로’를 미리 소개하고 있다.
모텔 첼로가 있는 오랜 벌판엔 이따금
낡은 짐승들이 배회하고 있었고
어두운 객실에서 당신이 죽을 때마다
인디언 인형은 사라져갔네
어딘가로 가라앉은 당신의 눈들
일렁이며 눈 뜨는 당신의 아름다움
아무도 없는 모텔 첼로의 열 꼬마 인디언과
당신의 죽음은 열두 번 계속될지니, 라는 낮은 속삭임 사이
오래 고인 강물이 흘러가고 있었고
바람은 구름이 있는 높은 곳에서만 불었네
흔들리는 모텔 첼로의 금 간 그늘 속에서
입으로만 웃는 인형의 검은 눈은 줄어들지 않았고
당신의 죽음은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었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네〉
신해욱의 시를 읽을 때마다 섬찟한 인상을 받는다.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이다. 그로테스크한 상황 묘사, ‘나’를 앞세우는 독백체, 그리고 수식어가 생략된 간결한 문체. 이 세 가지는 신해욱의 시를 건조하고, 황량하고, 솔직하게 보이게 만든다. 그로 인해 그녀가 묘사하는 상황이 시적 가정이나 상상이 아니라, 마치 그녀가 보고 있는 세계의 진실인 것처럼 믿게 만든다. 더욱이 간결한 문체는 단호한 어조로, 시인의 믿음을 읽는 이에게 강요하는 효과도 거둔다.
위의 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나’라는 어사는 문면에 나오지 않았지만, ‘당신’이라는 문구를 앞세워 말하는 자의 입장을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 간결한 문체와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곁들여진다. 모텔 첼로는 부드러운 이름답지 않게, 드라큘라의 성처럼 음습하고 기괴한 인상을 드리우고 있다.
사실 모텔의 인상이 그러하다.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한다고 해도, 그 공간에는 이해되지 않은 어둠과 음습한 냄새가 하루 종일 떠돌고 있다. 하룻밤의 편안함을 위해 찾아드는 공간이지만, 막상 그 공간에서는 좀처럼 잠들기 힘들다. 단절, 차단, 냉막, 고요, 기괴,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까지 담지한 곳이다. 시인은 이러한 공간에 죽음의 이미지를 겹쳐 놓고 있다. ‘당신의 죽음이 열두 번 계속된다’는 저주 아닌 저주까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모텔 첼로’를 소개 받은 후에, 2장 ‘모텔 첼로’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모텔 첼로 시편’들로 들어가기 위한 서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의 입구인 셈이다. 그 입구는 ‘죽음’과 ‘주술’ 그리고 ‘적막’이 넘쳐 흐리고 있다.
2장의 첫 번째 시는 〈이방인―101호〉이다. 손님은 음습한 모텔 첼로로 들어간다. 모텔은 세상의 변경에 있지만, 손님은 자신이 단 하룻밤일지언정 거주할 공간이 세상의 중심이기를 바란다. 시인은 ‘변경에선 언제나 당신이 중심’이라고 말해준다. 다음은 〈안내인―102호〉이다. 102호로 찾아온 안내인(종업원)은 섬찟한 목소리로 주문을 요구한다. 그가 요구하는 주문은 상례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이 안내인은 이 죽은 자의 공간(모텔 첼로)을 이루는 어떤 두려움이다.
세 번째 시 〈밀실〉은 더욱 큰 두려움이다. 〈밀실〉에는 방 번호가 붙어 있지 않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인 셈이다. 그 내용을 보면 좁은 공간에 매장되고 있는 자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누군가는 생매장을 당하면서 이 죽은 자의 공간의 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그로테스크한 진실을 상기시키는 방도 있고(106, 107호), 오 헨리의 공간을 연상시키는 방도 있다(308호). 지하도 있고, 지하실 방 사이의, 그러니까 벽 사이의 좁은 공간도 있다. 신해욱이 건축한 공간은 총 11개이고, 서두의 모텔 입구(〈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까지 포함하면 총 12개의 공간이 제시된 셈이다(열두 번 죽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위에서 내가 추정한 것이 모두 옳다면, 시인은 의도적으로 하나의 공간을 건축했고, 그 공간에 시적 의미를 담아 하나의 맥락 있는 시편으로 묶어 놓은 셈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건축하려고 했던 공간은 어떤 의미, 어떤 맥락을 지닐까.
먼저 공간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자. 첫째, 누군가의 내면 독백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는 기본적으로 내면 독백이다. 시인의 목소리로 세상의 모습을 살피는 글쓰기이자 책읽기의 방식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반적인 통념을 감안해도, 신해욱의 시는 독백성이 강하다. 그녀의 시는 눈에 띌 정도로 ‘나’ 혹은 ‘당신’ 등의 호칭을 강조하고 있다. 그로 인해 각 시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라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둘째, 그 사람들이 모두 갇힌 자라는 점이다. 그들은 갇혀 있고, 어떤 경우에는 파묻히고 있고, 꼼짝 못하는 상황이거나, 잠기는 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방 자체도 암실이거나 지하이거나 숨겨진 방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벽 사이의 갇힌 공간인 경우도 있다. 최고층이라고 할 수 있는 308호 시편을 보면, ‘창문 너머’를 보고 있지만, ‘창문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고, 밖을 바라보다가 누군가에게 강하게 구속당하면서 시가 종결되고 있다. 정리하면 이 모텔에서는 누구도 빠져 나갈 수 없다. 이 안에서 떠도는 시선들은 결박되어 있고, 다른 무엇에 의해 관찰당하고 있다. 한 마디로 죄수이자 구금된 자들이며 결국 수인인 셈이다.
무엇으로부터, 갇히게 되었을까. 이 점은 ‘모텔 첼로’의 장만 보아서는 알 수 없다. 사실 이 시집 전체를 통독해도, 그 이유를 알기는 어렵다. 다만 흥미로운 비교가 또 하나 가능하다. 이 시집의 제 3장, 즉 세 번째 구획의 제명이 ‘환한 마을’이다. 어두운 모텔과는 대조되는 제목인데, 그래서 2장에 들어 있는 심리적 어두움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장 역시 마을 입구부터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따라, 시의 제목과 내용이 결정되고 있다. 가령 3장의 첫 시는 〈동구 밖〉이고, 두 번째 시는 〈초입〉이다. 이 공간을 들어가다 보면, 마을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언젠가 한 번 왔었던 공간(〈데자뷰〉)을 다시 보게 되기도 하며, 세입자․복도․옥상 등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게 되기도 한다. 이 역시 어떤 공간에 진입하기 시작해서 통과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흥미로운 공간 배치이다.
그러나 제목 ‘환한 마을’과는 달리, 이 공간에는 웃는 사람들이 없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 서로 싸우는 사람, 함께 사는 사람들이 없다. 나무가 있고, 바람이 불고, 햇빛이 눈을 따갑게 찌르지만, 사람들이 생경하고 마을이 생경하고 ‘나’는 경직되어 있다. 움직일 수 없고, ‘나’의 주변에는 친숙한 사람들이 없다. 정리하면, 마을은 있지만 사람은 없다(딱 한 번 웃음소리가 들리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신해욱의 시가 어려운 것이, 이러한 도저한 고독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신해욱의 시에는 혼자만의 공간이 승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그녀의 말대로 죽어간다. 열두 번 죽을 수도 있다. 설령 살아 있다고 해도, 빛처럼 환한 공간에 둘러싸였다고 해도, 그들은 혼자이다. 시의 정서가 기쁨보다는 슬픔에 가깝고, 환한 미소보다는 쓸쓸한 웃음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신해욱의 선택은 읽는 이(특히 나에게)에게 냉혹한 고독을 전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다시, 먼저 던졌던 질문을 상기하자. 무엇으로부터, 그녀의 시적 자아들은 갇히게 되었을까. 인적 없는 고독으로부터 갇히게 되었을 것이다. 시적 자아들이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인기척 없는 적막의 공간이 탄생되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의 거리를 갖게 됨으로써, 시적 자아들은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묻자. 그러면 왜 사람들을 멀리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모르겠다. 그 대답은 신해욱이 시를 쓰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신해욱의 시는 그로테스크하다. 섬찟하고 단호해서 때로는 기피하고 싶어 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 기피나 절망이 도저한 침묵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동변상련의 느낌도 든다. 그녀의 생만큼은 그녀의 시와 달랐으면 한다. 아니, 내가 그녀의 시를 잘못 읽었으면 하는 마음 가득하다.
4. ‘홀로 된 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은 시집 《님의 침묵》으로 한국 시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그의 시집을 통해 한국 시는 분절된 시편 속의 님이 아니라, 한 권의 시집으로 통궤되는 님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집은 님의 중의성, 님의 고전성 등으로 인해 한국 현대시와 현대 이전의 전통 지향을 접목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하종오의 《님 시집》(애지, 2005)을 읽으면서 이러한 《님의 침묵》과 비교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그러다 보니, ‘님’의 의미를 추상적으로 해석하려 하였다. 시집의 절반 정도까지 읽어나가면서, 님을 ‘봄’ 혹은 ‘희망’ 또는 ‘자연’ 등의 추상적, 개념적 명사로 환치시켰고 이러한 환치가 들어맞지 않는 경우에는 ‘님’의 외연을 넓혀 보다 확대된 명사 혹은 개념들을 찾아보았다. 그래도 끝까지 ‘님’의 정체는 묘연하기만 했다. 특히 다음의 시는 참으로 처리하기 곤란한 경우였다.
그이는 상수리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패었습니다. 님께서 마무리하지 않으신 일에서 그이는 님의 행실을 파악했습니다. 지난해 늦봄, 님께서 밭고랑 타고 앉아 흰콩 심으실 적에 까치들이 몰래 뒤따르며 파먹었더랬습니다. 그걸 모르신 님께서 한 뙈기 다 심고 일어서서 돌아보셨을 때, 밭고랑에는 까치걸음 자국이 님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고 흰콩 심은 데마다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어리둥절해지신 님께서 고개 드시자, 까치들이 허공 빙 돌더니 상수리나무 꼭대기 둥지로 올라갔습니다. 반나절 쳐다보다가 그 둥지 위에 멈춘 뜨거운 해와 마주친 뒤에 님께서 하신 일은 섭리라고 해야 할는지요. 그이가 까치한테 그 꼴을 당하였을 때는 후여후여 소리치거나 돌팔매하기가 고작이었지만, 님께서는 끌과 망치를 들고 상수리나무 아래로 가서 밑동을 뚫으셨습니다. 그 구멍에 제초제를 쏟아 붓고 돌아오신 님께서는 그날부터 상수리나무 꼭대기 둥지를 득의만면 쳐다보셨습니다.
―〈제 1부 제 12편〉 부분
‘님’은 밭에 씨를 뿌리다가 까치에게 놀림을 당하고 만다. 까치 입장에서야 먹을 것을 찾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당하는 ‘님’에게 까치의 사정이 올곧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복수를 계획했고, 상수리나무에 제초제를 쏟아 부어 까치를 괴롭히는 방책을 생각해 냈다.
‘그이’는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에, 죽어가는 상수리나무를 보고 ‘님’이 한 일을 눈치챈 것 같다. 시인은 만일 까치로부터 일을 당한 사람이 ‘그이’였다면, 몇 번 ‘후여후여’ 소리치고 쓰린 속을 달랬겠지만, ‘님’은 ‘그이’와 달랐다고,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다. 이러한 비교는 명백한 우열을 보여준다. 까치야 잘못이 있었다고 해도 죽은 상수리나무의 억울함을 생각할 때, ‘님’의 처신과 행동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님’은 속이 좁고 사물의 질서를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님’과 같은 고급스러운 호칭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서 고매한 인격을 가진 대상이 되어야 할 ‘님’의 시편에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님’에 대해 고전적인 편견을 가진 나에게, 이 시는 무척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님’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시인이 슬쩍 ‘섭리’를 운운하면서 정당화시키려 한다는 의혹마저(?) 일었다.
단번에 해석이 되지 않아 시집 전체를 통독해 가던 나에게 또다른 걸림돌이 제시되었다. 〈제 2부 제 14편〉이 그것이다. 이 시가 걸림돌이 된 것은, ‘님(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 때문이다.
다른 님들도 저에게 몰려와서 삿대질하였습니다. 그중에 님께서 아니 계셔서 저도 손가락질하였습니다. 다른 님들은 저의 땅과 연경하고 있는 자신들의 땅을 제가 가져갔다고 소리쳤고, 저는 제 땅인 줄 모르고 다른 님들이 농사지어 먹었으니 이젠 돌려줘야 한다고 맞고함쳤습니다. 님께서는 땅에 임자로 나선 다른 님들을 무시하십니까? 땅에 경계를 짓는 저를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측량하여 말뚝을 박아 버린 데서 문제가 만들어졌습니다. 밭둑으로 지경 삼던 다른 님들에게 저는 지적도 대로 지경 삼았습니다. 님께서 와서 삿대질하셨더라면 제가 손가락질할 수 있었을까요? 님께서 손가락질하셨더라면 다른 님들이 삿대질할 수 있었을까요? 소유에는 더러운 언행이 뒤따르니, 님께서는 접경에 서지 않고 무변으로 가셨습니까? 사람들은 무변을 감당할 수 없기에 늘 접경을 확인하느라고 싸우고 선언하고 맹세하여 왔습니다. 님께서 그 하나인 저에게도 그 여럿인 다른 님들에게도 상관하지 않으셨으니, 땅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님들과 저는 대거릴 하면서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님께서 아니 계시니 저나 다른 님들이나 서로에게 님이 될 수 없었습니다.
상황은 간단하다. 시인은 측량을 해서, 실제 자기 땅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 측량 결과 이웃 사람들의 땅을 침범하게 되었고(엄격하게 말하면 이웃 사람들이 무단 점유했던 땅을 찾게 되었고), 이로 인해 두 집단 간의 언쟁이 시작되었다. 이웃 사람들은 시인에게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야박하다고 통박했을 것이고, 시인은 시인대로 이제까지 불법적으로 획득한 이득에 대해 감사해야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 응대했을 것이다.
싸움은 제법 격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삿대질, 손가락질, 거기에 막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뒤에 시인은 그들과 다투었던 기억을 멀리서 회고하면서 ‘소유에는 더러운 언행’이 따름을 확인하게 된다. 일단 상대의 잘못을 일방적으로 나무라기보다는 속세의 생존 원리에 휩싸인 중생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성숙한 태도가 보인다.
문제는 시인(‘나’)과 ‘님(들)’의 관계이다. 시인은 님(들)을 우러러보고 그 행실을 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적대시하고 실제로 싸우는 존재로 비하했다. 그것도 상대의 잘못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여, 님(들)에게 동정을 보내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님(들)의 존재를, 우리는 과연 우리 전통 시가와 한용운의 빛나는 전통과 연결지을 수 있을까. 이 시집에게 나에게 어려웠던 점은 여기서 출발한다(시집을 통궤한 후에 시인의 자서를 읽었다. 시인은 ‘님’이 실제 이웃이었음을 일찌감치 밝혀두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인의 말보다, 시 안의 내용이 우선이었고, 무엇보다 이러한 모순을 쉽게 극복하기 어려웠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님들의 횡포와 분리된 또 다른 님의 침묵이다. 시인은 몰려온 님들과 싸우면서도, 쫓아오지 않은 어떤 홀로 된 님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그 님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껏 싸울 수 있었다고 했다. 싸움이 끝난 이후에도 그 님의 반응에 대해 신경쓰고 있다. 만일 님들이 이웃이라면, 홀로 된 님 역시 이웃 사람 중 하나일까.
손쉽게 생각하면 마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 혹은 어쩌면 시인이나 이웃들의 땅과 관련 있는 지주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표면적 정보만으로 ‘홀로 된 님’의 정체를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홀로 된 님’이 힘 있는 이웃사람이기보다는, 이러한 싸움에 초연할 수 있는 어떤 존재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님은 이 싸움에 끼어들지 않음으로써, 이 싸움에 끼어든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던져주고, 이 싸움이 추악한 것이었음을 증언한다고 하겠다.
한용운은 기룬 것은 다 님이라고 했다. 하종오의 시집에서는 마을 사람들에게(설령 까치에게 복수하는 비뚤어진 마음의 소유자라해도) 모두 공평하게 '님'이라고 불렀다. 사람들 개개인에게 불성(佛性) 혹은 인자한 마음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마을 사람들이 속세의 이득에 눈이 어두워 싸움을 벌일 때에도, 어딘가에는 그 싸움에서 벗어나 초연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시적 전언이 아닐까. 어쩌면 이러한 싸움에 의연할 수 있는 존재가 됨으로써, 내면에 간직된 불성 혹은 자애를 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홀로 된 님의 정체를 추정하면서, 이 시집이 실은 님이 되기 위한 시인의 득도의 과정임을 알았다. 시인은 ‘꼴 같지’ 않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님’이라고 부르면서, 자신 안에 있는 ‘님’을 불러내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시가 수양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은 큰 수양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다시 시집을 통독하니, 시인은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음을 알았다. 마을 사람들 사이의 반목과 갈등 속에서 일방의 입장을 편들지 않기 위해서 수양하고 있음을. 세상에서 편견을 버리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특히 자신보다 낮은 자들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면. 시인은 어쩌면 자신들보다 낮은 자들의 세상을 ‘굽어보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삶과 다툼과 이기심을 ‘우러러보기’ 위해서, 그들을 ‘님(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하종오의 ‘님’은 자신이고, 자신 안의 부처였던 셈이다.
5. 별빛 깊숙이 드리워진
오태환의 세 번째 시집 《별빛들을 쓰다》(황금알, 2005)에는 황홀한 시들이 꽤 들어 있다. 꼽아 보면 〈토란잎에 빗물 듣다〉, 〈대련〉, 〈늪〉, 〈아프리카,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3〉, 〈실솔〉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긴 문장의 틈입이다. 언뜻 보면 비문이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긴 문장이 군데군데 포진하고 있어, 읽은 이를 바싹 긴장시키곤 한다. 가령 “햇빛을 이마에 뒤집어쓰고 발굽을 쳐 달리는 노랗고 검은 갈기털 흙먼지의 바다 흙먼지의, 장엄한 고통을 목격하며 나는 한갓, 비겁한 남루한 음모陰謀에 불과한 나의 시詩들 때문에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아프리카,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3〉)의 구절에서, 나는 몇 번이나 앞뒤 구조를 따져 읽어야 했다. 지금도 이 구절이 완전한 문장이라고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문장 안에 들어 있는 호흡을 존중한다. 오태환은 이상한 곳(논리적으로 잘 납득이 되지 않는 곳)에 쉼표를 찍어 시구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프리카〉 시편은 일종의 시론에 해당한다. 시인은 마치 〈동물의 왕국〉을 보고 있는 것처럼, 아프리카 초원과 밀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내고 있다. 생존의 고통과 환경의 열악함을 음미하려는 듯. 그리고 그 고통과 열악함을 자신이 쓰고 있는 시적 상황과 병치시킨다. 병치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슬그머니 겹쳐 놓음으로써, 미묘한 상실감 내지는 아픔을 표현하려 한다. 그런데도 이러한 상실감과 아픔으로 난감해지지 않는 것은, 이리저리 휘돌아 나가는 문장의 흐름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넋두리나 엄살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이 시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 〈실솔〉이다.
백로白露도 한로寒露도 훨씬 지나 부뚜막의 온기가 따사로운 어슬녘 지푸라기로 묶어 지붕기슭 처마밑에 널어둔 무청이 붐비며 서걱이는 그늘을 스친 뒤란 치운 돌길 저녁이슬에 가느다란 더듬이가 찰싹! 젖은 귀뚜라미를 가만히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집어들면 까슬한 뒷다리를 접어 앙버티는 그것의, 물처럼 말랑말랑한 살갗에서 만져지는 냉기 뒷다리의 몹시 까슬한, 힘 틈새의 아흐, 그 투명하고 서늘한 감촉 또는
지금 내가 사는 금곡역 부근 연립주택에도 또르르르 또르르르 그 귀뚜라미가 엷은 저녁이슬의 물보라를 비비네 불혹不惑을 슬프게 엇비낀 이 가을 귀뚜라미의, 그 투명하고 서늘한 감촉 탓에 내 마음을 십상으로 들키네
시인은 한 연을 하나의 문장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것도 완전하게 끝맺지 않는 문장으로. 주어와 술어의 호응 관계가 애매하고 헷갈려서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했다. 처음에는 ‘부뚜막의 온기’와 호응하는 술어도 찾기 힘들었고, ‘무청’이 만들었다는 그늘과 그 그늘을 스치는 존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시에는 미처 끝맺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서술어, 호응을 찾기 힘든 주어, 이상하게 수식되는 관련 어구 등이 혼잡하게 엉켜 있다. 엉켜 있는 구조를 분리해 내면 시를 읽는 묘미가 되살아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이 시는 복잡한 문장의 다발에 불과하다.
시인은 백로와 한로가 지난 시점에, 돌길에 서서, 부뚜막의 온기가 따사롭다고 느껴지는 저녁 오후를 감촉하고 있다. 시인의 근처에 무청을 널어 두면서 생긴 그늘이 생겨나 있고, 시인은 돌길로 나가기 위해서 그늘을 통과해야 했다. 그곳에서 시인은 귀뚜라미 한 마리를 잡는다. 귀뚜라미를 잡아서 그것의 살갗을 어루만지며, 뒷다리의 까슬한 느낌과 냉기를 감촉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시인이 귀뚜라미를 잡아 그 감촉한 느낌을 옮긴 것이다. 귀뚜라미라는 작은 미물의, 그 작고 좁은 틈새의, 투명하고 서늘한 촉감을 옮겨내려 한 것이다. 왜 그럴까. 혹 시인은 이 귀뚜라미의 냉기를 우주의 기운으로 인식한 것은 아닐까. 오태환이 그토록 받아쓰고 싶었던 ‘별빛들의 휘광’을 귀뚜라미라는 작은 몸체 안에서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오태환의 시는 아주 미세한 감각을 찾아가는 통로이다. 그는 시를 통해 별빛을 찾고(〈바다편지〉), 별빛을 닮은 여인의 미세한 감각을 읽고(〈별들을 읽다)〉, 두 은행나무 사이의 살가운 교응을 읽고(〈대련〉), 토란잎 애순의 작은 솜털을 읽는다. 그에게 시는 삶의 미세한 감각 혹은 우주의 에너지가 발현되는 지점을 찾는 도구이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좁은 곳, 숨겨진 곳, 미세한 곳, 무심히 지나가는 곳을 파고들려는 속성을 지닌다. 오래된 집, 그늘 뒤로, 드리워진, 작은 길, 옆의, 귀뚜라미의, 틈새를 향한 집착 같은 것이다. 그의 시는 하늘의 별빛들이 지상에서 다시 발현되는 지점을 찾는 탐사장치이기에 집요하고, 끊어지지 않고, 유장하게 이어지기 마련이다.
다문다문 움트더니 내가 다니는 휘경여고 내가 점심 먹으로 가는 길섶 한데서 그 가위 같은 애순旬들이 어린 목덜미 드러내더니 붐비며 솜털 송송 드러내더니 해찰이나 하더니 아뿔싸, 어느새 평坪가웃 잎새들을 펼쳐들더니 휘엉청 소란한 녹청綠靑들을 펼쳐들더니
―〈토란잎에 빗물 듣다〉
〈실솔〉과 거의 같은 구조이다. 문장이 길게 늘어진 것도 비슷하고, 중간에 감탄사가 들어 있는 것도 비슷하고, 한 연을 끝맺으면서도 완전한 서술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비슷하다. 토란잎 애순을 찾아내는 시인의 감식안을, 시적 과정으로 보여준 점도 비슷하다.
여기서도 시인은 친절하게 문장을 구획하고 쉼표를 찍고 주어와 술어를 구별하여, 명료한 문장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 마치 좁은 공간 속에 시어를 몰아넣듯, 첫째 연에 몰아넣고 있다. 그것도 미처 끝맺지 않음으로써 여운을 남겨두고 있다. 그리고 둘째 연에서 시인의 현재 처지를 설명한다. 〈실솔〉에서는 시인이 현재 살고 있는 상황과 지금 듣고 있는 귀뚜라미 소리를 언급하였다면, 〈토란잎에 빗물 듣다〉에서는 학교에서 근무하며 점심 먹으로 가는 현재 처지를 기술하고 있다. 비교하면 첫째 연은 미세한 관찰이고, 둘째 연은 시인의 처지에 대한 진술이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과거로 건너가는 내밀한 통로를 건축하고 싶어한다. 그 통로는 마치 촉수처럼 시공간의 경계를 지나 황홀한 경험의 어떤 장소로 안내한다.
오태환의 시는 어렵다.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문장의 구조이다. 그의 시는 긴 문장, 복잡하게 얽힌 사유로 인해 세심하게 끊어 읽어야 한다. 자칫하면 그의 시를 읽다가 길을 잃기 때문에, 늘 긴장해야 한다.
둘째, 보기 드문 단어의 사용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의성어와 의태어이다. 장석주는 오태환의 의성어와 의태어를 크게 칭찬하며 ‘한국어의 휘황찬란함’을 선보였다고 극찬했다.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의성․의태어가 반드시 순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의성․의태어가 문장의 흐름을 늦추고 문장의 여운을 길게 하여 그가 추구하는 긴 문장에 유효하다는 점이다. 보기 드문 단어의 사용에는 이밖에도 뜻밖의 감탄사, 제법 어려운 한자어, 괄호 안의 부연 설명, 긴 제목 등도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시가 지향하는 바이다. 시에서 주제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오태환이 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의 시는 마치 미로처럼 어떤 내밀한 생각을 보호하고 있다. 그의 시가 내밀한 감각을 더듬는 것도 그 생각이 응축되어 저장된 지점을 찾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가 말하려 하는 바는, 언어의 미로를 통과하고 육신의 보호벽을 벗겨내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시에서 육탈과 염습에 대해 자주 말하고 있다. 먼 아프리카의 생존 조건을 살피면서, 시를 다루는 ‘언어꾼’으로서의 자괴감에 대해서도 내비치고 있다. 무언가를 벗겨내야 한다는 생각이 충만한 것 같은데, 그것은 생각의 질료인 언어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그의 시어는 어쩌면 무언가를 벗겨냄으로써, 그 안의 것을 얻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싶다. 이것은 아직 가정이지만, 그의 시는 안의 것을 발굴하기 위해서 그 위에 입히는 하나의 껍질이다. 순은으로 빛나는 별빛―언어의 정수를 캐내기 위한.
6. 깨진 비유들과 그 복원에 대한 상념
네 권의 시집은 모두 어렵다는 공통점 이외에도, 비유가 적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최근 시인들의 시적 스타일과 관련이 높다. 과거 우리 시의 요체는 비유였다. 일상어를 비틀어 시어를 만드는 능력은 비유의 생산 능력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능력을 중시한 것은, 세상의 많은 물상들을 시를 통해 축약하는 과정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나’와 ‘나의 주변’에 널려 있는 물리적․심리적 정황들을 언어를 통해 정리하고 응축하는 작업이 ‘시’였다.
하지만 요즘 시들은 그러한 작업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요즘 시들은 세상의 복잡함을 설명하려고 하고, 긴 문장과 장황한 묘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는 길어지고, 시는 한층 복잡한 정보들로 가득차게 된다. 비유를 사용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과거 우리가 배웠던 비유들은 ‘은유’나 ‘직유’를 골자로 하였다. 문장의 표현만 보아도, 이것인 은유이고, 저것이 직유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은유 같지 않은 은유, 직유 같지 않은 직유, 아니, 비유 같지 않은 비유, 수사 없는 시를 사용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그 결과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이중적 개념이 희미해지면서, 비유 자체의 원상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졌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작업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시인들은 이해받지 못하는 시를 쓴다는 것에 필요 이상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내가 읽었던 네 권의 시집은, 악전고투하면 그 뜻을 찾을 수 있는 경우였다(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존의 언어 사용과 시적 기교에 대한 문제 의식을 지닌 경우였다. 다소 편차는 있지만, 2005년 한국 시단의 소중한 평가로 기록될만하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시는 쉽게 이해되지도 않아야 하지만, 아주 어려워서 이해받지 못해도 안 된다. 시는 추상적인 정보의 나열이지만, 그 정보는 구체적인 삶의 정황 안에 있어야 하며, 그 삶의 정황은 개인의 체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적어도 시로 표현되는 순간에는 그러한 정황이 보편적인 정황으로 신뢰될 여지가 있어야 한다. 지금의 시는 너무 어렵다. 그것은 비유들에 대한 신뢰가 약하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비유를 거부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비유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 만물의 축약 기능, 즉 외적 질서의 내부적 정련과정까지 외면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유가 보다 살아나고, 언어가 축약되는 시를 보고 싶다. 너무 어렵지 않는, 그렇다고 너무 단순하지도 않은.
출처, 애지(06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