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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부지역 전도
남부지역 복음전파에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회를 중심으로 북장로교 선교회와 남장로교 선교회가 선교전략의 최대 거점지역으로 확정하였습니다. 부산은 조선을 대표하는 국제무역항으로 대구, 전주를 최대 반경으로 하는 복음의 출발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1882년, 일본인 매서인 “나가사까”가 로스 선교사로부터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가지고 부산에서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884년 4월, “미우라”와 “스가노” 부부가 부산에 “성서보급소”를 설립하고 이수정이 간행한 “신약성서로가전”과 “신약성서약한전”과 전도문서를 보급하였습니다.
➀ 부산, 경상도지역 복음화
1885년 11월, 영국성공회 중국 푸죠우 선교사 “존 울프”가 중국인 기독교 지도자 2명과 함께 부산선교를 타진하였습니다. 1889년 7월, “제임스 게일”은 1991년까지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1890년 9월30일, “로버트 하디” 선교사가 1892년 11월까지 부산지역에서 의료선교를 하였습니다. 1889년 10월, 호주장로교 선교회 데이비스가 경상도 선교사로 파송되었으나 사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소천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1891년 9월, 북장로교 선교회는 윌리엄 베어드 부부를 부산지역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주거지 안전문제로 베어드 선교사의 부산행이 다소 지체되어 1891년 11월, 부산에 정착하였습니다. 하디 부부, 베어드 부부, 맥케이, 니븐, 브라운, 맨지스, 케리 선교사와 한국어 선생과 일본인 하녀가 열악한 주거환경속에서 살아가던 중 사라 맥케이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호주 여선교사 “진 페리”는 고야 양육을 위해 1895년, 13명을 시작으로 고아원을 설립하였습니다. 1897년에는 새로운 남자 성도인 심서방의 부친 “노심” 선생을 교사로 채용하여 “남자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항구도시 부산은 진성 콜레라 등 각종 전염병으로 가득하였고 위생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1892년 5월18일, 베어드 선교사는 서상륜과 함께 부산의 남해안 지역 순회전도를 하였습니다. 부산은 항구도시의 특성상 용왕 굿 등 무당들이 많고 수많은 미신들이 있어서 복음전파가 벽에 부딪히는 등 힘겨운 사역이 계속되었습니다. 1893년 12월, 서경조가 소래교회로 복귀하고 황해도 해주 출신 “고윤하”가 베어드를 협력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베어드는 영선현을 중심으로 “영선현교회”(현,초량교회)를 설립하고 호주선교회는 범일동과 좌천동 지역에 “부산진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멘지(Menzies)의 어학선생 심서방이 1893년, 베어드에게 세례를 받고, 두명의 조선여 인도 함께 세례를 받았으며, 7월15일, 베어드의 고용인 두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베어드는 복음전파를 위해 부산을 거점으로 마산포, 진주, 김해, 동래, 상주, 안동, 경주, 울산, 밀양, 진주, 대구, 전주, 목포 등 연중 279일간 1,000마일의 도시를 방문하였습니다. 1896년, 출석교인 60명으로 성장하였고, 베어드의 헌신은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남학교”를 설립하여 100명의 학생이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야간 여학교”에도 16명의 여학생이 재학중에 있었습니다. 1896년 4월, 경상지역 최초로 조선인 여학교 학생 1명이 “기독교 예식”으로 결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세브란스, 갬블, 호서방의 기부금으로 1908년, 베어드는 여학교를 신축하고, 1909년 10월, “여자중학교”가 개학하였습니다. 1909년, 초등학교 20개교에 남학생 138명, 여학생 142명이 재학하였습니다. 1901년, 부산에 파송된 의료선교사 “어빈”(Charles H.Irvin)은 재직 8년간 아동 환자 9천명 등 6만명의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어빈은 헌식적인 의료사역과 함께 한국인 “고명오”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시켜 세브란스 외과의사로 헌신하게 하였습니다.
진주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부는 진주를 서부경남 복음의 거점으로 여겼습니다. 1905년 10월, 호주 장로교 의료선교사 “휴 커렐”(거열휴,Hugh Currell)부부가 “박성애”씨 가족과 함께 부산진에서 진주로 이전하고 진주선교부를 개설하였습니다. 진주면 옥봉리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11월5일, “옥봉리교회”(진주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옥봉리교회는 1906년 11월2일, 교회건축 7개월만에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1906년 4월, 사립 “안동학교”와 8월, 사립 “정숙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약방”을 개소하여 매일 환자를 진찰하고, “성경학교”를 개설하여 체계적인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마산
1900년, 호주 장로교 선교회 엥겔(Engel) 선교사는 마산선교부를 개설하고 여성선교사들의 활약에 힘입어 선교지역을 확장해 갔습니다. 호주 장로교 여성선교사들은 전도부인과 동역하며 순회전도를 하였으며 심방, 상담, 성경공부 등 가족중심의 사역을 하였습니다. 이로서 가족상담과 여성문제 전문상담을 통하여 여성들을 기독교화 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대구
1895년, 부산에서 대구로 선교지를 이동한 베어드와 아담스 선교사는 경상도의 중심에 위치한 대구를 선교거점으로 지정하였습니다. 7만5천명의 인구가 밀집한 대구는 지리적 접근성이 유리하고 상업적 요충지로서 남북으로의 활동이 가능하였습니다. 대구는 산이 많은 부산과 달리 평지가 많고 사통팔달 모든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복음전파에 적합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1898년, 베어드의 처남인 “아담스”(James Edward Adams) 선교사는 자신의 자택에서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하고 10월에 “대구 제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1902년, 대구제일교회 내에 “대남 남자소학교”와 1906년, “계성중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을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➁ 전라도지역 복음화
전라남북도 지역은 1892년,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거점지역이었습니다. 1893년 6월, 전킨(전위렴), 테이트(최의덕), 매티 테이트(최매티), 레이놀즈(이눌서), 데이비스 선교사들은 레이놀즈의 조사 “정혜원”을 통하여 전주 성문밖 은송리(완산동)에 선교센터를 구입하고 “전주서문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유교문화가 고착화된 전주지역은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은송리 사람들은 서양 선교사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따라 다녔습니다. 이들에게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891년, 전주지역 천주교 사제로 섬기고 있는 보두네 신부를 방문하여 전주지역의 선교현황과 미래전망을 청취하였습니다. 1893년 11월,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선교부를 설치하고, 주일예배를 드리며 선교가능성을 진단하였습니다. 1894년 3월,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에 파송되어 어학선생 “서광범”과 전도부인과 함께 전주선교를 본격화 하였습니다. 여전히 업신여기고 돌을 던지기도 하는 등 위험한 상황이 돌발적으로 발생하였지만 주일예배에 5~8명이 참석하는 등 복음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중에 12명의 남자들이 교리를 배우고 그들 가운데 3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1894년 3월27일, 레이놀즈 선교사는 의료선교사 “드루”(A.D.Drew)와 함께 군산에 도착하여 군산참사에게 복음을 전한후 “군산개복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레이놀즈는 전주지역에서 성경교리와 주일예배를 드리는 조선인들을 바라보며 가능성을 확인하였습니다. 그후 김제, 금구, 태인, 정읍, 홍덕, 줄포, 곰소, 영광, 함평, 무안, 목포, 우수영, 진도, 완도, 신지도, 녹동, 벌교, 순천, 좌수영, 남해를 경유하며 복음전파의 가능성을 재차 확인하였습니다. 1894년 4월27일, 동학농민들이 전주성을 공격하며 조선전국은 농민들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어 7월에는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조선정국은 더욱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선교정책은 다소 주춤하거나 철수가 불가피 하였습니다.
전주
1896년 1월, 테이트의 사랑방에서는 남자교인들이 회집하고, 매티의 사랑방에서는 여자교인들이 회집하여 각각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1897년 3월6일, 전주선교부 출범기념예배를 드렸고, 레이놀즈와 테이트가 전주선교를 담당하였습니다. 주일 8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고, 3월28일, 4명의 어린이와 함께 주일학교를 개설하였습니다. 1897년 7월17일, 김창국, 김내윤, 유충경의 모친, 김창국의 모친과 할머니 함씨 등이 세례를 받았으며, “김창국”은 전주신흥학교와 평양숭실중학과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1897년 8월1일, 전주지역 최초로 성찬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군산
1894년 3월27일, 호남선교의 개척자 레이놀즈 선교사는 의료 선교사 드루와 함께 제물포를 경유하여 군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군산지역 행정관인 참사에게 복음을 전하고 1895년 3월, 전킨 선교사와 드루(유대모)가 군산에 합류하여 “김봉래”, “송영도”를 전도하여 결신하였습니다. 1896년 4월, 전킨 선교사가 김봉래, 송영도, 차일선의 학습문답을 거쳐 7월20일, 전라도지역 최초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드루 선교사는 진료소를 개소하고 진찰진료를 시작하였으며 전킨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0월4일, 송영도의 딸이 유아세례를 받고 40명의 교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남녀 각각 다른방에서 전킨 선교사의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렸으며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문맹자였기 때문에 한글교육을 병행하였습니다. 1896년 10월, 전킨 선교사의 어린 자녀가 전염병으로 사망한 것에 충격을 받은 남장로교 선교회는 군산지역 선교부 철수결정을 내렸으나 군산지역 선교사들의 반발로 군산과 나주에 모두 선교부를 두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김제
1896년, 김제군 공뎍면 송지리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전킨 선교사와 드루 선교사는 김제 복음화를 위해 한글교육과 의료선교를 함께하며 농촌지역 환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1899년, 구암리에 선교센터와 주택을 건립하고 김제지역선교를 본격화 하였으며 12월4일, “구암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구암교회 설립자인 전도인 “장인택”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선교사공의회 설립회원으로 참석하였습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어학선생이며 역관이었던 장인택은 군산선교의 주역이었습니다. 1900년, 전킨 선교사가 설립한 옥구군 “지경리교회”는 현지인 “최홍서”의 헌신에서 태동된 것이었습니다. 최홍서는 지경리교회의 초대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1899년 구암교회는 군산항 개항으로 수백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전킨과 드루선교사는 지경, 만자산, 남차문, 김제 송지리, 성말에 순회전도를 통하여 각각 기도처소를 설립하였습니다. 1899년, “남전교회”가 설립되었고, 1900년, “지경교회”가 설립되었으며, 드루 선교사는 전도선을 이용하여 서해안 지역 섬선교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목포
1897년 6월4일, 목포선교의 개척자 벨은 목포에 도착즉시 목포 외곽지역에 2,500평의 대지를 구입하였습니다. 1897년 11월27일, 목포와 나주로 양분된 선교부는 목포로 내정됨으로서 종식되었습니다. 1898년 5월15일, 초가집을 임시사택과 예배처소로 사용한 지 불과 2개월만에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나주 권서인 “변창연”이 목포로 이동하였고 1899년, “스트레퍼” 선교사가 목포에 합류하였습니다. 1897년 11월, 의료선교사 “오웬”이 목포로 파송되어 “진료소”를 개설하여 복음과 의료선교라는 두가지 정책으로 복음전파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1901년 4월12일, 벨 선교사의 아내 로티 벨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으며, 의료선교사 오웬도 폐렴에 걸려 사망하였습니다. 1906년, 목포는 영적대각성운동을 전개하며 복음의 불길을 높였습니다.
광주
1904년 12월, 벨과 오웬은 광주 선교부 개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광주, 전남의 복음을 선도하였습니다. 목포에서 이사를 온 “김윤수”가정은 선교부 확장에 큰 공헌을 하며 훌륭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광주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하여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광주교회는 예배당이 협소하여 밖에서까지 드려야 했고, 불과 몇 년후에는 400~500명에 이르는 교인이 주일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순천
1912년에는 순천선교부가 개설되었습니다. 광주 선교부 선교사인 오웬이 순천에서 복음을 전파한지 불과 얼마 않되어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미 1909년에 순천에는 50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앙문답과 원입교인을 세우는 등 교회를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1910년, “니스벳”(Nisbet) 선교사가 순천지역 최초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1912년, “코잇트” 선교사가 프레스턴 선교사 가족과 함께 순천에 파송되었습니다. 비거(백미다)와 두피(두애란) 등 2명의 여선교사가 합류하고 의료선교사 헨리 티몬스(김로라)와 “크레인” 선교사가 순천에 파송됨으로서 순천지역 복음화는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헨리 티몬”은 “알렉산더병원”을 설립하고 의료와 교육과 복음선교를 균형있게 발전하였습니다. 복음전도와 함께 군산구암병원, 전주병원, 목포병원, 광주병원, 순천병원, 나병원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숭일학교, 수피아학교, 영명학교, 메리 볼딘여학교가 설립되어 문명퇴치와 함께 무속신앙을 통한 치료행위를 중단케 하였습니다.
첫댓글 한국교회사를 보며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배우고 되고, 우리가 깨달아야할 부분도 참 많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