葛川 金熙周 先生(영조 36년 ~ 순조 30년) 자:공목(公穆), 성사(誠思) 호:갈천(葛川) 출생지:안동 망도리(望道里) 분묘지:영주 어유곡(榮川 魚遊谷) 입사경로:문과 ,규장각 강제문관(奎章閣講製文官) 으로 출사 내관직:대사간(大司諫), 병조 참판(兵曹參判) 외관직:영흥 부사(永興府使)
(1) 원만하고 화해로운 성품의 선비, 김희주 김희주(金熙周, 1760∼1830)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자는 공목(公穆), 뒤에 왕명에 의하여 성사(聖思)로 고쳤으며, 호는 갈천(葛川)이다.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의 현손이다. 옛 안동부의 속현인 내성현 망도리(乃城縣 望道里)에서 후덕한 사람으로 알려진 아버지 증 이조 참판 김시동(金始東)과 어머니 반남박씨 박효술(朴孝述)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처사 전필현(全必鉉)과 송오(松塢) 권사민(權思敏)에게 수학하였으나 뒤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 되었다. 대산 이상정은 돌아갈 즈음 사람들에게 김희주의 장래가 유망하다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1789년(정조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2년(정조 16)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강제문관(奎章閣講製文官)이 되었다. 그 뒤 많은 벼슬을 역임하였고, 1819년(순조 19) 대사간(大司諫)에서 병조 참판을 거쳐 영흥 부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하였다. 또한 영해 부사·안주 목사·우승지·형조 참판·한성 좌윤·사간원 대사간·함길도 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98년(정조 22) 홍문관 교리 때에는 당시 현실의 폐단을 상소하였는데, 정조가 칭찬을 하며 받아들였다고 한다. 1800년(순조 1)에는 교리에 실록 편수관(實錄編修官)을 겸하여 『영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806년(순조 6)에는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었다. 그는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정치와 교화 또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개탄하여, 사재(私財) 수백 냥을 투자하여 배움터[講所]를 마련하였다. 안악군 내의 뛰어난 젊은이들을 뽑아 효제의 도리 등을 교육하고 생업에 힘쓰도록 하였다. 그 성과가 매우 뛰어나서 주변 고을도 모두 본받았다고 한다.
김희주는 만년에 귀향하여 소수서원의 원장이 되었다. 화공을 불러 낡은 선성(先聖 : 공자)의 영정을 모사하고, 회헌 안향과 신재 주세붕의 영정도 새롭게 손보았다. 영정들을 봉안하는 날, 그 자리에 모인 천여 명의 사람들이 이를 매우 영광스럽게 여겼다.
김희주는 당대 사림의 지도자로 여강서원의 배향문제(이른바 병호시비)의 규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의견들이 달라서 오래도록 통일되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조정을 해가며 수십 년 동안 사림의 영수노릇을 하였다. 그의 성품이 퍽 너그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벼슬살이도 잘하였고,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뒤에는 풍기의 소수서원, 안동의 여강서원의 원장이 되어 사문을 흥기시키는데 힘을 썼고 사림들을 이끌었다.
김희주는 타고난 천성이 신중하면서 느긋하였고, 기상은 원만하면서 원대하였다. 평소에는 어리석은 듯하고 말을 할 때는 회의적인 듯하였으나, 생각이 깊어 잘 드러내지 않고, 실력은 쌓을 뿐 자랑하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뜻을 잘 맞추어 편안하게 해드렸고, 제사를 받들 때는 정성을 다하였다. 집안을 다스릴 때는 너그러우면서도 법도가 있어 항상 검소하고 절약하였다.
친족들을 대할 때는 그들의 가난함을 아파하여 가난한 친척들을 위해 땅을 떼어 주거나 고아가 된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기도 하였다.
(2)임금의 은총을 입음 조정에 있어서는 임금의 은총을 남달리 입었으나, 자신에 대한 과장된 평판으로 인한 은혜라 생각하고 항상 경계하고 신중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입직(入直)하는 날이면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글을 읽곤 하였는데, 임금이 보고는 ‘이는 필시 김아무개일 것’이라고 했다.
어린 임금(순조)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교리(校理)의 신분으로 임금께 나아가 아뢰기를 “천하의 어떤 일도 스스로 다짐하지 않고 되는 일은 없사옵니다. 스스로 다짐하였다면 마땅히 온 힘을 기울이는 것으로 준칙을 삼아야 하며,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법은 오직 전하께서 어떻게 뜻을 세우시고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달려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3) 능력 있는 목민관 외직에 있을 때는 백성들에게 효제(孝悌)의 도리를 가르치고, 학교를 보수하여 교육을 진작시켰으며, 백성들의 고통은 제거해 주고, 형벌은 최소한으로 시행하였다. 그러자 누락되었던 세금도 오래지 않아 모두 걷히게 되었다.
(4)불의에 대한 과단한 비판 한 번은 의금부(義禁府) 관원이 액정서(掖庭署) 하급관리의 불법을 논하다 오히려 죄를 입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액정서의 하급관리들이 언제 한번이라도 법의 무서움을 느껴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관리를 선발하는 법은 친분이 얼마나 두터우냐의 여부와 뇌물의 많고 적음에 의해 상실되고, 옥사를 판결하는 법은 세력이 얼마나 무거우냐의 여부와 청탁의 빈도수에 의해 무너졌사옵니다.
관리들에게는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법이 있지만 아첨만을 일삼고, 과거는 인재를 선발하는 법이지만 청렴하고 정직한 인재들은 하나도 선발하지 못하옵니다. 액정서 하급관리의 무엄함은 아무래도 이러한 현상에 익숙한 결과일 것이옵니다.”
(5)학문이야기 1. 학문의 길에 들다 6세에 처음으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9세에는 영주의 전필현(全必鉉)에게 나아가 배웠고, 12세에는 권사민(權思敏)에게 나아가 배웠다. 스승인 권사민이 대단히 엄격해서 일일이 법도에 맞게 하기를 요구했는데 그대로 따랐다. 배운 지 7, 8년 만에 학문이 크게 성장하였으며, 16세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 온 후 아버지 참판공이 밤낮으로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점검하고 시간을 한가하게 허비하지 않도록 했다.
2.대산 이상정 문하에 들어감 일찍이 풍기에서 살고 있을 때, 대산 이상정이 풍기에 들렀다가 병으로 인해 며칠을 머문 적이 있었다. 이때 김희주가 날마다 가서 시중을 들었는데 물러나면서 사람들에 말하기를, “20년 동안 노력한 공부가 모두 선생의 문하에 들기 위한 것이었던 모양이오. 오늘에서 선생의 도가 여기에 있음을 알았다오.”라고 했다.
그해 겨울 마침내 집지하여 문하에 들어 배우기를 청했다. 이에 대산 이상정은 “그대는 타고난 품성이 삼가고 돈후하며 어려운 문제에 대해 묻는 것이 정미하며, 또한 독서에도 부지런하다니 이 공부에 충분히 뜻을 둘만하다. 내가 그대에게 거는 기대가 적지 않네.”라고 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길 “후생들 중에서 김공목(金公穆)과 남자호(南子皜) 등이 대단히 장래가 촉망된다.”고 말했다.
(6)저작이야기 문집으로는 『갈천집』 10권이 있다. 문집의 시 가운데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화답한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는 그의 산뜻한 정감과 뛰어난 문장력이 돋보이는 글이라 평가되고 있다. (선생의 문학적 재주와 감성을 잘 볼 수 있는 글이다.)
서(書)는 학우들과 친지들과 주고받은 것으로 이황·이상정의 학문에 관한 것이 있다.
疏 중에 1811년에 올린 「논혜경궁복제소(論惠慶宮服制疏)」는 당시 禮設에 관한 소신을 밝힌 것으로 여러 전거와 중국의 사례를 들어 14년 동안 왕권을 대행한 혜경궁에 대한 상례(喪禮)가 소홀하다는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1824년(순조 24)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이 소가 당시의 정치적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한 「사서추잉진육폐소(辭西樞仍陳六弊疏)」이다. 당시 여섯 가지의 폐단을 일소하는 방법으로 궁성학(躬聖學)·입기강(立紀綱)·광인재(廣人才)·휼민은(恤民隱)·정사추(正士趨)·숭도술(崇道術)등 6조목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성인의 학문을 궁구함[躬聖學], 기강을 세움[立紀綱], 널리 인재를 모음[廣人才], 백성을 돌봄[恤民隱], 선비의 길을 바로 세움[正士趨], 유학의 도를 높임[崇道術] 등의 6가지 당시의 현실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이외에도 왕에게 맹자의 왕도정치 구현을 주장한 「경연강의」가 있다.
公은 1820년(순조 20) 한 달여 금강산을 유람한 뒤 돌아와 「금강산유록(金剛山遊錄)」이란 기행문을 짓기도 하였다.
28세(정조 13년)-司馬試에 乙科6위로 급제하여 成均생원 31세(정조16년)-到記三試에 수석하여 事變假注書,규장각 講製文官인 초계문신이 되었다. 정조21년-수찬에서 홍문관교리가 됨 정조22년-丹楓亭親試(단풍정친시)에 수석 홍문록에 등제 된 후에 지평,장령,헌납,사간,사성역임. 순조5년-통정대부에 올라 우승지가 됨 순조15년-한성부좌윤,형조참판 순조19년(1819년)-대사간, 병조참판,영흥부사가 된 후에 사임하였다.
※德峯精舍(덕봉정사) 봉화읍 석평리 망도 덕봉산하(望道 德峯山下)에 소재하였으며 갈천공(김희주)가 건립하여 많은 유생이 찾아 와 강학을 받아온 서재였었다.
※葛川亭(갈천정) 소재지: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잿못마을 (원소재지 : 안동부 재산현 갈산리) 건축주:김희주(金熙周, 1760∼1830) 건축시기:1808년(순조 8)
1.봉화읍에서 갈천정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36번 도로를 타고 현동 태백 쪽으로 가다가 918번 지방도로를 따라 우회전하여 봉성·명호를 거쳐 재산 쪽으로 간다. 가다가 933번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933번 도로 쪽으로 좌회전 하여 1.2km 쯤 가면 왼쪽으로 갈천정이 보인다. 갈천정은 바로 길가 냇가에 기대어 있기 때문에 금방 눈에 띤다.
다른 하나는 36번 도로를 타고 법전·춘양을 지난다. 노루재 터널 직전에서 영양으로 가는 31번 도로를 따라 우회전 하여 7, 8km 남짓 가다가 918번 도로를 만나면 우회전 하여 5, 6km 남짓 가면 오른쪽으로 갈천정이 보인다.
정자의 재목은 아주 좋은 편이다. 기둥을 받친 초석은 잘 다듬은 돌이고, 마루를 고인 돌 조차도 잘 손질된 돌인 것으로 보아 이 정자는 엄청난 물력을 들여 공들여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퇴락하였다.
갈천정 주변은 호박덩굴이 무성하고 고추밭으로 일구어져 어지럽고, 정자 왼쪽 측면에는 예전에 누가 살았던 흔적으로 시멘트 블록으로 보일러실 같은 것을 덧붙여 놓았다. 그나마 아직도 애써 옛 모습으로 위엄을 지니고 있는 것은 낡은 현판들뿐이다.
갈천정 뒷집에 사는 동네 사람의 말에 의하면, 현 갈천정 옆에는 46칸의 큰 집이 있었다고 한다. 1957년 홍수에 그 집이 무너졌는데, 무너진 들보에서 ‘도광 8년(1828년)’이라는 기록이 분명히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확실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 집은 아마도 덕봉 아래에 있던 집을 옮겨왔던 것이 아닌가 한다.
2.건축 배경 갈천정(葛川亭)은 갈천 김희주가 지은 정자이다. 살림이 넉넉하였던 그는 봉성 북쪽, 땅이 그윽하고 넓은 쌍송정이란 곳[지금의 물야면 북지리이다.]을 보고 주인에게 많은 돈을 주고 구입하였다. 그리고 비용을 들여 수리하고 전 가족을 옮겼다. 못을 파 연꽃을 심고 날마다 글을 읽고 시를 읊으며 노년을 보낼 계획으로 1808년(순조 8) 당시 안동부 재산현 갈산리 선영 아래에 이 정자를 지었다. 산이 깊고 물이 돌아나가며, 아래에는 폭포가 있고 돌이 파여 그윽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 위에 집을 짓고 재(齋)를 족한(足閒)이라 하고, 헌(軒)을 수월(水月)이라 이름 붙였다. 정자를 갈천정이라 이름 지어 현판을 걸었는데, 이는 만년에 한가롭게 몸과 마음을 정양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몇 년 후 옛 주인이 갑자기 반환을 청하자 바로 포기하고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매년 봄 가을 좋은 때를 만나면 혹 벗과 함께, 혹 홀로 갈천정에 가서 머무르며 노닐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잠깐은 몰라도 늘 있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갈천정에 가 있는 동안 여러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덕봉 남쪽에 수 칸의 집을 지어 동쪽 방은 양정(養正)이라 이름 붙이고, 서쪽 방은 입교(立敎)라 이름 붙였다. 집은 덕봉정사(德峯精舍)라고 이름을 걸어 집안 아이들을 강학하도록 하였다.
3.건축 구성 갈천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이다. 왼쪽 대청 칸 위에는 수월헌(水月軒)이란 현판이 붙어 있고, 오른쪽 온돌방 칸 위에는 족한재(足閒齋)란 현판이 붙어 있으며, 가운데 방 위에 갈천정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정자가 있는 갈산리는 정자마(정자마을)라 불리는데, 이는 갈천정 건립 이후부터 불린 이름이라고 한다.
4.현판:
1)갈천정(葛川亭): 갈천정은 김희주가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선영이 있는 갈산리의 칡 갈(葛)자를 따고, 갈산리에 냇물이 맑게 흐르므로 내 천(川)자를 따서 자신의 호를 삼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정자의 이름을 붙인 것 같다.
2)수월헌(水月軒): 수월헌은 정자 앞 물에 달이 밝게 비치는 형상을 딴 듯하다.
3)족한재(足閒齋): 족한재는 만년에 한가롭게 노닐기에 족하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5.재산면의 젖줄, 갈산리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는 재산면 중에서 물이 풍부한 마을이다. 갈산리의 서쪽은 미림산 영역이고, 북쪽은 낙동강, 동북쪽은 제비산·장군봉 영역, 동남쪽은 조산봉 영역이다. 남쪽은 재산의 현동마을과 동면마을이 확정하여 준다. 이 마을은 남면리 쪽에서 시작되어 재산면소재지를 거쳐 북행하여 온 재산천 주변과 장군봉 산록을 훑고 한골·아랫공이 쪽으로 서행하여온 현동천 주변에 넓게 펼쳐져 있다.
임기에서 영양으로 나가는 31번 국도는 현동천을 따라 나가며 이 마을의 북쪽 영역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주며, 재산면사무소 쪽에서 아랫공이 쪽으로 나와 31번 국도와 만나는 933번 지방도는 이 마을의 서쪽 영역을 서로 원활하게 연결시켜 준다.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는 마을이다. 북행하는 재산천 영역에 펼쳐져 있는 것은 큰마을·잿마·요골·학다리·새골·머너부·골내골·합강 등의 고을들이다. 큰마을은 갈산·갈산리이다. 갈천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곳이다. 잿마는 재산천의 서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촌이라고도 하는데,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잿마의 북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학다리·학교이다. 근처에 학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주변의 재산천 영역이 절벽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준다. 머너무·골내골 등도 재산천 주변에 넓게 펼쳐져 있으며, 합강은 재산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31번 도로의 영양 쪽 끝으로는 우련전이 있다. 이곳은 풍수에서 연화부수형의 명당이라 한다. 갈산리의 동쪽 끝부분에 있으며, 영양 쪽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우련전의 북쪽으로는 한골·가내골이 있다. 한골은 대곡이라고도 하는데, 장군봉 남쪽 산록에서는 비교적 넓은 들을 포함하고 있는 곳이다. 한골의 위쪽으로는 가내골이 있는데, 시냇가 경치가 아름다워서 가내골이라고 한다.
우련전 서쪽으로 나오면 한골·대곡·신타리·산막 등이 있다. 이들 마을은 장군봉의 서남쪽 산록에 펼쳐져 있다. 산막은 우련전에 가깝게 자리 잡고 있고, 한골은 우련전에서 가장 멀리 위치하는 마을이다. 산막은 아연광이 폐광되기 전에는 번성하였던 마을이다. 한골과 대곡은 이 부근에서는 비교적 넓은 들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마을들은 현동천의 원류를 이루는 시내 주변에 넓게 펼쳐져 있다.
현동천의 하류 부분으로 가면 용구·오미골·공리골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공리골은 공이골이라고도 하는데, 큰 공이재 북쪽으로 웃공이·아랫공이로 나뉘어져 있다. 현동천과 재산천 사이에는 공이재·쇄실·염주골·잣밭골·까이골 등이 펼쳐져 있다.
◇19세 칠봉 김희삼(문과,삼척부사) 20세 개암 김우굉(문과,강원도 관찰사,대사성) 21세 주봉 김득가(진사,창녕현감,증 사복시정 퇴계 이황문인) 22세 천유당 김율(진사,안동좌수,수첨추,증 좌승지) 23세 학정 김추길(생원,수첨추,증 이조참판,정경세 문인) 24세 김성후(증 사복시정) 25세 草堂 김여탁(증 이조참의) 26세 金景㶅(김경학,증 이조참판) 27세 金始東(증 이조참판):안동좌수,안동별감,배:박효술 女
28세 葛川 金熙周(문과,병조참판,초계문신):대산 이상정 문
인,소수서원원장,여강서원원장, 배:강좌 권만 손녀 29세 儒軒 金在恭(성균생원)-배:형조참판 사은 이귀운
(송암 김경헌의 외손자,이육사의 6대 조부)孫女,女:愚伏 鄭經世 胄孫,女:李 敦禹 (大山 李 象 靖 胄孫) 30세 左海 金邁銖(성균생원):안동좌수,배:참판 이태순 손녀 31세 剛齊 金悳永:서산 김흥락문인,배:참판 이휘재손녀,李忠鎬(퇴계주손)
32세 春汀 金萬植(통덕랑):배:참판 이계로의 女, 女;李珉鎬
(退溪 后 穆齋 李晩由 胄孫/이만유:원촌 영감댁,승지,
대사간.형조참판 사은 이귀운 증손)
33세 玄沙 金昌詩(생부:漢植/金應煥)-도산서원 원장,
女;삼산 류정원주손<문집: 만록(漫錄):학봉 김성일이 통신부사로서 일본에 다녀와 복명한 내용으로 인하여 물의를 빚은 데 대한 해명한 내용이 문집에 수록되어있다.> 34세 金學基 35세 김상순 36세 김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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