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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Jesús dijo a Nicodemo: «Nadie ha subido al cielo sino el que bajó del cielo, el Hijo del hombre. Y como Moisés levantó la serpiente en el desierto, así tiene que ser levantado el Hijo del hombre, para que todo el que crea en Él tenga vida eterna. Porque tanto amó Dios al mundo que dio a su Hijo único, para que todo el que crea en Él no perezca, sino que tenga vida eterna. Porque Dios no ha enviado a su Hijo al mundo para juzgar al mundo, sino para que el mundo se salve por Él».
«Para que todo el que crea en Él tenga vida eterna»
Rev. D. Antoni CAROL i Hostench
(Sant Cugat del Vallès, Barcelona, España)
Hoy, el Evangelio es una profecía, es decir, una mirada en el espejo de la realidad que nos introduce en su verdad más allá de lo que nos dicen nuestros sentidos: la Cruz, la Santa Cruz de Jesucristo, es el Trono del Salvador. Por esto, Jesús afirma que «tiene que ser levantado el Hijo del hombre» (Jn 3,14).
Bien sabemos que la cruz era el suplicio más atroz y vergonzoso de su tiempo. Exaltar la Santa Cruz no dejaría de ser un cinismo si no fuera porque allí cuelga el Crucificado. La cruz, sin el Redentor, es puro cinismo; con el Hijo del Hombre es el nuevo árbol de la Sabiduría. Jesucristo, «ofreciéndose libremente a la pasión» de la Cruz ha abierto el sentido y el destino de nuestro vivir: subir con Él a la Santa Cruz para abrir los brazos y el corazón al Don de Dios, en un intercambio admirable. También aquí nos conviene escuchar la voz del Padre desde el cielo: «Éste es mi Hijo (...), en quien me he complacido» (Mc 1,11). Encontrarnos crucificados con Jesús y resucitar con Él: ¡he aquí el porqué de todo! ¡Hay esperanza, hay sentido, hay eternidad, hay vida! No estamos locos los cristianos cuando en la Vigilia Pascual, de manera solemne, es decir, en el Pregón pascual, cantamos alabanza del pecado original: «¡Oh!, feliz culpa, que nos has merecido tan gran Redentor», que con su dolor ha impreso “sentido” al dolor.
«Mirad el árbol de la cruz, donde colgó el Salvador del mundo: venid y adorémosle» (Liturgia del Viernes Santo). Si conseguimos superar el escándalo y la locura de Cristo crucificado, no hay más que adorarlo y agradecerle su Don. Y buscar decididamente la Santa Cruz en nuestra vida, para llenarnos de la certeza de que, «por Él, con Él y en Él», nuestra donación será transformada, en manos del Padre, por el Espíritu Santo, en vida eterna: «Derramada por vosotros y por todos los hombres para el perdón de los pecados».
♣ 십자가를 현양하는 삶 ♣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광야를 걷고 있었습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했고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생활이 너무 힘들어 불만에 가득 차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뱀들을 보내시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게 하십니다. 일종의 불신의 벌이 내린 것이지요. 그제야 정신이 든 그들은 모세에게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모세가 그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고 뱀에 물린 자는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민수 21,8). 과연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예수님 친히 구리 뱀처럼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렇게 그분께서는 오직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고, 죽음을 넘어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현양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현양하려면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오직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3,16).
따라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인 표지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외아들을 주심으로써 드러났으며,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은 화려하게 꾸며진 것도 고통 없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요. 십자가를 현양하려면 십자가의 무게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고통의 무게, 생명을 위한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때, 십자가를 통해 주님께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무한한 사랑만이 끝없는 고통과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십자가 그 자체는 고통, 불의, 실패, 절망, 수치, 치욕, 파멸, 죽음 등 부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극진한 사랑과 섬김, 희생과 겸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십자가의 역설을 보여주셨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십자가를 받아들이심으로써 절망을 넘어 희망을,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생명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의 그 사랑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십자가를 현양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십자가를 현양하려면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사랑으로 죽음을 삼켜야만 할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으셨을 것이며, 생명께서 나무에 못박히지 않으셨을 것입니다.”(크레타의 주교 성 안드레아) 십자가는 인간을 위한 예수님의 속죄 제사, 죽음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갈망하셨던 생명의 잔이고 영광이며,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의 마침표인 셈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느님의 능력이요 지혜”(1코린 1,24)로서 하느님께 이르는 등불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며’(1코린 2,3), 사랑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여,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고, 서로의 고통에 눈길을 돌리고 함께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어줌으로써 매순간 주님의 십자가를 현양하는 거룩한 날이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곧 우리의 연약함이며 매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일일 뿐임을 기억하며...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입니다!
이제는 많이 연로해지신 선교사 신부님,
스페인 출신이라서 그런지 정통 가톨릭 신앙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마치 투사 돈키호테 같으셨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혹시라도 누군가가 지하철역 에스켈레이터 끝에서,
‘예수천국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벼락같이 화를 내시면서 뛰어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피켓을 뺏들고는,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러분들, 두려워하지 마시고, 우리 천주교회로 나오십시오!
우리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신부님은 당시 피켓맨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ㅋㅋ
젊은 형제들의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위해 승용차로 모시고 갈때면,
창밖을 바라보며 늘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여기도 십자가, 저기도 십자가, 십자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 많은 교회 십자가 아래 예수 그리스도는 찾아볼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에서 십자가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구원을 꿈꾸지만,
사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천국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건너가지 않고는 영원한 안식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부정할 때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나 사회의 큰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나 고통, 희생이나 헌신이 없는 달콤한 인생, 편안한 신앙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한 걸음 한 걸음씩의 성장과 인내와,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노력,
결국 십자가와 고통은 외면합니다.
돈보스코가 시작한 오라토리오 초창기 시절의 일입니다.
돈보스코와 동고동락하기 위해 찾아드는 아이들의 수효는 점점 늘어나고,
숙소며, 먹거리며, 입을거리 마련이며, 할일은 태산같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연로한 어머니 맘마 마르가리타에게 도움의 손길를 건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웠습니다. 평생에 걸친 고생을 끝내고
이제는 손자손녀들 품에 안고 편한 여생을 계획했었는데,
갑작스런 아들 신부의 초대에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초대로 여기고 하루 온종일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삼시세끼 식사며, 청소, 이불빨래, 옷빨래로 하루 해가 짧았습니다.
하루는 너무나 지친 맘마 마르가리타가 아들 돈보스코를 떠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돈보스코는 아무 말없이 손을 들어 벽에 붙어있던 십가가를 가리켰습니다.
십자가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이 펼치는 위대한 사목의
가장 큰 협조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죄인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며 구원의 열쇠라는 진리를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에 감사하고, 기꺼이 지고가려는 사람은 드믑니다.
때로 피하고 싶어도, 때로 지긋지긋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또 다시 십자가를 선택하고, 십자가 안에 담긴 구원의 신비를 묵상해야만 합니다.
다시 한번 십자가를 우리 삶의 이정표요 지침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사람만의 십자가를 주십니다.
나는 내가 지고가는 이 십자가가 너무 작은 것 같아 늘 부끄럽습니다.”
(복자 샤를르 드 푸코)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겸손과 양순함을 배웁니다.
또한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면 즉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줍니다.”(성 콘라도)
십자가>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3-17).”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그러니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하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라는 말씀은,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시는 말씀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일은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그 뱀은 용서와 구원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도 용서와 구원을 상징하고, 그 점에서 모세의 뱀과 비슷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이고, 목적이라는 설명입니다.
“왜 십자가인가? 다른 방식으로는 안 되는 것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어떤 일을 하실 때
딱 하나의 방식 밖에 없어서 그렇게 하셔야만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마르 12,1-12)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설명하셨습니다.
그 비유에서 주인이 보낸 종들을 소작인들이 죽인 일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보내신 예언자들을
사람들이 박해하고 죽인 일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처벌하시지 않고,
회개시켜서 구원하시려고 계속 예언자들을 보내셨는데,
사람들 쪽에서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비유에서 주인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낸 것도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마르 12,6).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도 살해합니다(마르 12,8).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의 첫 복음 선포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입니다.
만일에 이 선포대로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다면,
인류 구원이 바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복음을 배척한 인간들의 범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왜, 일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속마음과 계획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건을 ‘빠스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신비’는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범죄의 결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사도 2,22-24).”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만일에 십자가 사건이 ‘죽음’으로 끝나고 ‘부활’이 없었다면,
그 사건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을 말하지 않고 십자가만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과 하나인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것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 뒤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꼭 십자가이어야만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은 모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졌기 때문에,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1-25).”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음만 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십자가에서 부활과 생명과 사랑을 봅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인이기 때문에 겪는 고난과 시련은 모두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도 부활과 생명으로 이어져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