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名 / 정윤천
스무살 무렵에 나는 해남이라는 지명을 퍽이나 동경했었다
거기, 바다가 시작되는 어느 산기슭에 땅 끝이 있다고 전해져 왔다
어쩌면 내 스무 살은, 시작과 끝이 한 뒷골목에서 함께 건들거렸던
누구라도 주워서 그을 수도 있던 깨진 병 같은 시절이었다
마흔 살 무렵이 가까워 오자, 나는 혼자서 여수에 가고 싶었다
내리막 길이 끝나 가는 허름한 점방집 유리문 같은 것에 대고
곧장 여수를 향해 가는 길을 묻고 싶었다
쑥부쟁이 닮은 주인집 여자가, 왔던 길 쪽을 향해 손사래를 치켜들고
한참이나 도라 도라 도라, 도리질을 쳐주어도
어쩌면 그 길을 되짚어 가지 않을지 몰랐다
나는 그저 내 마음의 방식으로
그 지명들을
그것들이 간직하고 있었을 파란만장의 내재율을
가만히 어루만져 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출처]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0년 올해의 좋은 시 1000[360]
우리가 오랜 뒤에도
- 삼천포에서
삼천년 전에도 여기가
삼천포였는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리가 오랜 뒤의 일이 되어서 삼천년이나 사천년이 흘러 간 해송의 바닷가 근처.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 때도 지금처럼 너를 한 눈에 알아 보고 나면, 삼 쳔년 전에도 여기가 삼천포였더라고, 해당화 꽃물은 들던 저녁물의 한 때였더라고.
[출처]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0년 올해의 좋은 시 1000[391]우리가 오랜 뒤에도 - 정윤천
젖을 향하여 / 정윤천
빨갛게 드러난 젖들이 걸음을 옮길 적마다
산처럼, 바다처럼 출렁거린다
차라리 젖으로 길 걷고 있는 어미 개여......
열 두 목숨 건사하는 꼿꼿함이
느린 발자국마다 서려있다
열두 개쯤 되어 보이는
마음껏 불어난 탱탱한 젖통을
땅바닥에 가깝게 늘어뜨리고
집을 향해 돌아가는
늙은 개 한 마리를 본다
이때쯤이면 한낮의 햇빛들도
젖을 향하여, 제 빛을 모은다.
--실천문학 2004년 겨울호
요즘 한국시에서 '悲壯美'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는데...
정윤천 시인의 시 [젖을 향하여]를 읽고 나서 나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차라리 젖으로 길 걷고 있는 어미개..."---젖으로 걷고
있다고 노래하다니...내 생각에는 올해 한국시에서 생산해낸
시 중에서 가장 좋은 시의 하나로 꼽아도 좋을 듯 싶다.
특히 마지막연을 보자.
"이때쯤 한낮의 햇빛들도 / 젖을 향하여,제 빛을 모은다." 하는
시구는 결코 쉽게 얻어질 수 없는 '시적 開眼 혹은 발견'(프로스트의 말
---한편의 시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발견이다)이 아닐는지!
그렇다면...아니, 그 어미 개의 젖을 향하여 정윤천의
몸 전체가 달라붙은 듯한 착각을 어디 나만이 느낀
저 흉내낼 수 없는 '슬픔의 기쁨'이었단 말인가!?
-- 김준태
↳ 이 시는 시집 '[구석]/실천문학사'에 실릴 때에는 약간 수정되었습니다.
어디 숨었냐, 사십마넌 / 정윤천
시째냐? 악아, 어찌고 사냐. 염치가 참 미제 같다만, 급허게 한 백마넌만 부치야 쓰겄다. 요런 말 안 헐라고 혔넌디, 요새 이빨이 영판 지랄 가터서 치과럴 댕기넌디, 웬수노무 쩐이 애초에 생각보담 불어나부렀다. 너도 어롤 거신디, 에미가 헐 수 읎어서 전활 들었다야. 정히 심에 부치면 어쩔 수 없고......
선운사 어름 다정민박 집에 밤마실 나갔다가, 스카이라던가 공중파인가로 바둑돌 놓던 채널에 눈 주고 있다가, 울 어매 전화 받았다. 다음 날 주머니 털고, 지갑 털고, 꾀죄죄한 통장 털고, 털어서, 다급한 쩌언 육십마넌만 서둘러 부쳤다.
나도 울 어매 폼으로 전활 들었다.
엄니요? 근디 어째사끄라우. 해필 엊그저께 희재 요놈의 가시낭구헌티 멫 푼 올려불고 났더니만, 오늘사 말고 딱딱 글거봐도 육십마넌뻬끼 안 되야부요야. 메칠만 지둘리먼 한 오십마넌 더 맹글어서 부칠랑께 우선 급헌 대로 땜빵허고 보십시다 잉. 모처럼 큰맘 묵고 기별헌 거이 가튼디, 아싸리 못혀줘서 지도 잠 거시기허요야. 어찌겄소. 헐헐, 요새 사는 거이 다 그런단 말이요.
떠그럴, 사십마넌 땜에 그날밤 오래 잠 달아나버렸다.
-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돈 '백마넌'을 부탁한 어머니와, 어쩔 수 없이 달달 긁어모아 '육십마넌뻬끼' 부치지 못한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시의 시적 주인공은 아들이 선뜻 보내지 못하고 어머니가 원대로 받지 못한 원수 같은 '사십마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한테도 아들한테도 부족하고 아쉽고 안타깝고 서운한 금액이지요. 그 '사십마넌' 때문에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뜨뜻미지근한 온기를 나눠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사무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오래 묵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서러움도 있습니다. -
-안도현
[경향신문 /이주의 신작시/ 2007년06월24일]
은빛 비늘의 순간 / 정윤천
법성포가 가까워지자, 저만치서, 한 쌍의 물고기를 닮아 있던 흔들림이 游泳처럼 다가왔다. 멀리서 보일 때는 어쩜 조기 머리 같기도 하던 그림자가 자그맣게 글썽였는데, 지나칠 때 보니까 그게 아니다. 둘이서 손잡고 걸어왔는지, 소녀의 볼우물 언저리엔 엷은 분홍 물도 배어 있다.
법성포 바다의 어느 조기 한 쌍들도 저렇게 먼 바다 건너왔을까 생각하면,
綜高의 하굣길을 나서 흩어지던 법성포의 아이들도 한바탕의 조기 떼처럼 풀려 있다. 그때까지도 어깨를 나란히 겯던 한 쌍의 조기 닮은 발걸음이 마을 쪽으로 이내 멀어지고 나면,
이제 막, 비릿하고도 반짝이던 비늘의 시간과도 같은 한순간이 스치고 갔다.
-- 제주 법성포 아이들의 하굣길 풍경이 법성포 바다의 조기떼를 닮았다는 유비(類比)가 두드러진다.
철학자 푸코에 따르면 이같은 유사성은 사물들이 신의 계시적 권위에 의해 보증되는 기호(말)들과 서로 닮아있던 르네상스 시대의 에피스테메이다.
제주 바다에서 일하는(제주유람선) 시인의 눈은 우주의 질서를 믿었던 옛 사람들처럼 무구하다.
‘비릿하고도 반짝이던 비늘의 시간’에 대한 향수가 무럭무럭 생겨난다.
↳ 영광의 법성포 같은데요...^^;;;
[한겨레신문/ 시인의 마을/ 2007년 6월 26일]
우기(雨氣) 아래 / 정윤천
공친 김생(生)이 슬레이트 지붕 쪽창 밑으서, 닷새 남짓 걸친 빤쓰 골마리에 손두덩 한 짝을 순하게도 묻고, 쩌어기, 영광 원자력발전소 수챗구녁 어름 빈 바다같이, 새우는 읎고 새우 그림만 그려져 있는, 새우깡 봉다리 닮은 꾸겨진 낮잠에 빠졌다. 김생에겐, 밀린 것이 빨래뿐이 아니다. 봄 꽃잎이라면 늦피었겠고, 하절(夏節) 것이라면 서둘러 벙글었을, 흰 꽃잎 몇 잎도, 마당귀 어쩐지 불어터진 밥풀테기 모냥인데, 밀린 것들에게 좀 셨다가 가라믄서,
작년, 재작년 밀린 빗줄기만 허천나서.
콩잎은 바람결에 흔들렸던 거디었다 / 정윤천
산그늘도 푸른 산비알 콩밭 속에서 할마씨는 홀로 콩밭을 매었던 거디었다. 콩잎은 바람결에 흔들렸던 거디었다. 어쩐지 또 푸른 바람의 시간녘이었던 거디었다. 심심거리 삼았던 막술 몇 사발이 그만 갑작스런 오줌발로 밀려왔던지, 할마씨는 손을 놓고 콩두렁 한 두덩일랑 맞춤한 발판을 삼아 궁뎅이를 사알짝 까발렸던 거디었다.
오매, 어쩌다가 이런 숭헌 일이...... 할마씨는 자망하여, 순식간에 산그늘 저 청그늘 때깔마저가 어지럼이라도 앓는 듯이 노오랗게 된통 물들었던 거디었다.
세상천지에 이런 낮도깨비가 또 어디 있을랑가. 분명코 어느 낯선 손길 같은 것이, 부드러우면서도 간질거리던 그런 것이, 그 옛날 할바씨의 수작이라도 되는 양하는 것이, 할마씨의 벗은 궁뎅이를 사알짝 스리슬쩍 스치어주고 사라졌던 거디었다. 옹가슴 언저리도 콩당거리게 했던 거디었다.
생각사록 난감한 일이었으매, 할마씨는 하마 그 숭헌 것을 향하여 고개나마 한번 돌려보지 못하고 애써 참아내었던 거디었다. 시침 떼고 돌아앉아서 호미질만 새삼 채근하였던 거디었다.
콩잎은 바람결인 양 살랑거렸던 거디었다. 풋물도 불러가는 콩꼬투리사, 저것들도 옆구리마다 배겨오는 웃음기 싱긋생긋 머금어주었던 거디었다.
저녁의 시 / 정윤천
저녁이 온다고 마을이 저 혼자서 아름다워지랴
한낮의 겨운 수고와 비린 獸性들도 잠시 내려두고
욕망의 시침질로 깊게 기웠던 주머니 속의 지갑인들 찔러두고
서둘지 않아도 되는 걸음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때
돌아와 저마다의 창에 하나씩 등불을 내걸기도 하는 때
그러면 거기, 사람들의 마을에는
멀리서도 깜박이는 점점의 환한 물감 방울들이 번지기도 한다
그렇게는 식구들끼리의 정다움 속으로 비로소
방심과도 같은 마음의 등을 내려놓기도 하면
머리 위의 하늘에선 두고 온 地上에서의 계급장들 같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별들의 수런거림이 일렁이기도 하는 때
저녁이 오면
저녁이 오면
어디선가 집집의 처마들이거나 이마 위를 어루만지며
스스럼없는 바람의 숨결 같은 것이
느려진 시간의 긴한 뒷등을 스치며 지나가기도 한다.
생은 둥글다지
생은 둥글다지. 극지의 어딘가 쯤에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얼음의 집. 그곳에서도 간혹 유별난 혹한기가 있어, 그새 식량은 떨어지고 굶주림의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 마침내 어느 하루는 집 안의 제일 연장자가 집 밖으로 나선다지. 스스로 미끼가 되어 벌판의 주린 짐승들을 불러 모은다지. 사이, 피투성이로 변해버린 시신에게 달려들어 사나운 짐승의 이빨들이 피냄새를 풍기는 찰라.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아 남기 위한 사냥을 시작 한다지. 그때 그 얼음 집의 지붕 위로는 차가운 햇살의 무늬가 어린다지, 반짝이며 출렁이는 햇살의 궤적은 차라리 둥글다지. 생멸의 바큇살처럼이나 둥글고도 둥글다지. 어디론가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처럼 소리를 지르며 휘어 진다지.
말하려 할 때
1
말하려 할 때
나의 말을 전하려 할 때
나는 내 어린 마을의 동구 앞을 지키던 한 그루
느티나무 아래의 풍경을 떠올려 보아도 좋으리라
그 나무의 몸 속에서 크는 검은 동굴 같은 궁륭까지도
백 년이 다섯 번이 넘게 지나도록 한 자리에만 서 있었던
가혹한 직립의 존재 하나에 대하여 수긍해 보아도 좋으리라
백 년이 다섯 번이 넘게 흐르도록 맨살로 버틴 껍질의
보푸라기와 까실거림에 관하여 매만져 보아도 좋으리라
2
紅東白西의 큰 상 앞으로 모여 들어 절을 올리면
지나가던 바람의 숨결들도 알아서 고요해 지던
순간까지는 거슬러 보아도 좋으리라
나의 말이 비록 진실이라 하였을지라도
때로는 내가 전하려는 생각만으로 급급해져 버렸을 때에도
사람의 가장 어른들까지 차례로 걸어 나와
오래고 고된 한 실존 앞에 이르러 무릎들을 고이던
미신 보다 깊은 장면까지는 거슬러 보아도 좋으리라
말하려 할 때
너에게로 영원히 건네지려 할 때.
< 미 발표 신작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