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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정숙의 음악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꼬꼬
시벨리우스 - 교향시 '핀란디아' /
Finlandia, tone poem for orchestra, Op. 26
Opening of the new Helsinki music hall
작곡 : 1899
초연 : 1900-07-02
작곡 동기 : 민족주의 역사극 <역사적 정경>의 상연을 위한 음악으로 애국적 내용의 교향시를 작곡함.
악기 편성 : 2 flutes, 2 oboes, 2 clarinets, 2 bassoons, 4 horns, 3 trumpets, 3 trombones, tuba, timpani, triangle, cymbals, bass drum, strings
[작품 해설]
핀란드는 13세기경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던 대공국이었으나,1808년 러시아의 핀란드에의 침공을 스웨덴이 격퇴하지 못했기 때문에, 1809년 이후로는 러시아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영토화 되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스웨덴 시대로부터 이어왔던 대공국으로서의 대우를 유지했으나,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1세(재위 1825~55년)의 시대 이후, 핀란드의 자치권이 침해당해 오다가,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핀란드의 자유는 박탈당하여, 러시아의 속령화 정책이 강제로 추진되었다.
그 때문에 핀란드에서는 애국 독립 운동이 격렬하게 고조되었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행사가 벌어졌는데, 그 중의 하나로는 문화적 행사를 가짐으로써 국민의 애국열을 높이고, 나아가 독립 운동의 자금을 모금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그 한 가지로 민족적 역사극 '옛부터의 정경'이 상연되게 되었다. 1899년의 일이었다. 시벨리우스는 음악가로서 이 연극의 상연에 참가했다. 이 희곡을 위하여 쓴 음악은 각 장면을 위한 전주곡과 대사의 배경 반주음악, 그리고 힘찬 피날레였다. 이 극음악에서 후에 '역사적 정경, 제 1'(직품 25)와 교향시 '핀란디아'가 만들어졌다.
이 작품 속에 담겨진 열렬한 애국심을 오늘 날에는 누구든지 금방 감지할 수가 있지만, 처음 발표 당시에는 청중도 비평가들도, 이 곡의 의미를 잘 몰랐었던 것 같다고, 시벨리우스 연구가 칼 에크만(Karl Ekman)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곧 청중은 이 작품 속의 뜨거운 애국심을 알아들었다. 이것을 눈치 챈 러시아 관헌은, 핀란드 국내에서 이 곡의 연주를 불온하다 하여 금지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눈이 미치지 않는 나라에서는 , 다른 타이틀로 바꾸 어서 러시아의 눈을 피해 연주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교향시의 중간부의 선율에는 후에 베이코 코스켄니에미(Veikko Koskenniemi)가 시를 써넣어 '핀란디아 찬가'라는 합창곡으로 만들었다. 이 곡은 오늘날 핀란드의 준 애국가처럼 애창되고 있다.
곡은 안단테 소스테누토의 서주로 시작된다. 우선 금관 악기가 연주하는 육중한 '고난의 동기'로 개시된다. 이 비극적인 동기를 받아서 목관과 현에 민중의 비탄을 상징하는 듯한 선율이 연주되지만, 그 후반은 점점 격렬하게 고조 되어, 이윽고 단호한 곡조로 전환, 알레그로 모데라토의 서주의 후반으로 들어간다. 투쟁하라고 외치는 동기가 팀파니와 나팔 등으로 날카롭게 울리고, 곡 첫머리의 '고난의 동기'가 이어지는데, 현악기에서는 약동적인 음형이 용솟음치듯 나와서, 이윽고 '투쟁에의 절규 제2의 동기'가 저음에서 힘차게 연주되자, 이를 계기로 곡은 폭발적으로 고조된 힘찬 주부로 들어간다.
여기서는 두개의 '추쟁에의 절규'의 모티브가 서로 짜 맞추어져서 곡의 흥취를 돋구는데, 또 하나의 짧고 새로운 동기, 탄짼베르에 의하면'축제에의 동기'도 곁들여져서, 압정에 대한 투쟁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이 격렬한 투쟁이 클라이막스를 구축하는데, 주부의 여기 까지는 교대로 되풀이 된다.
그후 크레셴도로 썰물이 빠지듯이 멀어지면, 이어서 최초의 목관 악기에 이어서 현에 의한 찬가풍의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이 주제는 민요풍의 정취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여서, 민요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생각된 일도 있었으나 영국의 시벨리우스 연구가 로자 뉴마치(Rosa Newmarch,1857∼ 1940)가 작곡자에게 물었을 때 작곡자는 부정했다고 한다.
개설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가사를 붙여서 '핀란디아 찬가'라 하여 노래로 불려지는 것은, 극음악으로서 이 작품이 발표된 후에, 시인 코스켄니에미가 이 부분에 가사를 끼워 넣은 것이므로, 원래 이 선율은 민요는 아니라고 하는 쪽이 맞다.
이 평화로운 찬가가 두 번 연주된 뒤, 재차 두 개의 '투쟁에의 모티브'와 '축제의 모티브' 가 곡의 고조를 부추겨, 종말의 클라이막스 속에, 후에 '핀란디아 찬가'로 된 선율의 일부를, 금관 악기가 고음으로 연주하여 힘찬 피날레가 시작된다
Jean Sibelius
출생 : 1865-12-08 Hämeenlinna, Finland
사망 : 1957-09-20 Järvenpää, Finland
핀란드의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가 34세 때 작곡한 교향시이다. 시벨리우스의 모든 작품 중에서 [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2번], [5번], [슬픈 왈츠], [카렐리아 모음곡] 과 더불어 가장 인기가 높은 작품 중 하나이다. 시벨리우스가 이 작품을 작곡하던 1899년 당시 핀란드는 니콜라이 2세가 다스리는 제정 러시아의 압제에 시달리는 속국이었다. 자치권과 언어의 자유를 억압당한 핀란드 민중들은 곳곳에서 러시아에 저항하는 독립 운동을 일으켰다. 러시아 이전에 핀란드는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었고, 시벨리우스는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국어인 핀(Fin)어는 나중에 배웠다. 그는 유학을 하면서 핀란드인으로서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점차 깨달아 갔고, 이런 고민을 자신의 음악에 반영했다.
1891년 베를린과 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시벨리우스는 핀란드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가 됐고, 1892년에는 핀란드의 국민적 서사시 [칼레발라]에 바탕을 둔 [쿨레르보 교향곡]을 작곡, 발표해 성공을 거뒀다. 이때부터 핀란드 지휘자 로베르트 카야누스와 교류하게 된 시벨리우스는 1892년 카야누스의 위촉으로 교향시 [전설(En Saga)]를 작곡했다. 1893년에는 핀란드 전통을 간직한 카렐리아 지방의 의뢰로 극 부수 음악인 [카렐리아]를 작곡하고 서곡과 모음곡도 편곡했다. 이때 시벨리우스는 ‘칼레발라‘로 오페라를 작곡하려 했으나, 계획을 바꿔 ‘투오넬라의 백조’를 포함한 [4개의 전설]을 작곡했다.
'핀란드여 일어나라'
시벨리우스가 [교향곡 1번]을 작곡한 해이기도 한 1899년 2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핀란드 공국의 자치권을 제한하는 ‘2월 선언’을 발표한다. 이는 핀란드 문화예술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시벨리우스도 음악으로 항의 의사를 표시하고 싶었다. 이 해 11월에 언론 연금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사가 기획됐다. 표면적으로는 핀란드 언론인들의 연금 기금 모금을 위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압제에 저항할 자유 언론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는 행사였다.
여기에는 핀란드의 역사를 다룬 역사극의 공연이 포함돼 있었다. 7곡으로 구성된 애국극인 [역사적 정경]은 핀란드의 역사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작품이었다. 특히 이중 ‘거대한 증오(Great Hate)’는 러시아 정복자들이 저지른 파괴와 조국 핀란드가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눈보라 속에서 전쟁, 추위, 기아,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다. 여기에 이어지는 마지막 곡이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핀란드여 일어나라(Suomi herää)’였다. ‘수오미’는 핀란드의 별칭으로 호수와 늪의 나라라는 의미가 있다. 스웨덴에 이어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독립된 국가를 갖지 못한 핀란드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 ‘핀란드여 일어나라’가 현재 ‘핀란디아’의 초기 버전이었다.
이후 카야누스는 헬싱키 필하모닉을 지휘해 시벨리우스의 표제음악 중 좋은 곡들을 골라 핀란드에서 연주했다. 특히 이 모음곡의 피날레 부분을 유럽 순회공연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이 때부터 이 곡은 유럽 전역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시벨리우스는 1900년에 이 곡을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했고 [핀란디아]라는 이름은 이 피날레의 피아노 편곡에 악셀 카펠랑이 붙이면서 유명해졌다.
이 해에 시벨리우스는 이 해에 작품을 손봐서 ‘핀란디아’란 명칭으로 정식 개정판을 냈고, 1900년 7월 카야누스가 지휘한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파리에서 초연됐다. 시벨리우스는 헬싱키 필하모닉과 파리 대박람회에 참가해 직접 [핀란디아]를 지휘했다. 초연은 세계 각국의 관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당연히 이 작품의 연주를 금했다. 이러한 검열 때문에 작품은 한동안 ‘핀란디아’라는 이름 대신 ‘즉흥곡’ 등 다른 이름으로 속여서 공연되기도 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핀란드가 독립되고 나서야 떳떳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
핀란드 민중들의 정신, 애국심의 고취
핀란드의 자연을 연상시키고 핀란드 민중들의 투쟁 정신을 고취하는 휘몰아치는 북유럽의 바람같은 음악이다. 끝부분으로 가면서 고요한 가운데 장엄하게 핀란디아의 찬가가 들려온다. 이 부분은 민요가 아니라 시벨리우스 자신이 작곡한 곡이지만 핀란드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시벨리우스는 [핀란디아 찬가]를 독자적인 작품으로 손질했다. 이 찬가는 1941년 시인 베이코 안테로 코스켄니에미가 가사를 붙인 것을 시벨리우스가 합창용으로 편곡했다. 당시 스탈린 치하 소련의 침략 위협 하에 있던 핀란드 사람들을 분발시킨 곡으로, 핀란드 제2의 국가라고 할 정도로 널리 불려진 노래다. 나중에 핀란드 출신의 영화감독 레니 할렌의 액션영화 [다이하드 2]에 사용되기도 했다.
[핀란디아]는 서주로 시작된다. 첫 서주인 안단테 소스테누토에서 금관악기는 음울하게 울부짖으며 북유럽의 빙하를 연상시킨다. 목관은 종교적인 분위기로 답하며 현은 인간적인 선율을 연주한다. 두 번째 서주에서 템포는 알레그로 모데라토로 바뀌며 팀파니의 트레몰로를 타고 금관 팡파르가 곡의 핵심적인 리듬을 예고하며 긴박감을 높여주고 심벌즈의 타격은 투쟁 정신을 고조시킨다. 템포는 다시 알레그로로 변하며 장조로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승리의 자신감을 나타낸다. 힘찬 2개의 주제가 애국심을 고취시키며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점차 발전하면서 금관악기와 팀파니의 연주로 모든 악기가 동원되어 이를 강조한다. 현악기와 목관악기가 여러 갈래로 진행하다가 슬픈 민요풍의 표정이 풍부한 노래가 나온다. 음악은 분위기가 고조되고 특징적인 리듬이 첨가되며 발전하다가 승리를 선언하듯 힘찬 기상으로 끝을 맺는다.
추천음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생전의 작곡가가 인정한 시벨리우스 작품 해석의 권위자였다. 카라얀은 이 곡을 정규 녹음으로만 다섯 차례나 녹음했고 모두 가치가 높다. 그 중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EMI, 1952)는 관현악의 결이 거칠지만 상대적으로 시대의 생생하고 깊은 맛이 있고, 베를린 필(DG, 1964)은 섬세하고 정치하며, 베를린 필(EMI, 1976)은 금관의 박력이 좋다. 디지털 초창기 녹음인 1984년 DG 녹음도 지나치기 아까울 만큼 빼어나다. 민족적인 해석으로는 얼마 전 타계한 핀란드 출신 지휘자 파보 베르글룬트와 본머스 심포니의 녹음(EMI, 1972)을 꼽겠다. 빙하의 저류를 그리는 듯한 무겁고 힘찬 표현이 일품이다. 한스 로스바우트와 베를린 필(DG, 1954)의 연주는 이와는 반대로 작품의 극적인 내러티브를 거세하고 날카롭게 스코어의 구조를 포착한 차갑고 순음악적인 해석이다. 이와 대조적인 스타일이라면 바비롤리와 할레 오케스트라(EMI, 1966)를 꼽을 수 있다. 풍성한 정열이 북유럽의 넓은 화폭 위에 펼쳐지는 깊고 따스한 연주다.
핀란드 작곡가. 헤멘린나 출생. 어려서부터 바이올린과 작곡에 재능을 보였고, 독학으로 몇 곡의 실내악곡을 썼다. 1885년 헬싱키대학 법과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헬싱키음악원에서 작곡과 바이올린공부에 전념하였다. 89년 베를린, 이어서 빈에 유학하여 A. 베커·K. 골트마르크·R. 푸크스의 지도를 받았다. 귀국해서 92년부터 헬싱키음악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핀란드의 민족적 대서사시 《칼레발라》를 기초로 하여, 독창·남성합창·관현악을 위한 《쿨레르보교향곡(1892)》을 발표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이어 몇 곡의 관현악곡을 썼는데, 그 중에는 교향시 《전설(En Saga, 1892)》, <투오넬라의 백조>가 포함되어 있는 《레민카이넨 조곡(1893∼95)》 등이 있다. 97년부터는 국가에서 종신연금을 받게 되었고, 《교향곡 제 1 번(1899)》, 교향시 《핀란디아(1899)》 《교향곡 제 2 번(1901)》 《바이올린협주곡 D단조(1903)》 등을 발표하여 지도적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1904년 이후에는 헬싱키 교외 예르벤페에 있는 별장에서 작곡활동에 힘써 《포효라의 딸(1906)》 《교향곡 제3번(1907)》, 현악 4 중주곡 《친근한 목소리(1909)》 《교향곡 제 4 중주곡(1911)》, 교향시 《음유시인(1913)》 등의 걸작이 차례로 탄생하였다.
그동안 베를린·런던·미국 등을 방문하여 자작곡연주회를 열어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높아졌다. 15년 12월 탄생 50주년 기념행사에서 《교향곡 제 5 번》이 초연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피아노곡 《10개의 바가텔(1912)》 《5개 꽃의 스케치(1916)》, 바이올린과 피아노곡인 《소나티네(1915)》 《5개의 소품(1915)》이 있는데, 비교적 소규모인 것이 많다. 제 1 차세계대전 후에 《교향곡 제 6 번(1923)》 《교향곡 제 7 번(1924)》, 극음악 《템페스트(1926)》, 최후의 걸작이라고 하는 교향시 《타피올라(1925)》를 썼으나, 29년 이후 갑자기 창작활동을 멈추고 30년 동안 공백기간을 가지다가 57년 예르벤페에서 죽었다.
그는 처음에 독일 낭만파와 러시아 국민악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거기서 탈피하여 핀란드의 신화·역사·자연, 특히 민족적 서사시 《칼레발라》를 정신적인 기조로 하여 고전적인 간결성을 나타내는 독자적인 내용과 형식을 확립하였다. 그 중에서도 《핀란디아》 등 교향곡들은 유기적인 악곡구조와 효율적인 악기편성으로 풍부한 효과를 이끌어내는 관현악법과 함께 높이 평가되며 국민적 작곡가로 사랑받는 바탕이 되었다.
장 시벨리우스(Jean Sibelius,1865년 12월 8일 ~ 1957년 9월 20일)는 스웨덴계 핀란드 작곡가이다. 음악 활동을 위해 본명인 요한(Johan) 대신 프랑스식 예명 장(Jean)을 사용했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은 요한 루드비그 루네베리의 시처럼 핀란드의 국민성을 대표한다고 여겨진다. 핀란드의 국민적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그는 핀란드 최대의 작곡가일 뿐 아니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세계적인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은 현대 음악풍은 아니지만, 애조를 담은 북유럽의 음악다운 특색을 가지고 있다.
요한 율리우스 크리스티안 시벨리우스(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는 1865년 당시 러시아령 핀란드 공국에 위치한 해멘린나의 스웨덴계 핀란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족들은 그를 스웨덴어·핀란드어 애칭인 ‘잔(Janne)’으로 불렀지만, 시벨리우스 본인은 프랑스어 이름 ‘장(Jean)’을 썼다. 그의 가족은 그를 핀란드어 학교에 보냈고, 거기에서 그는 펜노만(Fennoman) 운동을 접했다. 그의 음악관과 정치 성향은 국민악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핀란디아, Valse Triste, 바이올린 협주곡, 카렐리아 모음곡, 투오넬라의 백조(렘민캐이넨 모음곡의 한 악장) 등이 있다. 그 밖에도 그는 칼레발라에 영감을 얻은 작품과 일곱 개의 교향곡, 100개가 넘는 가곡, 13개의 연극을 위한 반주 음악, 하나의 오페라 (Jungfrun i tornet - 미완성작품), 현악 사중주를 포함한 실내악 작품, 피아노 소품, 21개의 합창곡집, 프리메이슨 예배음악 등을 썼다.
시벨리우스의 작품 스타일
시벨리우스는 19세기 말 작곡계의 조류를 일부 받아들였지만 음악의 심층적인 구조를 단순화시키려고 했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안토닌 드보르작처럼 관용적인 멜로디와 점차적인 발전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페루치오 부조니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영향을 받았고, 1891년의 쿨레르보(Kullervo)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그 영향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소나타 형식을 거부하고 음악적 단편을 발전시키면서 끝에 장엄한 피날레로 이어지는 구성을 그의 작품에 쓰기 시작했다.
시벨리우스는 조성적인 중심이 있는 음악을 썼다. 그는 길게 이어지는 음 하나(‘페달음’이라 한다.)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화성을 선호했다. 그는 “페달 없는 음악은 종종 길을 잃는다”고 했다. 이런 점 때문에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구스타프 말러와 같은 당대 작곡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후에 그는 Olin Downes의 찬사를 받았지만 Virgil Thomson에게는 비판을 받았다.
1925년 이후로 그는 작은 작품들만을 썼고, 여덟 번째 교향곡을 썼지만 폐기했다고 했다. 대편성으로 된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는 교향곡 6번과 7번,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위한 반주 음악, 그리고 교향시 《타피올라》등이 있다. 일차 세계대전이 지나고, 후두암 수술을 받은 뒤 30년의 여생 동안 시벨리우스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피했고 작곡에서도 거의 손을 뗐다.
그는 당대에 서양 고전음악 작곡가로서는 유행에 뒤처진 음악을 썼다. 그의 교향곡은 아직까지도 연주·녹음되고 있으며, 아주 유명한 20세기의 교향곡 작곡가 중 하나로 남았다. 하지만 생전에 그는 더 수입이 많은 실내악과 연극을 위한 음악을 더 많이 썼다. 그의 작품을 옹호하는 사람으로는 사이먼 래틀, 로린 마젤, 데이비드 앨런 밀러 등이 있다.
1958년 맨체스터 가디언 지는 다른 작곡가들이 칵테일을 제조하는 동안 시벨리우스는 차갑고 맑은 물을 제공했다는 평으로 그의 말년 작품을 회고했다.
주요 작품
교향곡 《교향곡 마 단조》(0번) <쿨레르보> (Kullervo), 작품번호 7. (1892) 소프라노, 바리톤,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
《교향곡 1번 마 단조》, 작품번호 39 (1899/1900)
《교향곡 2번 라 장조》, 작품번호 43 (1902)
《교향곡 3번 다 장조》, 작품번호 52 (1907)
《교향곡 4번 가 단조》, 작품번호 64 (1911)
《교향곡 5번 내림 마 장조》, 작품번호 82 (1915, 1916·1919 개작)
《교향곡 6번 라 단조》, 작품번호 104 (1923)
《교향곡 7번 다 장조》, 작품번호 105 (1924)
《교향곡 8번》 (1929, 완성했지만 시벨리우스 자신이 폐기했다고 1929년 Olin Downes에게 보내는 편지에 언급했다.)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라 단조》, 작품번호 47. (1903/1905)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두 개의 세레나데, 작품번호 69. (1912)
음시 《Skogsrået》(나무 요정), 작품번호 14. (1894)
《포흐욜라의 딸》(Pohjolan tytär), 작품번호 49. (1906)
《Öinen ratsastus & auringon nousu》, 작품번호 55. (1909)
오케스트라와 하프를 위한 《시인》(Barden), 작품번호 64. (1913/1914)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Luonnotar》, 작품번호 70. (1913)
《오케아니스》(Aallottaret), 작품번호 73. (1914)
《타피올라》(Tapiola), 작품번호 112. (1926)
반주 음악 《Kung Kristian》, 작품번호 27. (1898)
《Pelléas et Mélisande》와 모음곡, 작품번호 46. (1905)
《Svanevit》 모음곡, 작품번호 54. (1908)
성악, 합창, 관현악을 위한 《템페스트》(Stormen), 작품번호 109. (1925)
나머지 《카렐리아 서곡》(Karelia-alkusoitto), 작품번호 10. (1893)
《카렐리아 모음곡》(Karelia-sarja), 작품번호 11. (1893)
《렘민캐이넨 모음곡》(Lemminkäin-sarja), 작품번호 22. 칼레발라의 전설 네 개에 의함. (1893)
《Vårsång》, 작품번호 16. (1894)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Laulu Lemminkäiselle》, 작품번호 31/1. (1896)
《Sandels》, 작품번호 28.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즉흥곡. (1898)
교향시 《핀란디아》(Finlandia), 작품번호 26. (1899)
낭송, 합창, 관현악을 위한 《Snöfrid》, 작품번호 29. (1899)
낭송, 합창, 관현악을 위한 《울레아 강의 해빙》(Islossningen i Uleå älv), 작품번호 30. (1899)
여성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Livlust/ Gossar och flickor〉, 작품번호 19. (1902)
바리톤, 남성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Tulen synty》, 작품번호 32. (1902/1910)
《Cassazione》, 작품번호 6. (1904/1905)
《Kuolema》(〈Valse Triste〉와 〈Scene med Tranor〉), 작품번호 44. (1904/1906)
《Dance Intermezzo》, 작품번호 45/2. (1904/1907)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Vapautettu kuningatar》, 작품번호 48. (1906)
《벨사자르의 향연》(Belsazar's gästabud), 작품번호 51. 모음곡. (1906)
《판과 에코》(Pan ja Kaiku), 작품번호 53. (1906)
《Dryadi》, 작품번호 45/1 (1910)
《죽음(Kuolema)을 위한 두 개의 소품》, 작품번호 62. (1911)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우리의 조국》(Oma Maa), 작품번호 92. (1918)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지구의 노래》(Jordens sång), 작품번호 93. (1919)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배이뇌의 노래》Väinön virsi, 작품번호 110. (1926)
현을 위한 안단테 페스티보. 유작. (1925/1930)
나머지
남성 합창과 현을 위한 《라카스타바》(Rakastava - "연인"), 작품번호 14. (1893. 1911 현과 타악을 위한 곡으로 편곡)
《비시 요울룰라울루아》(Viisi joululaulua), 작품번호 1. 다섯 곡의 크리스마스 캐럴. (1895-1913)
《Porilaisten marssi》 (1900)
《Voces intimae》, 현악 사중주 (1909)
《재게르 행진곡》(Jääkärimarssi) (1915)
독주곡
6개의 즉흥곡, Op. 5 (1893)
피아노 소나타 F장조, Op. 12 (1893)
10개의 피아노곡, Op. 24
3개의 소나티나, Op. 67 (1912) No. 1 in F-Sharp단조
No. 2 in E장조
No. 3 in B-Flat단조
5개의 피아노곡 ("The Trees"), Op. 75
스파뉴올로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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