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일을 열 시간 정도 하는 날이 있습니다. 여름엔 휴가 간 우체부들이 많을 경우엔 때로 열 두 시간 일을 하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은 지칩니다. 그냥 내 라우트만 하고 빨리 집에 가는 게 좋은겁니다. 아무리 오버타임 좋고 돈 더 번다고 해도, 몸, 특히 발이 견뎌주지 못할 때는 집에 오자마자 뻗고 잠이 들기 일쑤입니다. 어제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습니다. 동료 우체부 하나가 몸이 안 좋다며 출근하자마자 케이싱만 끝내 놓고선 집에 가 버리는 바람에 안해도 될 일을 떠맡게 됐습니다. 두 시간 정도 분량의 우편물을 더 돌려야 하는데, 아침에 좀 추워서 두꺼운 바지를 입고 왔더니 몸 전체가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오후 날씨는 마치 초여름을 연상케 했습니다.
이런 날, 집에 가면 시원한 샤워를 하고 뭔가를 먹어야 하는데, 먹고 자시고도 없었습니다. 샤워 하자마자 그냥 뻗어서 잠이 들었습니다. 오후 여섯 시에 퇴근해서 집에 오니 여섯시 반. 샤워 끝나고 나서 한 시간 정도 잠이 든 것 같은데, 발이 무지 아팠습니다. 아내가 일 끝나고 돌아와 저를 깨웠습니다.
"삼겹살 먹을래요?" 아, 삼겹살. 영원한 한국인의 로망. 부스스 눈을 뜬 저는 그러겠노라고 했습니다. 몸을 일으켜 대략 준비를 합니다. 뒷마당에 나가 민들레 잎을 뜯고, 아내는 상추를 씻어 놓습니다. 아직 민트들이 피어나지 않아 민트 잎사귀들은 수확할 게 별로 없군요. 셋업을 대략 해 놓고 고기를 굽기 시작합니다. 시원한 저녁 바람에 몸이 으스스 떨려오다가 정신이 확 깹니다. 바람막이를 해 놓습니다. 뒷마당을 감싸고 들어오는 바람은 차지만, 그래도 여름의 내음이 섞여 들어옵니다.
"지난주 일 많이 해서 힘들었지요? 수고했어요." 아내의 말 한마디가 달고 고맙습니다.
참이슬 소주 두 병이 냉장고에서 고이 자고 있길래 꺼낼까 하다가 마음 바꾸어 프랑스 산 소비뇽 블랑 한 병을 꺼냈습니다. 몸이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평소에 삼겹살 먹을 때면 키얀티, 하다못해 워싱턴주산 산지오베세라도 놓고 먹고, 아니면 워싱턴주산 멀로를 꺼내어 즐기다가, 이번엔 소비뇽 블랑을 꺼내 봤습니다. 뱅드뻬이급의 르와르 소비뇽 블랑입니다. Patient Cottat 라는 이름의 와인 중개상(네고시앙)을 위해 누군가가 만든 와인이겠지요. 일종의 OEM 뱅드뻬이... 그러나 뜻밖의 괜찮은 와인을 만났다 싶습니다. 정말 단 맛이라고는 전혀 안 느껴지는 엄청난 본 드라이의 소비뇽 블랑. 향은 자신이 르와르 지역 와인임을 당당히 말하고 있습니다. 살구, 복숭아, 그리고 약간의 매실, 그리고 소비뇽 블랑이 갖추어야 할 미네럴한 캐릭터까지도 분명합니다. 상세레처럼 화려함이 살짝 깔려있지는 않지만, 깽시처럼 부드러움이 살짝 앞서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소비뇽 블랑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점, 오크통에서 절여져(?) 아예 이름도 '푸메 블랑'이 되어 버린 캘리포니아 소비뇽 블랑보다는 분명히 장점입니다. 아, 이 와인이라면 염소 치즈... 염소 치즈... 를 외치던 중에 아내는 고기의 상태를 보러 뒷뜰로 나옵니다. "뭐해요? 안먹고?" 그러던 아내도 와인잔을 듭니다. "어머... 향 너무 좋네." 그러나 와인은 그녀에게 매우 드라이할텐데... "이런 향이라면, 이만큼 드라이해도 좋다." 아, 술꾼의 아내는 역시 내공이 만만치 않습니다.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왔다갔다 하면서 흑돼지 삼겹살 한 팩이 모두 사라집니다. 뭐, 그만큼 먹고 그만큼 클 나이들이니... 삼겹살 두 팩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팩에 담긴 양이 보통 3파운드 이상이니, 한번 먹을 때 이 네 식구가 삼겹살 1킬로그램씩은 잡아먹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아내도 저도 아이들보다는 덜 먹을 나이가 된 모양입니다. 특히 지호가 한번 출몰하면 아예 판갈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이놈의 키가 이제 거의 저만하고, 계속 클 나이인 5학년이니... 물론 지원이도 만만치 않은 상대입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실감합니다. 일 속에서, 그리고 다른 일상 속에서 모르고 지나가던 시간은 자신의 존재를 아이들의 성장을 통해 일깨워줍니다. 거울을 보며 저는 머리가 점점 빠져가는 것을 느끼긴 하지만, 그것을 내가 나이먹는 신호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은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굵직한 지호의 목소리가 영 징그럽긴 해도 든든함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그래, 맛있게 먹어라, 그리고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이젠 정말 애기 티를 벗은 지호가 두 접시째를 완전히 비워버릴 때도, 아빠는 그냥 굽는 것이 기분 좋을 뿐입니다. 그리고 가끔씩 기울이는 와인잔에 담긴 뒷마당의 포도가 크는 모습을 보면서, 여유로운 저녁은 금방 어둠을 몰고 옵니다. 그리고 내 잔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시 초여름이 담기기 시작합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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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eattle Story 원문보기 글쓴이: 권종상
첫댓글 하루 일을 열심히 마치고 가족 간에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이 최고의 행복 중 하나겠지요.
상추와 민들레 이파리가 참 먹음직스럽게 보입니다. ^^
예, 일을 심하게 한 날일수록... 저녁이 더 맛있죠.
민들레가 깨끗한게 부드러워보이는게 무척 땡기네요....
여기도 요즈음 당뇨인가 혈압에 좋다고 오일장에서도 많이 팔던데...조만간 맛을 보아야 겟네요....
저녁놀에 와인향이랑 삼겹살내음이 퍼지는 집마당뜰....좋은 궁합입니다...
아, 따로 팔기도 하는군요. 민들레 맛은 쌉싸름합니다. 그래도 나물로 무쳐먹거나, 김치를 담가먹어도 맛있구요, 어떤 분은 이걸 살짝 데쳐서 참기름과 고추장에 조물조물 해서 드신다고도 하고...
요즘 민들레 이야기를 많이 하던데...
전 아직 못 먹어봤습니다만... -.-
한국인의 영원한 로망...
하...한국에서 이거 길들여져서 고국에 돌아간 이방인들도 그리워 하더군요..기름끼가 좀 부담스럽다면 안심과 적절히 섞어서 구워 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하... 그렇군요. 하긴, 우리나라 음식은 뭐든지 길들여지면 무섭죠.
멋진 나날을 보람차게 보내시는 것이 보기에 좋습니다. 단, 돼지 기름은 관상 동맥을 막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coronary valley 사람들 심장 동맥을 막은 기름의 DNA 가 바로 이 PORK BELLY 기름과 같답니다. 소위 삼겹살이란 것을 너무 좋은 면만 부각된 것 같습디다만, 다른 면도 알고 있으면 합니다. 너무 자주 드시면, CORONARY VALLEY 사람들 같이 50대에 일찍 가는수 있습니다.
어? 소고기 이야기 아니었나요? 돼지 기름은 포화지방산이 아니라 불포화지방산이라서 쇠고기 기름보다는 낫다고 들었어요. 물론 고기란 것이 무슨 고기가 됐든간에 야채 많이 먹는 것보다 좋지는 않겠지만요. 그래도 술 마실 때는 괴기가 함께 있어야.... ^^;
저도 그렇게 알았었는 데요, 요즘 남부에 많아 다니다 보니, 그 티비에서 Autopsy 하면서 보여 줍디다. 삼겹살 먹는 양으로 치자면 미국이 한국보다 훨씬 더 먹을 테니까, 그렇겠지요. 지구상에 futures market, 에 port belly 들어 가는 나라가 미국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