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군이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현재 진천에서 배티를 거쳐 안성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말끔하게 포장돼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인적이나 차량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해 전국 방방곡곡 거미줄처럼 도로가 뻗어 있는 오늘날에도 그 고적함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서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처럼 각 지역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위치하고 있는 배티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배티 인근에는 명승지와 성지들이 많이 있어 시간과 여건이 허락된다면 함께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안성에서 미리내 성지를 거쳐 용인 민속촌과 자연 농원 또는 죽산 칠장사를 거쳐 양지에 있는 골배마실과 은이 공소 터를 갈 수 있다. 또 남쪽으로는 유관순 기념관과 독립 기념관 그리고 온양 온천이나 현충사를 가는 것도 가능하다.
배티를 가기 위해서는 우선 진천으로 가서 백곡을 거쳐 들어간다. 진천에서 백곡행 버스나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백곡에서 배티까지는 약 4킬로미터 정도이므로 도보로 순례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하다.
진천에서 18킬로미터 정도 지점에 '삼박골 비밀 통로'라는 푯말이 나오는데 그 중간에 백곡 공소가 길 왼쪽에 서 있다. 여기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남원 윤씨와 밀양박씨의 묘가 있는데 이들은 친시누이올케 간으로 그 후손이 현재 평택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순례객은 여기서부터 순교선조들의 향기를 조금씩 느낄 수 있다.
'삼박골 비밀 통로'라는 푯말을 지나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면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여기서 배티까지는 약2킬로미터 정도로걸어서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 길은 박해 시대에 배티로 넘어가던 비밀 통로 였는데 무성한 수풀 사이로 난 좁다란 길은 믿음 하나로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던 당시 선조들의 가쁜 숨결을 느끼게 한다. 삼박골은 베르뇌 장 주교와 페롱 권 신부가 박해를 피해 은신했던 교우촌으로 현재 공소는 없어지고 순교자 이 진사의 부인과 딸이 묘소만이 남아 있다.
푯말이 서 있는 곳에서 안성 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드디어 배티 사적지가 나온다. 성지로 오르는 산길 맨 앞에서 '순교 현양'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먼저 순례객을 맞는다.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꺾지 않았던 선조들의 굳은 정신이 단단한 비석을 통해 느껴진다.
왼쪽으로 사제관을 두고 시작되는 오솔길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14처가 세워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처가 모두 하나씩의 커다란 맷돌에 새겨져 있어 당시 박해의 육중한 무게를 보여주는 듯하다.
14처가 끝나는 곳에는 자연석 그대로의 제대와 함께 나무 밑둥을 그대로 잘라 만든 야외 성당이 있고 산 기슭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제대 위의 촛대 역시 14처와 마찬가지로 맷돌로 만들어져 있고 제대 앞과 주위에는 나무 등걸로 이루어진 좌석들이 늘어서 있다.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공소 터와 무명 순교자의 묘를 가기 위해서는 성모상을 지나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등산로를 넘어야 한다. 이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오솔길을 다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약 400미터 정도를 올라가면 길가에 초소가 있고 오른쪽으로 집이 몇 채 보이는데 그 뒤가 바로 최양업 신부가 여름 장마철이면 머물던 곳이다.
1년에 5,000리에서 7,000리까지 걸어다니며 심할 때에는 한 달에 겨우 나흘밖에 못잤다는 최신부는 전국을 앞마당처럼 다니다가도 장마철에는 여기에 머물며 "천주가사"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 공과"를 번역했다. 그러나 그가 기거하던 바로 그 공소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오직 그 자리를 알려 주는 녹슨 푯말만이 옆으로 기울어진 채 남아 있어 후손들을 부끄럽게 한다.
여기서 고갯길을 따라 900미터 정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무명의 숨은 꽃'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 이곳은 배티에 숨어 신앙 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는 모두 14기의 순교자 묘가 안장되어 있다.
배티는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50여 명의 순교자를 냈는데 그 가운데 29명은 교회 역사에 기록돼 있고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이름 없는 묘소들로 산재해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배티 - 숨은 꽃들의 보금자리
고 윤의병(바오로) 신부의 [은화](隱花). 말 그대로 박해 시대에 피어난 숨은 꽃들의 신앙과 고난을 그린 군난 소설이다. 지금까지 이 작품만큼이나 오랫동안 신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그만큼 신자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는 소설은 없었다. 아울러 저자 신부가 6.25 전쟁으로 행방 불명됨으로써 미완성 작품으로 끝나게 된 점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 된 곳이 골배나무가 많았다던 배티[梨峙](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와 그 일대의 교우촌들이다. 윤의병 신부가 태어난 곳은 배티 입구의 용진골(용덕리)이었고, 순교자들을 배출한 절골(용덕리), 동골(양백리), 발래기(명암리), 퉁점(명암리) 등도 배티 인근에 퍼져 있다. 특히 현재에도 옛 교우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삼박골은 배티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삼박골이 바로 [은화]의 주된 배경이었다. 또 그 남쪽 성거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서덕골(충남 목천군 송전리)은 최양업 신부의 둘째 아우인 최선정(안드레아)이 성장한 곳이고, 그 이웃인 소학골(충남 북면 납안리)은 칼래(Calais, 姜) 신부의 피난처였다.
배티 성지를 가려면,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진천에서 빠져 나와 약 30분 정도를 다시 서쪽으로 달려 백곡면 소재지를 지난 뒤 북쪽 골짜기로 들어서면 된다. 지금은 경기도 안성에서 배나무 고개를 넘어 진천으로 가는 길이 잘 포장되어 있지만, 1970년대만 해도 배티로 가는 교통로는 방금 말한 '진천 - 백곡로'를 이용하거나 충남 '입장 - 백곡로'를 거쳐 가야만 했다.
이 일대에서 배티 인근만큼 깊은 산골짜기도 없었다. 그러니까 박해를 피해 새 터전을 찾아나선 충남, 경기, 충북의 신자들이 하나 둘 이 골짜기로 모여 들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우연히 서로가 신자임을 알게 되어 함께 비밀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산을 개간하여 오죽잖은 밭농사로 생계를 꾸려 나갔고, 때로는 옹기나 숯을 구어 생활하였다. 그러면서도 새 신자들이 교우촌에 들어오면 서슴지 않고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결과 인근에는 점차 교우촌이 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삼박골은 배나무 고갯길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집터나 돌담의 흔적, 우물터만이 겨우 남아 있지만, 마을 뒷편에는 유명한 신자인 이씨 집안의 순교자 무덤 2기가 있으며, 왼쪽 골짜기에는 유사시에 배티로 도망하던 신자들의 비밀 통로가 있다. 이처럼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신자들의 삶과 애환이 서려 있다는 것이 배티 성지가 지니고 있는 첫 번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신자들은 박해의 칼날을 피해 어렵게 터전을 잡은 이곳에서도 마음놓고 살 수가 없었다. 신앙 생활은 언제나 감추어진 상태였고, 교회 서적이나 성물도 충분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죽는 날까지 성사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신자들은 1850년 초에 최양업 신부를 모시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이 때 최 신부가 거처로 정한 곳이 바로 배티 이웃에 있는 동골 교우촌이었는데, 당시 이곳에 있는 그의 친척집에는 셋째 아우인 최우정(바실리오)이 살고 있었다. 또 산너머에 있는 서덕골 교우촌의 백부 댁에는 둘째 아우가 있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6호(1999년 7월), pp.126-127]
최양업 신부와 배티의 무명 순교자
최 신부는 이후 경상도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약 2년 동안 배티의 동골을 사목 거점으로 삼아 서양 선교사들이 다니기 어려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오지의 교우촌들을 순방하였다. 그리고 휴식 기간에는 다시 이곳에 들러 이웃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거나 동생들을 돌보았으며, 사목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신자들을 위해 "천주가사"를 저술하였다.
실제로 최 신부의 사목 순방은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을 안마당 드나들 듯이 하면서 교우촌을 찾아 수십, 수백 리를 걸어야만 했고, 때로는 신자 한 두 집을 방문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골짜기를 올라가야만 하였다. 또 어느 해에는 밀고자 때문에 한겨울에 신자 집에서 쫓겨 나와 맨발로 산야를 헤맨 적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삶은 곧 그리스도의 수난을 따르려 한 순교자적인 삶이었다.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함께 묻히는 것이 소망입니다(최양업 신부의 1846-1847년 서한 중에서).
이처럼 그는 조국 땅을 밟은 뒤 11년 6개월 동안 온갖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는 신자들을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과로와 장티푸스로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문경에서 선종하였으니, 만 40세의 한창 때였다. 그의 시신은 문경 부근에 가매장되었다가 그 해 10월 말 신학교가 있던 제천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백색 순교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배티 일대는 이러한 최 신부의 신앙과 땀이 배어 있다는 두 번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배티 성지가 지니고 있는 세 번째 의미는 순교자들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현재 이곳 배티 골짜기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으며, 그중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들이 섞여 있다. 특히 오반지(바오로)의 경우는 순교 후 친척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였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무덤 소재지를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1858년부터 1862년까지 이곳 배티에 거처를 정하고 충청, 경상, 경기, 강원 일부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이어 칼래 신부가 삼박골에 와서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곤 하였는데,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문경에서 쫓겨와 삼박골, 북면의 소학골을 거쳐 내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오랜 박해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신자들은 피신처에서 나와 새 복음의 터전을 닦아 나갔다. 배티, 용진골, 삼박골은 공소로 승격되었고, 배티에는 교리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신자들이 새로운 생활 터전을 얻기 위해 하나 둘 이곳을 떠남으로써 어느 교우촌은 단 한 명의 신자, 단 하나의 가옥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 일대는 순교자들의 보금자리요, 최양업 신부나 선교사들의 고난 어린 발자취가 스며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최양업 신부의 현양 운동에 동참하려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를 통해 그분의 삶과 신앙이 길이 남게 될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6호(1999년 7월), pp.127-129]